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생이 굴러들어옴-4화 (4/200)

4화: 동생이 굴러들어옴(4)

"시러..."

"응..?"

"유치언... 시러여."

"앗."

윤슬이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며 입술이 비죽 튀어나온다. 애써 시선을 빙빙 굴리는 게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유치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구나.

아마 다니긴 했을 것이다.

할머니께서 하루 종일 집에서 윤슬이를 데리고 있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몸도 편찮으시니.

단지 유치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 텐데. 그게 대충 무슨 일일지는 예상이 되었다.

"어, 윤슬이 잠깐 저기 볼까?"

"으응?"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대형마트의 윗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

"저기로 올라가면 뭐 있는지 알아요?"

"우움? 모르눈데."

"올라가면 자동차 있는데. 먹을 것부터 사고 같이 구경 갈까요?"

"어! 자동차!!"

금세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는 윤슬이.

사실 어제부터 은근 그런 눈치이긴 했는데, 윤슬이는 아마도 나와 같은 자동차 덕후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어젯밤 라면 먹기 전, 윤슬이가 방의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 딱 한 번 시선이 못 박힌 듯 멈췄던 적이 있다.

내가 찬장 위에 올려둔 한 대의 모형 스포츠카를 보고 그랬다.

올망이는 눈동자가 오매불망하던 애인인 양 피규어를 바라보기에 뭔가 그럴 것 같긴 했는데.

역시 피는 못 속인다고 자동차를 좋아하는구나.

"우리 윤슬이가 뭘 좀 아네? 나도 자동차 좋아하거든. 일단 필요한 거부터 사구, 같이 가서 재미 있게 구경하면 되겠네요?"

"네!!"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금방 배실배실 웃어주는 우리 동생.

아이는 이렇게 적당히 단순해주는 편이 훨씬 고맙고 대견하다. 복잡한 마음 갖기엔 몸도 마음도 여리다.

자동차 얘기를 꺼내서인지 무얼 먹겠냐고 묻던 다 좋다고 대답하고.

뭐가 필요하냐고 묻던 괜찮다고 대답하는 윤슬이.

이미 마음은 3층의 장난감 코너에 가있는 모양이라, 그냥 어제 필요하다고 느낀 것들만 우선 구매하기로 했다.

"나중에 또 필요할 거 생기면 다시 오지 뭐."

장난감 코너에 도착하자 윤슬이는 인형 코너나 마법 소녀 IP의 상품 코너를 빠르게 제쳐 모형 자동차가 모여있는 곳으로 달려나갔다.

취향 한 번 확고하다.

그 주위엔 여자 아이들보단 남자 아이들이 더 많은데, 윤슬이는 그런 거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저렇게 남 눈치 안 보고 좋아하는 거에 몰두하는 모습도 보기 좋다.

솔직하자면 내 사심도 조금 있는지라 윤슬이 놀아주는 척하면서 뒤에서 은근히 구경한 건 비밀이다.

-  엄마 나 저거 지게차 갖고 싶다. 엄청 멋있다.

-  저번에 하나 사줬잖아..?

-  그건 포크레인이잖아요.

-  어휴, 그거라도 하나 있으면 됐지. 넌 무슨 도시간척사업하려고 하니? 아주 공사용 차를 종류별로 모으려고 하네.

이번엔 반대편 코너에서 모자 간의 대화가 들려왔다.

글쎄, 이전엔 이런 대화 중요치도 않았고, 신경 쓰이지도 않았는데.

왠지 윤슬이가 같이 있으니까 무심코 집중하게 된다.

윤슬이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투명 박스에 전시된 자동차 피규어들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다.

그런데 그러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이 튀어나온다.

내 바지춤을 꾹꾹 당긴다.

"옵바, 이제 가쟈."

"응? 다 구경했어?"

"네."

"그렇다고...?"

하지만 표정에선 아쉬움이 스멀스멀 묻어나왔다. 애써 입꼬리는 말아올리고 있다.

그런데 자꾸 시선은 바닥을 향했다.

저 자동차 장난감들로부터 외면하듯이.

어제부터 느꼈는데 윤슬이는 자기 나이에 맞지 않을 정도로 의젓하려는 경향이 있다.

저 나이밖에 안 됐는데 뭐가 그렇게 윤슬이를 몰아붙였는지는, 지금으로선 알기 어렵다.

그래도 우린 이제부터 식구고 가족인데 저렇게 애써 참고 있는 동생의 얼굴을 보자니 명치가 아려온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뱅킹 앱을 켰다.

[송주현님의 현재 잔고]

[42,378,815원]

'사실 7년동안 정말 식비 외엔 거의 쓰지 않고 모은 돈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중에 장난감 하나 사줄 돈 없겠나.'

돈은 돈 벌려고 버는 거 아니다.

행복하려고 버는 거다.

그건 할머니가 내게 누차 하시던 말씀이고, 나도 100% 동의한다.

헤프게 쓰면 안 되지만 가치 있게는 써도 된다.

윤슬이가 장난감 갖고 좋아하면, 나도 행복할 것 같다.

"동생, 잠깐만 이리 와볼까요?"

"왜여...?"

작은 손을 꼭 잡고 아까 윤슬이가 제일 갖고 싶은 듯이 쳐다보던 스포츠카 장난감 쪽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과감하게 장바구니에 휙- 던져 넣어버리기!

방금 좀 터프했다.

"어..?"

"내가 아까 말했잖아. 나도 자동차 좋아한다구. 오빠랑 같이 갖고 놀면 되겠죠?"

"근데 비싸여. 그러면 안 대는데..."

"그치? 대신 오늘은 윤슬이랑 나랑 만나서 처음으로 마트까지 온 기념일이잖아.

그래서 괜찮아. 이럴 땐 하나 정도 사주는 게 예의야."

"예이..? 지짜 갠차나?"

"그럼! 오빠는 거짓말 안 해요. 대신 윤슬이 이거 사면 오빠랑 사이 좋게 같이 놀아줘야 되는데. 그럴 수 있을라나?"

"네!! 사이 조케!"

윤슬이는 신나서 방방 뛰기 시작한다. 그 모습은 아동복 모델 뺨치게 귀엽다.

이제야 어린애 같아서 안심스럽고, 또 다행이다. 이런 모습을 서서히 알아가는 게 가족이 된다는 거겠지.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오늘 동생이랑 같이 마트에서 장보기를 잘했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

"아저씨, 저 왔슴다."

"어, 뭐야? 송주현이 왔는가."

"동생, 이리 와서 인사드릴까?"

낡은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대형 서점과는 또 다른 느낌.

벽을 따라 책장이 이어진다. 책장엔 키 작은 순서대로 깔끔하게 정리된 책들이 주욱 나란하다.

헌책방 강씨 아저씨는 이런 정리를 참 잘하신다.

"그 애는 누구야, 딸?"

"방금 동생이라고 제 입으로 말했던 것 같은데."

"그랬나?"

"윤슬이, 인사해야 되는데요? 잘하잖아, 인사."

어제밤 나한테 보인 태도와는 다르게 줄곧 내 다리를 붙잡고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는 윤슬이.

뭐 못 볼 거라도 본 양 쫄아있다.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강씨 아저씨는 비주얼만 보면 17세기 산적급이다.

희끗하게 색이 바랜 묶은 머리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갖은 잔근육도 붙어있다.

옷도 웬 구제 야전 상의를 입고 있으니 아이 입장에선 무서울 만도 하다.

그런데 윤슬이는 모를 거다.

내가 강씨 아저씨한테서 애 다루는 법 배웠단 것을.

외형과는 전혀 안 어울리지만 아이들을 정말 좋아하시는 분이다. 또, 내가 단골이라서 아는데 믿을 만한 사람이다.

"동생 이름이 윤슬이라구?"

"네, 장윤슬."

"흐응, 윤슬이란 말이지."

아저씨는 앉아계시던 카운터 밑 부근에서 무얼 주섬주섬 꺼내더니 양 손에 들고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온다.

먹음직스런 갈색빛이 도는, 밀크초콜렛이다!

"아아, 지금 아저씨한테 초콜렛 있는데, 주현이밖에 없으면 그냥 둘이서 나눠먹어야 되겠네?"

"그렇네요. 우와! 초콜릿 맛있겠다."

그제야 입질이 슬슬 오시는 장윤슬씨.

제대로 낚이셨다.

내 다리 뒤에 착 붙은 손은 여전하지만 몸을 기울여 고개만 빼꼼 내민다.

아직 강씨 아저씨가 낯설고 무서워서 그런 것 같다.

"져두... 이써여."

"오잉?! 너무너무 이쁜 꼬마 아가씨가 한 분 계시네.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장윤들."

"아하 윤슬이~ 이거 조금 나눠주고 싶은데, 어떻게 괜찮을까요? 먹을 거예요?"

"고마씁니다..."

먹을 거냐고 물으니까, 고맙단다.

굳이 대답이 필요가 있겠느냐는 거겠지.

또, 고마울 땐 배꼽인사는 곧잘 한다.

어느새 손을 떼고 내 앞으로 나와 아저씨께 고개를 푹 숙이는 윤슬이.

어느새 윤슬이 두 손에 가득 들린 미니 초콜렛들.

먹어도 되냐는 듯이 나를 지긋이 올려다본다.

"포장지 까줄까?"

"윤스리가 할 쑤 있는데."

"그럼 윤슬이가 까서 먹으면 되겠네요~."

포장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잔잔하던 헌책방을 긴장시킨다. 투명한 포장지를 까자 슬며시 퍼지는 초콜렛 냄새.

밀크초콜렛이라 그런지 냄새가 더욱 부드럽다.

아이가 씹어먹기에도 전혀 부담 없겠지.

쏙- 냠!

우물우물~

어떤 맛일지는 이미 상상된다. 이 사이로 녹아내리며 혀를 감싸는 단 맛. 그리고 입 안 가득 차오르는 우유의 풍미.

어느새 비강에 까지 단내가 스며 숨만 쉬어도 초콜렛이 은은히 느껴지는 단계에 이를 것이다.

애나 어른이나 초콜렛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간식이다. 참 축복받은 단 맛이지.

윤슬이가 먹는 걸 보니까 나까지 먹고 싶어진다.

그런 마성이 있는 것 같다, 우리 동생한테는.

식욕을 부른달까?

웬 초콜렛을 저렇게 맛있게 먹는지 원.

어느새 강씨 아저씨는 카운터 밑에서 인형까지 꺼내 윤슬이의 관심을 끌어주신다.

워낙 애를 좋아하는 양반이라 저런 걸 가게에 잔뜩 두시고, 꼬마 손님들이 오면 한참을 놀아주신다.

저분 나름의 단골을 모으는 전략이다.

"아저씨, 저 잠깐 이 앞에서 전화 좀 하고 올게요."

"그려~"

윤슬이의 눈치를 슥 내려다보자, 이미 귀여운 강아지 인형에 정신이 팔린 것 같다.

계획대로군.

저 정도면 오늘 하루 정돈 윤슬이를 맡겨도 괜찮을 것 같다.

스마트폰을 꺼내어 전화를 건다.

[사랑하는 외할머니]

뚜루루- 뚜루-

클래식한 착신음이 두 번도 채 흐르기 전에 할머니께선 전화를 받으신다.

목소리가 쌩쌩하시다. 주위가 조금 소란스러운 걸 보니 아마도 친구 집에 계시는 모양이다.

[어, 그래 주현이냐?]

"네, 할머니. 어젠 잘 들어가셨죠?"

[밤이니까, 잘 들어가지. 버스가 밀리지두 않고 괜찮게 잘 가드라.]

"다행이네요. 근데 할머니 제가 윤슬이 때문에 뭐 하나 좀 여쭤보려고 전화드렸거든요."

[왜서? 그새 무언 일 있던 거야?]

"아뇨, 일까지는 아니고. 혹시 윤슬이 유치원 다닐 때 무슨 안 좋은 일 있거나 했는지 여쭤보려고."

[엄매, 애한테 고새 유치원 얘기 꺼낸 모양이구만?]

"네, 저도 아차 싶었는데. 애 표정이 안 좋더라고요."

[쯔즛, 아니다. 내 잘못이지. 그런 걸 좀 차분하게 다 알려줬어야 됐는데.]

"아니에요, 그런 말씀 마세요."

할머니라고 무슨 일 일어날지 다 아셨겠는가.

또 어젠 여러 모로 아이 돌볼 때, 뭘 주의해야 하는지 어지간한 건 말씀주셨다. 전혀 탓할 일이 아니다.

[애가 여기서 유치원 다닐 적에 애들이 막 괴롭힌 모양이더라고.]

"아, 괴롭.. 혀요?"

목이 매이는 듯했다. 갑자기 그랬다.

내 일처럼 그랬다.

[아니, 애 마중을 만날 내가 나가니까. 너는 엄마 아빠가 어디 갔느냐고 하도 물어보대더라. 거기, 유치원 선생이 나한테 알려줘서 나두 겨우 알았다.]

잠깐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남 일 같지 않아서 그랬다.

내 일 같아서 그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