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식탁의 목적(6)
뽈뽈뽈뽈-
뚜벅- 뚜벅-
윤슬이와 발을 맞추어걸으면 걸음걸이가 조금 느려진다. 다섯과 스물다섯의 보폭 차이니 말이다.
그 덕에 조금 더 주위를 살피면서 여유롭게 걷게 되었다. 예전엔 어딘가로 걸어야 한다면 그건 목적지로 도달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지루하고 지루한 일이다.
허나 요즘엔 걷는 게 조금 즐거워졌다.
윤슬이가 도시의 전경이 신기해 기웃거리는 것도 귀엽다. 예를 들어 자기보다 조그마한 강아지와 우연히 만나 서로 체온을 나눈다던가.
담을 걷는 길고양이가 어디로 가는지 함께 생각해본다던가.
그런것들 덕분에 어딘가로 걸어가는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되었다.
"옵바, 옵바! 강아지!"
"옵바, 옵바! 고냥이!"
하고 내 손을 꾹꾹 잡아당길 때마다
"음 그러네? 조금만 같이 놀다가 갈까요?"
하며 멈춰서야 했지만 윤슬이가 만세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모습에 마음이 녹는다.
또 주위의 시선도 은근히 웃음짓게 한다.
곧잘 시민들과 눈이 마주친다.
- 아, 죄송합니다 자녀분 눈이 너무 이뻐서 쳐다보게 됐네요.
- 아버님이세요? 엄청 젊으시다. 애기도 엄청 이뻐요! 나중에 꼭 모델시키세요.
- 따님이 너무 먹고 싶은 듯이 쳐다보는데, 빵 하나 나눠드릴까요? 혹시 괜찮으시면요.
위와 같이 곧잘 말을 걸어온다.
때마다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뒤로 숨는 수줍은 꼬마 아가씨를
"윤슬이, 인사드려야지."
하고 앞으로 끄집어낸다.
그러면 여지 없이.
"장윤들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게 내 동생이다.
대형 마트를 가는 길도 그런 일상의 즐거운 반복이다.
그런 반복이긴 한데 이번엔 조금 특이한 일도 있긴 했다.
부아아아앙-! 터더덩-
웬 오전 시간대부터 판타지에서 나올 법한 붉은색 긴머리를 휘날리는 한 명의 라이더가 할리(고가의 오토바이)를 타고 골목길을 달리는 게 아니겠는가.
그다지 빠른 속도는 아니었던 터라 나무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걸 본 윤슬이와 내 목소리가 겹치는 게 재미있었다. 우리가 뱉은 세 글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머싯다...""
아무래도 우리 남매는 자동차만이 아니라 오토바이에도 큰 흥미를 보이는 것 같다.
이럴 때마다 핏줄이란 게 실감 나서 마음이 들뜬다. 대략 좋은 쪽으로.
마트에 도착하곤 곧장 식료품 코너로 내려갔다.
구매목록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그래서 사는 데는 얼마 걸릴 것 같지 않았는데.
- 아버님~! 따님이랑 같이 만두 하나 드셔보세요. 따님이 너무 귀여우시네!
- 이쪽에 오리 고기도 있어요! 한 번 드셔보세요. 2+1 행사중입니다.
날 '아버님'으로 보는 직원분들의 호객이 이어졌다.
심지어 우리 장윤슬씨는 홀랑 넘어가 만두를 하나 집기 직전까지 갔는데
내가 뜯어말렸다. 윤슬이를 들어안고 재빠르게 자리를 떴다.
"윤슬아, 항상 음식 먹을 땐 조심해야 돼. 오빠가 주는 것만 먹자.
네가 섣부르게 손댔다간 이 마트 음식 다 털리는 거야. 넌 그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인간이라고!"
"움... 그게 몬데."
윤슬이는 알아들을 수 없단 듯이 입술을 비죽 내민다. 그래, 누가 보면 오바하는 줄 알겠지.
그러나 이미 동대문에서 윤슬이의 능력은 검증되었다. 괜히 동네 마트에까지 이변을 일으켰다간 상황이 안 좋게 번질 것 같다.
어느 기자가 인터넷에 [모 대형 마트에서 하루만에 굳만두가 완판된 이유?]라는 기사를 싸지를지도 모른다.
주위의 주부들이 불필요한 소비를 하지 않게 돕는 일이다, 이건.
"암튼 오늘은 가지랑 돼지 후지만 사서 금방 나갈 겁니다, 장윤슬씨."
"우우... 네.."
"대신 오빠랑 재미 있게 장봐주면 이따가 초코도 주고 제육도 해줄게."
"오오오...!! 졔육... 쵸코..."
얼마 전에 시험 삼아 동생한테 떠오른 레시피로 제육을 만들어줬더니 잘 먹더라.
그 음식을 개업할 식당의 주메뉴 1안으로 생각 중이다. 윤슬이는 이래 봬도 입맛에 나름의 기준이 있다.
먹는 건 좋아해도 맛있는 걸 먹었을 때와 맛없는 걸 먹었을 때의 반응이 확연히 다르다.
내가 만들었던 제육은 전자였다.
정육 코너 쪽으로 오자 명백히 시야가 바뀌었다는 걸 알게 됐다. 내게 생긴 '음식에 관한 특별한 능력' 덕분인 것 같다.
"보는 눈이 아예 달라졌구나."
예를 들어 고기의 팩 바깥을 만져보거나 색을 보거나 하는 것만으로도 신선도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누가 뭐래도 고기는 선도가 제일인데, 대형 마트인 만큼 품질 자체는 잘 관리된 것 같았다.
"근데 문제는 지방과 살코기의 비율이지."
사실 육안으로 판별하긴 어려운 부분이다.
아무리 대형 마트라도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비율까지 표시해서 주진 않는다.
그저 무게에 맞춰 정형한 걸 팩에 나눠 담아 매대에 올려둘 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 눈으로 꼼꼼히 살펴보자 지방과 근막, 그리고 살코기의 비율을 언뜻 알 것만 같다!
즉, 눈 앞에 여러 식재 중 최고의 것을 고를 능력이 내게 생겼다는 말씀.
"동생, 이 맛있어 보이는 돼지 뒷다리로 제육 만들 거야. 어떻게 생각해."
"음... 버얼겋구먼?"
한 번 보라고 들이밀었더니...
또, 할머니한테서 배운 구수한 어휘가 작렬하는군.
후지를 한 팩 장바구니에 담고 채소 코너로 향했다.
그곳엔 웬 뿔테 안경을 쓴 점원이 헤실헤실 웃으며 호객 중이었다.
주부들도 몇몇 몰려있었다.
"음..? 채소 코너에서 왜 저러고 있지? 행사라도 하나."
잔잔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논리나 이성이 아닌 감각에서 비롯됐다.
가지를 사러 고개를 들이밀었더니 두 분류로 나누어져있었다.
투명한 봉지로 잔뜩 패키징된 쪽과 낱개로 파는 쪽.
보자마자 대충 뭔지 알 것 같았다.
- 어머! 아버님, 자녀분 건강 챙기려면 채소 가지고 들어가셔야죠? 지금 묶음으로 판매 중인데, 요거 행사 상품이니까 들여가세요!
마침 날 보고 뿔테 점원이 가지 들여가란다.
양 자체는 얼추 보아하니 8개 정도.
가격도... 나쁘진 않고.
- 지금 가지 들여가시려면 묶음으로 사는 쪽이 훨씬 싸세요~. 품질도 좋으니까 이쪽으로 사가세요!
묶음 쪽이 더 가격적으로 메리트가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품질이 좋다고?
구라를 치네.
아마 재고 떨이하려고 저러는 모양이구만.
묶음으로 된 것들이 물론 못 먹을 정돈 아니었지만 2류의 느낌이 났다.
차라리 낱개로 된 쪽이 가격은 몇 백원 비쌀지 몰라도 더 내실 있다. 짙은 색깔과 고운 빛깔. 또 흠집 없이 깔끔하다.
반면 묶음 쪽은 색이 옅고, 흠집이 있는 게 드문드문 눈에 띠었다.
나는 말 없이 낱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굳이 점원 권유를 들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 돈 써서 내가 먹겠다는데.
- 어머, 손님! 낱개보다 묶음 쪽이 싼데? 에헤이, 따님 생각하셔서라도 괜찮은 상품 들여가셔야죠~!
"묶음 쪽이 그렇게 좋으시면, 아주머니나 퇴근하실 때 한 봉지 사가세요. 저는 이쪽이 더 좋아보이니까."
- ....
순간 주위가 싸해졌다.
근처의 주부님들도 동공을 굴리며 눈치보기 시작한다.
나라고 굳이 싫은 소리 덧붙이긴 싫었지만 수가 너무 뻔히 보이는 게 짜증을 유발했다.
질 떨어지는 가지들을 모아 싸게 판다는 취지 자체는, 뭐 나쁘지 않다고 본다.
그게 소비자의 수요에 맞다면 팔리는 거겠지.
그런데 저런 식으로 품질이 좋다며 거짓을 말하고.
또, 내가 모른 척 넘어가며 딴 거 사려고 하니까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게 솔직히 귀찮았다.
괜한 소리했나 싶기도 한데.
못할 말 한 건 아니니까.
"응? 윤슬아?"
"아쥼마, 요기."
그 와중에 윤슬이는 내 맘을 아는지, 아니면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인지 모르겠는데.
어느새 뿔테 점원 앞까지 가서 행사용 가지 한 묶음을 들이민다.
얼떨결에 점원은 가지를 받아든다.
"마싯게 머거여. 테근할 때 가져가여."
뽈뽈뽈-
그리곤 줄행랑.
내 다리에 찰싹 들러붙는다.
낱개 가지를 몇 개 봉지에 따로 담아 챙기곤 채소 코너에서 떠났다.
그곳을 등지며 윤슬이가 혼자서 중얼거린다.
"옵바 화나게 해써, 아쥼마가. 나쁜 아쥼마."
내 마음까지 다 알고 그런 거구나.
잘했어 내 동생.
폭신한 머리를 만져준다.
윤슬이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린다.
뒤쪽에 그 아줌마가 없더라면 목마라도 태워줬을 텐데.
계산대로 향하며 그 점원 쪽을 슬쩍 돌아보자 약간 넋이 나간 듯 보인다. 아마 주위의 주부들이 행사용 묶음 가지 쪽에서 발길을 돌렸기 때문인 것 같다.
셀프 계산대로 왔다.
요즘엔 이런 것도 잘 되어있다.
굳이 줄 설 필요 없이 바코드만 찍어서 스스로 계산하면 되니까, 이런 점은 참 편하다.
삑-
삑-
돼지 후지와 가지 봉지의 바코드를 차례로 찍자 뾰족한 기계음을 내며 화면에 가격이 찍힌다.
총 만 원 이하로 알뜰하게 소비했다.
돼지 뒷다리는 싸면서도 맛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부위. 가지야 해봤자 얼마 하겠는가.
특히 다음달부터는 제철(4월에서 8월까지)이니 더 싸질 걸?
아마 매장 차리고 나서부터 제철될 테니까 재료값 좀 세이브 되겠다.
"뚜익-! 뚜익-!"
윤슬이는 꼭 마트에서 바코드 찍을 때 저 소리를 한 번씩 따라내더라. 저번에도 그랬던 것 같은데.
그러면서 자기 코 밑을 슬쩍 닦는다.
머쓱한 건지
아니면 스스로 잘 따라한 것 같아서 자만심이라는 뽕이 차오른 건지.
둘 중 하나인 것 같은데.
둘 다 귀엽다.
"윤슬이 이거루 같이 요리 맛있는 거 해먹자, 오빠랑 강씨 아저씨랑, 호연 형님이랑."
"조아여. 졔육?"
"응 제육. 그리고 이 보라색 채소로 다른 것도 하나 해줄 거야."
"보라색? 가지?"
"응, 가지로."
"으에에..."
인중을 길게 늘어뜨리며 명백히 싫다는 듯한 표정이다. 딱히 날 기분 나쁘게 하려고 그러는 것 같진 않고. 그냥 가지에 대한 선입견이 안 좋은 게 아닐까?
하긴 가지가 애들한테 인식이 좋은 식재료는 아니긴 해. 아마 할머니도 시큼하게 무쳐서 윤슬이한테 먹이셨겠지.
"이 오빠만 믿으세요, 장윤슬씨."
"움, 웅. 근데 가지눈 안 미더여."
딱 기다려.
내가 맛있게 만들어볼테니까.
돌아가는 길엔 강씨 아저씨와 호연 형님에게 각각 전화해 약속을 잡았다.
아마 일을 다 끝내고, 늦은 시간이 되겠지만 그때라도 와달라고 부탁했다.
식당에서 팔 주력 메뉴를 선보이는 시간이다.
내게 굉장히 큰 도움이 되어준 두 어른은 꼭 한 번 먹어줬으면 좋겠다.
둘 다 꽤 오래된 인연이니 분명 가감 없는 평가를 내려주겠지.
"두 사람은 맛있게 드시려나?"
그랬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