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64화 - 함선(艦船)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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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서 기사의 존재감은 역시 대단했다.
비록 기사의 장비를 갖추고 랜스 차지를 연습한지 고작 몇일밖에 되지 않은 초짜 겸 여진족 출씬 짝퉁기사 마푸타가 출전했음에도.
홀로 올라 부족의 기병 수백기를 와해시키고 적장까지 참살한 그 전과를 어찌 평가절하 할 수 있으랴.
다만 여진족들이 경기병 위주로 운용해 왔을 뿐 진짜 제대로된 중기병을 겪어보지 못했던 문화충격도 영향이 있었다.
마치 조총을 처음 겪어본 조선군이 겪었을 충격과 공포처럼 말이다.
그 충격과 공포를 아껴뒀다가 누르하치같은 거물을 상대하는데 써야 했던 거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놈은 이정도가지고는 잡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섰기에 미리 지른 것.
자신이라는 괴물을 처음 겪어봤음에도 기동성 및 산개 후 깎아먹기라는 최적의 카운터 전술을 들고나오는 군략에서의 괴물이 놈이 아니던가.
겨우 기병 중 끝판왕이란 기사정도만 가지고 놈을 어찌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애시당초 하지도 않았다.
근대 전쟁의 끝판왕인 나폴레옹이 진가를 알아본 모든 병종 중 끝판왕 정도는 되어야지.
거기에 17세기 동방의 나폴레옹이라고 볼 수 있는 그자가 더해진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기사의 위엄찬 모습은 일단 주명 자신에 대한 와르카 부족의 충성심과 경외감을 드높이는 정도로도 충분히 쓰임새가 있겠다.
일단은 내부용으로 쓰고 나중에 늑대를 잡을 때는 다른 식으로 쓸 계획.
“만호, 와르카 부족들을 정착시키는 작업은 완료되었습니다. 생각보다 순조롭게 끝난는데, 여진인들이 그렇게 고분고분할지 꿈에도 몰랐습니다.”
당연하지.
기병이 정체성인 녀석들이 그 기사가 될 수 있게 해주는 ‘2차 전직 관리자’에게 대들 리가 있는가.
"철기가 되고 싶습니다!!"
마푸타의 동생이라는 예천을 시작으로 부족의 모든 남자가 눈을 반짝이며 무릎을 꿇고 제발 기사가 되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통에 반란 따위가 일어날 리 없었다.
기사는 로망이니까.
거지떼처럼 후즐근하게 가죽 쪼가리로 차려입고 멋없이 각궁 쪼가리나 들고서, 들개처럼 굶주림에 헉헉대며 이곳저곳을 뭐라도 약탈해 먹으려고 배회하는 그 여진족 궁기병과는 클라스가 다르니까.
지금 주명의 앞에 있는 서얼출신 관원은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말이다.
정여수의 피맺힌 절규에 굴복한 주명은 대대적으로 관청의 인력을 확충했고, 그 대상이 되었던 이들은 양반가의 서얼이었다.
평민보다 월등한 교육수준에 그래도 신분제도상 평민보다는 높은 대우를 받았던 서얼들은 관아에 필요한 능력과 권위를 적당히 가지고 있어 제격이었다.
얼자 출신(?)으로 공을 세워 경국대전이 정한 한계를 뒤엎고 김시민의 양자로 입적하고 또 선조의 치적 추가용으로 급조되어 무늬뿐이라지만 공신이 되기도 했으니 그들에게 주명은 영웅이자 롤 모델.
거기에 나름 상류층이라 유학을 배웠던 서얼들에게있어 진사시에 전국 10등이란 성적으로 합격한 주명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존재였다.
그런 이유로 주명이 관원들의 주축이 된 서얼들을 장악하기 쉬웠으니 결과론적으로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서얼출신 아전을 한 50명 정도 확충하자 그동안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었던 녹둔도의 경영이 훨씬 체계적으로 변하여 주명도 놀랐을 정도였다.
물론 나라에서 인정하는 정식 관원은 아니었고 그냥 주명이 만호의 이름으로 사재를 털어 고용한 일종의 준-공무원이나 공사 직원에 가까웠지만 백성들에게나 주명에게나 그게 그거 아닌가.
그리고 조선의 행정력이 전근대 수준에서는 나름 뛰어났다고는 하지만 현대를 살아온 주며에게는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이 처음부터 근대적인 관료체계를 구축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기존의 아전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관원들을 뽑은 측면도 있었다.
또 굳이 이 작은 녹둔도에서 50명이나 되는 서얼들을 그런 공무원(관원)으로 채용한 건 다른 이유가 있었다.
“지난번에 지시하신 갑옷공방의 확충 건은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 당장 내일부터 판금갑 생산이 가능할 것입니다.”
해병대원들을 모두 판금갑으로 무장시키고, 또 와르카 부족을 기사로 전직시키기 위해서는 갑옷공방을 큰 규모로 확충해야 했으며,
“늘어나는 인구를 관리하기 위해 녹둔도의 녹둔동(鹿屯洞)과 와르카 부족이 거주하는 북쪽의 와동(瓦洞)에도 관원들을 파견하는 작업도 마무리 되었습니다.”
주명이 기거하는 녹둔도의 만호부 산하에 동(洞)이라는 고유의 행정단위를 만들어 관원을 둘씩 파견하는 등 전근대 행정이 아닌 보다 진보된 행정을 갖춰야 했고,
“학교를 화충하여 수용인원을 늘리고, 또 와르카 부족민들이 있는 와동(瓦洞)에도 비슷한 기관을 만들어 교사를 초빙하는 것도 곧 가시화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아예 백지에 가까웠던 교육쪽의 틀을 만드는데 많은 행정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만 만호 나리, 광동성(廣東省) 동완(東莞)의 그 원숭환이란 아이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소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역사를 아는 주명만이 할 수 있는 잡다한 빌드업들을 수행해야 했으니 오히려 50명의 인원으로도 부족하다 볼 수 있었다.
“당장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홍이포를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을(乙, 2번째)등급의 우선순위로 처리하게.”
원숭환(袁崇煥)과 홍이포(紅夷砲)
당장의 임진왜란이 아니라 저 누르하치를 상대하기 위한 빌드업의 양대 축이다.
영원성 전투에서 그 늑대새끼를 저승으로 보내주었던 대 누르하치 필살 키워드라고 할 수도 있겠다.
영원성 같은 요새만 쥐어주면 아주 삼위일체로 늑대새끼에게 지옥을 보여줄 것이다.
‘그 충무공에 비견될 정도로 이시대 최고의 명장중 하나니까.’
누르하치가 어디 평범한 놈인가? 그런 놈을 상대로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이미 박살난 방어선을 지켜냄은 물론 전사시킬 정도니 육지의 이순신이란 평가도 받을 자격이 있는 놈이다.
1584년에 태어나는 원숭환은 지금쯤이면 7살이 되었을 텐데 지금부터 미리미리 포석을 깔아 두어야 녀석을 얻을 수 있다.
조선인과 한족이라는 인종적 문화적 차이라는 기본적인 큰 괴리를 극복하려면 머리가 굳어지기 전에 세뇌...아니 조기 각인이 필요하지.
다행히 녀석의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기 때문에 예를들면 학비를 지원해 준다는 식으로 인연을 엮을 기회는 충분히 만들기 쉬울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금융치료는 병사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처음보는 사람에게도 충분히 통하니까.
“이번에 녀석의 부친에게 가면 천은으로 한 천냥(1억 6천만원)정도 아이의 학업에 쓰라고 전달하며 내 이름으로 서신 하나를 전하게나.”
“나, 나리. 아무리 그래도 처, 천냥 씩이나 보내신다는건...”
"괜찮네. 그리고 반드시 그정도 금액은 전해야 하네. 그 금액이 아깝지 않은 기재라네."
원숭환의 가치를 생각하면, 누르하치에게서 느꼈던 그 개같은 기분을 생각하면 그정도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서신의 내용은, 음...대충 조상님꿈이나 용꿈으로 적당히 각색해서 일단 초안 내게 올리고.”
처음에는 약간의 미신과 우연이 들어간 호의에서, 나중에는 낭중치추처럼 드러날 놈의 재능에 대한 투자로 바꾸면서 점점 인연을 엮어갈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필연적인 인연이 되겠지.
원숭환의 재능의 방향을 생각하면 동방의 모든 병법서를 이번에 선물로 쥐어 주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리고 보내는 김에 병법서도 현존하는 모든 종류를 하나씩 다 구해서 보내주도록."
“...그리하겠습니다."
관원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명령들이었지만 애초에 정식 아전도 아니고 애매한 지위를 가진 관원에 불과한 자신이 이 관청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이해 못할 일이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이해를 포기했다.
또 이곳의 주인인 저 김 만호는 정식 아전도 아닌 자신들에게 공무원(公務員)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불러주며 힘을 잔뜩 실어주기도 했고, 또 조선에서 그 어떤 공직자도 상상할 수 없는 풍족한 급료를 주는 분이니 무슨 반역을 꾸미라는 게 아니라면 절대 항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굳이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는 대신 또다른 이해하지 못할 명령에 대한 보고를 계속했다.
"그 서역의 기사를 초빙하는 일은 어제 하야타카란 자와 조율을 마쳤습니다.”
주명이 관원들을 동원해 시키는 일들 중에는 본래 하야타카란 사카이 상인을 통해 돈을 쥐어주고 수행했던 일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뭐 어차피 이 녹둔도를 찾는 다른 국제적인 연줄이 없으니 결국 그를 통해야 한다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조직을 통해 의뢰하고 관리하게 된다면 더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으니 이전보다 훨씬 진보한 체계였다.
그래서 눈앞의 서얼출신 공무원을 만족스럽게 쳐다보던 주명은 그의 업무보고가 끝나자 마자 어깨를 두드려 주며 격려했다.
"고생이 많았네."
그들이 가져다준 행정적인 공헌 덕분에 이제는 진짜 한명의 영주가 된 것 같았으니까.
[영지 : 녹둔동(鹿屯洞)]
[등급 : 촌락 Lv5(5/20)]
[인구 : 1,851]
(행복 100/100, 충성 100/100, 치안 100/100)
[군사 : 해병대 820, 총병대 200]
(인구에서 91명 추가징집 가능)
[발전 : 상업 35, 농업 28, 공업 41, 문화 33, 과학(☆) 51]
[자금 : 은 2,450냥(명나라 화폐)]
[자원 : 쌀 3,500석, 그 외(+)]
[영지 : 와동(瓦洞)]
[등급 : 개척지 Lv5(5/10)]
[인구 : 4,451]
(행복 30/100, 충성 90/100, 치안 50/100)
[군사 : 철기대 1, 경기병 786]
[발전 : 상업 15, 농업 1, 공업 1, 문화 15, 과학(☆) 0]
[자금 : 은 500냥(명나라 화폐)]
[자원 : 쌀 300석, 그 외(+)]
정말로 저들이 있어 노력해줬던 덕분에 녹둔도와 와르카 사람들이 있는 쪼렙 개척지를 녹둔동(鹿屯洞)이라는 촌락과 와동(瓦洞)이라는 적정 수준의 개척지로 탈바꿈할 수 있었으니까.
녹둔동(鹿屯洞)은 개척지의 다음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촌락(村落)으로 등급이 올라갔고, 1레벨짜리 개척지였던 와동(瓦洞)은 저들 중 두명을 파견하여 세운 동사무소의 존재 덕분에 무려 5레벨로 단숨에 뛰어오를 수 있었으니까.
부-목-군-현이라는 군현제의 틀 내에서 수만의 인구를 지닌 한개의 거대한 현을 고작 수십의 아전으로 커버했던 조선의 행정과는 달리 몇천 단위의 좁은 행정구역인 동(洞)에도 관원을 2씩 상주하게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행정력이란 결과를 보여주었다.
굳이 행정력이 아니어도 상태창을 통해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주명이지만, 그저 개인 혼자서 확인할 수 있는 정보와 관료조직이 체계적으로 관리되는 행정적 수치 사이에는 그 잠재력 측면에서 큰 격차가 있다.
저들의 존재 덕분에 그냥 혼자만 열람할 수 있는 인력과 자원의 덩어리 같았던 영지가 '관리'가 가능해지자 딱딱 나뉘어져 구분된 벽돌같은 걸로 변모한 것이므로.
덩어리는 주물러 봤자 그저 덩어리고 모양도 이상할 뿐이라 한계가 분명하지만, 벽돌은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한 곳에 쌓아 건물을 만드는 데 쓰일 수 있으니 인력과 자원을 모아 영지 그 이상의 형태까지도 발전할 수 있게 되는 것.
그 고마움을 주명은 실질적인 보상으로 보답해 오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고생하는 관원들에게 이번달에도 지난달과 같은 수준으로 성과급을 지급하게나."
"허, 허나 그러면 너무 지출이 많아질 것입니다."
성과를 누가 따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업무를 많이 던져준것 같으면 쥐어주던게 바로 성과급이었기 때문데, 성과급이라고 쓰고 그냥 특별 야근수당이라고 읽어도 되는 그 성과급은 무려 급료보다도 많은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그 지출규모가 예상되는 저 관원이 놀랐던 것이다.
뭐 애초에 공무원들이 복지부동하는 시대도 아니고 주명이 딱히 빡빡하게 성과를 따져가며 구분해서 줄 이유도 없었다.
"내 관원들을 챙기는데 재물을 아끼면 안되지."
"아....나리의 은혜가 너무 각골난망이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관원이 은혜라고 말 하는 데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이미 풍족한 급료를 받고 있는 관원들이라 본인들의 호구지책에만 충당해야 했다면 넘치다 못해 흘러 넘칠 정도로 주명이 잘 챙겨 줬지만 문제는 그들이 이곳에 올때 가족만 데리고 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주명의 의뢰를 받아 주요 상단을 통해 주로 평안도와 함경도의 서얼들에게 뿌려진 구인광고를 보고 녹둔도로 간다는 큰 결심을 한 대담한 자들이 바로 주명의 관원들이었고, 그런 대담한 성품 만큼이나 그들은 평소 주변에 영향력이 있었던지라 관원들을 따라 지인들까지 가족들을 데리고 녹둔도로 왔던 것.
서얼이라고 해서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 그들은 나름대로 한 무리의 영향력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사실 조선 시대의 귀족이라고 볼 수 있었던 양반가문의 피를 이었고, 그 귀족가문에서 적자보다는 부족하지만 수준높은 교육을 받는 경우가 많았으니 엘리트라면 엘리트층이 바로 서얼이었다.
양반들에 준하는 학식을 쌓고도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관직에 나서지 못했던지라 오히려 양반들보다도 백성들과 접하게 되는 빈도가 많은 게 서얼들이었고, 그런 서얼들은 백성들 사이에서 일종의 오피니언 리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1596년에 서자 출신 이몽학(李夢鶴)이 난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런 서얼들의 특별한 위치가 기여하기도 했던 것.
그렇게 자신을 믿고 따라와준 지인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관원들은 초기 정착을 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생계까지 책임져 주려고 했기 때문에 주명이 주는 급료만으로는 호구지책이 완전할 수 없었다.
조선에서 보면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 녹둔도에 자신만 보고 따라온 그 지인들을 마냥 외면할 수 없는 관원들의 처지를 배려할 목적에서 거의 매달 간격으로 주명은 성과급이라는 이름의 보너스를 지급하고 있었다.
물론 주명이 사람이 좋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제 무리를 이끄는 입장인 그가 그런 이유만으로 이렇게 재물을 푸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성과급이란 것은 관원들의 품위 유지비 겸 세력 유지비로 주는 거고, 그들을 완전히 내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주는 투자같은 거지.'
녹둔도에 원래 살았던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주로 외부에서 유입된 사람들이 다수였지만 온갖 곳에서 찾아온 그들 사이에 어떤 질서라던가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정치적으로 봤을 때는 그저 파편화되어 서로 떨어져 있는 많은 수의 다양한 집단들이 한 공간에 모여있을 뿐이라, 수천의 인구는 그저 덩어리만 컸을 뿐 그들 사이에 연결을 하고 질서를 잡아줄 무언가가 없었던 것.
조선이었다면 엄격한 신분제를 통해 강제적으로 억악함으로써 연결과 질서를 구현하겠지만 그딴 봉건적인 짓거리를 자신의 영지에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신분제 위에 군림하는 그런 지배층은 사양이지만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어우를 수 있는 사회 지도층이 있어 그들의 영향력 아래 각 세력들을 엮고 묶을 필요가 있었다.
혹시 양반들이 있었다면 지배층인 그들을 지도층으로 순화시키는데 애를 먹었겠지만 이 오지중의 오지인 녹둔도에 양반이라고는 김작 그새끼와 주명의 어머니인 서씨 부인, 그리고 숙모인 진씨부인 뿐이었으니 두껍고 넓어야할 지도'층'을 형성하는 데는 무리였다.
사람들의 큰 존경을 받는 해병대와 총병대라는 군인들이 있기는 한데 전직 왜구로 외국인인 그들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정여수를 비롯한 장인들에게 서양의 도시에서 무슨 길드 만들어 자치권 어쩌고 하듯이 운영하자고 한다?
'미쳤다고 할걸? 아직 여기는 조선이다.'
그래서 주명이 생각하기에 녹둔도의 지도층이 될 이들은 바로 눈앞의 관원같은 이들이었다.
아까 관원들 덕분에 진정한 영주가 되었다는 감상을 주명이 지녔다고 했는데, 영주에게는 관료 겸 장교가 되어줄 인력풀이자 사회에 영향력을 지녀 민심을 관리해 줄 수 있는 보위(保衛)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조선에서도 양반들이 조선 국왕을 향촌에서부터 지지하게 하고, 또 그들은 곧 문관과 무관으로 공무원이 될 인력풀이 되는 보위세력인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상 정부 주도로 발전이 이뤄지는 이 녹둔도에서는 서얼 관원들이 사회 지도층이 될 게 분명해.'
양반 가문의 핏줄을 반이나마 이었다는 준-귀족의 혈통, 양반 가문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쌓아올린 학식과 능력.
거기에 주명이 쥐어준 공무원이라는 완장까지 달고 있으면 이 녹둔도에서는 100% 사회 지도층 확정이다.
혈통과 능력을 가지고 민중들 속에서 구축한 영향력을 증명하듯, 같이 따라온 지인들이 있어 그들이 무리를 이뤄 1차적인 추종세력까지 형성해 줄 것이니 더더욱.
아마 돈이 흘러 넘치는 녹둔도의 호황을 고려하면 저들이 지인들의 호구지책 문제로 곤경을 처하는 것도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다시 오지않을 그들의 궁색한 초창기 타이밍에 선심을 베풀어 완전히 포섭하겠다는 게 주명의 생각이었다.
'내 은혜가 각골난망이라고 했지? 그 마인드로 너희들의 지인들 역시 나의 충실한 지지자로 만들라고.'
신분따위에 구애받지 않고 학교에서 한명의 예외도 없이 교육을 받고있는 이땅의 아이들이 성장하게 되면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을 해야 겠지만, 지금 당장은 서얼들을 지도층으로 삼아 녹둔도를 운영하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주명의 세심하고 후덕한 마음에 감읍하여 거의 눈물마저 보이기 직전일 정도로 감동한 관원은 그냥 자기 선에서 무시해 버릴까 고민했던 사안에 대해 말을 올렸다.
이분께는 터럭만큼이라도 숨겨서는 안되는 것이란 생각이 차올랐으니까.
"나리, 죄송하지만 혹시나 해서 보고드리지 않은 사안이 하나 있습니다..."
"음? 그게 뭔가?"
"어떤 미친놈이 자신에게 명나라 은화로 1만냥(16억)을 쥐어주면 나리께서 말한 서역의 배, 그 범선(帆船)을 얻게 해주겠다고 떠들고 다녔습니다만...."
범선(帆船)이라는 말에 주명의 눈이 커졌다.
홍이포와 원숭환은 어찌보면 미래를 대비한 장기적인 포석이자 빌드업이었고 그다지 시급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을(乙) 등급 순위로 배당한 것이었고.
하지만 범선(帆船)은 최우선 우선순위인 갑(甲) 등급!
바다로 나아가야 했던 주명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게 얻으려고 했던 게 저 범선(帆船)이었지만 쉬울 리가 없었다.
특히 가능하다면 현재 주력함으로 쓰이는 갤리온으로 구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군사기밀까지는 아니었지만 각국에서도 최일선 군함으로 사용되는 저 갤리온은 중요한 전략물자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큰 돈을 쥐어준다고 해도 쉽사리 구할 수 없었던 것.
재벌이라고 해서 군함을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주명의 의뢰를 받은 하야타카가 후한 조건을 들이밀어도 갤리온을 소유한 선주(船主)들은 한사코 거부했으며, 애초에 협상 자체를 거부했으니 주명으로서는 속도가 나지 않는 진척도에 속만 썩이고 있는 형편이었다.
카락이나 캐러밸 같은 다른 작은 함선들을 운용하는 선주들은 애초에 이 동방까지 올 체급이 안되는 관계로 접근조차 할 수 없었으니 얘기할 필요도 없었고.
절대로 손에 닿을 것 같지 않았던 그 범선(帆船).
그걸 구하는 손에 뭔가가 걸린 것 같다는 생각에 주명은 다급히 관원에게 그 미친놈의 행방을 물었다.
"그자가 어디있나?"
"일단은 왜놈 같은데 몇주 전에 풍랑을 만나 원래 타던 배를 잃고 이곳으로 표류했다는 놈입니다. 아마 저잣거리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을 것입니다. 표류했던 주제에 뭔 돈으로 술값은 내는 것인지..."
그 말을 듣고 주명은 바로 해병대를 소집하여 그 왜인을 찾도록 했고, 해병대의 탁월한 수색실력 덕분에 곧 놈이 있다는 객잔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곳으로 급히 뛰어가 보게된 그 왜인은,
"호오, 당신께서 남만인들의 배를 찾는다는 분이신가?"
원래 외모가 잘 생겨서 더 그런것인지는 몰라도 표류한 것 치고는 무척이나 말끔해 보였으며, 관원의 지적대로 표류하여 빈털터리가 된 주제에 무척이나 번듯한 술상에서 고급스러운 술과 기름진 안주를 태연하게 쳐먹고 있었다.
거기다 자신을 찾아온 주명을 보고 처음 봤음에도 바로 용건을 알아맞히는 그 직감은 왠지 주명조차도 섬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땅의 지배자이자, 놈에게는 이땅의 다이묘인 주명에게 대하는 태도 치고는 너무도 예의따위를 전혀 갖추지 않고 있었다.
"무례한 놈 같으니! 예의를 갖춰라!"
"그만, 난 괜찮다."
놈의 너무도 태연한 태도에 주명을 수행해온 히로시가 분기가 치밀어 올랐는지 칼을 빼어들며 더 무례하게 굴면 베어버리겠다는 살기를 뿌려댔지만 주명이 제지했다.
"나의 함선? 충분한 대가를 지급한다면 그것이 숨겨져 있는 위치를 알려주도록 하지."
그의 건방진 태도도 태도거니와 배를 판다는 것도 아니고 고작 위치를 알려준다는 말에 주명은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히로시, 관청 지하에 가면 궤짝이 있다. 거기서 가져오도록."
그럼에도 범선(帆船)이 너무나도 마려웠던 주명은 히로시를 시켜 개인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관청의 지하에서 은 10,000냥을 꺼내오도록 시켰다.
"허! 정말...시원시원해서 좋군. 뭐 그런 의미에서 이미 돈은 받은 걸로 치고 말해주지. 그 관대하기로 이름난 다이묘께서 한낱 낭인 따위에게 거짓을 말할 리 없으니 말이야."
그 모습에 잠시 흠짓 놀랐다가 금세 표정을 바꾸는 왜인은, 주명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이미 알아보았는지 은 궤짝을 아직 받지 않았음에도 주명의 이름값을 믿고 범선이 숨겨진 위치를 알려준다고 했다.
"훗카이도, 훗카이도 동쪽 해안을 따라가다 나오는 첫번째 무인도에 범선(帆船)이 숨겨져 있다."
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범선(帆船)의 위치를 들었을 때 주명은 경악했다.
그러면서도 의심과 함께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왜냐하면 그 멀리 훗카이도라는 외지에 숨겨져 있는 배가 저 왜놈의 것이 과연 맞는가, 발견한 것만 가지고 야부리를 치는 거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기 때문.
"아? 왜 그게 내꺼가 아닌 거 같은가? 하하하! 무려 70년 넘게 외딴 무인도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처음 발견했으면 내께 되는 게 맞지. 거기는 물살도 험하고 너무 외진 곳이라 백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찾지 못할걸? 게다가 그 아이누 놈들만 사는 미개한 곳이니 찾아보 알아볼 수 있을리가 없지."
그래, 이렇게 위치라도 알았으면 된거야.
그렇게 화를 삭이며 놈을 노려보고 있는 주명이었지만 놈이 던진 다음 말에 도저히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잘 찾아봐. 이 세상의 전부를 거기에 두고 왔으니까. 크하하하!"
"이 씨발새끼가?!"
그 말을 내뱉었던 그 해적놈처럼, 저 왜인새끼도 참수해 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