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식탁의 목적(1)
진호연은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생각이 없다.
종합 장사 경력 18년. 아무 것도 모르던 스물 때부터 지금, 마흔을 바라보는 시점까지 계속되던 요식업 외길 인생.
그 나름의 철학이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요리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언제든 대견한 일이다. 허나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실력을 갖춰야한다. 만약 1인 창업이라면 더더욱.
'형이 시험해서 미안하지만 다 널 위해서다. 만약 실력이 썩 별로인 것 같으면 모질게 얘기해줘야겠어.
우리 가게에서 나갈 땐 나가더라도 헛된 꿈 꾸는 거면 요식업 선배로서 따끔하게 얘기해줘야지.'
진호연씨는 나름 자기 혀에 자부심이 있다. 사업장, <빨간 돼지>를 여지껏 유지한 것도 자신의 미각과 노력의 덕이라고 믿는다.
고깃집이라고 해서 밑반찬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파절이나 나물, 서비스로 나오는 찌개까지.
전부 이 집 나름의 비법을 이용한 것들이다.
그러니까 요리에 관해선 나름 일가견이 있다.
"주현아, 형 출출하다. 아직 멀었니?"
"아, 아뇨! 금방 돼요~."
웬일로 송주현의 목소리에서 삑사리가 난다.
'뭐야, 나한테 음식 만들어준다고 긴장했나? 짜식, 벌써 저러면 장사 어떻게 하려구.'
음식을 맛보기 전부터 걱정이 생긴 진호연씨였다.
한편 송주현은 자신에게 일어난 미묘한 이변을 감지했다. 현기증이 나더니 전신마취라도 당한 듯 기분이 몽롱해졌다.
빈혈 같은 걸로 쓰러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고, 외려 묘한 자신감이 단전에서부터 솟구쳤다.
'뭐지..? 왜 갑자기 주방에 서는 게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지?'
몸상태에 문제가 없는 것 같아 요리에 집중하기로 했다. 지금 당장 흐트러지면 여간 손해가 아니다.
진호연이 사업을 도와주겠다고 단언했다. 그를 아군으로 둘, 든든한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재료 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토마토.
일전에 주방 이모가 피부 미용에 좋다며 사장님께 졸라 패밀리 밀 재료로 들여온 것인데, 이게 사용하기 좋아보인다.
'토마토 하면 데웠을 때, 감칠맛이 진짜 일품인데. 이걸로... 라면이나 끓여볼까?'
라면은 아무튼 송주현이 가장 자신 있는 음식이다. 또, 무궁무진한 변화구를 던질 수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밤참으로 라면만한 게 어디 있기나 하려나.
'이번 라면은 저번 사골 라면이랑은 다를 걸?'
그때 토마토를 지긋이 들여다보자 송주현의 머리 속에 갖은 정보가 흘러들어왔다.
'뭐야, 왜 토마토가 얼마나 익었는지 그냥 알 것만 같지?'
그 정도의 깊은 지식은 원래 송주현의 머리 속에 없었다.
그런데 이 빨간 토마토를 손에 쥐자마자 그 익은 정도를 마치 수학 연산의 덧셈뺄셈처럼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딱, 좋게 익었다.
덜 익으면 산미가 강해서 라면엔 안 어울릴 텐데, 적재적소가 되어줄 재료다.
먼저 냄비에 올리브유부터 두른다.
주륵-
두꺼운 올리브향이 코를 찌른다. 어깨를 느슨하게 풀어주는 안심스러운 냄새다.
중불로 점화.
팬이 데워지기 전, 베이컨을 썬다.
타다다닥-!
'뭐야, 칼질이 더 늘은 것 같은데?!'
굵기가 일정할 뿐만 아니라 속도가 붙었다. 어느새 주방 너머에서 슬쩍 들여다보던 진호연도 살짝 놀란다.
"오, 뭐야 송주현? 칼질 좀 치네? 역시 내가 잘 가르치긴 했다."
괜히 추임새 넣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착석.
심심했는가보다. 귀여운 양반이다.
달아오른 팬에 베이컨과 다진마늘 한 스푼 투하.
웍질하자 치이익-! 기름과 맞물리는 식재료의 수분이 증발한다.
그 소리는 가히 반항적.
'이 녀석한텐 양파와 토마토를 때려넣어 기강을 잡아줄 필요가 있겠군.'
웍질과 칼질을 번갈아한다.
숙련된 조리사처럼 꽤나 능숙한 손놀림. 마치 오래도록 주방에서 일한 요리사처럼 자유롭고 자연스럽다.
'왠지 평소보다 요리가 잘 되는 것 같은데?'
양파는 잘게, 토마토는 뭉텅뭉텅 썰기!
양파를 먼저 투하해서 싸한 맛을 기름에 섞고. 토마토는 뒤늦게 찰박-
기름에 어우러지는 토마토는 그 열기에 녹아 금세 흐멀흐멀해진다. 어느새 팬에 수분이 자박하다.
부드러운 갈색으로 달아오른 베이컨이 송송 박힌 게 어느 유럽 시골마을풍의 스프 같기도 하다.
'토마토엔 수분이 워낙 많으니 이 수분감만으로도 충분히 라면 하나 정돈 끓일 수 있겠지.'
이미 풍미의 호수가 된 붉은 토마토 육수에 라면스프 투하. 이로써 맛은 검증된 셈.
한 입 간 보는 송주현.
"음, 존나 맛있군."
무심코 욕을 입에 담아버렸다. 베이컨과 양파, 마늘이 어우러지는 기름에 토마토의 육질이 녹아내려 탄탄하면서도 내실 있는 국물의 완성.
다이나마이트급 화력의 감칠맛!
거기다 라면 스프를 때려넣자 소금기와 매운 맛을 더해준다.
이미 국물만으로도 완성품에 가깝다. 여기다 밥 말아먹는 것도 가능할 정도.
'근데, 뭔가 2% 부족해. 뭐가 부족하지?'
.....
계란이다.
근데 날계란을 풀어넣는 게 아니라, 해답은 후라이.
불을 하나 더 점화하고, 꺼내는 작은 팬.
후라이쯤은 쉽다.
다만 송주현이 원하는 것은 반숙.
계란을 편평한 바닥에 조심스레 툭- 깨어 팬 위에 상륙.
'괜히 모서리에 쳤다가 노른자 박살나면 내 기분도 박살나는 거다.'
페퍼밀 꺼내서 후두둑!
기분 좋게 깨지는 후추알의 소리와 동시에 반쯤 익은 계란에 휘뿌려지는 귀여운 후춧가루들.
첫 눈처럼 곱게 내린다.
통째로 넣은 라면 면발이 꼬들하게 익어갈 때쯤 계란 팬을 조심히 기울여 냄비 위에 무심히 툭- 얹어주면.
비주얼까지 완성.
토마토 계란 라면.
송주현의 자신작이다.
즉흥적으로 뚝딱 떠오른 레시피인데, 진호연의 취향에 맞을 지는 모르겠지만 맛만큼은 확실하다.
행주로 뜨거운 손잡이를 쥐고, 진호연 사장이 기다리는 1번 테이블로 달렸다.
젓가락까지 이미 세팅을 마친 진호연.
"야, 뭐냐 뚝딱뚝딱하더니 결국 만든 게 라면이야? 좀 실망이긴 한데... 뭐, 분식 장사하게?"
"일단 먹고 말씀하시죠."
송주현은 모처럼 단호했다.
왜냐면 그만큼 자신 있는 맛이다.
"내, 냄새는 확실히 죽이긴 하는데. 킁킁- 뭐야? 이거 그냥 라면에 베이컨 넣고, 후라이 올린 게 아니구나? 토마토...?"
진호연은 당황스러우면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내심 생각한다.
확실히 토마토는 생으로 먹어도 괜찮지만 이런식으로 국물 요리에 넣거나 끓여먹으면 신 맛이 줄고, 단 맛과 감칠맛이 늘어난다.
'조금 솔직해지자면 맛이 궁금하다... 이 시간대에 라면은 진짜 못 참긴 하는데.'
스마트폰의 시계는 [21:43]을 띠운다.
폴폴 오르는 김과 함께 부드럽게 코를 감싸는 토마토의 자상한 향기. 텃밭을 벗어난 원숙의 내음이다.
침샘의 둑은 무너져 범람하기 직전이었다. 이대로 가면 혓바닥이 침수될 위기.
재빠르게 젓가락을 집어 냄비에 쑤셨다. 불가항력이었다. 머리가 시키지 않아도 손이 움직인다.
부드러운 계란을 뜯어 면과 함께 후루룩!
"허어어... 존맛이네, 이거."
잠시 고민하더니 일어난다.
그리고 가게 냉장고로 직행.
"미안하다. 못 참겠다."
곧바로 판매용 맥주 하나를 꺼낸다.
테이블로 갖고와 숟가락을 뚜껑에 걸치고 지렛대의 원리로 뽕! 따버린다.
진호연의 짬이 느껴진다.
"아니, 사장님 가게 맥주에는 웬만하면 손도 안 대시면서."
"야, 너 이거 먹어봤냐?"
"당연히 간은 봤죠."
"그럼 알잖아? 이걸 먹고 맥주를 어떻게 참냐고. 나중에 냉장고에 다시 채워넣어야지, 뭐."
후룩- 후루루룩...
게눈 감추듯 먹는 진호연.
설익은 꼬들면과 부드러운 계란의 식감, 어금니와 정답게 씨름한다.
국물은 입술을 부르는데, 마침 어제 마셨던 맥주 한 캔 때문에 은근슬쩍 취기가 남아있는 상황.
울컥울컥 마시지 않고서야 못 배긴다.
그런데도 맥주를 하나 더 까게 됐다는 게 거대한 함정이다. 이 역시도 불가항력이었다.
그런 맛이다.
"야, 주현아."
"네?"
"너 이거 팔아라. 내가 맨날 먹으러 갈 테니까."
"그건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은데... 그리고 이거 오늘 방금 떠오른 메뉴라서."
"이게 방금 떠오른 메뉴라고?!"
진호연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조합이 완벽했다.
계란과 토마토의 양.
그리고 건더기로 넣은 양파와 베이컨, 토마토의 조합은 의좋은 형제처럼 서로 입 속에서 다투는 법이 없는데 말이다.
허나 송주현은 이런 걸로 거짓말할 사내는 아니었다.
또, 이걸 만들게 된 과정 자체도 돌발적이었다.
가게 재료를 적당히 섞어 빠르게 요리를 내려면 즉흥성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진호연은 납득할 수밖에 없었고, 다음엔 이런 말이 터져나왔다.
"송주현이, 넌 식당 할려고 태어난 놈이구나 사실."
토마토 계란 라면만큼이나 진심이었다.
**
[22:12]
잠금화면의 디지털 시계만 우두커니 깜빡인다. 그 깜빡임이 나를 재촉하는 듯하다.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시간이 조금 늦어졌다.
원래 같았으면 이야기가 훨씬 길어질 뻔했지만 윤슬이 얘기를 꺼냈더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이해해주셨다.
심지어 꽤 본격적으로 도와주실 본새다.
"가게는 어느 상권에 차리려구?"
"주방이랑 홀 혼자서 볼 거냐?"
처럼 핵심적이고도 중요한 질문들을 선뜻 물어보시면서 여러 모로 알아봐주실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런 것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당장 마음이 바쁜 것도 사실이다.
오늘 거의 한나절을 헌책방에 맡긴 셈이니 윤슬이한테도 미안하고, 강씨 아저씨한테도 죄송스럽다.
솔직히 강씨 아저씨와 친분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다음에 식사라도 대접해드려야지.
그나마 빨간 돼지와 헌책방의 위치는 빠른 걸음으로 10분 거리다.
도착하는 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드르륵- 덜컹!
헌책방에 도착하니 윤슬이와 아저씨가 오전에 사뒀던 자동차 모형을 갖고 놀고 있다.
다행이다. 표정이 썩 어두워보이진 않는다.
"윤슬아, 미안해... 너무 늦었지?"
"어... 옵바."
두두두-
달려오는 발걸음이 조금 기운 없어 보였다.
여태 이곳에 있느라 지쳤을까?
내 다리에 폭신하게 안겨든다. 얼굴까지 바지자락에 묻어버리는 게 강아지 같다.
"윤스리 기다려써여..."
"아이구 내가 너무 기다리게했지? 미안해 미안해. 오늘 심심했어요?"
"아냐, 재미써."
"재미 있어~"
그야 그렇겠지.
강씨 아저씨는 웬 가게에 있는 장난감들을 바닥에 다 늘어놓고 윤슬이랑 한바탕 놀아주고 계셨던 모양이다.
애가 이렇게 말한대도 아마 내심 서운하고 걱정도 되고 그랬겠지. 나중에 어디 좋은 곳이라도 데리고 나가야지.
"낮잠 좀 재웠는데, 30분 전에 일어나더라. 그렇게 많이 힘들진 않았을 거야."
아... 낮잠 재워주셨구나.
카운터 쪽에 놓인 소파에서 잔 모양이다.
소파 가죽이 윤슬이 몸집만큼 아래로 슬쩍 꺼진 게 보였다.
근데 낮잠이라기엔 시간이 너무 늦긴 했다. 이따 집 가서 잘 자긴 하려나?
윤슬이를 두 팔로 들어 안아올렸다. 아직 다섯 살이라 그럭저럭 들고 다닐만하다.
애가 아직 잠결에 젖은 것 같으니까 오늘은 이대로 안아서 귀가해야겠다.
들어올리니까 안정적으로 목에 안겨드는 게 가슴팍이 간질간질하다.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아저씨, 오늘 맡아주셔서 감사해요. 대신 다음에 식사 대접 한 번 할 테니까, 저희 집 놀러오세요."
"뭘, 식사 대접까지야. 어차피 나도 애 보는 거 좋아하니까 도와준 건데."
"아뇨, 그냥 감사하기도 하고. 또 아저씨랑 얘기하고 싶은 부분도 있구요."
"? 뭐, 그려. 송주현이가 밥 채려주겠다고 그렇게까지 말하면 나도 싫을 거 없지."
"감사합니다. 다음에 한 번 연락 드릴게요!"
말을 맺고 헌책방을 나왔다.
물론 윤슬이 하루 봐주신 거에 대해 감사한 마음도 있지만...
더 큰 건, 따로 있다.
"식당 하기로 했으면 어떤 메뉴를 팔지 정해야지."
덤으로 우리 먹방 신동 윤슬이한테도 먹어보라고 나눠줘야겠다.
왠지 윤슬이를 팔로 끌어안고 가는데도 평소보다 걸음이 가벼운 것만 같다. 이래서 옛말로 자식을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
라고 표현하는지도 모른다.
자식이 아니라 동생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