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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굴러들어옴-5화 (5/200)

5화: 동생이 굴러들어옴(5)

그 뒤론 할머니와 어떤 대화를 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 날 때 한 번 윤슬이 데리고 올라오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냥 알겠다고만 하고 끊었다.

누굴 탓하거나 미워하는 감정이 들진 않았다.

그보다 내 동생이 어떤 감정이었을지 알 것만 같아서 괴로웠다.

나도 중학교 시절에 그랬다. 초등학교는 괴물 같은 친모 밑에서 졸업했지만, 중학교 때 외할머니께서 구해주셨다.

그 시절 딱 한 번 학부모 참관 수업이 있었다.

할머니께서 와주셨는데 평소에 잘 지내던 반 친구 녀석들이 내게 물었다.

'왜 너는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가 오셨냐?'

라고.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다른 녀석들은 모두 엄마나 아빠가 오셨는데, 나만 할머니가 오셨다.

핑계라도 대려면 댈 수 있었고.

솔직하게 말한대도 걔들이 막 놀렸을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나쁜 애들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기분이었다. 그냥 내가 뭔가 죄 지은 것만 같고. 남들이랑 다르면 안 되는 것만 같고.

무질서한 감정이 내 입술을 보이지 않는 실로 꼬매어버렸다.

그날은 할머니께서 차려주신 밥도 안 먹었던 것 같다. 정말 최악의 선택이었지만 그만큼 심란하기도 했던 사춘기였다.

"윤슬아."

"우물우물~ 녜?"

한 손엔 초콜렛, 한 손엔 강아지 장난감이라.

행복한 한 순간을 즐기고 있다.

윤슬이의 무구하고도 밝은 얼굴을 보자니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잠깐 이리 좀 와볼까요?"

"우물~ 니예."

도도도-

앙증맞은 발로 잘도 뛰어다닌다.

"윤슬이는 유치원 가기가 싫지?"

"우움... 네."

금세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나마 입에 초콜렛을 담고 있어서 그런지 아까보단 나은 것 같다.

"그럼 안 가도 되는데."

"어? 안 가여?"

"네, 안 가도 돼요. 대신 오빠랑 약속 하나 해야 돼."

"옵바랑 약쏙?"

"응, 책을 많이 읽어야 돼. 유치원을 안 가려면."

"윤스리는 책 죠아해. 그니까 조아여."

초코를 입에 담아도 할 말은 하는 장윤슬이.

눈빛에서 제법 굳은 의지가 느껴진다.

어지간히도 유치원에 가기 싫은 것 같다.

왠지 윤슬이의 감정을 알 것 같았다. 나도 학부모 참관 수업이 한 번 있고, 반친구들에게서 묘한 시선을 느꼈을 때

정말로 등교하기 싫었다.

그런 감정은 다섯 살에게든 열다섯 살에게든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리라.

어차피 유치원은 의무 교육도 아니다.

반드시 보내야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중요한 건 내가 일하는 동안 윤슬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그게 문제인데.

염두에 둔 방안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아직 용기가 조금 모자란데 오늘 고깃집 사장님께 한 번 말씀드려볼 생각이다.

**

고깃집이 텅 비어있다.

전쟁 같던 오늘 장사가 끝났다.

윤슬이를 헌책방에 맡기고 온 터라 마음이 평소보다 조금 더 바빴고.

오늘 그만둔다는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기에 조금 더 조마조마한 하루였다.

오늘따라 주방 마감 시간 1시간 전에 손님들이 모두 나가는 바람에 장사를 일찍 접었다.

운이 좋다.

다른 알바생들이나 주방 이모도 모두 귀가했다.

마침 사장님이 주방 안쪽에서 내일 판매할 돼지 부위를 손질 끝내고 걸어나오신다.

"여, 주현이 수고했으."

"사장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아니, 뭐 오늘은 일찍 끝났으니까 그래도 좀 낫지.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어... 사장님 그전에 저랑 잠깐만 얘기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뭐야, 할 말 있어서 남아있던 거냐? 그럼 들어줘야지. 송주현이 대화하자는데."

"흐흐, 감사합니다."

실 없이 웃으며 사장님의 배려를 받아들인다.

안 그래도 장사가 잘 되는 사업장인지라 사장님께선 육체적 피로를 달고 사신다.

그러니까 퇴근하고 싶으실 텐데, 그래도 나랑 7년 동안 일한 정이 있어서 이렇게 기꺼이 이야기도 들어주시는 거다.

주방이랑 출구 쪽에서 제일 가까운 1번 테이블 의자를 끌어다가 마주 보고 앉는다.

오래도록 본 사람이지만 그래도 사장님인지라 이렇게 마주보려니 긴장도 되고 그렇다.

특히 말씀드리려는 내용이 썩 긍정적이진 않으니.

"무슨 일이냐, 연애 상담? 만약 그런 거면 번짓수 잘못 찾았다. 형도 아직 결혼 못한 거 알잖아."

"아뇨, 애석하게도 그런 쪽과는 연이 없습니다요."

"엥? 야, 너는 그만큼 반반한 얼굴 뒀다가 얻다 쓰려고 썩혀두냐? 그 얼굴로 묵은지라도 만들 생각인겨? 잘 팔리기야 하겠다.

그걸로 사업해라, 묵은지 사업."

"사람 얼굴로 묵은지 만들면 퍽이나도 잘 팔리겠네요."

사장님께서 내 얼굴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건 신기하게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다.

실 없는 농담 주고 받을 정도로 친하니까 그런 것 같다.

"농담이야 인마. 그냥 아까부터 표정이 썩 안 좋은 게 무슨 일 있겠구나~ 싶더라.

뭔 일인데? 가족 사정?"

"비슷하죠... 사실."

사장님은 내가 18살 때부터 이 가게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이다.

내가 중졸인 것도 알고 계시고, 우리 집안이 그다지 온건하지 못하단 것도 알고 계신다.

그래서 윤슬이와 함께 살게 됐다는 말을 꺼내기엔 어렵지 않았다.

"아하 그래서, 다섯 살 난 동생이 하나 떡하니 생겼다 이 말씀이시구나? 귀엽겠다, 야."

"그럼요. 처음 봤을 때 웬 천사인 줄 알았어요."

"흐응, 대충 무슨 흐름인 줄 알겠다. 그래서 부양 가족이 생겼으니까, 네가 생각하기에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겠다 싶은 거지?"

"그쵸, 아무래도. 여기서 일하는 것도 사실 수입이 모자라진 않은데. 애 돌보면서 고깃집 일하는 건 여러 모로 무리이지... 싶더라고요."

난 풀타임 멤버다. 정오부터 오후 10시까진 여기에 줄곧 묶여있어야 한다.

윤슬이가 유치원 집에 안 간다고 하면 돌볼 사람이 없어진다. 만약 유치원에 가게 된다더라도 오후 10시까지 돌봐주는 유치원이 어디 있기야 하겠는가.

피식-

사장님은 전혀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환하게 웃으신다.

"그치 이해한다. 나가는 건 좋아, 솔직히 네가 우리 집에서 얼마나 오래 일했는데 붙잡는 것도 좀 그렇지. 난 너한테 되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처음 왔을 때부터 싹싹했고. 지각 한 번 없이 성실했고. 손님들한테 잘 하고. 특히 애기들 손님 왔을 땐 네가 늘 전담해서 그 테이블 맡는 것도 그렇고.

넌 어디 가든 잘 할 놈이야. 알바 그만두는 거에 대해선 전혀 나한테 안 미안해도 된다."

"아...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래도 조금 마음이 놓이네요."

솔직히 사장님 입장에선 조금 갑작스러울 수 있는 얘기니까, 죄송스럽긴 했다.

이 가게 직원이 조금 넉넉한 편이라 일손이 모자라진 않겠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있던 알바가 떠나는 건 가게 입장에선 손해일 수밖에 없으니까.

"아니, 뭐 괜찮아. 우리 가게는 신경 안 써도 되는데. 나는 네가 걱정이다.

나가면 무슨 일 하려고 그러는데? 계획은 있지?"

"그럼요. 아니 사실 계획... 이라기보단 제가 예전부터 하고 싶어서 모았던 돈이 있거든요."

"그래? 사업할 모양이네?"

"네, 저도 요식업 한 번 해보려구요. 사실 사장님 보면서 꿈 키운 것도 있어요.

어떤 점이 힘든지도 알지만 또, 그만큼 보람 있는 점도 알고 있으니까."

사장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본인 칭찬 들어서 뿌듯한 것 같다.

하지만 이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눈매를 좁히기도 한다.

"근데 그래도 걱정이긴 하네. 너도 알겠지만 요식업 하려면 장사 아이템 선정부터 여러 모로 고생이거든.

네가 창업한다는 얘기 들어보니까, 요리는 직접 할 거 아니야?"

"그렇죠. 나름 자신 있어요."

"그래?"

사장님은 잠시 턱을 괴고 고민하신다.

갑자기 어쩐 일일까.

"오케이, 우리 주현이가 내 밑에서 일하다가 자립한다는데 어떻게 내가 두 손 놓고 보고만 있냐?

형이 조금 도와줄게. 너니까 특별히 도와주는 거다."

"도와주신다고요?! 아니, 뭐 그렇게까지 해주실 건 없는데. 저도 나름 여러 모로 알아본 게 있구."

"인마, 아무리 그래도 내가 장사만 거의 20년째 하고 있는데. 나보다 더 잘 알까?

심지어 우리 집만큼 오랫동안 잘 되는 집도 잘 없어."

그 말은 사실이다. 사장님께선 꾸준히 좋은 매출을 유지하고 계신 요식업가였다.

나름의 노하우도 있으시고, 상가 임대나 인테리어 같은 자잘한 부분에서도 제반 지식이 있으실 거다.

도와주시기만 하면...

정말로 든든한 아군을 얻는 것은 확실하다.

"야, 대신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아... 저 모아둔 돈으로 자리 임대하는 것도 빡셀 것 같은데."

"아니 짜식아 내가 너한테 돈 받겠다냐? 형한테 한 번 확인을 시켜줘봐."

"확인이요?"

"그래, 마침 안쪽에 주방도 있겠다. 우리 패밀리 밀로 만들어먹던 식재료도 얼마 있겠다.

요리 솜씨 한 번 보여줘. 네가 정말로 사업 한 번 뛰어들 정도 실력 되는지 안심은 시켜줘야 할 거 아냐?

설마 송주현이가 말만 번지르르한 놈은 아니겠지?"

".... 당연하죠."

사장님은 내 뒤로 다가와 두어번 두들겨주신다.

그 손길에서 나온 물리적인 힘이 어떤 마음으로 뒤바뀌는 것만 같았다.

든든하고, 따듯한 것.

이런 걸 정이라고 하던가.

"주현아, 나 여 테이블에 앉아있을 테니까. 네가 생각하기에 괜찮을 것 같은 메뉴로 하나 갖고 와봐.

꼭 그걸로 사업하란 얘기는 아니니까."

"예이, 예이~ 잠시만 기다려줍쇼, 손님."

이미 마감하느라 깔끔히 정리된 주방에 들어갔다.

그전에 스마트폰으로 시계를 확인한다.

9시 35분 정도.

이 정도 시간이면 음식 하나 만들어도 책방 문 닫기 전에 윤슬이 데리러갈 수 있겠다.

"오빠가 사장님한테 음식 하나만 만들어드리고 금방 갈게 윤슬아, 좀만 기다려줘."

그때였다.

스마트폰이 주머니 속에서 마구 진동했다. 마치 재난 문자라도 연달아 떨어지듯.

"뭐지?"

연락할 사람도 잘 없으니, 아마 황사 경보라도 떨어진 게 아닐까.

때도 아직 3월, 봄이니 별안간 황사철이긴하다.

개의치 않고, 요리에 전념하기로 했다.

허나 이때부터 스마트폰을 잘 확인했더라면 조금 더 눈치 빠르게 이것저것 시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내 스마트폰엔 정말로 중요한 정보들이 빗물처럼 쏟아지고 있었으니.

[재능 '요리의 길'이 초회 발동합니다.]

[술자의 내재 실력에 따라 특성 레벨 조정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

[판별 결과: LV.3 – 숙련자]

[스킬 '칼질'의 숙련도가 급상승합니다.]

[스킬 '웍질'의 숙련도가 급상승합니다.]

[스킬 '소금 간'의 숙련도가 급상승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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