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식탁의 목적(7)
"옵바."
"응?"
"저 차는 얼마만큼 빨라여?"
"음... 도로에서 돌아다니는 자동차들보다 네 배 정도는 빠르려나?"
"네 배?"
"응... 그 정도."
"우움...?"
윤슬이를 무릎에 앉히고 티비 시청 중이다.
저녁은 이미 먹었고, 노곤해질 무렵이지만 윤슬이의 눈길은 티비에 고정돼있다.
레이싱 프로그램을 보느라 그렇다.
인기 있는 채널은 아니지만 우리 같은 고정 시청자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유지되고 있는 게 아닐까?
씽- 씽-
트랙을 따라 달리는 차체와 속도감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그걸 보고 윤슬이도 꽤 마음에 드는 듯 눈을 떼지 못하는데, 글쎄.
저 속도를 어떻게 윤슬이한테 표현해주면 좋을까.
도시의 4~8차선 도로를 지나다니는 차들보다 몇 배는 더 빠르다-
라는 식의 설명으론 도무지 다섯 살 난 아이에겐 이해하기 어려울 텐데 말이다.
음...
엇!
"윤슬아, 저 차를 타고 가면 할머니네 댁까지 한 시간도 안 돼서 도착할 수 있어!"
"한 시간?"
"응, 시계 긴 바늘이 한 바퀴도 안 돌 만큼 짧은 시간."
"우오! 거 아주 빨르네."
이 정도면 적당한 설명이었을까.
나름 납득한 듯 눈썹을 위로 치켜올린다.
할머니 댁은 강원도 동쪽 끝, 강릉이니 레이싱 카의 속도라면 분명 한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간에 신호에 걸려 지체되거나 정체 구간에라도 막혀버리면 안 되겠지만.
마침 내일모레 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들르신다는 게 기억난 터라 그런 비유를 들어봤는데,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옵바."
"응?"
"아져씨는 언제 와여?"
"음... 곧 오실 거야."
"곧?"
"응, 곧."
시계를 보니 슬슬 10시였다.
그럼 호연 형님도 오늘 장사 마감하고 이쪽으로 오실 테고.
또, 강씨 아저씨도 이리 오시겠지.
지난주에 헌책방에 데리고 가서 한나절 동안 맡겼는데, 그때 아저씨와 꽤 재미있게 놀았던 모양이다.
그 뒤로도 종종 강씨 아저씨 얘기를 윤슬이가 먼저 꺼내곤 한다.
그나저나 또 주현윤슬 하우스가 비좁아지겠군.
두 분 다 덩치는 꽤 큰 편이니.
"윤슬아 슬슬 상 차릴까요?"
"졔육?"
"그렇지."
"아까 윤스리가 주물러써."
"그치. 윤슬이가 주물렀어. 오빠 도와주느라."
"네! 재미써!"
혹자는 애늙은이 입맛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제육은 재워야 제맛이다.
지금도 냉장고에서 고이 주무시고 계신다.
저녁 먹기 전쯤엔 윤슬이랑 미리 구매해둔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손질하여 양념을 묻혔다.
찐득하고 양파가 섞여 싱싱한 양념을 고기에 묻히자 달고 신 냄새가 비강 내 점막을 슬슬 문질렀다.
윤슬이는 벌써부터 침을 흘리며 고기를 탐냈지만 '조금 이따가 아저씨들 오면 같이 먹자.'
라고 하니까 꿀떡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고기에 양념을 고루 묻히려 주무르자 윤슬이가 바짓춤을 쿡쿡 잡아댕겼다.
'옵바.'
'네, 말씀하세요 아가씨.'
꼭 날 부를 땐 이러더라.
용건까지 같이 말하면 되는데, 먼저 '옵바'하고 부른 다음에 내가 대답을 해줘야지 하고 싶은 말을 잇는다.
이건 아마 윤슬이라서 그렇다기보단 이 나이대의 애들이 다 이런 것 같다.
"윤스리 해보고 십다."
"이거? 주무르는 거?"
"네.. 주물르는 거.."
"그럼 해봐야지요. 근데 윤슬이가 처음 해보는 거니까 오빠랑 같이 할까?"
"네! 가치가 조아여."
배실배실 웃으면서 내 앞으로 꼼지락거리면서 들어온다. 윤슬이랑 같이 앉은뱅이 식탁에 앉아 고기를 주물주물 했다.
윤슬이의 쪼그만한 손을 내 밑에 두고 팔을 겹쳐 주물거렸는데 그 촉감이 마냥 신기한지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게 웃겼다.
가끔 사람들이 나더러 윤슬이 아빠 같다고 하는 게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봐도 이 장면은 조금 부녀 같다.
"옵바."
"네, 왜 부르실까요?"
"나중에 요리 가르쳐주세여."
"요리?"
"윤스리도 요리 조아해."
내가 최근에 요리를 많이 만들어줘서일까?
동생이 갑자기 요리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그야 할머니께서도 장사를 하셨으니, 우리 집안엔 일종의 요리 유전이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우리 가게 잇겠다고 하는 거 아냐?
200년 뒤쯤엔, 5대째 이어지는 전통의 요릿집까지 이어진다던가.
그런 망상을 뭉게뭉게 피우며 윤슬이와 고기를 주물렀고.
시간이 흘러 그 재워둔 고기를 다시금 꺼내자 향긋한 양념육의 냄새가 스멀스멀 오른다.
"크, 이거 데워다가 밥에 얹어 먹으면 기가 막히겠다 윤슬아. 그치?"
"밥은 아까 머거써."
"어? 그럼 윤슬이는 이거 안 먹구 오빠랑 아저씨들만 먹으면 되겠네요?"
"한 번 더 머거도 대는데여..."
요즘은 윤슬이 이렇게 한 번씩 또 놀려주는 게 재미있다. 순수해서 반응이 꾸밈 없이 나오는 점이 또 매력적이라 무심코 장난치고 만다.
"한 번 더 먹어도 되는구나? 생각해보니까 일부러 아까 저녁 조금만 먹었죠?"
"네..."
그러면서 자기 배를 문질댄다.
다섯 살치곤 꽤 많이 먹는 것 같은데 통통하지도 않고 적당한 체형이다.
살 안 찌는 것도 집안 내력인가.
부우웅-
마침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금 두 분 다 만나서 출발하신단다.
헌책방과 고깃집.
두 사업장의 거리가 멀지 않아 서로 아는 사이다.
그 덕에 이렇게 함께 초대해서 식사하는 것도 가능하니 이것도 어찌 보면 운이 좋은 일이다.
"도착하면 딱 먹을 수 있게 준비해둬야겠다."
재워둔 양념육을 꺼내 금세 달아오르는 팬에 붓는다.
치이익-!
양파와 파에서 나온 수분이 팬의 열과 부대끼며 하늘 위로 펄펄 증발한다.
뒤에서 윤슬이가 "구름 같다..."라고 표현하는 게 팬의 지글거리는 소리와 섞여 귀에 쓸려들어온다.
내 기분도 붕 뜨는 것 같다.
낙낙한 양념과 국물이 자작하게 끓어오르자 제육이 익는 건 금방이다. 특별한 재료를 넣었기 때문에 유독 붉은 색이 이뻐보인다.
이어서 냉장고에서 가지를 꺼내자 윤슬이의 눈매가 좁아진다.
"우으.. 가지다."
명백한 경계심을 보이는 고양이처럼 몸을 숙인다.
대체 가지랑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까지 경계하는 거지?
"어허! 윤슬이, 아직 가지를 속단하긴 일러요. 싫어하더라도 한 번 먹어보고 나서부터 싫어하자."
물론 가지 자체가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음식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방법으로 조리된 가지를 먹어 안 좋은 인상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지를 한 입 크기로 썰어 전분으로 만들어둔 묽은 반죽을 묻힌다.
얕게 깔린 기름에 바싹- 튀긴다.
지글지글 끓는 기름이 가지를 금빛으로 물들인다. 곳곳에 기름이 스민 가지의 맛을 상상만해도 혀까지 침이 차오른다.
치킨이나 크로켓이라면 두 번 튀겨야 맛있지만 가지는 한 번만 튀겨도 적당히 촉촉하고 식감이 좋다.
튀김과 가지의 밸런스를 신경 쓰는 것이다.
갓 튀긴 가지 튀김을 젓가락으로 집어 윤슬이의 앞으로 가져간다.
연노란빛으로 귀여운 튀김 옷을 입은 가지를 보자 윤슬이의 볼이 축 늘어진다.
"어때?"
"움? 가지?"
이게 가지인 줄도 모르는 건가.
하긴 살짝 보랏빛 껍질이 보이긴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보면 그냥 과자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 번 먹어볼래?"
"아움..."
대답도 없이 고대로 입으로 쏘옥 넣어버린다.
프허-
흐어-!
우물우물.
갓 튀긴 건데 고민도 없이 입에 담다니.
열에 대한 개념은 있을 텐데, 그냥 담력이 대단한 것 같다.
"야, 당연히 뜨겁지... 방금 튀겼는데. 오빠가 호호 불어주는 거 기다려야죠."
"흐으.. 흐으.. 마시써... 뜨거.. 마시써.."
"으이구.. 잘 먹는 거 보니까 그래두 이쁘네."
윤슬이 머리를 한 번 꼬깃꼬깃 만져주고 곧바로 찬물을 갖다주니까
벌컥벌컥 들이킨다.
"프허-! 사라따.. 이거 가지야?"
"네, 가지 튀긴 겁니다. 맛은 좀 어떠셨어요 장윤슬씨?"
"아주 조아씁니다!"
동생의 엄지척. 고사리만한 손가락이 조이스틱처럼 까딱거린다.
아까 레이싱 프로그램에서 트랙을 완주한 레이서가 보이던 세레모니였는데
고새 그걸 따라한다.
젖살이 덜빠진 동생의 등살을 투닥투닥 두드려준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럽지.
어느새 동생 바보가 되어버린 것 같다.
물론 그냥 튀기기만 해서는 가게 메뉴로 내놓을 수 없지. 특제 소스를 만들어서 뿌려줘야 한다.
손님 두 분이 오기 전에 후딱 만들어야지.
옆에서 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가만가만 바라보는 윤슬이. 동생이 옆에 있으니 손을 움직이는 순간 순간이 피로하거나 고단하지 않았다.
**
"누구셔요?"
벌컥-
"아이구 윤슬이가 마중을 나와주네?"
울리는 초인종에 윤슬이 보고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강씨 아저씨가 무릎을 쪼그려 윤슬이와 시선을 맞춘다.
"아저찌다."
"아저씨가 윤슬이 보러 놀러왔네?"
"네! 초코 아저찌."
음, 강씨 아저씨는 아무래도 초코를 주는 아저씨로 인식된 모양이다.
오빠가 옵바로 변한 정도는 매우 양호하다고 볼 수 있다.
"아저씨 옆에 잘생긴 오빠도 있는데?"
"에엥.. 그거 아니에여."
호연 형님이 본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오빠'라고 자칭한다.
그러자 윤슬이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내 쪽으로 쫄래쫄래 도망을 온다.
"옵바는 요기."
내 동생은 선이 확실한 편이다.
그 모습을 보고 호연 형님은 내심 상처 받은 건지 애처럼 입술을 대빨 내민다.
아니, 당신이 다섯 살이냐고.
불혹을 바라보는 양반이 입술을 그렇게 닭똥집처럼 내밀고 계시면 곤란하다.
튀긴 가지에 소스를 뿌리면서 식탁에 앉은 세 사람의 대화를 드문드문 엿듣는다.
아무래도 호연 형님의 정체성은 '빨강모자 삼촌'인 것 같다. 본인 가게 상호와도 연관된 색이 마음에 들어 종종 쓰고 다니는 모자인데.
오늘 그 포인트가 윤슬이 눈에 딱 사로잡힌 거다.
"자, 자, 빨모 삼촌이랑 초코 아찌. 식사들 하십쇼.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습니다."
"야! 주현이, 너까지 빨모 삼촌이라 부르면 내가 진짜 삼촌인 것 같잖아! 형이라고 불러달라고."
이제 사장님이 아니니까, 아저씨나 삼촌이라고 부르려고 고민했다. 그러나 본인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기에 형님이라 부르기로 약속해버렸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니까, 그다지 어색한 호칭은 아니다.
"호연아... 추하다. 너 정도면 솔직히 주현이가 삼촌이라 불러도 그러려니 해야돼. 윤슬이는 둘 째 치고."
"아니, 필중 형님까지 그러십니까! 저는 젊게 살고 싶다고요."
"이 양반아 젊게 살고 싶다고 젊어지니? 그냥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여라."
"흑... 야속한 세월."
강필중, 헌책방 아저씨의 일침에 호연 형님은 거의 녹아웃 직전이다.
"윤슬이가 지금 두 분 기다리느라 제육이랑 가지 튀김도 못 먹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식기 전에 드시면서 얘기하시죠."
두 분은 윤슬이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침을 흘리기 일보 직전이다.
세 남자가 뭐라고 이야기하는지에는 전혀 관심 없어보인다.
저녁을 조금 부실하게 먹어서 배고플 즈음이긴 하다.
그런데 재미 있는 건 윤슬이의 시선은 제육이 아니라 오히려 가지 튀김 쪽에 가있다.
불그스름한 특제 칠리 소스를 부은 가지 튀김. 노릇한 튀김의 표면과 어우러져 미학적으로도 나쁘지 않다.
쪽파까지 송송 썰어 올려줬는데
초록, 빨강, 노랑이 적절히 섞여 신호등 조합이다.
"옵바, 나 이거."
"가지 집어줘?"
"네!"
옆에서 두 어른은 눈을 휘둥그레 뜬다.
중년이 저런 표정을 지으니 정말로 놀란 얼굴로 보인다.
다섯 살 애가 가지를 집어달라고 하는 게 조금 특별한 일이긴 하지.
"뭐야, 애가 가지를 좋아해?"
"두 분 다 한 번 맛부터 보시죠. 기가 맥히게 만들었으니까."
아움!
입을 크게 벌려 칠리 소스가 찐하게 묻은 가지 튀김을 입안 가득 넣는 윤슬이.
딱 먹기 좋은 만큼의 온도로 식어있어 불어주지 않아도 오물오물 잘 먹는다.
그 표정은 정말로 황홀해보인다. 눈이 햇빛이 비춘 잔물결처럼 반작반작.
그 모습을 보자 두 중년도 입에 침이 고이나보다. 꿀꺽- 하고 침을 삼키더니.
그대로 젓가락으로 입에 가지 튀김부터 가져간다.
바삭!
으적으적-
두 남자의 입가에도 슬며시 미소가 감도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