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61화 - 천명(天命) 대 역천(逆天)(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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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의 가장 높은 산의 중턱에 위치한 공터에서 백발의 노파와 검은 머리의 여인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새벽인 시간대이고 바다에 인접한 습한 기후 탓인지 그리 높지 않은 산임에도 산허리에는 하얀 안개가 걸쳐져 있었고 그 위에 서 있는 두명의 여인은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하늘과 맞닿아 보이는 그 공간에서 백발의 노파는 마치 적을 이야기하는 듯한 건조한 목소리로 하늘에 대해 얘기했다.
"하늘이 항상 위에 있는 이유는 저 높은 곳에서 명(天命)을 내리는 지고한 존재라서이지."
"하지만 스승님, 저 푸른 하늘에 그 어디에도 그 어떤 삿된 마음도 이 제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무한한 듯 넓고 무심한 듯 항상 떠 있는 것처럼밖에 안 느껴져요."
초희는 스승인 명월이 왜 저렇게 하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해 보려 했다.
하지만 하늘은 시리도록 아름답게 푸르를뿐 그 어떤 부정적인 것도 느껴지지 않지 않은가.
"해가 사라지면 어찌 되겠느냐 아가."
"컴컴한 밤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깊이를 알 수 없어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 같은 허기진 검은 모습이 하늘의 본보습이란다. 해라는 대의명분이 치워진 뒤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그 민낯이지."
그렇게 생각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초희는 그건 결국 애초에 스승인 명월이 하늘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에 그걸 따라 떠오르는 주관적인 감상이지 결코 하늘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왜 내가 하늘을 이리도 싫어하는지 궁금한것 같구나."
"...예. 사실 의아하긴 합니다 스승님."
명월은 부드러운 눈으로 제자를 바라보던 시선을 옮겨 동남쪽에 있을 오사카, 그리고 북서쪽에 있을 저 요동땅의 어딘가를 번갈아 바라보며 제자의 의문에 답을 해 주었다.
"내가 본 그 모습들이 정말로 진실이라면 저 하늘은 삼한의 백성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사부가 두번의 큰 예지몽을 꾸고 그것을 천지신명의 계시라 여기고 있다는 말은 들어봤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말해준 적이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그걸 듣게 되는 것이다.
그 놀라움에, 또 그 불길한 어감에 다시 놀란 초희의 눈은 크게 떠졌다.
"중원의 거대한 붉은 용이 사방을 그 거대한 몽뚱이로 뒤덮고, 열도의 칼날이 뻗치는 형상의 해가 사방을 할퀴는 통에 삼한은 언제나 짓눌리고 피를 흘리는 모습만이 보였지. 용에게 숙이고 칼에 베이는 삼한의 사람들에게 하늘은 그저 압제(壓制)였을 뿐이지."
그리고 불길하다못해 절망적인 내용을 듣자 다가올 미래의 암담함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우리는 패배할 운명이란다."
"...!"
"저 하늘은 압제자의 옥좌였을 뿐이니, 그 드높음은 닿을 수 없는 우리에겐 절망의 깊이요 그 푸름은 그 아래에서 고통받을 우리에 대한 냉소이며 그 넓음은 억압받는 우리에겐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감옥과 같도다."
"스, 스승님. 어찌 그런 말씀을!"
초희의 말에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듯 명월은 계속해서 자신이 봤던 계시에 대해 말을했다.
"두번째 계시에서 봤던 그 모습은 지나치게 추상적이라 실제로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허나..."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는 명월의 눈에는 피맺힌 붉음과 한스럽고 답답한 탁함이 뒤섞인, 무너지고 쓰러져가는 어떤 대지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졌다.
그리고 그 대지와 너무도 대비되는 푸르르고 맑은 냉소적이며 이기적인 저 하늘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첫번째 계시에서 나는 분명히 보았단다. 왜인들에게 속절없이 무너지는 삼한의 군졸들과 유린당하는 백성들을."
그녀의 첫번째 계시는 임진왜란을 말하고 있었다.
"용감히 저항했다는 이유만으로 진주성의 백성들이 도륙당했을때 이땅의 창칼은 그 기세를 잃었고, 최후의 희망이었던 바다마저 결국 거제도 앞바다에 전선들이 침몰하며 내어주어야 했지."
2차 진주성 전투를 기점으로 조선의 지상군은 결국 붕괴했으며,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대패했을 때 마지막 희망이었던 수군마저 궤멸되었다.
"한 기녀의 희생을 보기도 했지."
하지만 군사력의 붕괴와 궤멸 속에서 방치된 삼한땅은, 한 기생이 비장한 각오로 왜장 한명과 함께 남강의 강물에 뛰어든 그 숭고한 희생 하나만으로는 그땅에 남겨진 삼한의 백성들을 지킬 수 없었다.
그 논개라는 이름의 기생이 품었을 결의, 그리고 끝내 뜻한 것을 이루지 못했던 한스러움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던 명월.
"그녀를 본받아 어떻게든 저 남해의 물을 남강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간절함에 이 대마도로 흘러들어왔단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지."
마찬가지로 명월이 무당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초희에게는 말해주지 못했지만 두번째 계시의 내용은 먼 미래와 가까운 미래의 모습을 모두 그래내고 있었다.
붉은 용과 칼날을 단 해가 나오는 그 장면이 먼 미래의 모습처럼 보였다면 명월이 생각하기에 두먼째 게시의 첫 장면은 가까운 미래로 보였다.
거기에서 하늘은 인물의 형상으로 화하여 한명은 남쪽에서, 한명은 북쪽에서 일어나 삼한과 천하 위에 군림하고 모든 것을 내리눌렀다.
삼라만상을 불태우며 더욱 푸르러지는, 더욱 거세지는 두 하늘의 뒤덮음을 보며 너무도 분했고 너무도 원통했지만 하늘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운명이었다.
다른 이들의 삶과 인생의 무의미와 무가치를 대가로 그들을 무자비하게 태워 홀로 위업으로서 우뚝서며 그 대의처럼 밝게 빛나는 두 영웅.
그리고 그중에서도 북쪽의 영웅은 실로 태양과도 같은 뜨겁고 거대한 대의로 세상을 불태웠다.
북쪽의 영웅이 원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세상인 중화(中華)를 불태워 파멸시키고 만주족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을 그 잿더미 위에 세우는 것이었다.
본래 영웅이라는 자들은 지극히 파멸적인 존재들이다.
뭇 사람들의 목숨을 연료로 삼아 자신의 대의를 타오르게 하여 널리 빛냄으로써 세상에 자신의 족적을 각인하고 하늘에 자신의 빛이 닿기를 바라는 자들.
그 타오르는 빛이 마치 태양과도 같이 뜨겁고 밝아 정말로 하늘에 닿은 이들이야 말로 천명을 받아 시대를 개척한 영웅중의 영웅일 것이다.
저 북방의 누르하치 같은 이들.
그 빛의 강렬함과 위대함에 비례하여 스러지고 타들어가야하는 뭇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 보면, 또 그 장작처럼 태워졌던 생명들의 무게를 생각해 보면,
빛이 세상을 비추어 다른 이들이 세상을 바로볼 수 있게 해 준다고, 그 온기가 세상을 덥혀 추위이 떨던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한다고 영웅과 그의 대의를 그저 칭송하기만 해야 하는가.
볼 수 없고, 그저 추울 뿐인 세상.
빛도 없고 열기도 없는 그런 세상일지라도 각자가 지닌 조그만 온기를 나누며 서로의 몸을 더듬어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마치 캄캄하고 추운 겨울밤을 함께 나는 양떼들처럼 말이다.
"푸른 하늘은, 아니 결국엔 검을 저 하늘은 오로지 승자의 무대일 뿐이란다. 최종 승자의 대의가, 그 태양이 내걸리고 그 빛이 세상을 비추기 시작하면 태양을 타오르게 만들어준 것들은 그저 밝은 빛속에 숨겨져 잊혀질 뿐이지."
"스승님..."
"대의를 욕해놓고 비겁하고 이기적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삼한의 사람들 중에도 그런 빛을 내는 이가 있기를 바랐건만...대낮의 태양이야 언감생심일지라도 각자의 대의들의 별처럼 수놓아진 저 드넓은 밤하늘 어디에도 삼한 사람들의 자리는 없더구나."
열등감과 질투심, 그리고 분노가 모두 다 들어간 절망감이 스승에게서 느껴졌다.
스승이 느꼈을 저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다 온전히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초희는 자신이 경험했던 참담한 기억들을 다 합쳐도 감히 비견할 수 없을 거란 건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스승은 그 무엇으로도 흔들리지 않으며 주변에 그늘을 내어주는 너그러운 고목같은 존재.
그 스승을 흔들었던 절망감이란 짐작할 수도 없는 수준이겠지.
"그래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삼한의 사람들이 자신을 빛내기 위해 다른 이를 태우는 영웅이 없는 순박한 이들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말대로 한반도의 사람들은 정말로 순한 양떼같은 이들이었다.
저 이리같은 북쪽의 야인들처럼, 저 들개같은 남쪽의 왜인들처럼 누군가를 잡아먹으며 성장할 생각조차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착하고 순한 이들.
또한 중원의 무리들처럼 누군가의 위에 서서 군림하겠다는 오만한 생각을 강요해본 적도 없는 겸손한 이들.
그리고 결국 시대의 흐름과 천명에 밀리고 밀려 마음속에 울분과 한만 쌓아온 패배자의 무리들.
명월은 고개를 더 치켜들어 저 하늘을 당당히 노려보며 말했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이상하게도 더할나위 없는 자신감과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자신을 포함한 삼한의 인간들이 닿을 수 없는 저 지고하고 드높은며 오만한 하늘을 향해 노려보는 것은 고작 당랑거철이요 계란으로 바위치기일텐데.
"그래도 절망만을 본 것은 아니다. 두번째 계시의 마지막에서 본 것은 한 사내였단다."
왠지 그 사내가 누구를 말하는 지 알 것 같은 초희는 그에게 받은 은혜와 그가지닌 따뜻한 마음이 떠올랐는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처음보는 여인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고, 아무 관계없는 여인의 슬픔을 덮고자 어떻게든 나서려 했던 그 사람.
그 또한 순한 양임에도 스스로 피를 뒤집어쓰고 오니가 되기를 자처한 사람.
"그는 양떼 사이를 거닐며, 양떼를 돌보는 그저 여리디 여린 마음을 지닌 한명의 목동일 뿐이나.."
명월은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해 뻗었다.
"자신이 돌보는 양떼를 태우려는 불길에, 세상 모든 것을 누르려는 하늘에 맞서 당당히 일어서서 결국 영웅들마저 누르고 하늘을 뒤집어 엎는 역천의 기수일지니."
그리 뻗은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는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이다."
오로지 이 세상에서 단 한명에게만 허락되었던 운명.
역천(逆天)
고작 목동이 세계를 지배한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뛰어넘고 승리한 영웅들의 하늘이 아닌 서로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세상을 열 수 있는 원동력이된 그 미약해 보이지만 절대로 꺾을 수 없는 불굴과 불사의 운명.
하늘을 넘어서는 세계 자체의 의지가 개입되었던 그 운명.
사랑이라는 소박한 이상이 거대한 제국의 '지배'라는 대의를 이겼던, 개인이 국가와 세계를 상대로 이겼던 유일무이한 기적을 만들었던 소시민 중의 소시민.
그 영웅보다 위대했던 소시민의 운명이 이땅에 재림하려 하고 있었다.
더 작고 더욱 소박한 운명이지만, '조부'와 함께하니 좀 더 폭력적이긴 할 것이다.
***
비록 2,000명 가까운 병력을 잃었지만 그정도는 누르하치에게 큰 손해는 아니었다.
그 대가로 만주일통을 하기 위해 치워버려야 했던 가장 큰 걸림돌을 묶어놓을 수 있다면 오히려 값싼 대가를 치른 거라고 봐야할 정도로.
주명이라는 거대한 걸림돌을 묶어놓은 누르하치는 이제 다른 쪽으로 관심을 두려 했다.
기왕 병력을 모았으니 다시 해산하기에는 아까웠던 누르하치는 이대로 병력을 몰아 해서여진을 들이치기로 결정했다.
아직 예허부를 중심으로 9부 연합이 완성되지 못한 상황.
호아파는 이미 사라졌고 올라(烏拉, 오랍) 부족의 병력도 크게 상했으니 설령 모였다 치더라도 7부 연합도 되지 못할 어중이 떠중이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어차피 9부 연합이 이뤄졌어도 크게 개의치 않고 오히려 좋아라 했던 누르하치였기에 이 상황은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랐다.
"일단 병력이 크게 상한 올라 놈들을 친다. 그러면 놈들의 세력이 양단되는 상황이니 어떻게든 병력을 급조하여 몰려오겠지."
올라 부족은 9부 연합이 자리잡은 만주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고 그들이 누르하치에게 넘어간다면 9부는 좌우로 분단될 처지에 놓이게 생겼으니 누르하치 말대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 될 것이다.
그래서 죄다 다급히 몰려올 것이다.
예허부를 중심으로 그나마 단결된 형태가 아닌 아주 중구난방의 개판으로.
"더 손쉽게 때려잡을 수 있겠군."
9부가 공고하게 모였어도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었는데 더 느슨하고 덜 온전한 7부 연합군이라며는 얼마나 쉬울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김주명이라는 놈이 설쳐댄 덕분에 만주일통이 더 쉬워졌다는 생각에 놈에게 고마움마저 가져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누르하치.
문득 놈의 백성들이 어찌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막사를 나선 누르하치는 줄줄이 묶인 채로 끌려오고 있는 녹둔도 백성들에게 발걸음을 옮겨 다가갔다.
그 중에서 가장 어리지만 뭔가 총명한 눈빛을 보이는 한 소년에게 다가갔다.
"어떤거 같나?"
물론 소년이 만주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니 수행하던 군관이 고압적은 목소리로 소년에게 통역을 해 주었다.
"뭐가 말예요?"
"네 주인에게서 떨어져 나와 다른 주인에게 맡겨진 기분이 말이다."
휴전의 대가로 주명이 허튼짓만 하지 않는다면 녀석들의 목숨은 붙여줄 생각이었지만 친절하게 그런 사실을 설명해 주었을 리는 없었다.
녀석들은 아마 놈들의 주인이 자신들을 구하지 못하고 결국 이렇게 붙들렸다고 믿고 있겠지.
"..."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는 소년의 모습에 수행하던 군관이 발끈하여 베어버리려 했지만 누르하치는 손을 들어 만류했다.
소년이 뭐라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주인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형은, 주명이 형은 한번도 스스로를 높이거나 다른 사람들보고 숙이라고 했던 적이 없었으니까요."
소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지만 주명이라는 놈의 성품을 생각해 보면 그럴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성품 때문에 낮잡아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형은 우릴 도우러 올 거에요."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확신을 가진 채로 말을하는 소년의 당당함이 대체 무엇을 믿고 그러는 건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아마도 조선인들은 위아래가 없이 방종하게 살아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던 누르하치에게 일송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은 말을 이었다.
"형이라면 구해줄 거에요."
"이몸은 하늘의 명을 받았다. 내 명령이 곧 하늘의 명령이라는 말이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너는 벗어날 수 없다!"
고작 아이를 상대하는 것일 뿐인데도 왠지 눈앞에 김주명이라는 놈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누르하치는 주명에게 말을 하듯히 소년에게 일갈했다.
자신의 허락없이는, 자신이 있는 이 세상에서는 그 무엇도 함부로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선포하듯이 말이다.
"형이 그랬어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요."
어디서 들은 것 같은 불쾌한 기시감에 누르하치의 눈이 가늘어졌고, 이내 그 말이 주명이라는 놈이 지껄였던 그 인간의 도리라는 거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크하하하, 그깟 사람의 도리. 여긴 초원이다. 늑대들이 사는 곳이며 강자존의 도리와 사냥이라는 대의만이 있는 곳이지. 그런 어쭙잖은 생각을 가지다간 곧 시체가 되어버릴 것다."
살기어린 기세를 조금씩 흘리며 소년을 겁박해 보는 누르하치였지만 소년은 꿈쩍도 하지않고 그를 태연히, 확신에 찬 눈빛으로 변함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갑자기 웃음을 지으며 오히려 질문을 건넨다.
"정말이죠? 아저씨와 다른 아저씨들 정말 늑대 맞는 거죠?! 그렇죠?!"
"....그렇다. 우리는 초원의 늑대들이지."
그 해맑은 질문에 누르하치마저 당황했던지 잠시 말문이 막혔던 것은 덤.
"다행이에요. 이젠 다 괜찮을 거에요!"
늑대라는 말을 듣고 대체 왜 저 조선인 꼬마가 밧줄에 묶여 있지 않았다면 마치 기뻐서 펄쩍 뛰기라도 할 것처럼 몹시 좋아하는지 누르하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호랑이도 때려잡은 영물중의 영물이 도깨비이니, 방망이를 휘두르면 잡귀따위는 얼씬도 못한다."
"그,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그리고 다시 확신에 찬 눈으로 진지하게 말하는 것의 내용은 황당하기 그지없어 그 부조화에 또다시 당황해야 했고 이번에는 말까지 더듬었다.
"은인깨서 저에게 줄곧 해졌던 말이에요. 어쨌든 도깨비가 늑대 이겨요."
"..?"
"호랑이보다 늑대가 약하잖아요? 그 호랑이도 이기는 도깨비인 형이 왜 늑대에게 져요? 분명 형이 우릴 구해줄 거에요!
뭔가 자신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모욕받는 느낌이었지만 아이의 해맑음에 차마 뭐라 더 말하기도 그런 누르하치였다.
인간 김주명은 영웅중의 영웅 누르하치에게 큰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도깨비가 출동한다면 어떨까?
***
"이 늑대새끼. 반드시 죽여 버린다."
누르하치와의 그 충격적인 첫만남 이후 주명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절치부심이었다.
비록 단신으로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수만 기병대에 돌격한 그의 영웅적인 활약에 녹둔도 주민들 환호하며 그를 칭송했지만 결국 백성들을 구하지 못했으니까.
잡혀간 이들의 가족을 찾아가 꼭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하며 위로해준뒤 한 것은 가장 첫번째로는 부하들을 키우던 종전의 패턴에서 벗어나 온 사방을 뒤집고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며 개인 레벨업을 하는 것.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나미에도 같이 따라나왔기 때문에 그녀와의 데이트의 의미도 있었지만 누르하치에게 쌓인 게 많았던 주명은 온전히 달달한 기분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야, 그러면서 왜 불쌍한 수달들을 죽이고 있는거야?"
특히나 누르하치의 아버지가 수달이었다는 전설을 들은바 있기 때문에 이제는 연인이 된 그녀 앞에서도 수달만 보면 눈이 뒤집혀 잔인한 행동을 멈출 수 없었다.
어떻게든 씨를 말려버린다는 각오로 한놈도 남기지 않고 죽여버렸던 것.
"나미에, 할 말이 있어."
"뭐, 뭐?! 아니 그건 아직은..."
대체 뭘 생각했던 것인지 나미에는 얼굴이 발개지며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내심 기대를 했던 그녀의 속마음이 무색하게도 주명이 한 말은 동떨어진 내용이었다.
"이제는 세력을 더 키워야 겠어."
"난 아직..응? 뭐?!"
"원래는 조선 왕놈의 눈치도 보고 적당히 뒤탈없는 수준으로 천천히 빌드업을 할 생각이었는데 늑대새끼가 날 먼저 물었네?!"
주명이 그날의 일로 얼마나 상처를 받고 상심했는지 잘 아는 나미에는 넌 최선을 다했다고 다시한번 말해주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주명의 말이 이어졌다.
"해병대 애들과 총병대 애들이 강하기는 하지만 너무 숫자가 적어. 그래서 지난번에도 놈에게 끌려 다녔던 거고. 소수정예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이 녹둔도 하나만 믿고 가기엔 너무 좁고 외지에 있지. 그래서말인데..."
주명은 저 멀리 보이는 동해 바닷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바다로 나가자."
바다로 나아가 미친듯이 세력을 키워낼 것이다.
그리고 세력도 세력이지만 여진족 말박이새끼들에게 진정한 하늘이 뭔지 보여줄 것이다.
'야이 늑대새끼들아,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가 갤리온과 홍이포를 몰고가서 네놈들 대가리를 다 날려버리겠어!'
누르하치의 천적이자 누르하치 살해자인 홍이포를 도입할 시간이다.
전쟁은 숫자라고? 전쟁은 다시 말하지만 템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