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식탁의 목적(2)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기로 하고선 꽤 한가로웠다.
사업장을 어떻게 꾸려나갈지에 대해 사장님과 논의하는 걸 제외하곤 전혀 할 게 없으니 말이다.
시간 여유가 늘었다.
어느 상권에 점포를 낸다던가.
어느 요리를 주력으로 내세울 계획이라던가.
세세한 것들에 대한 기약 없는 고민이 남았지만, 그건 반대로 시간을 투자하더라도 공 들여야 하는 부분이에 급하지 않다.
'사업 시작한다고 너무 급하지 말고, 형이 차근차근 도와줄 거니까. 겁 먹지 말고 너 동생이랑 시간 좀 보내줘.
이제 본격적으로 장사 시작하면 동생이랑 놀 시간도 없어진다.'
라고 전 사장님께서 말씀도 하셨다.
"우리 동생이랑 그 가게에서 같이 지낼 거란 사실은 아직 모르시지.
우리 윤슬이는 홈스쿨링할 건데, 그치 윤슬아?"
"우움? 네!"
응, 방금 뭔지 모르는데 그냥 대답한 거잖아.
다 알아.
좌우지간 요 며칠 사이엔 쭉 윤슬이와 함께했다.
책을 읽어준다던지 단 걸 쌓아두고 먹는다던지 나름 육아의 재미를 느끼고 있던 와중.
난, 눈을 떴다.
윤슬이를 동생으로서도 당연히 아끼지만 그 중에서도 무얼 먹이는 걸 심히 좋아하는 것 같다.
"윤슬이, 오늘은 한 번 이거 먹어볼까요?"
"몬데여?"
"간장 국수."
"조아!"
응, 방금도 뭔지 모르는데 그냥 좋다고 한 거잖아.
다 알아.
최근에 윤슬이에 대해 알게 된 것 중 하나.
내가 제안하면 일단 좋다고 대답한다.
무지성에 젖어 아무런 생각 없이 긍정하는 것 같진 않은데, 뭐랄까.
내가 무언가를 제안했을 때, 그걸 수긍하면 대체로 좋은 결과가 따라온다는 걸 체감한 것 같다.
나중에 유치 빼러 치과 갈 때 편하겠구나.
오전 11시.
아침이라기엔 너무 늦었고, 점심이라기엔 조금 이른 시간. 애석하게도 우린 아직 식사를 못했다.
이유는 별 거 없다.
둘 다 늦잠을 자버렸다.
동생이야 워낙 잠이 많을 시기고, 나는 알바를 그만두었으니 생활에 긴장감이 풀렸달까.
심지어 마침 밥솥에 밥이 없지 뭔가.
내 선택은 간장 국수다.
주방 찬장에 쟁여두었던 소면 포장을 뜯어 뜨거운 물에 3분 정도 끓인다.
그리곤 찬 물에 헹군다.
"음, 딱 좋게 씻겼네."
소면을 삶을 때 가장 중요한 건 얼만큼 삼느냐보다
얼만큼 전분을 잘 거둬내느냐다.
채에 받친 소면을 손빨래하듯 물에 빡빡 씻어내야 입으로 호로록~ 찰지게 빨린다.
간장 국수는 양념도 심플해서 좋다. 기본에 충실한 맛. 진간장과 설탕 4:3 비율로 섞어 면에 비비고, 참기름으로 풍미를 더하는.
과하지 않지만 절대 모자라지 않다.
"안 매우니까 윤슬이가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겠지?"
"네, 근데 윤스리는 매운 거 갠차는데."
"얼씨구? 다음엔 짬뽕도 먹으러가야겠네."
"조아!"
정말 좋은 거 맞지? 이러다 긍정의 화신으로 자라는 거 아닌가 몰라.
내가 손으로 간장 국수를 비비적거릴 동안 윤슬이는 상을 차린다.
저 나이인데도 대견하게도 밥 먹을 때 사용하는 앉은뱅이 식탁을 혼자서 편다.
또, 젓가락과 물컵을 찬장에서 내려주면 뽈뽈뽈 상까지 달려가 나란히 올려두기도 한다.
엄청 대단한 일은 아니어도 저렇게 도와주려고 한다는 점이 나름 감동이지 않은가.
마무리로 쪽파까지 잘게 썰어 올리자 자연스런 색상이 식욕을 자극한다.
갈색 바탕에 흰색, 녹색 풀떼기들이 듬성듬성 모인 모양. 오랜 벗처럼 젓가락을 부르는군.
윤슬이 전용으로 사둔 꼬마 자동차 디자인의 앞접시에 덜자 에디슨 젓가락을 손가락에 끼우고, 오늘의 먹방을 시작하는 장윤슬씨.
나는 식사보다 4D 먹방 관람을 우선하기로 한다.
후루-후루- 후루룩!
"면치기 뭐야?"
일부러 먹기 쉽게 식혀서주긴 했지만 정말 술술 잘도 넘긴다. 웬 인기 너튜버 뺨치는 면치기로 내 시선을 훽 낚아채는 동생.
소면이라 씹어 넘기기 어렵지 않을 텐데도 입에 한움큼 담는 게 식사에 얼만큼 진심인지가 느껴진다.
"전에 포크로 먹을 때보다 훨씬 잘 먹네? 윤슬이가."
"달달해구먼."
"아이구, 달달해요?"
"우물우물~ 녜.."
오늘도 여지 없이 신들린 어휘력을 보여주신다.
할머니 밑에서 오래 자란 탓에 가끔 아이답지 않은 단어를 툭툭 뱉곤 한다.
그런 점이 윤슬이 매력인 것 같다.
너무 동생만 보고 있는 것도 모해서 나도 한 입.
후룩-
입에 담자 누구든 예상 가능한, 단짠 맛이 혀를 부드럽게 감싼다. 위에도 자상할 것 같은 소면이 구강에서 물결처럼 찰랑인다.
아, 내가 이 맛을 언제 처음 느꼈더라.
무심코 기억을 되짚게 된다.
산 정상에 올라 등산로를 복기하듯, 익숙함을 느끼자 그 이유를 되짚는다.
기시감이 돋는 길, 친근한 기억.
그 그늘진 골목 어귀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건 이젠 영영 볼 수 없는 아버지의 등살.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윤슬이만큼, 아니 그보다 더 어렸을 때.
이 음식을 내게 처음으로 맛 보게 해준 건 아버지였던 것 같다.
'주현아, 이거 한 번 먹어볼까?'
청각적 상상력과 기억이 반씩 눅진하게 섞여 플래시백되는 상냥한 말씨.
어제오늘처럼 느껴지진 않아도 그리 멀지 않은 과거처럼 피어오른다.
그때 내가 무어라 대답했더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아버지의 말따라 아무 생각 없이 후룩후룩 중면을 목으로 넘겼던 것 같다.
그런데 중면은 그때의 내게 조금 버거웠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왜냐면 그때까진 아직 제 정신이던 친모가
'아니, 애 아직 이빨도 다 안 났는데 두꺼운 면을 삶아주면 어떻게 해!!'
하고 호통치던 게 어렴풋 기억난다.
그런데 난 그때 미련했는지.
아니면 아버지가 혼나는 모습이 마냥 보기 싫었는지.
불완전한 치아로 어떻게든 우적우적 씹어 삼키려고 했던 것 같다.
다행히 중면도 그다지 씹어넘기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고, 잘 먹었던 것 같은데.
그랬던 것 같은데...
솔직히 잘 기억이 안 난다.
시야가 바다 속처럼 울렁인다.
그 옛된 바다 속에서 여린 목소리가 나를 낚싯바늘처럼 끌어올린다.
"옵바..."
"으응?"
"왜 우러여?"
"아, 음식이 맛있어서 그랬어요. 윤슬이가 놀랐구나."
"아니에여. 만화에서도 바써. 근데 윤스리는 마시쓰면 웃는데..."
얼마 전에 맛있는 음식을 먹고 눈물 흘리는 리액션을 만화에서 본 모양이다.
우연이지만 도움이 됐다. 내가 우는 모습을 봐서 윤슬이가 얼마나 놀랐을까.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교통사고처럼 돌연 찾아온 감정 기복에서 나를 꺼내준 것은 윤슬이였다.
"고마워, 윤슬이."
"모가?"
천진한 얼굴로 소면을 후룩후룩 먹고 있다.
아무 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소면을 목구멍에 우겨넣곤 윤슬이와 함께 외출 준비를 한다.
오늘은 같이 동대문까지 외출하기로 했다.
DDP에 가고싶다나.
뜬금 없이 다섯 살짜리 애가 무슨 디자인 플라자에 흥미를 갖는지, 처음엔 나도 의아했지만 전시 목록을 찾아보곤 곧바로 수긍했다.
자동차 전시회가 있던 것이다.
나까지 덩달아 동대문에 가고 싶어졌다.
남매끼리 취미를 공유하는 건 꽤 괜찮은 일이다.
적어도 어디 외출할 때, 억지로 한 쪽이 나머지 한 쪽을 따라가는 느낌이 안 들잖아.
"옵바, 이거..."
윤슬이가 우리 집에 처음 오던 날 입고 있던 아동용 더플 코트를 내게 들이민다.
"팔이 안 드러가."
"팔이 안 들어가? 그럼 내가 입혀줘야지요."
더플 코트의 울 조직이 단단하게 짜여, 신축성이 없으니까 입기 힘들었나보다. 아동복으로 만들 거면 조금 더 배려해주면 좋을 텐데.
근데 생각해보니까 윤슬이 외투가 이것밖에 없지 않나?
"동생, 오늘 옷 한 벌 새로 살까?"
"움..."
"우리 윤슬이 이쁜 옷 입으면 더 이뻐져서 안 되려나?"
"이뻐?"
"그럼, 윤슬이가 좋아하는 걸루 한 벌 사자. 레이싱 자켓 어때요?"
"오오오! 레이싱! 조아여."
5살에겐 어려운 어휘지만 레이싱이란 말도 안다.
우리 집 TV 채널은 주로 두 남매의 합의 하에 스포츠카의 레이싱 경기에 고정되곤 하니까.
마침 사장님께서 아르바이트 퇴직금으로 2000만 원 정도 챙겨주셔서 자금에 여유도 있는 상황이다.
물론 새로 점포 얻고, 인테리어 가꾸고, 여러 모로 쓸 구석은 많지만 그래도 그 중에 동생 옷 한 벌 사줄 돈 없으랴.
**
"우오... 흐어..."
아까부터 웬 아저씨가 국밥 한 그릇 들이킬 때 내는 흠흠한 소리를 연발한다.
우리 여동생이다.
허나 주위의 사람들은 그저 귀엽다는 듯이 쿡쿡거리며 지나간다. 자동차의 주위를 두른 빨간줄에 엉겨붙을 듯 눈을 밝히고 차를 구경하는 윤슬이는 오히려 전시장의 차체보다 더욱 주목을 끌고 있다.
"그렇게 좋아?"
"웅, 머시따."
"한 번 자동차 윗부분도 봐봅시다, 장윤슬씨."
나는 윤슬이를 번쩍 올려들어 내 시야와 가깝게 맞춰준다. 내 허리까지 오는 윤슬이 신장으로는 차창 위로부터는 잘 보이지 않을 것 같다.
윤슬이는 내 팔에 들린 채로 들썩들썩 기웃기웃하며 차체를 구경한다.
그런 모습도 깜찍하다.
- 야, 보닛 존나 쌔끈하다?
- 인정. 근데 어차피 못 삼.
- 응, 난 돈 벌어서 살 거~.
- 제발 꿈 깨라, 니 경차 할부금이나 다 갚을 생각부터 하시고.
음, 확실히 보닛 쪽이 매끄러운 곡선으로 빠진 게 매력적이긴 하지. 그게 B사의 장점이랄까.
그건 그렇고 윤슬이 앞에서 그런 어휘를 남발하시는 건 개인적으로 탐탁지 않습니다만.
"움? 쌔끈해~?"
미치겠네.
고새 따라한다, 장윤슬.
"윤슬아 그런 말은 적어도 열 살 넘어서부터 배워주면 안 될까... 내가 부탁할게."
"안 대?"
"안 된다고 하기엔 좀 그런데... 이르달까."
"알게씀니다..."
혼낸 건 아니었는데 윤슬이가 입술을 비죽 내민다.
동생의 신바람이 한풀 꺾이자 갑자기 주변의 면식 없는 아주머니가 한 마디 거들어주신다.
- 아니, 이 양반들이! 바로 앞에 애기가 앞에 있는데 되먹지도 않은 소리나 하고 있대? 다 큰 인간들이 점잖을 줄도 모르고?!
- 으아! 죄송합니다.
주변에서도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었나보다.
뭐, 저쪽은 다 큰 어른이고 어떤 말 사용하든 자기들 마음이긴 한데.
왠지 나까지 머쓱해진다.
"아, 아뇨 그러실 수도 있죠. 하하하하..."
웃음으로 무마하며 아주머니께 눈인사를 건넨다.
윤슬이 데리고 전시장의 다른 쪽으로 넘어가자.
애를 데리고 있자니 여러 모로 주변 환경의 변화가 자주 일어난다. 특히 처음 보는 아주머니들이 곧잘 아군이 되어주신다.
감사한 육아 선배들.
애 키우면서 뭐가 힘들고, 어떤 부분이 곤란한지 이미 알고 계시니까 저렇게 거들어주시는 것 같다.
덕분에 여러 모로 편하다.
전시장의 다른 쪽으로 넘어가자 의외의 코너가 준비돼있어서 조금 놀랐다.
B사의 디자이너들이 기획하여 만들어놓은 갖은 상품들이 있었는데, 마침 찾던 것도 저기 같이 있다.
"윤슬아 저기 봐봐."
눈을 반짝 빛내는 동생.
보라고 하기 전부터 이미 그곳에 집중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