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69화 - 함선(艦船)(6)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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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녀석은 배를 잘 찾고 있겠지?"
일본인들의 침공과 인종청소 수준의 학대에 아이누가 겪는 참상들을 목도한 주명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우선순위를 조정했다.
선 아이누 구원 후 범선 탐색으로.
물론 우선순위가 그렇다는 말이지 두 작업은 동시에 이뤄졌다.
다만 가장 강한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주명이 어느 쪽에 힘을 싣는냐는 차이가 있을 뿐.
처음 녹둔도를 출발할 때 가져온 네척의 배에는 그간 아이누 마을들을 구하며 얻어둔 나무와 밧줄 같은 수리용 자재들을 가득 채웠고, 아이누 사람들과 해병대원들을 적당히 섞어 40명씩 태운 채 따로 범선을 찾도록 해 두었다.
그 무리를 통솔하기 위해 나미에를 보냈고, 운항을 위해 샤를을, 그리고 범선의 위치를 찾는 길잡이로 쓰네히라를 보냈으니 주요 항해요원들은 죄다 그쪽으로 몰려간 셈.
하지만 주명은 선 순위라고 할 수 있는 아이누 구원을 위해 다른 그룹에 몸을 실었다.
해적놈들에게서 얻은 배들을 가지고 해병대원과 아이누 사람들을 태운 채로 에조치의 해안을 제집 들락거리듯 약탈하던 해적들을 쓸어버리기로 한 것.
처음 서쪽 해안을 돌며 나포했던 6척의 해적선을 가지고 시작했던 아이누 구원을 위한 여정은 동쪽 해안을 돌고 쓰루가 해협에 거의 근접했을 때에는 무려 26척까지 불어나 있었으니 왜인들의 횡포는 동쪽 해안에 더 극심했다고 볼 수 있었다.
26척까지 불어난 선박이 의미하듯 그의 세력도 크게 늘어나 있었다.
그의 밑에 있는 아이누 사람들은 왜인들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에, 또 아이누 동포들을 구원하겠다는 마음에 자원하여 자신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다.
[부대명 : 아이누 민병대]
[부대 등급 : 2]
[적용효과 : 공격력 +3%, 방어력 +3%]
[병력 : 769/769]
[사기 : 155/155]
나미에가 이끄는 별동대에 가 있는 아이누인 80명까지 포함하면 모여든 아이누 사람들의 수는 지금까지 769명.
거의 한개 대대급 병력이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모인 것이니 이들이 왜인들에게 가졌던 원한의 크기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거기에 주명에게 한가지 이점이 되는 것이라면 본래 영지민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유니크 반지의 조선어 패치가 휘하의 군대에도 적용된다는 점.
그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기에 단 몇일 동안에 벌써 주명에게는 익숙한 단어들을 꽤나 능숙하게 말하는 아이누 민병대원들도 눈에 띌 정도였다.
아직은 단어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 문장이 되고 대화가 되어, 나아가 정말로 유창하게 주명이 쓰는 한국말을 구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미 왜인들은 죄다 주명이 죽여놓았기 때문에 전장 정리라고 해봐야 시체를 치우고 놈들이 입고있던 무장을 수거하여 아이누인들에게 지급하는 정도였을 뿐이었다.
왜인들의 무장을 쓰게 하고싶지는 않았지만 정여수의 공장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보급이 여의치 않았던 관계로 궁여지책으로 택한 방법이었다.
"카무이님 감사합니다! 너무 좋은 무기입니다."
"어, 그, 그래.."
본래 자기들이 쓰던 뼈나 돌로만든 무기보다는 좋다며 함성을 지르는 아이누 사람들의 모습에 얼떨떨했지만.
본래 전쟁은 템빨이어야 하건만 이 불쌍한 아이누 사람들은 왜인들의 막강한 철기 앞에서 오로지 투지와 복수심 하나만 가지고 처절하게 싸워왔다는 생각을 하니 그래도 저 사람들이 마냥 초라하게만 보이지 않았다.
구한말 독립군들이 일본놈들의 기관총에 화승총으로 맞섰을 때 누가 감히 비웃을 수 있던가? 독일군의 탱크에 예전의 후사르가 지녔던 그 로망을 잊지 못하고 랜스 차지를 시도하다 '돈키호테'처럼 우두둑 끔살 처리된 폴란드 친구들이라면 모를까.
"자네들은 왜 하나는 이빨이 없고 하나는 손가락이 왜 펴지지 않는 것인가?"
"예전에 왜놈들과 싸울 때 한놈이라도 죽일려고 이빨로 깨물어서 저는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놈들 때려죽인다고 갑옷에대 대고 하도 주먹질을 해댔더니 손이 뭉개졌네요."
"..."
저들의 동포를 구한다는 불타는 의기와 부족한 무기에도 굴하지않고 싸운다는 불굴의 투지만큼은 구한말의 그 존경스러운 독립군과 다를바 없이 빛났기 때문에 솔직히 주명은 지금까지 그들을 구해주고 받아오면서도 경의마저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독립군을 독일군처럼 무장시켜 일본군에게 충공깽을 선보이고 싶다는 염원을 저들에게 투영한 나머지 주명은 최대한 빨리 연락선을 보내서 정여수가 만든 질좋은 무구들을 들여오겠다고 결심했다.
판금갑이라면 몰라도 조선군에 납품하는 환도와 등패(방패), 두정갑 정도는 산처럼 재고가 쌓여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군의 무장을 최대한 튼실하게 해 준다는 계획하에 이일이 북병사로 있는 북방군에 지금 납품하고 있는 물량을 아득히 넘어서는 물량을 생산하여 녹둔도에 쌓아두고 있었다.
지금 그걸 나눠주면 선조는 물론 조정에서도 의심할 수 있으니 그저 북방군에게 나눠줄 뿐이었다.
스탈린이 우랄 산맥 동쪽으로 산업단지를 이전하여 무기를 찍어낸 힘으로 결국 독일군을 몰아냈듯이, 임진왜란이 발발하면 저 쌓여있는 재고들은 무너진 군역과 재정에 부실한 무장을 하고있는 조선군과 더 빈약한 의병에게 쥐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연전연패하던 소련군이 결국 스탈린이 시베리아에서 찍어낸 무장과 그간 쌓인 전투경험을 가지고 뒷심을 발휘하여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을 작살냈듯,
전투에 익숙한 일본군에 초반에는 속절없이 밀리게될 조선군도 녹둔도에 쌓인 무구로 충실히 무장하고 일본군과의 접전에서 경험을 쌓는다면 나중에 한번의 대회전에서 일본놈들에게 대패를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생각에 그 대회전의 장소가 될 곳은 바로 진주성이어었다.
신립이 '탄금대' 하지만 않는다면, 조선군이 초반에 역사에서처럼 너무 허무하게 밀리지 않는다면 일본놈들은 결국 조령과 소백산맥이라는 방어선에서 공세종말점을 맞을 것이다.
애초에 방어전에서만큼은 조선군도 꽤나 분전했으니 산맥을 끼고 조총을 빼곤 우세한 화약병기와 고지대라는 특성상 유리한 활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저항한다면 절대로 쉽게 뚫릴 리 없다.
히데요시의 부하놈들이 단일대오를 이뤄서 한몸으로 공격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놈들은 아직 전국시대 물이 덜 빠진 별개의 다이묘들이니 그럴 수 있을 리 없지.
그러면 결국 놈들은 수도를 빠르게 함락시킨다는 전략을 수정하여 적의 핵심 곡창지대를 침으로써 조선의 전력을 약화시킨다는 전략을 들고나올 것이 분명했고, 이는 원 역사에서는 평양성과 한양을 명나라에 뺏기고 함경도에서는 정문부에게 패배한 결과 일본군이 보인 전략과 일치했다.
그래서 그때 놈들은 전력을 모아 전라도를 얻기 위해 그곳의 방어벽인 진주성을 친 것이었고 거기서 김시민에게 패함으로써 나라가가 되었지.
그 이후 또다시 전략을 수정하여 경상도와 전라도를 먹게 해달라고 명나라와 협상하는 할거 전략으로 나왔던 것이나 다행히 명군과 조선군의 분전에 이순신의 캐리가 더해지고 히데요시의 저승으로의 탈주가 결정타가 되어 일본군의 서렌으로 끝났지.
적들을 애초에 바다에서 막을 수는 없다.
준비가 덜 된 것은 그 치트공과 수군도 마찬가지.
바다에서 적들을 막자고 했다가는 전쟁 시작부터 최강의 패인 치트공과 수군을 더 큰 스케일로 '칠천량'할 수 있으니 상륙하려는 놈들에게 큰 피해를 주는 선이 고작일 것이다.
원 역사에서는 그마저도 못했기에 아무 피해없이 17만이라는 일본군이 전부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그리고 원 역사보다 더 빠르게 일어날 진주성에서의 전투, 아니 대전투에서 조선과 자신의 결집된 힘을 보여줄 것이다.
본래는 조선의 멸망과 존속이란 두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김시민의 목숨마저 바치고 처절히 싸워 결국 존속이라는 최악을 간신히 면한 결과를 얻었던 그 분기점에 이번에는 반드시 '영광'과 '승리'를 집어넣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군의 결집된 힘에 보탤 자신의 힘도 키울 필요가 있었다.
"저도 받아주십시오! 목숨을 걸겠습니다!"
"저도 받아주십시오! 충심을 다해 카무이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래서 적의 적은 동지라고 일본놈들에게 핍박받는 아이누를 자신의 세력으로 넣는 것이다.
미국에게 침공을 받아 영토를 털리는 멕시코가 인디언들을 포섭하는 것과 같은 맥락.
하지만 자신은 그저 이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정말로 저들에게 카무이가 되어줄 것이다.
아이누인의 정체성을 지켜줄 것이며, 그들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것이다.
[부대명 : 유카르]
[병력 : 811/811]
벌써 오늘도 각지에서 모여든 수십의 아이누인들이 주명의 부대에 자원입대했다.
아이누어로 영웅 서사시를 뜻하는 유카르라는 이름을 지닌 아이누 민병대의 손에 이 에조치는 아이누인들이 지은 새로운 이름을 얻고 지금 카무이의 깃발 아래 모인 811명의 영웅들이 써 나가는 위업에 의해 스스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아이누 해방전에서 유카르의 역할이 중요하다.
"해병대원들은 유카르 부대원들에게 전투기술을 전수하라!"
"예 주군!"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한 이들만이 스스로의 이름을 걸고 설 수 있으니까.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저 아이누인들을 군대로 조직하여 아이누의 이름으로 일본놈들을 몰아낼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빨리 나미에와 샤를이 있는 분견대가 당도해야 하는데. 샤를이 있어야 녹둔도에서 무장을 가져오지.'
군대를 조직하려는 마음에 보급품이 매우 마려웠던 주명은 점점 능숙해지는 유카르 부대원들을 흡족하게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쪽 바다를 쳐다보며 초조하게 무언가를 기다렸다.
몇일이 지났을 때 드디어 저 멀리서 푸른 점들이 가까워지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그 푸른점들이 있는 곳에 일본식의 낮은 배가 아닌 이질적인 디자인의 배 한척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주명은 환호했다.
"좋았어!"
범선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샤를이 왔으니 빠른 속도로 녹둔도에서 보급품을 받아올 수 있게 된 것.
보급품을 가져올 수 있다면 더 큰 규모의 군대를 만들 수 있다.
급히 유카르 부대원 중 인망이 있어보이는 이들을 100명 정도 불러다 모은 주명은 그들 하나하나의 눈을 마주쳐가며 힘주어 말했다.
"우타리(동포)들에게 이곳으로 전사들을 이끌고 모이라고 알려라."
그리고 그들이 뭐라 대답하기도전에 그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말을 던졌다.
"이 땅은 오로지 나 카무이와 우타리의 것이다. 기생충같이 동포들의 피를 빨아먹고 잡초처럼 대지를 더럽히고 있는 저 왜인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전해라. 카무이가 너희들을 부른다고!"
"우와아아아!"
카무이가 약속된 승리에 자신들을 부른다는 얘기에 환호하는 아이누 사람들을 보며 주명은 다짐했다.
이들을 충실히 무장시켜 일본놈들에게 지옥을 맛보게 해 주겠노라고.
이것은 전초전이다.
카키자키는 물론 일본 동북부의 다이묘 세력들과 싸우는 수만 단위의 전쟁.
침략자이자 정복자인 일본에 대항해 조선과 아이누가 싸우게 될 수십만 단위의 거대한 전쟁을 대비하는 전쟁이다.
반드시 승리하여 아이누를 일으켜 세우고, 마치 아일랜드가 영국을 옥죄듯 일본놈들에게 두고두고 등 뒤의 가시같은 존재로 두렵게 여기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뭐 영국처럼 연방이라는 울타리 안에 아이누 사람들도 묶어 자신의 세력권으로 만들겠지만 영국놈들처럼 혐성짓거리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
"스승님께서는 물을 정말 참 잘 다루시는 것 같습니다."
"같은 영력(靈力)라도 사람마다 다 그 성질이 다른 법이니 그럴 수 있지 않겠느냐."
스승의 설명에도 사실 초희는 납득이 가지는 않았다.
스승인 명월은 특별히 무언가에 치우쳐 그것에 골몰할 분이 절대 아니었다.
무엇에도 거리낌이나 치우침이 없이 마치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마음을 아름답다 여기고 그렇게 살고자 하는 분이 스승 아닌가.
근데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을 훈련시키고 사람들을 돌볼 때 외에는 항상 저렇게 물을 다루는 연습을 하시는 건 대체 왜 그러시는 것인지 연유를 알지 못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수련해 왔던 거란다. 대마도는 특히 수기(水氣)가 강하거든."
그래서 물어봤는데 스승의 대답은 더욱 의혹과 혼란만을 가중시켰다.
대체 이곳에 처음 왔을때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수기(水氣)를 다루는 데에만 전념해야될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해져서.
그리고 애초에 이 대마도에 왜 와 계셔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명확한 이유를 듣지 못했다.
"계시에서 논개라는 기녀가 남강에 몸을 던졌듯, 비록 무당에 불과한 나일지라도 뭔가 하고 싶어서 이곳에 왔던 거란다."
뭐라도 하고 싶은 조급함과 초조함 때문에 명월이 이곳으로 왔다?
항상 계획을 세워두고 행동하시는 스승님의 차분하고 침착한 평소의 모습을 생각하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뭔가 놓치는 것이 있는 것일까? 남강 그리고 수기(水氣). 이 두 단어를 가지고 좀 더 생각을 해 보면..."
알 길이 없는 스승의 의도를 어떻게든 가늠해 보려는 초희의 고민이 점점 깊어지는 그 순간에도 명월의 손끝에서 흘러나간 푸른 기운은 저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에 닿아 그것을 움직이고 있었다.
푸른 하늘 아래, 더없이 푸르고 잔잔했던 바다였건만 명월의 영기가 더해져 바다의 수기(水氣)를 건들자 달라졌다.
마치 폭풍우가 몰려와 성난 바다의 모습처럼 높은 파도가 몰아치는 흉흉한 모습은, 맑고 푸른 하늘을 비추는 바닷물을 찢어 발겨 마치 그 하늘을 찢어발기려는 누군가의 비장한 결의가 담겨있는 듯 인위적이었고 위험해 보였다.
바로 그 순간 문득 초희의 머릿속을 지나가는 한 단어에, 아직은 이뤄지지 않을 숭고한 희생을 했던 그 이름이 떠오르자 초희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논개? 서, 설마. 아닐꺼야. 그건 아닌거죠 스승님?!'
그리고 폭풍이 치듯 넘실거리는 바다를 보며 그녀는 자신이 했던 추측이 정말일거라는 확신을 점점 굳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대마도를 가로지르는 어떤 결계같은 무언가 깨지는 듯한 느낌에 또다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조, 조선이 느껴져?'
일본과 조선 사이에 있던 그 결계가 사라지자 지금껏 느껴지지 않았던, 원래 그녀의 실력이라면 느껴져야 했으나 한번도 느껴지지 않아 자신의 실력부족만 자책하게 만들었던 그 조선의 땅에서 나오는 거대한 원기(元氣)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국가단위의 원기에 전혀 뒤지지 않는, 아니 더 찬란하게 빛을 뿌리는 그분의 기운도 느껴졌다.
그분께서는 지금 저 동방의 먼 곳에서 찬란한 푸른 빛을 뿌리며 마치 나무처럼 뿌리를 박으려 하고 있었고, 저 북쪽에는 그분이 이미 뿌린 푸른 기운들이 발아하여 조그만 숲을 이루고 있는 게 분명히 느껴졌다.
혹시 스승께서 이곳에 있었던 이유가 논개의 그 희생을 되풀이하는 것을 넘어서서, 어쩌면 그분을 가려주는 장막이 되려 하셨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들었다.
스승이 저 강하기 그지없는 그분을 누군가로부터 감추려 했다면 그 누군가는 대체 어느 정도의 존재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아 두려움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분의 아래에 위치한 방향, 동쪽에 위치한 일본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거대한 기운에 압도되어 주저앉았다.
어째서 스승이 이곳에 있어야만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바로 그시각 일본의 모처에 있는 동굴에서는 한 노인이 눈을 뜨고 있었다.
한점의 빛도 없이 캄캄했던 동굴이건만 노인의 눈이 뜨여지자 마치 태양이라도 뜬 것마냥 주변히 그 안광에 훤하게 회색 빛으로 밝혀졌다.
마치 천년 묵은 구렁이의 그것처럼 요사스럽게 빛나는 노인의 눈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신비함과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노인의 눈을 우연히 마주했던 동굴 속 박쥐가 그대로 절명해 버린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절대로 평범한 인간은 아닌 저 노인.
노인의 입에서는 마치 쇠를 긁는 듯한 탁하면서도 찢어지는 이질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결국 경고를 무시하고 역천을 벌이려 하는가 계집."
노인의 분노가 목소리에 실리자 주변의 마치 지진이라도 닥친듯 흔들렸다.
노인은 목소리에 힘을 실어 현실로도 구체화 시키는 권능, 언령의 경지에까지 오른 자였던 것.
노인이 잠들었던 것은 하늘이 안배한 운명이 결국은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는데 그 운명을 비틀려는 저항을 감지하자 참지 못하고 깨어났던 것이다.
비록 이번에 조선으로 향하는 파도는 결국 거기서 물러날 것이지만 그 움직은 결국 야마토 민족의 욱일승천의 기반이 될 것이니 무의미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허나 그 파도를 막으려는 누군가가, 그것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본래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기라는 힘을 사용한 누군가가 느꼈졌던 것.
그 누군가에게는 분명 미리 경고를 해 두었을 터인데.
"기생 출신이라더니 어지간히도 제 말에서조차 지조가 없는 년이군. 이번에는 그 목을 꺾어야 겠어."
필승의 운명을 한낱 계집 따위가 건드리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고작 술이나 따르고 시나 읊어대던 천박한 기녀 따위가.
이름이 황진이랬지?
애초에 자신처럼 하늘의 선택을 받지 말아야할 운명이었건만 뭐가 뒤틀렸는지 영기를 지닌 채로 그 오랜 세월을 살아남았다는 게 애초에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굳이 하찮고 미미한 존재 따위에게 개입하고 싶지 않은 오만함에 자비를 베풀어 그냥 대마도에 숨죽여 살수 있도록 놔두었는데.
서경덕이라는 제 정인을 따라갈 수 있도록 이번에는 기필코 숨통을 끊으리라고 노인은 다짐했다.
노인의 발걸음이 이어질 때마다 대지는 꺼멓게 죽어버렸고 그럴수록 노인의 안광은 더욱 짙어지고 걸음걸이는 더욱 힘차게 생기가 넘쳐졌다.
이참에 그년의 목을 뽑고 영기도 뽑아내야겠다고 노인은 결심했다.
그 걸음걸이는 마치 조선의 원기를 짓밟을 임진년의 일본군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