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분홍색 맛 났어!(1)
"으으... 여긴 모야."
낮게 신음하는 장윤슬은 주위를 둘러본다.
잔잔한 볕이 비추는 벚꽃길.
옆엔 처음 보는 호수가 있고.
그 호수를 빙빙 둘러 벚나무가 늘어서있다.
"버꼿?"
기억을 거슬러보니, 엊그제 오빠가 함께 벚꽃을 구경하러 가자고 했던 것 같다.
아, 지금 구경하러나온 거구나.
"옵바는 어디?"
오빠가 안 보인다.
오빠는커녕 사람 하나 안 보인다.
이 드넓은 호수를 둘러싼 산책로에 사람이라곤 오직 자신 하나뿐인 것이다.
"움? 옵바를 이러버렸어. 어디찌?"
결코 미아가 된 것이 아닌, 본인이 송주현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장윤슬.
바닥이 잘 마감되어 평탄한 산책로를 따라 뽈뽈뽈 걷기 시작한다.
허나 얼마간 걸어도 풍경은 같다. 호수는 원형이고, 아무리 걸어도 사람은 나오지 않으니 유의미한 행동은 아니다. 주위의 경치도 그닥 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잠시 멈추기로 한다.
스산히 부는 바람. 잘 보이지 않는 화분이 넘실거려 공기가 노랗게 뜬다.
바람에 얹혀 벚꽃이 날아들고, 그 풍경을 묵언으로 바라보는 장윤슬.
"움! 이뿌다!"
역시 오빠 말을 따라 나오길 잘한 것 같긴 한데.
중요한 건 오빠가 또 사라졌다는 것이다.
언젠가 한 번 이렇게 사라져서 오빠를 찾아걷다가 밭줄을 타고 다니는 이상한 녀석들을 조우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언제여떠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때였다.
무언가가 몸을 낚아챈다.
오빠처럼 부드럽게 들어올려주는 것은 아니고, 훨씬 거칠다.
붕- 뜬다.
눈 앞에 있는 건 벚나무 괴물이다.
망측한 괴물은 줄기를 이용해 윤슬이를 높게 들어올리더니 커다란 입 속으로 쏙 집어넣는다.
"우어어어어!! 떠러진다!!!"
괴물의 입 속은 꽤 깊었고, 끝 없이 떨어지다가
크게 뒤척이며 꿈에서 깼다.
"프허- 왜케 기퍼! 놀래따..."
이번에야말로 악몽을 꾼 주제에 꽤 침착한 장윤슬이었다.
괴상하게 생긴 괴물, 그 자체보다는 떨어지게 된 깊이에 놀라게 된 것이다.
"개물 입이 왜케 크지?"
혼잣말하며 꿈을 복기한다.
그제야 현실을 자각하고 옆을 보자.
"으으으으... 후우."
자신이 손가락으로 코를 막는 바람에 열심히 구강 호흡 중인 오빠가 눈에 보였다.
"앗, 옵바 미아내."
손을 재빠르게 치운다.
그제야 송주현의 얼굴 근육이 느슨히 풀어진다.
떨어지는 꿈을 꾸는 바람에 뭐라도 잡으려 발버둥치다가
하필 옆에서 곤히 자던 오빠의 코를 잡아버렸다.
"자니까 모르게찌?"
다행히 핀잔을 듣진 않을 것 같다.
오빠의 머리맡에 놓인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하자 시계가 나온다.
[05:27]
"우어, 엄청 일찍 인나써."
보통 윤슬이는 일곱시 반이 다 돼서야 일어난다.
항상 오빠가 깨워주기 때문에 이 시간에 스스로 일어난 적은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잠시 고민에 빠진다.
이제 뭘해야 되는가.
오늘은 오빠랑 나들이를 가자고 했으니 굳이 출근하는 날마냥 준비를 서두를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오빠가 이렇게 곤히 자는데 깨워서 놀아달라고 하긴 미안하다.
TV나 볼까 싶기도 하지만.
"그러믄 옵바가 시끄러. 잠 다 깨여."
사면초가.
TV도 못 보고, 씻고 나갈 준비하는 것도 아니면 할 게 하나도 없다.
다시 잘 수밖에 없다.
오빠 옆에 딱 달라붙어서 눕는다.
벌렁 드러누우니 그제야 창문 밖에서 희푸른 빛깔이 방 안으로 드리우는 게 보인다.
새벽이라는 게 실감난다.
잠들어있는 오빠 팔에 손을 무심히 올려둔다.
시원해서 기분 좋다.
잘 때 흰색 반팔을 입고 자는 오빠의 맨살은 늘 윤슬이의 손바닥보다 서늘하다.
잘 때 굳이 찰싹 붙어서 자는 것도 그런 이유다.
"으어, 시언하구만."
이대로 방열이 끝나면 오빠의 반대쪽, 벽면으로 붙어서 다시 방열할 계획이다.
다섯 살, 장윤슬의 체온은 기본적으로 조금 높은 편인 것이다. 그래서 자기 전에 이렇게 한 번씩 열을 뽑아내곤 한다.
송주현은 아직 본인 팔을 껴안는 게 그런 이유인 줄은 모르고 있다.
"읏, 뜨거..."
오빠가 뜨겁다고 방금 중얼거린 것 같긴 한데 가볍게 무시하기로 한다.
어차피 깊게 잠들어서 일어날 것 같진 않다.
그렇게 눈을 감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잠이 안 온다.
막상 자려고 몸을 눕히니 그동안은 어떻게 잠들었던지 모르겠다. 장윤슬의 사고 과정.
어떤 생각을 해야 잠들 수 있더라?
팔은 차렷 자세? 아니면 배 위에 올려두었던가?
잠들 때의 눈알 위치는?
아아, 발 간지럽다. 벅벅벅-
새근새근- 옵바 숨소리 신경 쓰인다.
다시 코를 막아볼까?
그러다간 코에 들어간 손이 신경쓰여 또 잠을 못 잘게 뻔하다.
"그냥 이러나야게따..."
결국 숙면을 포기한다.
그리곤 다시 오빠의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해본다.
[05:40]
???
15분도 안 지났다?
그럴 리가!
"이게 모지. 고장 난나?"
스마트폰이 거짓을 보이고 있는 게 틀림 없다.
오빠가 잠에서 깨면 수리점에 맡겨야할 것 같다고 말해야겠다.
그렇다면 이제 방법이 없다.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는 수밖에.
윤슬이는 조심스레 이불 밖으로 기어나와 발걸음을 고양이처럼 살살 옮긴다.
오빠한테 들키고 싶지 않은 한 가지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사뿐사뿐.
다섯 살의 가벼운 몸무게.
그 무게가 내는 발소리로는 도무지 깊게 잠든 송주현을 깨울 수 없었고.
윤슬이는 무사히 옷장 앞에 도착했다.
정확히 옷장 밑부근의 서랍이 목표다.
드르륵-
서랍엔 오빠의 것으로 추정되는 갖은 옷가지들이 곱게 개어져있다. 니트나 두꺼운 맨투맨, 코듀로이 팬츠처럼 동복들이다.
그 안쪽으로 손을 쑤욱 집어넣어 주섬주섬거리다가
"여기따."
손을 꺼내자 윤슬이의 조막만한 손바닥엔 미니 초콜렛 여러 개가 들려있다.
한 손 가득 들린 미니 초콜렛들은 모두 송주현 몰래 숨겨둔 것들이다.
원래 초콜렛을 먹기 위해선 항상 오빠에게 부탁을 해야만 했다.
윤슬이가 '초코 봉투'라고 부르는, 종이봉투는 싱크대 위 찬장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짧은 신장 탓에 도무지 손에 닿질 않는다.
딱히 송주현이 장윤슬을 의심하여 몰래 빼먹는 것을 경계하느라 그곳에 둔 것은 아니다. 거기 말곤 적당히 놔둘 만한 보관 장소가 없었다.
'윤슬이 초코 먹구 싶으면 나한테 말해. 대신 너무 많이는 안 줄거야.'
'네! 알게씀니다!'
원래 오빠한테 말하면 꺼내어주긴 한다. 한 번에 3개까지긴 하지만.
그 정도면 나름 만족할 만하다.
그럼에도 이렇게 초코를 숨겨둔 이유는 따로 있다.
한 번에 초코 3개 이상을 먹는 배덕감을 맛보고 싶기 때문.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한 번쯤 해보고 싶지 않은가.
손에는 얼추 10개에 근접하는 미니 초콜렛이 들려있다. 윤슬이는 이걸 입에 왕창 넣고 와구와구 먹고 싶다. 그런 충동에 휩싸인다.
"어짜피 다 내 거니까 갠찬켔지?"
이 초콜렛들은 몰래 빼오거나 한 게 아니라, 오빠한테 3개씩 받았던 것 중에 하나둘씩 모아 몰래 쟁여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걸 숨겨두건 비둘기 모이로 주건 마술 재료로 쓰건 윤슬이의 마음이긴 하다.
그럼에도 망설이는 건 오빠가 3개씩만 주는 이유를 윤슬이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번에 설명을 들었다. 초코를 너무 많이 먹으면 이가 썩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윤슬이 이 썩으면 나중에 치과 가서 다 뽑아야 하는데? 그럼 엄청 아프니까 조심하자?'
'아파?'
'응, 엄청. 오빠도 한 번 양치 잘못했다가 치과 갔는데 울 뻔했어.'
'윤스리는 안 우러!'
'너 막상 치과 가면 그 말 취소하게 될 걸?'
아무튼 이가 썩는 게 문제인 것인데.
그딴 건 잘 모르겠고, 일단 손에 들린 초코들부터 어떻게 해야겠다.
손에 오래 들고 있었더니 끈적하게 녹아내릴 것만 같다. 투명한 포장지 안쪽으로 초콜렛들이 녹아내리고 있는 게 훤히 보인다. 애초에 옷장에 오래 방치해둔 탓에 표면이 말랑하게 무너져있기도 했다.
바스락바스락-
포장지를 까서 양 손 가득 모은 다음
"아움!"
한 입 가득 담자 찐득하고 부드러운 식감의 초코가 입천장을 싸고 돈다.
"마시써."
우물우물
우물우물
초콜렛을 하나 먹을 때보다 훨씬 오래 씹어야 했고, 그 만큼 행복감이 오래 지속되었다.
손에 묻은 초코를 적당히 닦아낸 다음 포장지를 쓰레기통에 버린다. 보이지 않게 깊숙이 묻어버린다.
옷장 서랍도 꼭 닫아버린다.
오빠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여전히 잠들어있다.
"움! 안 들켜따."
범행 은폐에 성공한 장윤슬.
그대로 오빠 밑으로 쑥 들어가 자는 척 시전.
이제 한 시간 정도 있으면 일어날 시간이다.
그때까지만 이대로 있으면 자신이 초콜릿을 먹었다는 사실은 본인만 알고 있는 거다.
그런데 자는 척만 한다는 것이 진짜로 잠들었다.
수는 여기서 꼬여버렸다.
**
뭐지?
왜 윤슬이 입가에 뭐가 덕지덕지 묻어있냐?
[08:47]
평소보다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 정신을 차린다.
오늘은 가게 휴일이기도 하니, 알람을 맞춰두진 않았다. 그 덕에 윤슬이도 늦은 시간까지 푹 자는 것 같은데.
일어나보니 옆에서 자고 있는 동생 입가를 비롯해 볼따구에도 갈색 무언가가 묻어있는 것이 아닌가.
"아직 잠이 덜 깼는가?"
윤슬이 볼을 살짝 꼬집어본다.
"으무..."
"음, 평소처럼 말랑한 걸 보니까 제대로 일어난 게 맞긴 해."
그럼 이건 뭐냐?
순전히 호기심으로 윤슬이 볼따구에 묻은 갈색 반고체를 닦아내자 손에 묻어났다.
코에 가져다대자 슬슬 올라오는 단내.
익숙하다.
"초코?"
아무래도 내가 잠든 사이에 초콜렛을 꺼내먹은 것 같다. 그리고 그 초코의 출처도 어렴풋 알고 있다.
어차피 저 쪼꼬미는 신장이 짧은 터라 찬장에 있는 봉투를 절대 만질 수 없으니.
옆에서 고롱고롱- 코를 고는 윤슬이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히 일어나 옷장의 동복 서랍을 열어젖힌다.
옷을 몇 장 꺼내어 안을 들여다보니
"역시 없네."
저번에 윤슬이가 나 몰래(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알고 있었음.) 넣어둔 초콜렛이 없어져있다.
이 좁은 집구석에서 나한테 뭔가를 숨길 수 있을 거라 착각한 시점에서 네 패배다, 장윤슬.
"와, 그거 아홉 개인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걸 나 자는 사이에 다 먹은 거야?"
어젯밤엔 분명 윤슬이가 먼저 잠들었으므로 초콜렛을 먹었다면 내가 자던 사이다.
간밤에 잠이 깨어 기회를 살피다가 먹은 것 같다.
"음... 얘를 어떻게 하면 좋아?"
어차피 나 몰래 빼어간 것도 아니고, 본인이 모아서 한꺼번에 먹은 거니까 혼낼 상황도 아닌 것 같고.
그런데 뭔가 몰래 먹은 게 귀여워서 골려주고 싶단 말이지.
"음..?"
순간 스마트폰의 렌즈가 아침 햇볕에 비추어 내 눈까지 빛을 반사했다.
"저거다."
세수하면서 먼저 정신을 차리고, 도시락을 만들려 재료를 준비할 때쯤 윤슬이가 부시럭거리더니 잠에서 깼다.
"음메, 다시 자버려따."
"윤슬이 일어났어?"
"네! 오늘 옵바랑 소풍이야."
일어나자마자 한껏 들뜬 동생.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초콜렛은 그대로다.
"소풍 가죠? 근데 그전에 우리 윤슬이 오빠랑 사진 한 장 찍어야겠네? 셀카로."
"응? 왜여?"
"한 장 찍어보면 그 이유를 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