소설리스트

대한 해적왕-61화 (61/77)

〈 61화 〉 60화 - 천명(天命) 대 역천(逆天)(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누르하치는 당연히 놈이 민간인들을 포기할 줄 알았다.

저 한줌도 안되는 조선인들을 굳이 짓밟지 않고 일부러 병력을 내어 포위한 것은 그저 놈에게 무력감과 좌절감을 더해주려는 심리전 차원에서의 견제였을 뿐이었다.

먼저 놈의 자신감을 갉아먹는다면 분명 사람의 심리상 더 위축되거나 반작용으로 더 격하게 나올 것이다.

위축된다면 기병의 압도적인 기동력으로 상대해 주면 될 일이고 격하게 나온다면 끌어내어 짓밟으면 될 일이었다.

어떻게 나오든 죽여버릴 수 있다고 믿었다.

믿었던 피옹돈과 800기의 죽음은 누르하치에게 해서여진과 야인여진이 만들 연합군보다 주명의 존재를 더욱 신경쓰게 만들었고 반드시 짓밟아 대계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압도적인 병력을 끌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저 미친놈 같으니!"

세상에 수만명의 기병들을 상대로 단신으로 돌격하는 미친놈이었을 줄이야.

잠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뿐이었다.

"놈이 뛰쳐나왔을 경우 처리하려했던 대로 하면 그뿐이지."

결국 웅크리느냐, 발끈하여 뛰쳐 나오느냐의 갈림길이었고 조금 예상보다 일찍 튀쳐나왔던 것뿐이었다.

누르하치의 손짓에 수만의 만주기병들이 마치 한몸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다가오는 주명을 향해 마치 물살이 갈라지듯 좌우로 넓게 퍼져 포위하듯 감싼 것이다.

"네놈의 무위가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들은바 있지. 저돌적으로 행동한다는 것도. 허나.."

누르하치가 팔을 들어 올리자 주명을 포위한 만주기병들은 등 뒤에 매고있던 각궁을 꺼내 화살을 매기 시작했다.

"성난 멧돼지를 잡는 방법은 수십가지가 넘지만 가장 효율적인 걸로 준비했다."

마치 원을 이루듯 주명을 포위한 자신의 만주기병들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누르하치는 들었던 팔을 아래로 내렸고, 그건 마치 사냥감을 쏘아 죽이기 위한 사냥개시 신호이자 사형수에 대한 사형선고와도 같아 보였다.

정예기병답게 직사로 쏘게 되면 아군을 상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수천발의 화살이 쏘아졌고, 마치 거대한 구심력처럼 중앙으로 모여든 화살은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무수히 적중하기 시작했다.

수천발, 다시 수천발, 또다시 수천발.

쉴새없이 쏟아지는 수만발의 화살에 하늘이 어둡게 물들고 땅에는 검은 그림자가 지워질 정도였다.

"어떡해..."

그리고 이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연이는 눈물을 흘리며 발을 동동 굴렀고, 다른 사람들도 눈시울을 붉히며 용감한 한 전사의 사실상 확정된 죽음에 슬퍼했다.

화살세례가 그치자 시꺼멓게 물든 대지.

그 대지에 고슴도치가 되어 피를 흘리는 말을 본 사람들은 통곡하며 주저않았다.

"안돼...안돼요 오라버니. 제발, 제발 죽지마요. 흑."

자신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봐 주며 옷을 새로 맞추러 가야겠다고 웃음을 지어주던 오라버니를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연이 역시 주저않았다.

주저앉으려 했다.

"...?!"

하지만 어느새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는 여검객의 모습에 연이는 그녀의 행동과 미모 그리고 그녀의 평온한 표정에 세번이나 놀라야 했다.

"걱정하지마."

"하, 하지만 저렇게 많은 화살을 오라버니가 맞았어요.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착한 여동생이구나."

전혀 걱정따윈 안하는것 같은 나미에의 모습에 연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생각이 이상한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다들 오라버니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는 통곡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주명을 냉랭하게 대했던 서씨부인과 진씨부인마저 눈물을 저리 흘리고 있는 것을 보면 자신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을 것인데 대체.

"절대로 저딴 화살따위에 당하지 않아. 왜냐면..."

검게 물들은, 검은 화살의 산더미에 짓눌린 대지를 뚫고 검 한자루와 한 사내가 비상했다.

마치 포탄처럼, 대지를 찢는 빠르기와 강맹함으로 수십미터를 단숨에 도약하며 뛰어든 사내의 검격에 검끝을 기점으로 수십미터의 방사형 공간이 찢어졌다.

"녀석은 오니거든. 아? 조선에서는 도깨비라고 했으니 도깨비려나."

그걸 미리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그 압도적인 광경이 벌어지기도 전에 씨익 웃으며 연이에게 이유를 말해주는 나미에였다.

"절대로 인간이 죽일 수 없는 존재야."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미에는 마음속으로 말을 이었다.

'하늘이라면 몰라도.'

***

다 잡았다고 여겼던 사냥감이 미쳐 날뛸 때의 더럽고 황당한 기분은 타고난 사냥꾼인 여진족이라면 누구나 그런 상황에 처하면 가질 법한 보편적인 반응일 것이다.

더군다나 전쟁에서라면 그 엿같음은 더할나위없이 클 것이고.

"이런 씨발!"

너무도 분기가 치민 나머지 누르하치는 굳게 쥐고있던 지휘봉까지 던져 버리며 욕지거를 내뱉었다.

말을 탄다는 것을 큰 자부심으로 여기는 기병중의 기병이 여진족이고 자신 역시 여진족이건만 말들이 이렇게 초라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저럴 거면 대체 왜 말따위는 타고 왔는가.

수십미터를 도약하여 대지 자체를 찢어발기며 한방에 수십씩 기병들을 도륙하고 있는 괴물같은 놈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군략을 타고난 명장중의 명장이자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누르하치답게 상황판단이 빨랐다.

단 일격에 수십명의 만주기병을 저승길로 데려가는 놈의 공격을 보며 최대한 산개하여 대형을 이루라고 명령한 것.

놈의 공격력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강했지만 개인의 무위는 전쟁이라는 광역의 폭력에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가 분명했다.

놈의 엄청난 거리와 빠르기의 도약, 그리고 강력한 광역공격은 여전했지만 산개된 만주기병들의 움직임에 공격 한방에 희생당하는 만주기병들의 숫자가 수십에서 한두명으로 확 줄어버렸다.

저런 무지막지한 공격을 하루종일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누르하치는 금세 여유를 되찾았다.

"네놈도 사람일 테니 곧 지칠 것인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지켜봐주마."

개인이 군대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숙리이요 천명이다.

지금이야 그 괴물같은 기량으로 종횡무진 날뛰지만 결국 군대의 질량에 짓눌려 쓰러질 것이다.

"저건 뭔 해괴한 짓거라냐?!"

갑자기 놈의 품속에서 검은 가루들이 폭포수처럼 엄청난 양으로 뿜어져 나오더니, 놈이 그 탁월한 도약력을 이용해 이리저리 움직이자 검은 가루는 마치 연기처럼 수백미터를 뒤덮었다.

너무나도 엄청난 양이 살포되었던 탓에 누르하치가 있던 본대에까지 그 가루가 몇개 닿을 수 있었고 그는 검은 가루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이건?! 이런 개..."

그것은 폭염을 동반한 죽음의 가루였다.

누르하치가 경악하여 미처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전에 죽음이 발화되었다.

콰과과광!

장장 600m에 걸쳐 살포된 수십톤의 화약은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폭발음을 내며 수백의 병력을 찢어발겼고 또다시 수백의 병력을 뜨거운 화염으로 할퀴어 버렸다.

"으아아아!"

"끄아아악!"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우주의 먼지로 화한 동료들보다도 불행한 건 온 몸을 태우는 끔찍한 불길에 괴성을 내뱉으며 죽어가는 폭발지점 주변의 이들이었다.

모두가 말문을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 멈춰버린 그 때 사방에 퍼져 일렁이는 화염을 뚫고 한 사내가 도약하여 멈춰선 기병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된다. 어찌, 어찌 이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한명의 몸에서 한 나라가 보유하고도 남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화약이 나왔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고, 그 화약이 만들어낸 작열(灼熱)하는 죽음의 작렬(灼熱)이 너무 현실감이 없어 그 누르하치마저 지금 이 순간은 항거할 수 없는 재난을 마주한 범인(凡人)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천명을 받은, 시대가 선택한 이는 다른 것일까.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승리의 길을 찾아내는 누르하치였다.

'놈은 한줌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 그렇다면...'

아직도 녹둔도의 백성을 포위하고 있는 자신의 부하들이 보였다.

그 부하들 사이에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저 백성들.

놈에게는 분명 큰 가치가 있을 것이고 그러니 뛰쳐 나왔겠지.

놈이 백성에게 두는 가치가 크면 클수록 내뱉어야 하는 대가는 클 것이다.

"당장 저것들을 데리고 와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부하들을 향해 칼을 휘둘러 위협하며 급히 재촉한 누르하치의 눈에 그의 군대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두 팔을 올려 천세를 외치는 조선인들과 부둥켜 안고 좋아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평정심을 깨트릴 정도는 아니었다.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저 괴물을 말로써 무너트리려면.

갑자기 자신을 향해 백기를 들고 달려오는 기병을 보며 주명은 대체 무슨 상황인가 의아해 했다.

하지만 그 누르하치가 전멸했으면 했지 항복을 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저 백가는 대화를 하자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미친 새끼들. 제놈들 마음대로 쳐들어와 놓고 마음대로 대화를 하자고? 누가 들어줄...어?!"

그딴 건 무시하고 저 깃발을 든 기병부터 두쪽을 낸 뒤에 바로 누르하치를 쳐죽이러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병의 뒤로 보이는 언덕, 누르하치의 본대가 있을 그곳에 매달린 채로 화살이 겨누어진 녹둔도의 주민들을 보자 안색을 굳히며 멈춰서야 했다.

"칸께서 대화를 원하신다! 허튼 짓을 하면 모두 죽여버릴 것이다!"

"...씨발."

높게 치켜들었던 '조부'를 내려놓으며 주명은 누르하치가 있을 본영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누르하치는 다행히 자신의 기대대로 놈이 행동을 멈추었다는 것을, 저 백성들의 목숨이 기대했던 것만큼의 가치를 지녔다는 것을 확인하자 말을 몰아 주명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주명이 지금까지 보여준 무위를 생각하면 무척이나 대담한 행동이었다.

시대를 풍미한 영웅다운 배포를 보여주는 모습이었지만 누르하치는 주명의 한가지 행동을 보고서도 놈의 심리와 생각을 어느정도 읽었다 확신했기에 전혀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멍청한 놈. 대의를 위해 희생도 필요한 법이거늘, 고작 백성 수십의 목숨에 한발짝만 더 가면 승리할 수 있었던 상황을 포기하다니.'

실제로 조금만 더 지체하였다면 패하는 것은 자신의 만주기병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놈의 그 막대한 화약을 이용한 광역공격이 한번만 더 이어졌다면 군심이 무너지기 시작했을 거고, 다시 이어졌다면 완전히 군심이 무너져 탈영병이 나올 것이 분명했으니까.

물론 주명의 인벤토리에 이제 화약이 다 떨어졌고, 전에 만주기병이 했던 대로 산개하며 계속 활로 견제를 한다면 결국 패하는 것은 주명이 되었을 테지만 그것까지 누르하치가 알지는 못했다.

다 잡은 승리를 겨우 하찮은 백성들의 목숨 때문에 포기한 주명의 행동은 누르하치로서는 이해할 수도, 이해하기도 싫었다.

누르하치는 저 주명이란 자는 지도자로서는 대성하기 어려운 작은 그릇밖에 안된다는 평가를 마음속으로 내리며 조소했다.

하지만 위험한 무력을 지닌 놈을 면전에서 자극하는 것은 이 세계의 지존이 될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는 것이라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기에 그는 최대한 자신의 비웃음을 숨기며 주명에게 말을 건넸다.

"정말 용맹하더군. 내 부하 수천을 데려갈 자격이 있는 용사다워. 그 무위에 경의를 표하지."

"이 상황에서 내 칭찬을 하는 거냐?! 닥치고 요구조건을 말해!"

자신에 의해 수천의 부하들이 죽음을 당한 상황에서도 여유롭게 적장을 칭찬하며 고개까지 숙이는 그 영웅다운 대범함이 주명은 너무도 역겨웠다.

삼국지를 읽었을 때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런 때였다.

예를 들자면 조조가 제 부하를 최소 수백은 죽였을 관운장을 웃으며 맞이하고 심지어 경애하기까지 했던 그런 장면.

영웅이란 자들에게 병사들 수백의 목숨은 애초에 저울에 달 가치조차 없는 하찮은 거였다.

세를 확장하는데 요긴한 병사들마저 그럴진데 백성들이야 말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만약 여기서 자신이 놈의 부하가 되겠다고 한다면 껄껄 웃으며 형제의 예로 대하고 한침상을 쓰자고 할 놈들이 저런 영웅들이었다.

소시민인 주명은 절대로 그런 자들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후후..요구조건이라. 원래는 그대의 죽음이었지만 상황이 이리 되었으니 달라져야겠지."

마치 항구적인 평화를 말하듯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누르하치는 말했다.

"휴전이다. 내가 이 만주를 통일하기 전까지 그 어떤 군사행동도 하지 마라."

이미 침공을 한 놈이 누구인데도, 또 제 부하들이 죽어나간 상황에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놈의 태연한 미소가 너무나도 염치없어 보이고 역겨웠던 주명의 대답이 좋게 나올리 만무.

"그딴 게 무슨 휴전이라고!"

"후후, 이몸도 그대를 향해 칼을 들이대지 않는 자비를 베풀었으니 휴전이 아닌가? 대신 서로에 대한 믿음은 없는 것 같으니 그 담보로..."

팔을 들어 매달려 있는 백성들을 가리킨 누르하치는 주명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대의 백성들은 휴전의 기간 동안 내가 데리고 있도록 하지."

"이 개새끼가! 죽고 싶나?!"

"그게 싫다면 저들을 지금 죽여도 되나?"

누르하치를 쳐죽일 듯 뛰쳐 나가려던 주명의 행동이 놈의 말에 그대로 굳었다.

고개를 들어 매달린 백성들을 보는 주명의 마음은 무거웠다.

특히 이이첨이 각성하는 계기가 되어준 일송이 녀석까지 저기 매달려 울고있는 것을 보는 주명의 마음은 찢어졌다.

"그대는 훌륭한 위정자가 아닌가?"

"..."

"그 조선에서 말하는 선비인가 뭔가 말이다. 백성을 보듬고 아껴준다는 자들 말이지."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백성의 목숨을 저울추에 달아놓고 자신에게 행동을 강요하고 있는 놈의 태연하고 건조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는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단 한번도 만나보지 않았는데도 놈은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대는 선비이지 않나. 백성 한사람 한사람의 목숨이 소중한."

그 말을 하며 누르하치는 마음속으로 주명을 비웃었다.

놈은 정말로 조선인들이 말하는 이상적인 선비와 같은 존재였다.

왜놈의 자식이라고 들었는데 조선에서 배척하는 그 핏줄의 자식이 조선에서 가장 숭상하는 이상적인 모습의 선비라니 얼마나 아이러니인가하고.

조선 놈들이 그런 허황된 이상을 지녀 지금까지 그모양 그꼴로 허구한날 쳐맞고 사는 것처럼, 저 주명이란 놈은 그 이상적인 선비의 모습을 지녔기에 그릇이 그것밖에 안되는 것이라고.

모름지기 영웅이란, 더욱이 난세의 영웅이란 대의를 위해 그 어떤 것도 희생할 줄 아는 과단성과 독심을 지녀야 한다.

전쟁의 승리, 나라의 건국, 시대의 교체라는 자신의 사명이자 대의를 위해 건주여진은 물론 전 여진의 목숨을 다 내놓으라면 내 놓을 자신이 자신에게는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영웅인것이다.

본래 하늘의 이치는, 세상의 이치는 강자존이라서 가장 강한 명분이 대의가 되어 모든 것을 다 짓누르는 유일한 하늘이자 진리가 되는 것이다.

가장 거대한 대의를 이룩한 이만이 시대의 사명을 받아, 천명을 받아 하늘이 되는 것이다.

그저 작은 정에도 이리 집착하는 저놈은 그래서 소인배인 것이고.

유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누르하치였지만 그래도 유학자들이 정의한 군자(君子)라는 말은 마음에 들었다.

다른 것은 다 집어 치우고 군자는 결국 천명을 받들어 대의를 집행하는 자이며, 홀로 무리(君) 전체를 대표하고 무리 전체의 가치와 동격인 존귀한 자(子)이니.

군자인 자신과 소인배인 저놈은 그래서 다른 것이다.

아니 저놈도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점에서 저놈이 틀린 것이다.

"...네놈이 백성들을 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믿지?"

"하하하하!"

주명의 말을 들은 누르하치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그는 주명의 말에서 승리를 확신했다.

이미 이행의 신뢰도를 논하고 있는 시점에서 놈의 마음은 기울어 졌으니.

이미 승리를 확신했기에 마음이 가는대로 놈에게 질문했다.

"궁금한 게 있다. 왜 그대는 저 백성들을 구하려 하는가?"

"백성을 구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왜 당연한가? 이해할 수 없다. 우리 만주족은 탁월한 사냥꾼이기는 하지만 그 위험한 사냥에서 모두 다 안전하게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사치지. 그래서 크게 다쳐서 거동이 어려운 자들같이 버릴 이는 버리고 온다. 원래 너희 농경인, 아니 조선인들은 이렇게 그대처럼 모든 이를 구하려 하는가?"

비웃음은 감추어야 했기에 쓸모없는 이들까지 쓸데없이 구하려 하는가란 말은 굳이 내뱉지 않고 나름 정제된 표현을 하는 누르하치.

"사람이 사람을 구하려 하는 게 당연한 거지 뭔 개소리야!"

"사람이라...후후. 우리 만주족들은 그 표현에 동의할 수 없군. 우린 늑대다. 강인한 정신과 유대감으로 사냥감을 무리지어 사냥하고 다니지. 너희 조선인들은...그래 소떼나 양떼 정도로 봐줄 수 있겠군. 우리의 먹잇감이 되니까."

"..."

"늑대의 무리는 한가지 커다란 대의를 짊어지고 살지. 바로 무리의 존속과 생존. 그 대의앞에서는 개개인의 희생과 손실은 무의미하고, 그게 바로 우리 만주족이 사냥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동료들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사냥을 나가는 이유이기도 하지."

누르하치의 눈빛이 지금까지 허허 웃으며 실실 쪼개던 태연한 눈빛에서 달라지며 기세가 돌변했다.

"그 위험한 사냥에 누군가 죽더라도, 죽을 것을 알면서도 반드시 사냥을 나서야 하는 게 우리의 숙명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의는 사냥이니까! 우리 만주의 늑대들은 이 세상을 사냥할 것이다! 수백년 전 저 몽골인들이 그리했던 것처럼 말이다!"

마치 우두머리 늑대와 같은 흉폭함과 강맹함을 뽐내는 놈의 기세는 늑대중의 늑대이자 시대의 영웅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래서 궁금한 것이다. 대체 너희 조선인들의 대의는 무엇이냐?!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뤄내야할 대의가 있기는 한 것이냐?!"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지만 주명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며 놈을 노려봤을 뿐 도저히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국가와 민족의 사명이자 시대가 내린 사명.

조선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백성들은 그저 부족하고 힘들지만 그래도 가족들과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이 일상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하루하루를 살아갔고, 위정자들은 그래도 다른 나라보다는 온건하게 백성들을 수탈하며 자신들의 고상한 삶이 유지되기를 바랐으니까.

조선인들은 안온한 삶에 안주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게, 그런 걸 바라는 삶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대의가 없는 삶은 가치없고 무의미한 것인가?

수백의 군졸의 목숨은 무의미하고 관운장의 무위와 충의는 가치있는 것인가?

대의가 없다는 것이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또 저 누르하치라는 놈의 잔혹한 대의에 지고 싶지 않았기에 주명은 놈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없다."

"크하하하하하!"

대의조차 없는 그런 삶이 너무 웃긴다고 생각해서인지 눈물까지 찔끔 흘려대며 광소하는 누르하치.

한참을 웃어대던 놈은 주명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이제는 전혀 숨길 생각도 없는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너희들이 사냥당하고 지배당하는 것이다. 그저 가축처럼 의미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겨울의 추위에 떨며 옹기종기 모여 그놈의 온정을 나누며 다함께 얼어죽어가는 그런 사냥감들 말이다. 서로를 소중히 여기기에 네놈들이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야!"

주명은 굳이 대답할 생각을 하지 않고 놈을 노려보았다.

놈은 굳이 주명의 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듯, 휴전에 대한 의견교환이 마무리되지 않았는데도 마치 다 이뤄진 것 마냥 등을 돌렸다.

"만주를 통일하면 네놈의 저 소중한 백성들은 무사히 돌려보내 주겠다. 너희 조선인들은 약조를 소중히 여기는 자들이니 굳이 허튼 짓은 하지 않을 것으로 믿지. 다만 참으로..."

말을 몰고 제놈의 본영으로 돌아가는 중에 잠시 고개를 돌려 누르하치가 하는 말은,

"참으로 의문이 드는 것은 어차피 우리가 만주를 넘어 이 천하를 사냥하고 나면 네놈과 네놈의 그 소중한 백성들은 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그렇게 소중히 여긴다면 그들을 보듬어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언덕길을 가고 있었기에 주명을 내려다보고 있던 놈은 깔보는 듯한 시선으로 주명에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내것이 될 천하인데 애초에 내게 숙이고 복종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들을 위한 길인 것 같다는생각이 드는군. 그렇지 않은가 백성을 위하는 조선의 선.비.여?"

등을 돌려 언덕으로 올라가는 놈의 뒷모습은 마치 승리자의 그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실제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주명을 묶어둔다는 최소한의 전략적 목표는 달성했으니 성공한 것이 맞았다.

다만 그가 예상하지 못한 수단, 이를테면 하찮은 백성의 목숨을 가지고 성공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상관없었다.

주명이라는 놈의, 더불어 조선이라는 자들의 한계와 그릇을 잘 알게되는 유쾌하고 유의미한 시간이었으니까.

백성의 목숨따위에 계속 매어있는 한, 치열한 대의도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한 절대로 저 하늘에 닿지 못할 것이다.

저놈도, 그리고 저놈의 그 답답하고 쓸모없는 조선이란 나라도.

하늘은 오로지 자신과 만주족에게만 길을 열어줄 것이니까.

후손들에게 영광된 이름을 물려줄 수 있는 것은 우리 만주족뿐이다.

근데 주명은 왜 아무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을까?

'add_debuff(impotence*)_to_target_100099'

* impotence : 발기부전

'홍타이지 잘가. 그리고 그 손자인 강희제도 함께 잘 가시게나.'

바로 근접한 누르하치를 스캔하고 디버프를 걸고 있었던 것.

1592년 태어날 홍타이지가 없으면 저놈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병신들이었으니, 만주족의 미래는 놈의 생각처럼 밝지는 못할 것이다.

'조부'를 쓰다듬으며 그 밝지 못할 미래도 보여주지 않겠다고 각오를 다지는 주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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