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62화 - 일기당천(一騎當千)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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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주여진의 침입 때 아이들이 붙들려간 후 대한학당의 교실은 거의 절반이 비어버렸다.
본래 누군가 앉아서 웃고 떠들며 재잘거렸을 그 빈자리를 보며 옥현은 교실을 지배하고 있는 상실감과 슬픔을 느꼈다.
선생님들도, 아이들도 모두 미소가 사라져버린 이 교실.
의술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집중도 잘 되지 않았던지라 시선을 움직여 그 빈자리들을 가라앉은 눈으로 하나씩 쳐다보던 옥현은 자신의 근처에 있던 빈자리를 보며 눈동자가 떨려왔다.
무척이나 자신을 의지했던 일송이 녀석의 천진한 미소와 그 총기 가득한 눈망울을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미 몇번이나 울었음에도 눈물이 나오려 했다.
하지만 옥현의 그런 추태일 수도 있는 행동을 막아준 것은 이곳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양반집 도령 분위기의 한 소년과 그 뒤에 시립해 있는 검객이었다.
사부도 즐겨입는 왜국의 무복을 입고있는 그 검객은 칼을 차고있기는 했지만 손에는 큼지막한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다.
검객은 자신이 잘 알고 따르는 히로시라는 이름의 해병대원이었으며 그 앞에 있는 소년은 김작.
피식
그리고 히로시가 왜 이곳에 있는지 이미 그에게서 들었던지라 그 내막을 떠올리자 저절로 웃음이 나며 울음을 멈추었던 것.
"허튼 짓을 하면 죽지는 않을 만큼 두들겨 패라."
아마 이 교실에서 "내가 이런 비천한 것들과 같이 수업을 듣는다고?" 라고 말했으면 히로시가 들고있는 몽둥이가 김작에게 자비없이 휘둘러졌을 것이다.
그걸 알고있으니 김작도 얼굴을 붉히며 불쾌하다는 기색을 온몸으로 내비치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저 김작이란 망나니에 대해서는 얘기를 들었다.
윤아에게, 그녀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말로 희롱했다지?
그 얘기를 듣고 어금니를 깨물며 조용히 손봐주려고 마음먹었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형이 개패듯 저자를 후드려 패는 것을 몇번이나 봐 왔기 때문에 충분히 벌을 받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또 그렇게 쳐맞는 저녀석이 불쌍하기도 했던 것.
그 김작의 옆에는 자신이 눈에 콩깍지가 씌인 윤아만큼은 아니지만 눈부신 외모를 지닌 소녀가 앉아서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었다.
김연이라는 이름의 그 소녀는 김작의 이복여동생이라고 들었는데, 그 외모만큼이나 아름다운 옷을 입고있는게 눈에 확 띄었고 그래서인지 뭇 아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자꾸 향하는게 눈썰미가 좋은 옥현에게는 다 보였다.
사실상 이곳의 공주님이 아닌가.
무려 이땅의 지배자인 주명의 여동생이니 말이다.
물론 실제로는 이복여동생이고 족보에 오르지도 못하는 얼녀인데다가, 주명이 김시민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니 이젠 여동생이 아니라 사촌이라고 봐야 했지만 어쨌든.
그녀의 외모에 관심이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존재 덕분에 교실을 짓누르고 있는 슬픔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아 그런 점에서는 고마웠다.
"여러분, 오늘 복식부기에 대해서 배워봤는데 이게 단식부기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참나. 고귀한 신분인 내가 그딴.."
퍽
"꾸엑!"
괜한 소리를 했다가 어김없이 날라오는 히로시의 검격, 아니 몽둥이 공격에 머리를 쥐어싸매고 돼지 멱따는 소리를 하는 김작.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깔깔거리며 웃는 아이들.
옥현은 왠지 아이들에게 큰 웃음을 주게될 저 녀석도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미에에게 바다로 나가겠다고 말은 했지만 당장 그러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지난번처럼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도록 이 녹둔도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가야했다.
누르하치란 놈은 만주를 통일하는 데 정신이 팔려있고 주명과는 최대한 충돌을 피하고 싶어할 테니 놈이 무척이나 싫은 것과는 별개로 적어도 만주가 통일되기까지 그 몇년동안은 놈과 충돌할 일이 없다.
다만 여진이라는 족속들이 너무도 여러갈래로 나뉘어져 있는지라 어떤 돌발행동이 일어날 지 예측이 어려웠고 특히 나뉘어진 정도가 심했고 정체성도 약했던 야인여진은 더더욱 그랬다.
병력을 더이상 늘릴 이유도 없었고 그 위험을 감수하기 꺼렸기에 원래는 그저 구축(驅逐)의 대상이었던 여진족.
하지만 누르하치의 침공에 녹둔도가 위험에 빠지고 백성들이 끌려가는 그 일을 겪은 뒤 생각이 달라졌다.
그 대단하다는 만주기병 수만에게 둘러싸였을 때 처음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대마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 쓸어버릴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역시 기병은 기병이었고 그 누르하치가 지휘하는 만주기병은 기병중의 기병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무위에 놀라 큰 피해를 입는가 싶더니 결국 산개대형을 이루며 각궁으로 계속해서 자신에게 견제를 하는 방식으로 빠르게 선회를 하자 정말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꺼내든 것이 인벤토리에 쌓아두었던 모든 화약을 개방하고 살포하여 넓은 범위를 일시에 터트리는 것.
그 효과는 놀라웠지만 그게 끝이었다.
일천 몇백의 만주기병을 폭사시켰고 수백의 만주기병에게 죽음의 화상을 입혔지만 놈들의 수는 3만이 넘어가니 일부의 피해에 불과했던 것.
그 화약을 이용한 공격을 했을 때 자신도 많이 지쳐 있었다.
초인적인 도약공격을 연이어서 하는 데에는 엄청난 체력이 소모되었고, 오우거의 체력을 지닌 그라고 하더라도 무한의 체력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 누르하치가 휴전을 제의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만주기병들을 한 수백명 정도 더 잡고난 뒤 힘이 빠져 쓰러졌을 것이다.
그정도로 만주기병들은 재빨랐으며 정예했고 교활한 기동을 보여주었다.
만약 자신에게 누르하치에게 비견되는 수준의, 아니 적어도 군대라고 불릴 정도의 규모를 지닌 병력이 있었다면 그 화약을 이용한 활약이 큰 빛을 발위했을 테지만 그러지 못했다.
전투에서의 우위가 전술적인 우위로 이어질 수 없었던 것은 절대적인 병력의 부족이 원인.
그래서 그걸 만회하기 위해 발걸음을 향하는 것이었다.
물론 요즘은 자신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나미에와 함께 데이트도 할 겸 단 둘이서 말을 몰고 가는 길이었다.
그녀의 무위와 그녀에게 준 아이템 덕분에 위험하다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연인을 데리고 어쩌면 유혈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곳에 누가 가고 싶겠는가.
하지만 어찌보면 무모하기도 했던 그 돌격에 대해 나미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책망했었던지라 요즘은 최대한 그녀의 기분을 맞춰주고 하자는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함께 말을 몰고 가면서 주명은 그날 전투를 복기하며 어떻게하면 더 잘 싸울 수 있었을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무위가 발휘되지 않는 기동력이 뛰어난 적군을 상대하려면 결국 비등한 기동력을 지닌 존재가 필요할 것 같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지금 향하는 곳에서 하게될 포섭 작업이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병은 기병으로 상대해야지."
"주명, 기병을 구할 방도가 있어?"
이제는 서로 스스럼없이 애정표현을 하는 관계이기도 했고 나미에가 워낙에 당찬 여인인지라 타고있는 말을 주명의 말과 최대한 가깝게 붙여 숨결이 느껴지는 지근거리에서 말을 하는 나미에였다.
"뭔데? 방법이 뭐야?"
지근거리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체취에 가끔 정신이 헤롱댈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날이후 누르하치에 대한 복수심에 절치부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세워둔 계획에 대한 최소한의 자각은 유지할 수 있었다.
기병을 구할 방법은 바로 여진족을 포섭하는 것이었다.
누르하치 그 늑대새끼가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고 했지 여진족을 포섭하지 말라고는 안 했으니까.
아마 누르하치 본인이 절대적인 존재감으로 떡 하니 자리잡고 있으니 설마 여진족들이 주명에게 귀부할 거란 건 생각도 못했겠지.
게다가 우지에 부족과 호이파 부족을 비롯해서 많은 여진족들을 때려잡은 여진족 학살자가 주명이 아니던가.
하지만 유일하게 가능성이 있는 부족이 하나 있었다.
"저 북쪽에 와르카(瓦尔喀, 와이객) 부족이라고 있어. 여진애들 중에서 특히 아웃사이더에 박해도 많이 받았지."
굳이 한국의 역사에서 찾아 보자면 가야의 포지션이다.
주변의 강한 국가인 백제와 신라에게 쥐어 터지고 가진것을 털리다 결국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 흡수된게 가야.
마찬가지로 해서여진과 건주여진에게 심심하면 약탈을 당하던 와르카 부족은 결국 만주를 통일한 건주여진에게 흡수되어 버리지.
왜 와르카 부족이 유독 털렸냐면 가야가 그랬듯이 가장 약했던 주제에 적당히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으니 그랬던 것이다.
다만 주명이 주목하는 것은 누르하치의 만주통일이 거의 마무리되가던 1603년 정도에 와르카부족 수천명이 조선으로 귀부했다는 명나라측 기록이다.
뭐 향화호인(向化胡人)이라 불릴 그놈들이 나중에 병자호란 때 결국 배신을 때리기는 하지만 그건 조선 사회의 뿌리깊은 유목민 멸시 때문에 빡쳐서 그런 거고.
어쨌든 중요한 것은 같은 여진족의 영웅인 누르하치에게 귀부하기를 거부하고 무려 수천리 남부에 있는 조선에 귀화했을 정도로 그새끼를 싫어한다는 것.
그새끼를 싫어하는 놈들이라면 내새끼로 만들어 주면 될 것 같아서 그들에게 향하는 것이었다.
만주기병에 비해 손색이 있기는 하지만 걔네도 일단은 기병이니까.
강성한 해서여진이나 건주여진에 비할 바는 아니니 한 일천정도의 기병을 뽑아낼 수 있으려나?
"아웃사이더?"
"잘 섞이지 못하는 외톨이들 말하는 거야."
"아, 일본의 아이누인 같은 녀석들이구나!"
나미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애초에 아이누 애들은 일본인들과 혈통부터 다르고 문화와 언어도 다른 별개의 민족이다.
그저 살던 땅에 살고싶었을 뿐이었던 아이누를 마치 미국인들이 인디언 때려잡듯이 때려잡으며 결국 다 집어삼킨 일본인들이 아이누를 아웃사이더라고 부르면 안될 말이지.
아이누에 대해서는 장기적으로는 포섭도 시도할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주명은 아이누라는 말에 눈을 빛내었다.
병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일이지.
안그래도 일본놈들에게 원한이 많은 이들인데 일본놈들과 싸우게 도와주겠다고 한다면 분명 자신의 깃발 아래 모여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왜구에, 여진족에 이젠 아이누까지.
무슨 다인종국가도 아니고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여러 민족들을 휘하에 포섭하려 하냐는 물음에 대한 주명의 대답은 '템빨'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템빨에 기반한 언어패치.
[이름 : 위대한 반지 '하나의 혀(one tongue)']
[레벨 : 200(경험치: 0/250)]
[효과 : 영지 주민들의 플레이어 언어(한국어) 습득력이 2,500% 증가합니다.]
[모든 혀와 거기에 걸린 소리를 지배할 하나이자 유일한 혀입니다.]
엿같은 마음에 기분전환겸 토토를 하는 심정으로 겜블링을 돌린 결과 무려 '조부'와 동급의 유니크 템이 나와버렸다.
보통 언어를 각잡고 배우는데 1년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그걸 단 2주로 줄여준다면?
문화승리, 아니 언어승리다!
6코어(core) 풀템을 차 엄청난 캐리력을 지니게된 세종대왕이 미쳐 날뛰며 전설적이 될 것이다!
그 2주도 못 기다릴 다급한 상황이 된다면 갈릴레이에게 했던 방식대로 포인트를 쓰는 수도 있었다.
어쨌든 와르카 부족이 자신의 영지민이 될 수만 있다면 동화는 어렵더라도 함께 살게 하는 것은 문제 없었다.
언어는 가장 강력한 유대감의 토대이니까.
"단 둘이 이렇게 나오니 좋네."
"맞아. 그리고 오늘따라 특히 예뻐보이는 미녀와 함께라서 더욱 그런거 같아."
가장 강력한 표현의 도구이기도 하고.
둘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점점 더 후끈하게 달아오르려 하고 있었고, 나미에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 눈을 감고 입술에서 느껴질 부드러운 감촉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꺄아악!"
둘에게는 불행하게도,
저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사방에 번져나가는 불길에 하던 일을 멈추고 급히 말에 박차를 가해야 했다.
주명의 눈에 보이는 선명한 붉은 무리들.
그리고 그 붉은 무리들 사이에서 점점 숫자가 줄어들어가는 하얀 무리들.
'내 기병!'
주명과 나미에가 말을 몰며 달려가려 하는 그 장소에서 수십의 기병들이 간신히 대형을 이루고 그들의 뒤로 뛰어가는 동족들을 지키고자 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앞에서 동족들이 침략자들 손에 붙들려 마치 짐짝처럼 말 뒤에 실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벌써부터 색욕에 사로잡혀 여인들을 범하려는지 그녀들의 옷을 찢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고, 그 참혹한 광경에도 도저히 나설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던 마푸타는 눈물을 흘리며 그저 지켜 보아야만 했다.
"내 동족이..."
와르카 부족 족장은 이미 전사하고 그의 아들인 와르카 마푸타가 패잔병들을 규합해서 저항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올라(烏拉, 오랍) 부족이 쳐들어오자 아버지는 동족들을 모아 필사적으로 저항하려 했다.
왜냐하면 놈들이 요구하는 것은 그저 공물을 바치고 고개를 숙이라는 수준을 넘어 살던 터전과 동족들을 다 가져가겠다는 것이었으니까.
건주여진의 습격에 안 그래도 부족한 병력으로 대항할 수 없었던 올라 부족은 대다수가 누르하치의 공격에 쓰러져 그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었지만 일부는 다른 선택을 했다.
대략 1천여기의 기병으로 이뤄진 수천의 여진인들이 와르카 부족이 살던 터전과 와르카부족 자체를 노리고 쳐들어온 것.
와르카도 하나의 부족이며 야인여진 중에서는 규모가 있는 편에 속했기 때문에 가진 전력을 끌어모아 똑같이 1천의 기병으로 맞섰지만 완패했다.
금나라의 후예라 칭하고 강대한 건주여진과 수시로 싸움을 일삼았던 올라 부족을 그저 소규모 분쟁만을 경험했을 뿐인 와르카 부족이 막을 수 없었던 것.
올라 부족의 기병 수십이 쓰러지는 동안 와르카 부족의 병력은 족히 수백이 쓰러졌고 군대는 와해되어 버려 지금 마푸타의 곁에 남아있는 수십이 전부였다.
"우리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남은 부족민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야 한다. 이대로 저들에게 붙들리면 평생을 노예처럼 살아야 할 것이야."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최대한 많은 부족민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하고자 목숨을 대가로 시간을 벌려는 의도였다.
그게 족장의 아들로서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새끼들 그만둬!"
"예천!? 안돼!"
하지만 더러운 올라 놈들에게 위협받고 있는 여인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동생 와르카 예천이 뛰어드는 장면을 보게되자 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그 비장한 책임감이 흔들렸다.
아직 15세밖에 안되는 저 어린 동생녀석은 전쟁의 무서움, 여진인들의 잔혹함을 모른다.
가소롭다는 듯이 동생을 베어넘길 적들의 모습이 그려지자 어린 동생을 부탁하며 전장에 나선 아버님의 얼굴을 볼 낯이 없는 것 같아, 그리고 동생의 죽음을 차마 두 눈으로 볼 수가 없을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어, 어?! 그 호랑이?! 우지에 부족을 멸했다는 그 호랑이아냐?!"
하지만 부하들의 웅성거림에 다시 뜬 눈으로 보게된 것은,
"이새끼들이 어딜 감히 내꺼에 재를 뿌려!"
"끄아악!"
늑대들 사이에 난입한 붉은 호랑이가 동네 강아지들을 때려잡듯이 그 무서운 올라 부족의 약탈 기병대를 썰어버리는 모습이었다.
스스로 산과 초원의 늑대들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여진족들은 맹수이자 포식자로서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무력으로 여진족들을 때려잡는 모습에 강자를 숭상하는 여진족의 문화덕분에 공포감과 존경심이 섞여있는 경외감을 담아 붙인 별명이 두만강의 호랑이였고 그 별명을 지닌 자의 활약은 마푸타도 들은바 있었다.
하지만 직접 그걸 목격하게 되니 왜 우지에 부족이 저 호랑이에게 무너졌는지 알것도 같았다.
검격을 휘두르자 한번에 두셋의 인마가 위 아래로 쪼개지는 공포스러우면서도 강맹한 그 모습.
"정녕 산의 제왕이라는 호랑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도다.."
무서운 늑대들로 보였던 올라 부족의 기병들이었지만, 지금의 모습은 마치 호랑이의 앞발질에 찢겨지는 강아지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여인들의 속곳을 찢기 직전이었던 올라 부족의 기병, 아니 말에서 내렸으니 그냥 전투원 놈들은 한 여인의 폭풍과도 같은 검격에 모조리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더러운 것들."
차갑고도 날카로운 그녀의 목소리보다도 날카로운 건 아직 밤이되지 않았는데도 달빛처럼 은은한 빛무리를 뿌리는 검을 휘두르는 검격이었다.
마푸타 자신도 꽤나 뛰어난 전사라고 자부해 왔지만 저 여검객의 검은 자신의 인지를 아득히 상회하고 있었다.
그 빠르기는 눈으로 쫒기에 너무도 버거웠으며, 그 부드러우면서도 신묘한 궤적은 그의 마음속에 수십년간 새겨왔던 검로들을 가지고는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번의 검격이 물결처럼, 바람처럼 기이한 곡선 경로를 타고 흩뿌려지자 두명의 목에서 피가 뿜어진다.
그녀의 뒤와 옆에서 찔러들어오는 두군데의 창격을 쳐내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 피의 궤적과 무기를 쳐내는 소리 사이의 연결을 자신의 수준으로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었다.
숙련된 전사인 마푸타에게도 그녀의 검격은 마치 파편처럼 띄엄띄엄 인지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빠르고 신묘했으니까.
바람에 날카로움이 달려있다면 저런 움직임일까.
저 자유롭고도 빠르며 구애됨이 없는 검격들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검객은 결국 홀로 수십의 올라 부족원을 참살하며 여인들을 구해내었다.
구해졌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부족의 여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주변으로 모여들며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자신의 동생이 그 여인들 중 한명을 얼싸안으며 안도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푸타의 시선은 다시 그 호랑이에게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곳에는,
수백의 인마가 널브러져 있는 시체의 산 위에 마치 산군처럼 우뚝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붉은 호랑이가 있었다.
저도 모르게 마푸타는 고개를 숙였다.
저 호랑이가 포효하면 그 어떤 늑대가 감히 달려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동족을 지키지 못하고 위험에 빠지게 한 우두머리 늑대인 마푸타 자신은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