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해적왕-77화 (77/77)

〈 77화 〉 76화 - 아이누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처음 상륙전을 펼쳤던 곳에서 대략 50Km 정도 북상한 공터에 차려진 아이누 정벌군의 본진은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일주일동안 그 50Km를 북상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나도 끔찍하리만큼 뼈아팠던 것.

산지가 많은 에조치의 특성상 정탐부대뿐만 아니라 본대도 수백 단위로 쪼개서 기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약점을 저 아이누 놈들이 뼈아프게 치고 들어왔다.

이 근방의 지리에 익숙한 카키자키 가문의 병사들이 각각의 쪼개진 부대마다 한둘이 꼭 붙어 있었음에도 놈들의 신출귀몰한 기동을 도저히 파악할 길이 없었다.

놈들의 기동을 파악하지 못하니 매복이나 기습을 당해 전멸하는 부대들이 속출했는데, 수십에서 수백 단위로 쪼개서 움직이는 자신들과는 달리 놈들은 천 단위의 두 부대로 나누어 습격했기에 필연적인 결과였다.

동시에 천발의 장궁 화살이 무자비하게 쏟아지는데 어찌 쪼개진 부대 따위가 당해낼 수 있겠는가.

사실 약점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약점이라고 부를 수 었었던 것은 누구나 이 세상의 군대라면 그렇게 쪼개서 기동을 하기 때문이었다.

아이누 정벌군 역시 그런 점에서 할 말은 있었던 것이 험한 산지에서 병력을 쪼개서 기동하는 것은 병법의 상식중의 상식이었고, 오히려 천 단위의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는 아이누 놈들의 움직임이 이치에 맞지 않았다.

적군이 어디 있을 지 모르는데 마치 그물을 펼치듯 신중하게 병력을 펼쳐 나아가야 하는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런데 놈들은 마치 어디에 적군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모양이었고, 지금까지의 실적을 보면 정말로 그런 것 같았다.

마치 이세상 군대가 아닌 것 같았다.

저 험한 산지에서 아군의 움직임을 마치 손안에 두고 모조리 파악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에 아이누 정벌군의 수뇌부는 섬뜩함마저 느껴야 했다.

설령 간자들이 곳곳에 박혀 있다고 해도 이정도로 세밀하고 치명적인 기동을 보여줄 수 있을 리가 없었으며, 아이누 따위가 간자를 박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주명이 유격전이라고 명명한 그 치명적인 기동&기습의 결과는 놀라웠다.

아니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절망적이었다.

좌군으로 출발했던 쓰가루 가문의 일천 오백 병력은 거의 대부분의 병력이 전사하고 좌군의 장이었던 쓰가루 다메노부의 차남은 전사.

우군으로 출발했던 안도 가문의 사천 병력은 일천이 전사하고 사기가 무너져 도저히 일군을 유지할 수 없어 중군에 합류중.

중군 역시 육천 오백의 병사 중 무려 칠백을 잃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고생을 했는지 모든 이의 복장에는 미처 털지 못한 흙먼지와 빨아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는 핏자국이 배어 있었으며 회의실은 이들에게서 나는 절고 절어 썩어가는 땀냄새가 자욱해 도저히 숨울 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물론 후각이 워낙 민감한 감각이기에 이미 코가 마비되어 버린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맡아지진 않겠지만.

썩은 냄새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전황이 좋지 못해 이들의 마음속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에 출정할 때 모인 군대는 무려 일만 육천이었으나 초전에 사천을 잃고 또 놈들의 신출귀몰한 움직임에 또다시 육천 가까이 잃었으니 남은 것은 고작 팔천 팔백정도였다.

벌써 절반의 병력을 잃은 것이다.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차남을 잃고 그 슬픔에 무척이나 어두운 얼굴을 하고있던 쓰가루 다메노부가 말하자 이목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싸우던가, 아니면 물러나던가 결정해야 합니다."

"물러 나다니요! 야마토 민족이 아이누 따위에게 뒤를 보일 수는 없소이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두가지 선택지중 한쪽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받아들일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에조치와 혼슈(일본 본토)에서 사냥꾼으로 저 아이누라는 짐승들을 쫒아내고 학살해 왔던 포식자로서의 자부심에 아이누 따위에게 패하고 퇴각한다는 것은 결단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니까.

"그럼 싸워야 하는데, 저들이 우리랑 싸워 주겠소이까? 지금까지 해왔던 짓거리를 보면 놈들이 원할 때 일방적으로 기습하고 우리는 싸움도 하지 못하고 화살비에 죽어 나가야 했소이다. 이런 식이라면 싸움이 이뤄질 리 없지요. 하지만..."

슬픔에 잠겨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살기를 머금고 빛나는 다메노부의 말에는 그가 한 지역의 다이묘라는 사실에서 오는 것 외에도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거기서 더 반박하거나 말을 붙이지 않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놈들이 싸움을 피할 수 없는 곳을 찌른다면 이번에야 말로 싸울 수 있을 것이외다."

다메노부는 손가락으로 회의장에 펼쳐져 있는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아이누 놈들이 이곳에 많이 모여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소. 아마 지금 날뛰고 있는 놈들의 가족들도 저곳에 있을 터. 이곳을 향해 진군한다면 반드시 우리와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오!"

그곳은 바로 후일 삿포로라 불리게될, 지금은 주명이 수만의 아이누 사람들을 모아놓은 집결지였다.

서로 마주보는 싸움을 회피하고 일방적인 싸움만을 강요하는 유격전에 시달린 왜인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바로 그곳을 찌르는 것이었다.

수많은 전쟁을 거치며 동북지방의 강자 중 하나로 군림하고 있는 쓰가루 다메노부의 말에 총대장이었던 난부 하루쓰구는 물론 다른 지휘관급 인물들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병력은 자신들이 몹시 우세하니, 더군다나 놈들의 근접전 병력은 너무나도 보잘 것 없으니 지금까지의 패전은 잃고 단 한번의 결전에서 이기면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아이누 놈들이 무척 많이 모여있다고 하니 전리품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짐승들이 재물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놈들의 몸뚱아리야 말로 노예라는 가장 가치있는 재물이 아니던가.

"몇일 뒤면 아이누 여인들을 품을 수 있겠소이다 하하하!"

거기에 그 재물중 몇을 취할 생각에 벌써부터 아랫도리가 불끈해 오는지 개중 몇명은 이미 이기기라도 한 것마냥 전리품을 얻을 기쁨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사실 그들의 생각도 틀리지 않은 것이 병력차이는 아직도 네배라는 끔찍한 차이였으니까.

일단 근접전에 붙기만 하면 자신들이 확실하게 압도할 수 있으니까.

"놈들 중 유독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는 그 쓰네히라라는 놈을 치울 방도를 내 세웠소이다."

아직도 너무 커 보이는 승리의 가능성에 더 쐐기를 박을 만한 계책을 카키자키 요시히로가 들고왔다.

"그놈 때문에 내 차남이 죽었소. 어서 말해보시오!"

특히나 쓰네히라에게 차남을 잃은 다메노부는 무척이나 요시히로의 방도라는 것을 반겼고 어서 말해보라 재촉했다.

"놈의 어미를 내가 데리고 왔소이다. 더 날뛰거나 우리 진영으로 기어들어오지 않는다면 어미를 죽여버리겠다는 것도 놈들에게 전달이 되었을 것이오."

"오오! 그런 좋은 방법이!"

특히 쓰네히라에게 가족을 잃었던 다메노부는 놈의 가족을 이용해 놈을 끌어들여 처리한다는 이 계책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헌데 놈이 오겠소이까? 아무리 짐승이라지만 공명심에 눈이 멀어 가족을 버릴 수 있는 거 아니오?"

물론 의문을 제기하는 이도 있었다.

난부 하루쓰구는 평소에도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족도 서슴지 않고 내버릴 각오가 서 있는 냉철한 정치인에 가까운 인물이었기에 자신의 심성이 비추어 봤을 때 놈도 그럴 수 있을 거란 의문을 제기했던 것.

"자신의 어미로부터 동족을 살해해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날뛰며 제 주군이었던 이몸을 향해 칼을 든 놈이오. 동족에게도 그럴진데 가족에게는 오죽할까."

하지만 카키자키 요시히로는 놈이 반드시 올 것이라 확신했다.

더군다나 놈은 자신이 퍼트린 모친의 죽음을 듣고는 몇날 몇일을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분명 모친의 생존을 듣고 가만히 있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이미 이긴 것이나 다름없소. 쓰네히라라는 놈만 아니면 근접전에서 우릴 막을 놈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놈을 치운다면, 그리고 북쪽으로 진군하여 놈들에게 결전을 강요한다면 확실히 이길 수 있을 것이오!"

하루쓰구마저 동의하자 작전을 논의하는 회의는 일사천리로 결론을 내었다.

잘게 나뉘어 기동하던 아이누 정벌군들은 이제 지형이고 뭐고 상관없이 한곳에 모여 한몸처럼 움직였다.

무척이나 느렸지만 천천히, 그리고 안정적으로 북쪽을 향해 진군하는 그들은 마치 그곳에 모여있는 수만의 아이누 사람들을 향해 쏘아지는 죽음의 탄환같이 묵직하게 나아갔다.

***

"주군..."

쓰네히라는 도저히 주명의 얼굴을 볼 수 없어 그저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를 찾아와 내뱉어야할 다음 말이 그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라는 것을 본인도 알았기에 그런 것.

아이누의 검으로 우뚝 서서 주군의 구상에 기여해야 한다는 책임을 두고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떠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야 했기에.

"얘기는 들었다. 어머니께서 살아 계시고 저놈들에게 잡혀 계신다지?"

"그렇습니다. 해서 저는.."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다. 아들이 되어 가지고 당연히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가야지."

"주군..."

자신이 차마 내뱉기 어려워 입을 떼기가 머뭇거렸던 그 말을 대신하며 순순히 허락해 주는 주군이자 고용주의 모습에 쓰네히라는 울컥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정을, 가족마저도 저버리고 헌신해라라고 주입받아온 자신을 비롯한 일본인들의 삶.

다른 일본의 다이묘였다면, 가까운 예로 일전의 주군이었던 카키자키 요시히로였다면 절대로 어머니를 구한다고 군영을 이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군영을 사사로운 이유로 이탈하는 것이 일본 사회에서는 무척이나 큰 죄악으로 치부되는 관계로 어느 누구도 다이묘를 옹호했으면 했지 쓰네히라를 두둔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치닌마에(一人分, 일인분)

설령 가족을 잃게 되더라도 한 사람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일본의 가치이자 핵심 윤리였으니 자신의 주어진 역할을 버리고 떠나간다는 것은 크나큰 죄악이었다.

그런 가치관을 지녀 자신이 얼마나 큰 대죄를 짓는 것임을 잘 알고있는 반-일본인 쓰네히라로서는 순순히 허락해주는 주명의 모습에 감명을 넘어 감격했다.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절을 올리려고 하던 쓰네히라는 주군의 말에 멈짓했다.

"단!"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주명의 얼굴은 크나큰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런 치졸한 짓거리를 하는 새끼들을 가만 둘 수는 없지. 또 내 부하를 사지로 홀러 던져 넣을 수는 없다. 그러니.."

주명은 쓰네히라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나도 같이 간다."

"주, 주군! 그것은 위험합니다!"

그 말을 들은 쓰네히라는 크게 놀라져 손까지 휘저어 가면서 불가하다 말해보았지만 주명은 이미 생각이 굳어져 있었다.

"너 혼자가는 게 더 위험해 임마. 웬만하면 내가 안 나서고 병력 대 병력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개짓거리를 해대니 참을 수가 없네."

전투에서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고 적의 가족을 인질로 잡는 게 사람새끼가 할 짓인가?

더군다나 쓰네히라가 지금까지 세웠던 혁혁한 전과를 생각하면 어머니를 살린다고 그놈들에게 갔을 때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를 떠올리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것.

"어차피 유격전으로도 목표한 것 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한 성과를 거두었으니 이제 결전을 벌여도 된다."

더군다나 바로 뒤에 아이누 사람들이 운집해 있으니 그들 앞에서 멋지게 승리를 해 보인다면 앞으로 주명의 구상이었던 아이누 통합이 더욱 가속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본래는 유격전으로 적들을 더 괴롭힐 생각도 있었지만 놈들이 삿포로를 향해 우직하게 다가가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한 지금 더이상 지금처럼 큰 재미를 보기도 힘들었다.

"다카모리를 불러라. 제3단계를 시행할 때가 왔다."

적의 상륙을 방해하며 초반에 큰 피해를 준다는 데미지 누킹의 1라운드.

그리고 유격전을 통해 점진적으로 피해를 누적 시키는 데미지 딜링의 2라운드.

마지막으로 대망의 3라운드는 바로 적을 몰살시킨다는 막타를 의미했다.

다카모리를 불러 이천의 유카르 부대와 110명의 해병대원들에게 전선에서 뒤로 물러나 계획된 장소로 집결시켜 두고 일전에 말해두었던 모종의 작업을 하고 있으라는 명령을 내린 주명은 어찌할 줄을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 쓰네히라를 데리고 적진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주군. 제발 재고해 주십시오!"

"다카모리 님의 말이 맞습니다. 저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지만 주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모드 끝장입니다!"

물론 다카모리와 쓰네히라의 격한 반발이 있었지만 그걸 억지로 누르고 적진을 향해 가던 길을 재촉했다.

왜냐하면 사지로 걸어가는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주명에게 이번 일은 그저 쓰네히라라는 미니언을 데리고 그의 어머니라는 NPC를 구하러 가는 퀘스트 정도 수준의 난이도에도 미치지 못했으니까.

풀 강화된 아이템을 들고있는 쓰네히라의 HP가 닳을 리도 없었거니와, 자신의 생각대로라면 쓰네히라의 어머니에게는 털끝만한 위협도 가해지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조부'가 함께하는 이상 그 어떤 위협도 헤쳐나갈 자신이 있었다.

***

대열을 갖추어 행군하고 있는 팔천의 병력 가운데에 휘날리는 큰 깃발아래 총대장인 하루쓰구가 말을 타고 움직이고 있었다.

앞으로 전쟁의 향방이 어찌될지에 대해 고민하고 이미 큰 피해를 입은 부분을 어찌 수습해야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그의 표정은 더없이 심각했다.

하지만 수습을 걱정한다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이끌고 가는 군대가 패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상륙전과 유격전에서 당한 병졸이 절반에 가깝지만 일단 놈들과 제대로 붙기만 한다면 끝장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으므로 승리야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으니까.

그의 생각대로 지긋지긋한 산악지대도 점점 낮아지고 해안에 다가와 가는지 저 멀리서 바다의 내음이 섞인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고 지대도 얕은 구릉으로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그 지긋지긋했던 유격전의 악몽을 떠올리며 몸을 한번 부르르 떤 하루쓰구였지만 점점 낮아지는 지대와 헐거워지는 숲의 무성함을 보며 승리의 가능성이 더욱 확실해진다고 자부했다.

평지에서 다수의 병력으로 자신들의 장기인 근접전을 벌이면 절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루쓰구님! 노, 놈이 찾아왔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리 호돌갑을 떠시오 카키자키공? 고작 무사 하나가 온 것을 가지고 그러는 것이라면.."

"그게 아닙니다! 놈들의 수괴인 그 슈아키라가 직접 찾아왔습니다!"

슈아키라는 주명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은 것으로, 요시히로의 말처럼 주명이 쓰네히라를 데리고 마침내 적진에 당도한 것이었다.

병사들에게 이끌려 자신 앞에 당도한 아이누의 수괴를 보며 하루쓰구는 경멸과 분노를 담아 그를 말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을 던졌다.

"네가 슈아키라라는 놈인가?"

그 무례한 모습에 쓰네히라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검에 손을 가져다 대려 했으나 주명이 손을 내저어 만류했다.

굳이 저놈의 무례함에 열이 받지 않은 이유는 주명 역시 놈에게 곱게 말을 해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

"그럼 네놈이 대장 원숭이겠네?"

"원숭이?"

원숭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갸우뚱 하는 하루쓰구를 향해 주명은 부연설명을 해 주었다.

"굳이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서 화살맞고 뒈진 원숭이새끼들이 팔천마리는 되어서 말이지."

"이런 무례한 놈을 봤나!"

그 의미를 알게되자 하루쓰구는 화가 치밀었는지 얼굴이 시뻘개졌고 주변의 다른 인물들도 하나같이 노하여 칼을 빼들었다.

그런 그들을 지지않고 노려보며 주명은 손으로 하루쓰구를 가리키며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누를 일컬어 짐승이라고 부르며 사람 대접을 해주지 않은 게 네놈들 아닌가? 그리고 무례하다고 말했나.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며 평화롭게 살고있는 아이누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빼앗아 가는 도적떼들이 무례를 운운하는게 우습구나!"

"여봐라 저놈의 목을 베어라!"

더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주명을 죽이라고 명을 내리는 하루츠구의 말에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칼을 들고 다가왔다.

그 모습에 저절로 검을 꺼내 자세를 취하면서도 쓰네히라는 대체 어쩌자고 적진 한복판에서 적장을 도발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어머니에 대한 걱정에 속이 타들어가고 있었던 그는 주군이 일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 같아 서운한 마음마저 들 정도.

그렇지만 무턱대로 일을 저지르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주군을 믿어보려 했지만 그 속을 짐작할 길이 없어 답답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계신건지..아니?!'

쓰네히라도,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다른이들도 눈이 휘둥그레지게 만들 일이 주명에 의해 벌어졌다.

주명의 주변 허공에서 마치 공간이 갈라지듯 열리더니 새하얀 가루들이 흩날리기 시작했던 것.

"콜록!"

마치 공기를 대신하기라도 할 기세로 폭풍처럼 쏟아지는 하얀 가루에 어떤 이는 코로 들어가 숨이 막힐 것 같았는지 콜록거리기도 했다.

"어?! 이것은!"

하지만 주변을 가득 메우는 하얀 가루가 코로만 들어갈 리는 없으니 대부분의 경우 입술에 들러붙거나 놀란 나머지 벌리고 있던 입으로 들어가 버렸고 그들의 입속에 일단 들어간 하얀 가루는 그들의 미각을 폭발적으로 자극했다.

"설탕이야 설탕!"

허공에 흩날리는 가루를 조금이라도 더 핥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이 단맛을 지속시키기 위해 마치 걸신에 들린 듯이 아이누 정벌군들은 혀를 낼름거렸고 병장기는 이미 바닥에 던져버린지 오래였다.

"이게 무슨 짓인가! 대열을 정비...크음. 음..."

심지어 군기가 무너지는 상황을 단속해야 하는 지휘관들마저 단맛의 폭발적인 감각에 매혹되어 제대로된 지휘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쓰네히라는 왜 주군이 자신에게 코를 가릴 수 있는 가리개를 준비할 것을 지시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주군이 왜 그렇게 적들 사이에서도 당당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창고를 지닌 주군의 신비한 능력으로 적군의 군기를 박살내 군대가 아니게 만들어 버린다면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 뭐가 무섭단 말인가.

무사이고 병졸이고 다를 바없이 주변에서 연신 혀를 낼름거리고 있는 저들의 모습을 보며 도저히 군대라는 생각을 가질 수 없었다.

"쓰네히라, 따라와라."

피아식별 스킬로 하얀 점, 그러니까 쓰네히라의 모친이 붙들려 있는 곳의 위치를 진작 파악하고 있었던 주명은 쓰네히라를 이끌고 설탕에 흠뻑 빠져있는 한때 군대였던 군중들 사이를 유유히 빠져 나왔다.

"저, 저기 놈이 도망간다! 어서 잡아라!"

물론 그 상황을 눈치채고 대처를 하려는 이도 있었지만 무질서하게 이리뛰고 저리뛰며 설탕을 핥아대는 무리들이 날뛰는 통에 지시를 받을 이도, 지시를 받더라도 놈을 쫒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설탕 폭탄이 투하된 공터의 끝자락에 도착한 주명은 밧줄에 꽁꽁 포박되어 있는 한 노파를 보자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어머니..크흑."

그 노파가 겪어야 했던 눈과 혀가 뽑히는 끔찍한 경험을 떠올리자 쓰네히라는 복받치는 슬픔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다행히 이미 혀가 뽑혀 입맛을 느낄 수 없는 노파를 제외하고는 주변의 병졸들은 설탕을 핥기 위해 짐승처럼 뛰어다니고 있었고 그녀를 구하는 것은 수월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쓰네히라를 대신해 그녀를 업은 주명은 쓰네히라에게 따라오라고 말한 뒤 전속력으로 북쪽을 향해, 부하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해 뛰어갔다.

그들이 떠나가고 삼십분 뒤.

본보기로 목이 잘린 이십여명의 병졸들의 목이 공터에 피를 머금은 채로 굴러다니고 있었고 피묻은 칼을 든 하루쓰구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팔천의 병졸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본인은 너희들에게 실망이다. 어찌 일본국의 당당한 군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 고작 설탕이 주는 단맛 따위에 미친 들개들 처럼 질서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죄송합니다!"

그 기세가 서릿발같이 지엄하여 같은 영주급인 다메노부와 요시히로 같은 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무사와 병사들이 고개를 땅에 박으며 사죄하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티나지 않게 입가에 아직 묻어있는 하얀 가루를 핥는 이들이 있었던 것 보면 단맛 따위라고 폄하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또한 설탕 따위라고 했는데, 주명이 이곳에서 푼 설탕의 양이 톤 단위를 넘어서는 무지막지한 양이었고 그 하얀 가루가 같은 무게의 금과 같은 가치를 지닌 엄청난 물건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그런 현실을 반영한 것인지 눈에 띄지 않게 땅바닥에 아직 남아있는 하얀 가루를 주머니에 쓸어담는 이들이 너무 많아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였다.

군인이기 이전에, 일본국의 신민이기 이전에 이들은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백성이었고, 이시대 먹는 것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설탕의 미각이 주는 폭력 앞에서는 너무나도 나약한 소시민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루쓰구님. 어쨌든 병사들이 고된 행군으로 인해 피로가 쌓이고 있었는데 놈이 귀한 설탕을 뿌린 덕분에 원기를 회복했으니 나쁠 것은 없습니다."

요시히로가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포장해 보려 말을 진언해 보았지만 말을 하는 그 자신도, 듣는 하루쓰구도,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설탕을 뿌렸다'는 대목에 있어서만큼은 섬뜩함을 느끼는 것에 예외가 없었다.

'우리는 대체 어떤 존재와 맞서고 있는 것인가...'

값비싼 설탕을 무진장 뿌리는 재력보다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순식간에 그 무진장 많은 양을 꺼내는 신묘한 광경을 목도했기 때문에 주명이라는 존재가 두려웠던 것.

'정말, 정말로 오니란 말인가?!'

처음 상륙하기 전에 비웃었던 놈들의 오니(鬼)깃발.

그게 진짜가 아닐까 하는 섬뜩한 상상에, 열변을 토하며 사기를 고취시키려는 요시히로도, 그리고 입가에 묻은 설탕을 핥는 병졸들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지나쳐온 길에 버려진 동료들의 시신.

그 시신들을 뜯어먹기 위해 몰려와 까악거리는 까마귀들의 울음소리가 저 뒤에서 들려오자 안그래도 초현실적인 존재를 마주한 것 같아 불안감에 떨던 차라 마치 죽음이 자신을 쫒아오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설탕을 주머니에 잔뜩 쟁여두며 후일을 기약하는 병졸들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이거 가지고 돌아갈 수 있을까?'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

지금은 삿포로라고 불리는 곳.

하지만 지금은 갑자기 만들어진 움막들이 얼기설기 지어져 있었기 때문에 현대와 같은 도시 느낌을 주지는 못했지만, 그 움막들이 엄청난 숫자로 지천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도시의 요소 중 하나인 많은 인구는 갖춘 곳이었다.

임시로 '카무이의 땅'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이곳의 책임자는 주명이 따로 직함을 주지는 않았지만 나미에였다.

실질적인 무력이라고 할 수 있는 30명의 해병대와 100명의 유카르를 지휘하는게 그녀라는 점도 있었지만, 나미에가 지닌 무사로서의 강맹한 기세와 월아(月兒)를 지니며 가지게 된 신비로운 분위기 덕분이기도 했다.

낮에도 감춰지지 않는 월아(月兒)의 은은하고 신성한 빛은 밤이 되면은 마치 스스로의 존재를 만방에 과시하듯 환한 달처럼 사방을 비추었고 아이누 사람들은 그녀를 또다른 카무이로 숭배할 정도였다.

주명이 카무이 중의 으뜸이라는 칸다코로카무이, 즉 하늘의 신으로 숭배되었다면 나미에는 달과 가정을 상징하는 아에오이네카무이로 여겨졌던 것.

직접 자신들의 주변에서 머물며 달처럼 은은하게 보듬어주고 있는 그녀를 아이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치 주명이 하늘의 제우스로 여겨진다면 나미에는 가정의 헤라로 여겨지는 것과 같았다.

그 덕분에 수만명을 상대로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나미에의 막중한 임무가 너무도 손쉬워졌다.

안그래도 가진 것에 만족하고 순박한 아이누 사람들이라 갈등의 여지도 거의 없었는데다 무려 여신이 현실에 떡하고 존재하는데 그녀 앞에서 누가 말썽을 피우려 할까.

"나미에님, 이것좀 드셔 보세요."

지금처럼 매일같이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어 바치는 등 지극정성으로 그녀를 섬겼고 그녀의 의도치 않은 존재감 덕분에 '카무이의 땅'의 질서는 놀라우리만큼 확고하게 자리잡아갔다.

아이누 여인들이 만들어온 음식을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며 남미에는 저 남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싸우고 있을 그남자를 떠올렸다.

세상 제일 쓸데없는게 그녀석 걱정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수만명의 적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을 알기에 그래도 걱정이 되었고, 그걸 다 떠나서 주명에 대한 마음이 깊은 그녀는 그남자가 조금이라도 위험에 처한다는 것 자체가 신경이 안 쓰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함께 따라가려고 한 것인데...녀석은 자신을 위하고 생각하는 마음에 거절을 했었고 그래서 자신이 여기 있는 것이다.

"카무이께서 상륙하려는 적들을  크게 물리치셨다!"

"전사들이 산지에서 적들을 사냥한다더라!"

연이어 들려오는 승전보에 '카무이의 땅'의 사람들은 축제 분위기였고 다들 기쁜 마음에 밤잠을 잊어가며 전사들이 쓸 화살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승전보에 안심이 되는 것은 나미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렇게 무사하다는 것을 소식으로 듣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차지 않았다.

직접 그남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으니까.

"카무이님..."

"왜 그러니 하시우크?"

앳된 얼굴의 소녀가 자신의 손을 잡으며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보이자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무슨 일인지 물어 보았다.

그 소녀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자 왠지모를 동질감이 들었다.

그녀의 아버지도 그남자와 함께 저 아이누 정벌군과 싸우고 있을 것이며, 그녀 역시 자신처럼 아버지를 보고싶을 것이니까.

"저도 저 장궁을 써 보면 안돼요?"

하시우크라 불리는 소녀는 나미에의 어깨에 매여 있는 거대한 활을 조심스럽게 가리키며 말했다.

"하시우크, 넌 아직 어려서 장궁을 쓰기에는 힘이 부족할 것 같아. 하지만 조금 더 크면 이 언니가 장담하는데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을 거야."

실망한 듯한 표정의 소녀를 달래주며 나미에는 속으로 그건 정말 빈말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저 어린 소녀가 장난감처럼 생긴 작을 활을 가지고 날아가는 새를 맞추는 것을 그녀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

'이곳 사람들이 사냥의 여신을 하시우크카무이라고 부른다고 했지 아마?'

왠지 그녀가 성장하여 자신과 주명의 제대로된 지도를 받게 된다면 충분히 카무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성장하리라 확신했다.

이 재능있는 아이들을 위해서도 부디 그남자가 멋지게 승리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 그녀는 다시한번 고개를 돌려 남쪽을 바라보았다.

남쪽의 하늘은 티없이 맑고 푸르렀지만 그 푸르름이 지닌 적막하기까지한 깔끔함이 마치 아직 정해지지 않은 승패인 것 같아 괜히 불안한 그녀였다.

저 깨긋한 하늘아래 벌어질 피의 향연에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마음 속으로 기원했다.

부디 그 남자가 승리하게 해 달라고.

"근데 주명은 왜 화산재와 석회를 최대한 많이 구해달라고 했을까? 또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남쪽으로 보내달라고 했을까?"

바로 몇일 전 전령에 의해 당도한 주명의 부탁을 떠올리며 나미에는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루마에(樽前) 화산이 존재하는 이 에조치(훗카이도)에서 화산재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석회는 조금 찾기 어려웠지만 다행히 근방에 위치한 호수 바닥에 있던 석회를 건져올려 충당할 수 있었다.

"일전에 보니 바닷물도 챙기는 것 같던데 대체 의도가 뭘까?"

남쪽의 낮은 구릉지대, 도무지 적들을 방어할 방벽이 없어 보이는 그곳을 보며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미에였다.

***

"씨발! 제대로 섞으라니까, 굳기 전에 어서 빨리 모양을 잡아야 한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삽질을 하고 있는 부하들과 유카르 대원들, 그리고 얼마전 당도한 아이누 사람들을 어설픈 조선어 욕설을 섞어가며 닥달하고 있는 이는 다카모리였다.

그의 주변에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석회와 화산재, 그리고 거대한 구덩이를 가득 메운 짠내나는 바닷물이 마치 염수호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단 몇일만에 만들어 낼 수 있는 방벽이 건설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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