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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굴러들어옴-2화 (2/200)

2화: 동생이 굴러들어옴(2)

약간 상처 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간다.

"아하! 안 되는구나. 혹시 이유가 뭘까?"

"움... 윤스리랑 가치 이쓰면... 힘드러."

"힘들어? 누가?"

윤슬이는 나를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할머니가 쯔즛하며 혀를 찬다.

"으휴, 미안하다. 애기 데리고 희영이네 집에 몇 번 들렸었거든. 걔가 괜한 소리해서 또 이러네."

할머니 친구분을 말씀하시는 거다.

아마 할머니께서 도맡아 키우는 걸 보고, 고생하시는 게 안쓰러웠나보다.

윤슬이한테 괜히 엄한 소리하신 모양이다.

한참 어르신인 데다가 할머니 친구이니 걱정 섞인 말씀을 건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윤슬아, 그럼 윤슬이는 나랑 같이 여기 있는 게 부담이 되거나 싫어요?"

"으응..."

윤슬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면 내가 힘들까봐 걱정인 거야?"

이번엔 끄덕끄덕.

"윤슬이 혹시 싫지만 않으면 나한테 잠깐 손 줘볼까?"

앙증맞은 손을 내밀어준다.

내 손바닥보다 더 작은 손.

이 나이대 애기치곤 말을 잘듣는다.

고깃집에서 별의 별 아이들을 다 봐서 대여섯살 짜리 애들의 살벌한 행태는 잘 알고 있다.

이토록 순한 아이는 드물다. 평범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다면 많이 사랑받았겠다.

할머니께서 잘 길러주셨기 때문에 착한 아이가 된 것 같다.

똘망한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윤슬이도 피하지 않고, 들여다봐준다.

인생이 순탄치 않았을 텐데, 갖은 상황에 위축될 만도 한데, 시선이 올곧다.

심성이 강한 아이인 게 느껴진다.

"윤슬아, 나는 있잖아. 너랑 이 집에서 사는 게 하나도 안 힘들고 많이 고마울 거 같애."

"고마어..?"

"응, 많이 고마워. 왜냐면 나는 이 집에서 7년 동안 혼자서 살았거든. 같이 사는 가족도 없이. 쭈욱 혼자서."

그 말을 듣고 윤슬이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워낙에 크고 올망하던 눈이 더욱 커진다.

"우아, 윤스리는 다섯 살바께 안 댔는데..."

"그치? 엄청 오래 혼자 살았지?"

윤슬이가 끄덕끄덕.

한창 비언어적 표현을 많이 사용할 나이다.

"그래서 나는 윤슬이가 같이 여기서 있어주면 더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혹시 윤슬이가 싫지만 않으면 같이 있어볼까요?"

그제야 고민하는 듯 한참을 우웅- 소리를 내며 눈썹을 찌푸렸다 폈다 한다.

금방 시선은 할머니 쪽으로 향한다.

아아, 할머니가 신경 쓰이는 건가?

자기 딴에도 할머니께 고마움을 느끼는 게 아닐까.

부모라는 작자들 대신 자신을 길러준 할머니다.

떨어질래도 정이 붙어서 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런 얘기가 오고 가는데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의젓한 게 대단하다.

대여섯밖에 안 되는 나이일 텐데.

"할머니는 윤슬이가 이 집에 있으면 자주 놀러올 건데?"

인생 경력 70년인 외할머니께선 눈치로 남에 밀리지 않으신다. 치고 들어오는 솜씨에서 인생 짬이 느껴진다.

"그럼 여기 이쓰면 함모니 자주 봐여?"

"자주 와야지. 윤슬이랑 오빠 보러."

"으음, 옵바...?"

윤슬이는 이번엔 나를 꿈뻑꿈뻑 쳐다보며 한 번 더 "옵바."라고 입에 담는다.

앞으로 내 인식명인가보다.

슬슬 마음이 이쪽으로 넘어오는 것 같다.

할머니와 내 사이에서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중이다.

이럴 땐 결정타를 날려줄 때다.

"윤슬이 잠깐만 내가 비밀 하나만 알려줄 테니까 귀 좀 빌려주세요."

이번에도 순순히 귀를 내 얼굴 쪽으로 갖다댄다.

작게 속삭인다.

'윤슬이 우리 집에 있으면 초콜릿 먹을 수 있는데? 나도 초콜릿 엄청 좋아하거든.'

말을 맺고 윤슬이의 얼굴을 보자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역시 이번에도 그러셨군.

외할머니는 이 썩을까봐, 단 거 잘 못 먹게 하신다.

근데 우리 집 내력 상 단 걸 좋아한다. 그래서 한참 어렸을 때는 외할머니께 불만이 있기도 했다.

윤슬이도 그런 부분은 비슷한가보다.

윤슬이는 이번엔 휘휘 위아래로 저으며 내게 손짓했다. 내 귀를 빌려달라는 것 같다.

그렇게 했고, 윤슬이의 여린 봄바람 같은 목소리가 귀에 새어들었다.

'옵바, 나두 쵸코 조아해요! 우리 똑가태.'

쿡쿡거리며 입을 손으로 가리고 웃는 윤슬이.

보통 이 나이대 애들은 비밀이라던가 닮은 점으로 어필하면 십중팔구 넘어오더라.

고깃집에서 애들 있는 테이블을 자주 가게 돼서 은근슬쩍 알게 된 접객 스킬이었는데, 여기서 쓰게 되리라곤 생각 못했다.

윤슬이는 이내 내 쪽으로 도도도- 하고 걸어와 풀썩 주저앉았다. 아까까진 할머니한테 척 달라붙어있더니 영판 다른 태도다.

강아지 같았고 난 무심코 머리를 쓰다듬었다.

푹신거리는 게 솜사탕 같기도, 캐시미어 니트 같기도 했다.

요 앙증맞은 놈이 내 동생이구나.

새로 가족이 굴러들어왔다.

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 점잖게 미소 지으셨다.

간만에 보는 아름다운 웃음이라고 생각했다.

**

결국 할머니는 댁으로 돌아가셨다.

오늘은 자고 가라고 말씀드렸는데

'이따구로 좁은 데서 어떻게 셋이나 자겠니?'

라며 정론으로 맞서셨다. 명치가 따가웠다.

실제로 내가 지내고 있는 이 원룸은 7평이니, 앞으로 윤슬이와 지낸다고 하더라도 그리 넉넉한 공간은 아니다.

'그래도 자고 가세요. 어떻게든 공간 만들면 되죠. 제가 바닥에서 잘 테니까.'

'됐네 이 사람아. 이미 버스 표까지 끊고 내려온 거니까, 신경 끄고 윤슬이나 잘 돌봐줘.'

버스 표를 이미 끊으셨단 말에서 의지를 느꼈다. 더는 잡을 수 없었다.

워낙 어르신인지라 이런 부분에서 고집 부리시면 나로선 말릴 재간이 없다.

그래서 또 시간 될 때 들리시라고 말씀드렸더니 별안간 윤슬이 보러 오시겠단다.

정이 많으신 분이다.

"윤슬이, 이제 슬슬 씻고 잘까?"

시계는 어느새 10시 반을 가리켰다.

다섯 살 난 아이라면 깜빡 졸아도 이상할 것 없는 시간이다.

그런데 윤슬이는 아직도 눈이 밝았다.

새로운 공간이라 아직 익숙해지려면 정찰이 조금 필요한 모양이다.

아까부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원룸의 구조를 살피고 있다. 그래봤자 7평이지만 아이에게는 제법 넓어보이지 않을까?

"윤슬이 안 잘 거예요?"

"으응, 자야 대여."

"같이 어푸어푸 세수할까요?"

"으응..."

뭔가 탐탁지 않은 듯하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는데, 오늘부로 우리 집에 들어온 또 하나의 시계가 그 이유를 알렸다.

꼬르륵-!

"앗..."

배꼽시계.

소리가 나자 윤슬이는 자기 배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윤슬이 저녁 안 먹었어요?"

"안 머거써..."

저런, 실수다.

우선 애 밥부터 챙겼어야 됐나.

왜 할머니는 애를 이 시간까지 안 먹이셨을까?

아니지.

내 책임이다.

애초에 난 집에 음식을 많이 쟁여두질 않는다.

할머니도 이 집에 자주 들리진 않으니 무얼 챙겨먹여야할지 모르셨을 거다.

또, 허리도 안 좋으시니 들락날락하기 벅차셨겠지.

설마 방금 돌아다니던 것도 본능적으로 먹을 거 찾아서 돌아다니던 건가?

그런 생각에 이르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다른 건 몰라도 애 굶기는 건 안 되지.

윤슬이 앞에 쪼그려 앉아 사과하듯 양 손을 모은다.

"미안, 윤슬아. 배고픈 거 몰랐어. 지금 당장 밥 차려줄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그러자 내 머리를 쓰담아준다. 할머니가 자주 하시던 행동이다.

"기다릴 쑤 이써여."

의젓한 대답을 듣고 난 빠르게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방이래봤자 싱크대에 가스버너 하나가 딸랑이지만.

요까짓 자취방에 무얼 바라겠는가.

싱크대 위쪽의 찬장을 열어본다.

라면이랑 스팸 그리고 인스턴트 사골육수 정도밖에 없다.

저 사골육수는 지난 설에 떡국이라도 혼자 만들어 기분이라도 내야겠다 싶어 사둔 것인데, 두 봉지 남았다.

여지껏 나 혼자 살았으니 특별히 음식을 구비해두진 않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제대로 된 거라도 사둘 걸.

하지만 이 7년차 자취 용사에게 가장 자신 있는 요리가 무엇이냐 물으면 단연코 라면이라 대답하리.

사실 다섯 살 아이한테 먹이고 칭찬 받을 만한 음식은 아니지만.

당장 밖에 나가서 음식을 사려고 해도 이 시간엔 편의점밖에 못 간다. 거기서 파는 인스턴트 음식이나 라면이나 몸에 나쁜 건 매 한 가지겠지.

"오늘만 라면으로 떼우자, 미안하다 동생아. 3분만 기다려줘."

다만 조금 특별함을 줄 생각이다. 마침 남아있는 사골로.

물이 아니라 사골을 냄비에 부어 버너에 올린다.

뽀얗게 뜬 국물이 벌써부터 감칠맛이 상상된다.

국물이 펄펄 끓기 시작하면 스프부터 반 정도 투하.

윤슬이가 먹을 거니까 너무 짜면 안 된다.

어차피 육수가 베이스니 맛은 잡혀있을 터.

건더기 스프까지 탈탈 털고, 그 위로 면을 올린다.

빠각-!

"애가 먹을 거니까 반으로 부셔야겠다."

이제부터 기다릴 3분.

허나 넋놓고 기다리지 않는다.

내 라면은 결코 기성품만으로 이루어진 흔해빠진 게 아니다.

화룡정점을 찍어줄 파송송 계란탁.

파와 계란 정도는 아무리 마른 우물 같은 우리 집 냉장고라도 구비돼있다고.

알바 때 사장님께 배웠던 현란한 식칼질.

나무 도마 위에서 탭댄스.

탁탁탁탁!

아이라도 적당히 씹어삼킬 수 있는 0.5센치.

"파 굵기가 일정하구만."

칼질 하나는 확실히 잘 배웠다.

파는 미리 썰어넣어 국물에 맛을 배게 한다. 느끼하게 올라오는 기름을 잡아줄 시원한 맛!

베이스가 사골육수이니 썰린 파와의 궁합은 여느 잉꼬부부 이상이다.

계란을 넣는 타이밍은 불을 끄기 직전.

상에 나갈 때 반숙으로 익어 숟가락으로 터뜨릴 수 있는, 궁극의 타이밍.

"완벽, 그 자체."

앗, 나도 모르게 자아도취하고 말았다.

은근슬쩍 젓가락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며 셰프 포즈를 잡고 있었는데, 부끄러워졌다.

빨리 동생 먹일 생각이나 해야지.

"윤슬아, 이리와! 밥 먹자."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돌았는데.

젠장, 윤슬이는 모든 걸 본 모양이다.

뒤에서 내가 지었던 포즈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아닌 밤 중에 수치플.

혼자 사는 게 아니니까 앞으로 행동을 좀 조심해야겠다.

좀 두근두근하지만 되도록 태연한 척한다.

어차피 상대는 어린애니까.

"윤슬이 젓가락질 할 수 있어요?"

"움... 아니에여."

못하는구나. 할머니께 여쭤보니 지금 딱 다섯 살이란다. 우리집엔 당연히 유아 연습용 젓가락도 없으니 포크나 쥐어줘야지.

앉은뱅이 식탁을 꺼내 원룸 중앙에 펼친다. 그 위에 라면 냄비를 올리자 김이 모락모락 난다.

마침 날도 추운데, 이렇게 국물 음식을 차리자니 마음까지 덥혀지는 것 같다.

"윤슬이 이제 먹을까요?"

"웅, 잘 먹게씁니다!"

앞접시에 국물과 함께 덜어주었더니 윤슬이는 포크를 훽! 낚아채 식사에 돌입한다.

눈이 서슬퍼런 게 마치 맹수 새끼의 기세다.

좀 먹을 줄 아는 녀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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