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동생이 굴러들어옴(3)
포크로 접시의 라면을 콕 찍어 돌돌 말아서 입에 쏙- 넣어버린다.
우물우물.
거기서 끝이 아니다.
입에 면발을 넣은 채로 접시를 들어 국물을 호록! 같이 마셔버린다.
찐득한 사골 베이스의 라면 국물이 윤슬이의 작은 입술로 꿀렁꿀렁 넘어간다.
"아직 뜨거울 텐데?"
뜨거운지 입으로 손에 부채질을 펄럭펄럭 하면서 음식물을 시키지만, 이는 멈추지 않고 음식물을 씹는다.
다섯 살이 원래 이렇게 잘 먹던가?
그 다음에 뱉는 대사는 가관이다.
꿀꺽-
"으허... 시언해..!"
"시원하다고?!"
저 정도의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니.
분명 라면은 뜨거운 음식이다.
방금까지 펄펄 끓고 있었고, 웬 유황 온천처럼 김도 모락모락 난다.
그런데도 이를 '시원하다'고 표현한다는 것은, 그 미묘한 온도 감각을 몸에 체화하여 무의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뜻.
내가 조절하고자 한 맛을 정확히 표현한 점에서 두 번 놀랍다.
아이 입맛에 너무 짜거나 자극적이면 곤란하니까, 스프는 적당히 넣었다.
그 맛을 보충하려 사골 국물을 추가, 그리고 파의 싸한 맛을 첨가했다. 실제로 사골국을 마실 때처럼 시원하다고 느끼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할머니랑 지내면서 별의 별 표현이 늘었구나? 윤슬이가."
"우물우물... 함모니?"
"아니야, 그냥 맛있게 먹어."
"웅, 우물~."
애기가 이렇게 잘 먹어서 어떡하냐.
잘 먹어서 보기 좋긴 한데, 앞으로 집에 여러 모로 많이 음식을 쟁여둬야겠네.
이것밖에 준비 못한 게 미안해질 정도다.
후루룩!
어느새 윤슬이는 아까보단 식어버렸지만 적당히 훈기를 유지하는 냄비를 두 손으로 들고 국물을 들이마시고 있다.
턱 쪽으로 슬슬 흐르지만 그냥 냅두기로 했다. 이따 닦아주면 되지.
스프를 조절해 나트륨을 줄였으니, 저 정도로 먹어도 큰 문제 없겠지.
한창 클 때이니까.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어도 나까지 배가 불러오는 것 같았다.
복슬복슬한 머리에 손을 올리고 슬슬 쓰담아준다.
"우리 윤슬이, 조금 많이 잘 먹네."
동생을 보고 있자하니, 어렸을 때가 떠오른다. 마귀 같던 친모에게서 외할머니가 처음 구해주셨던 날.
그날 할머니께서도 내게 라면을 끓여주셨던 것 같다.
맹맹한 맛이었다.
별로 맛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런 맛이었는지 이젠 조금 알 것만 같았다.
할머니께선 요리를 꽤 잘하시는 편인데도 그랬으니 말이다.
윤슬이.
내 이부 동생.
솔직히 아직까지 크게 가족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그냥 착하고 순하고, 귀여운 꼬마애.
그런 느낌이지만 왠지 내가 돌봐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할머니를 더는 고생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함께 사는 가족이 한 명쯤 있는 편이 좋을 것 것 같다고 마음이 나를 설득했다.
묵묵히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윤슬이가 제 머리 위에 얹힌 내 손을 툭툭 친다.
"응?"
"잘 머겄슴니다, 옵바."
"흐흥... 그래, 진짜 잘 먹더라."
절로 코웃음이 난다.
할머니께 인사는 꼬박꼬박 하도록 이야기를 들었겠지.
그런데 정말로 잘 먹는 모습이 눈에 선해 인사치레가 아니라 그저 사실을 논하는 평서문처럼 느껴진다.
치우려고 보니 냄비가 텅 비었다. 재료 하나 남기지 않고 싹 비웠다. 배가 고팠던 것도 있겠지만 워낙 먹성이 좋은 아이인 듯하다.
부흡-
동생은 이제야 배가 찬 듯 한 번 트림을 하고 윗배를 문질거린다.
그 모습을 보니 뿌듯하다.
"만족했나보네."
어느 책에서 본 것 같다.
가족은 식탁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구세기부터 가족을 나누는 기준은 식량의 분배였다고 하더라.
윤슬이와 내가 가족이 되기 시작한 것은 이 사골 라면에서부터일 수도 있겠다.
할머니와 내가 가족이 된 지점은 그 밍밍했던 라면이었을 것이고.
이 한 끼로 서로에게 가까워졌다면 오늘밤 라면을 끓인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특히 요리를 맛있게 먹던 동생의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이 훈훈해진다.
내심 요식업계에서 일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요리인'을 꿈꾸고 있다. 동생의 저런 모습이야 말로 장차 눈에 담고 싶은 장면이다.
"윤슬이 다 먹었으면 이제 씻고 잘까?"
"응, 씨슬게여."
"혼자 씻을 수 있어요?"
"네!"
꽤 자신만만하게 대답한다.
일단 자기 전에 설거지를 해야 되긴 하는데, 첫날이니까 씻는 모습을 한 번 지켜봐주긴 해야할 것 같다.
윤슬이와 함께 화장실로 향한다.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에 봉착했다.
세면대에 팔을 걸칠 만한 신장이 안 된다.
턱에 겨우 걸칠 정도의 키인지라 아무래도 혼자서 씻긴 어려울 것 같다.
슬쩍 내려다보니까 시무룩한 표정이다.
혼자서 씻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나.
"윤슬아, 내일 화장실 의자 하나 사둘 테니까 딱 오늘까지만 나랑 같이 씻을까?"
"오늘까지만."
"그래, 그래, 오늘까지만. 대신 내일부터는 혼자서 씻는 거 보여주면 되겠네요?"
"네, 그러면 대."
존댓말과 반말을 혼용하는 우리의 장윤슬씨.
자립심이 제법 강하신 모양이다.
샤워기의 물을 미온수로 살살 틀어 세수를 도왔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쓰던 클렌징폼을 사용하지만 장사할 때 주워들었던 것 같다.
애기들 건 따로 구비해둬야 한다고.
욕실에서 쓸 건 윤슬이 것을 따로 챙겨두어야겠다. 그밖에도 여러 모로 필요하려나.
세면세치를 끝내자 윤슬이는 그제야 꾸벅꾸벅거린다.
시계는 지칠 줄 모르고, 자정을 향해 달리고 있다.
"설거지는 그냥 내일 일어나서 해야겠다."
"하암..."
"윤슬이 오늘은 저기 침대에서 나랑 같이 잘까? 다른 이불이 없어요."
"옵바랑 같이..?"
"네, 싫으면 오빠가 바닥에서 잘까요?"
"가치가 조아여. 함모니는 맨날 덥다구 실타그래써."
"그랬구나."
자립심은 강해도 자는 건 같이가 좋구나.
생각해보면 나도 이만치 어렸을 땐 그랬던 것 같다.
밤의 어둠이 무서워서 불을 꼭 키고 자고 싶거나
그게 안 되면 누가 옆에 같이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아직 아빠가 요절하지 않으셨을 때,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젠 희미한 기억이지만.
내가 먼저 침대에 눕고, 윤슬이가 내 밑쪽으로 슬슬 들어왔다.
싱글 베드였지만 윤슬이 체형이 아직 작아서 둘이 자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집에서 언제까지 윤슬이랑 지낼 수 있으려나. 이사를 가야하나.
자려고 누우니까 또 잡생각이 의식을 비집고 들어온다. 언젠가 생각해야 할 부분이지만 오늘, 이 짧았던 순간만 해도 느낀 바가 많다.
먹을 것도 사둬야 하고.
세면도구랑 욕실 의자도 필요하다.
그리고 베개랑 이불도 윤슬이 걸로 하나 필요할 것 같고. 또 아직 내가 깨닫지 못한 부분도 많이 있겠지.
아무래도 내일 알바 가기 전 어딜 들려야 할지는 정해진 것 같다.
"내일은 마트에 장보러가야겠다."
새근새근-
동생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잠들어있었다.
피곤한 만큼 빨리 잠든 것 같다.
"오늘 막 우리 집에 와서 적응 못 할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잘 지내네."
우리가 혈육이라는 걸 어렴풋 알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동안의 삶이 기구하여 어디에 가든 적응해야만 했던 걸까.
윤슬이를 오늘 처음 본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동생을 돌보는 게 일처럼 느껴지진 않는다는 것이다.
내일 당장 고깃집으로 출근하기 전에 윤슬이와 장을 보러 갈 생각인데, 이게 전혀 고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가족.
그 보편적이고도 숭고한 두 글자 때문에 사고 과정이 조금 변한 것 같다. 원래 알바 가기 전엔 침대에서 뒹굴면서 핸드폰이나 만져줘야 하는데 말야.
윤슬이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려나.
**
삐빅- 삐빅-
깊은 새벽.
남매는 잠들어있다.
수상한 기계음이 간헐적으로 울린다.
허나 두 사람은 비렘수면 상태까지 진입해 얼굴 근육이 부드럽게 풀어져있다.
좀처럼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다.
쌕- 쌕-
송주현의 스마트폰 액정이 희푸르게 빛난다.
[축하합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새가족의 유대를 응원합니다.]
[재능을 부여합니다.]
[......]
[축하합니다. 오누이 중 오빠가 당신의 라면 솜씨를 인정합니다!]
[당신이 재능 '요리의 길'을 획득합니다.]
[......]
[축하합니다. 오누이 중 여동생이 장윤슬의 식성을 보고 감탄합니다!]
[장윤슬이 재능 '식신'을 획득합니다.]
시시각각 반짝이는 메시지 창.
송주현은 자던 와중에 단 한 번도 깨지 않았고, 이를 볼 수 없었다.
결국 핸드폰은 몇 시간 동안 깜빡이다가 방전되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서야 부랴부랴 기절한 핸드폰을 충전하고, 장윤슬을 깨우는 송주현이었다.
**
"옵바, 우리 어디 가?"
"마트 가지요."
"마트? 머 사러?"
"우리 윤슬이 먹을 거랑~ 윤슬이 씻을 거랑~ 윤슬이가 좋아하는 초코랑~ 암튼 윤슬이 거 사러 가는데요?"
"잉? 옵바 꺼는 업써여?"
"제 거는 이미 집에 다 있으니까, 오늘은 윤슬이 거를 사야겠지요?"
"오오...!"
묘하게 감탄하는 윤슬이였다.
정오가 지나지 않은 시각이라 그런지 대형마트엔 사람이 많이 들락거리지 않았다.
물론 길거리보다야 많지만 적어도 동생 잃어버릴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마트에 도착하자 곧바로 달라진 점이 느껴졌다.
예전에 혼자 장볼 땐 그냥 당장 쓸 거랑 먹을 것만 찾아서 휙휙 바구니에 던져넣었는데.
지금은 왠지 모르게 아이를 동반한 어머니들과 시선을 주고받게 된다.
이따금씩 웃으며 인사를 하시기에 나도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게 바로 육아인들의 동지애인가.
"윤슬이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함모니가 윤스리는 다 잘 머근다고 칭찬해써."
"정말 그런 것 같더라. 대단하네?"
"대다내?"
"그럼, 편식 안 하는 게 얼마나 좋은 건데."
동생은 내 칭찬에 얼굴을 발그레 밝히며 내 바짓자락을 꾸깃꾸깃 쥔다.
칭찬을 들어 쑥쓰러운 모양이다.
한편 방금 지나던 곳 근처 채소 코너에선 어느 애를 동반한 어머니께서 우리 얘기를 주워들은 것 같았다.
- 저봐 동건아! 저만큼 작은 애도 편식 안 한댄다. 너도 이제 당근 골라내지 말고 먹어야겠지?
- 응, 아니야~ 당근 안 머거~ 맛 업써~
- 으휴, 얘가 진짜!
이럴 수가, 장차 크게 될 놈이다.
척 보아하니 윤슬이보단 연상인 것 같았다.
곧 초등학교 입학할 정도의 남자 아이.
인터넷 방송을 많이 보는지 어미를 괴상하게 늘어뜨려 어머님에게 모욕감을 주고 있었다.
그에 반해 우리 윤슬이는 편식도 안 하고, 딱히 이상한 말투를 구사하지도 않는다.
"우리 윤슬이는 먹는 것 말구 좋아하는 거 따로 없어요?"
"움... 움, 윤스리는 책 조아해."
"그림책?"
"네, 함모니가 일거줘써."
확실히 다섯 살이면 아직 한글을 완전히 떼기엔 이른 나이다.
읽긴 읽어도 능숙하진 않겠지.
근데 그럼 애 유치원은 어떻게 해야 하나.
보통 글은 유치원에서 배우지 않나?
"윤슬이, 할머니랑 같이 있을 때 유치원 다녔어요?"
".... 우웅."
갑자기 윤슬이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지금껏 본 것 중에 제일 표정이 안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