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분홍색 맛 났어!(3)
막상 석촌호수의 둘레 산책로까지 들어오자 윤슬이의 표정은 다시 밝아졌다.
호수 가까이로 오자니 호기심을 끌 것이 많았던 덕이다.
깨끗한 생태를 잘 구성해놓아 거위가 들풀 부근을 걸어다닌다던지 이름 모를 나비가 날아든다던지.
호수 한 가운데에 물새들의 집이 보이기도 했다.
그것들 위로 하늘거리는 벚꽃잎들이 분위기를 더욱 무르익게 한다.
"꾸억 꾸억-"
거위를 발견한 윤슬이가 녀석들을 따라할 생각인지 엉덩이를 뒤로 쭉 빼며 손으로 부리를 만든다.
그리고 울음소리를 따라한다.
체구가 작아서인지 거위보다는 오리 같다.
"거위 따라하는 거야?"
"응! 옵바가 큰 거이 해."
"윤슬이는 저기 있는 작은 거위에요?"
"마자여. 옵바가 더 커."
동생을 따라서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손으로 부리를 만들었다.
"구어억-!"
내 나이 스물다섯.
동생 나이 다섯.
배역에 너무 심취한 탓에 공공장소라는 것을 망각했다. 주위의 이목이 내게 쏠린다.
지구를 파괴하고 싶어졌다.
자세를 바로하고 정색한다.
"윤슬아, 저쪽에 있는 거위가 더 큰 것 같아 자리를 좀 옮기는 게 어떨까? 제발."
"움.. 알게써."
"고마워."
산책로를 거닐며 윤슬이의 관심은 벚꽃잎 쪽으로 바뀌었다. 넘실거리며 떨어지는 모습이 이쁘장하다.
그 잎이 떨어지는 순간 윤슬이는 꼭 하나쯤 손에 쥐고 싶은 양 하늘 위로 두 팔을 벌리며 캐치볼을 시작한다.
그리고 낙하하는 벚꽃잎을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짝- 짝- 짝-
꽃잎이 손에 들어왔다가도 모기나 파리처럼 훽훽 도망가니 헛박수가 이어질 뿐이다.
"흐잉... 잡기가 힘드러여."
"오빠가 하나 잡아볼까요?"
"아니, 윤스리가 할 쑤 이써."
그렇게 윤슬이는 석촌호수 반바퀴를 돌 때까지 줄곧 헛박수만 쳐버리다가 끝내 포기했다.
도와주겠다니까 '윤스리가 자바야 대! 그래야 조아!'라길래 옆에서 응원만 열심히 해줬다.
"윤슬이 일단 김밥 좀 먹고 재도전해볼까요? 기운이 빠졌으니까 재충전해야지."
"그게 조아여... 힘드러."
지칠만도 하다.
근처에 있는 나무계단 부근으로 향했다.
그곳엔 여러 사람들이 앉아서 떠들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노상에서 파는 음식을 먹고 있었다.
"저기서 김밥 싸온 거 먹으면 되겠다, 윤슬아."
"김빱!"
김밥 소리를 듣자 내 손을 놓고는 자기가 먼저 후다닥 달려간다. 사람들과 일정 거리를 둔 자리를 잡아 이리 오라고 내게 손짓한다.
자기 옆에 앉으라고 옆 자리를 손으로 팡팡! 치기도 한다. "옵바, 이리루!"
하는 소리가 들리자 앉아있던 선객들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 저 애기 너무 귀엽다. 완전 강아지 상.
- 나도 저런 딸 하나 있었음 좋겠는데... 으휴, 우리 아들내미는 매일 스마트폰이나 만지고 누워있다니까?
- 여보 우리도 슬슬 자식 농사 지을 때 되지 않았어?
반응도 각양각색.
너무 시선이 끌리기 전에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윤슬이 옆에 앉는다.
"우리 동생이 어딜 가든 주목 받는구먼."
"옵바 동생이 주목 반는구먼."
윤슬이와 내가 앉은 사이에 도시락 통을 올려둔다.
여지 없이 레이싱 카가 그려진 도시락 통이다.
유아용이라기엔 수준 있는 사진이 박혀있다. 디테일이 사실적인지라 홍보용 상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 남매 취향의 합치에 의한 도시락 통 선택이었다.
뚜껑을 열자 노란색과 주황색이 빛깔을 뽐내는 김밥들이 고이 잠들어계신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마싯겠다."
"잠깐 윤슬이 먼저 손부터 쓱싹 닦아야지."
"움! 옵바가 해주면 조켔다."
내가 물티슈를 꺼내자 당당히 손을 내민다.
별 말 없이 물티슈로 쓱쓱 구석구석 닦아준다.
손만 잘 닦아도 감기 예방이 된다고 하니까, 이런 부분은 내가 신경 써줘야지.
그나저나 아까 벚꽃잎은 본인이 잡겠다고 그렇게 헛손질을 해놓고는 손을 나보고 닦아달란다. 본인이 직접 하고 싶은 일에는 따로 기준이 있는가보다.
"오늘은 옵바부터 머거."
"오빠부터 먹어요?"
"윤스리가 먹여주께."
자기 손을 다 닦자마자 내 입가로 김밥을 하나 집어 가져다댄다. 나무 젓가락을 꺼내려고 했는데, 윤슬이가 입 앞까지 갖고오자 참을 수 없어서 아앙- 하고 삼켰는데.
장난치고 싶었다.
"어엇! 옵바가 윤스리 손까지 머거써!"
"아무아뭉- 손이 더 맛있네?"
"으앙..."
"헉, 윤슬이 우는 거야?"
"안 울지롱."
속았다.
문득 생각해봤는데, 만약 다 큰 어른이랑 이런 장난치면 살짝 부끄러울 것 같다.
다섯 살 난 동생이랑 하니까 그나마 허용되는 수준인 듯하다.
김밥 맛은 준수하다. 프랜차이즈 김밥집에서 파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김밥 속을 가득 채운 계란지단이 폭신하게 씹히는 식감. 또, 볶은 어묵이 슴슴하고 고소하다.
이렇게 만든 지 시간이 지나도 맛을 유지해주는 게 김밥이란 음식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으무! 마시써!"
윤슬이도 맛있다며 손으로 하나씩 집어먹는다. 짧은 다리를 동동 구르는 게 기분이 좋아보인다.
"나들이 나와서 먹으니까 더 맛있지?"
"마자여. 근데 집에서 머거두 마시써."
좋아해주니까 다행이다. 솔직히 굳이 김밥을 싼 이유는 주위에 영향을 주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만약 윤슬이와 어느 식당에 간다고 한다면 그 결말이 눈에 선하다. 차라리 도시락을 싸서 오면 소비 경제에 불필요한 영향을 주진 않겠지.
싶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윤슬이가 꽃잎을 먹어버렸다.
"윤슬아 잠깐만."
"아움... 움?"
우리가 앉아 김밥을 먹던 나무계단의 선객들은 흘끗거리며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 애기가 김밥 엄청 맛있게 먹는다. 우리도 김밥 싸올 걸.
- 그러게, 갑자기 나도 저 모습 보니까 김밥 먹고 싶긴 하네.
애초 주위에서도 이 정도의 반응이었기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귀여운 아이를 보면 저 정도는 보일 수 있는 반응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윤슬이가 김밥을 먹으려고 집은 그 순간. 하늘에서 떨어지던 벚꽃잎이 그 김밥 위에 얹어졌다는 것이다.
그걸 그대로 한 입에 삼켜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오싹해져서 주위를 둘러보니.
"휴... 다행이다."
딱히 벚꽃잎을 먹으려는 행인들은 없어보였다. 아마 윤슬이가 직접적으로 벚꽃을 먹고 있다고 인식한 사람은 가까이에 있던 나뿐인 것 같다.
"옵바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닙니다요."
별 일 없으면 됐지.
괜히 신경 쓰는 걸 수도 있다. 애초에 벚꽃잎은 아무리 생각해도 음식과는 범주가 멀지 않은가.
설마 벚꽃잎을 입에 넣는 모습을 보았더라도 그걸 먹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겠지.
음식도 아니니까.
- 김 대리님, 저희도 김밥 하나 사들고 들어가실래요?
- 그러던지, 여기 카드.
- 누가 사달라고 했나요? .... 감사합니다.
도시락 통이 바닥을 보일 때쯤 주위의 인간들은 가져온 음식을 꺼내어먹거나 어딘가에 있을 점포로 음식을 사러 떠났다.
마침 점심 때이기도 하지만 윤슬이의 능력도 한 몫한 것 같다.
"이 정도쯤은 괜찮겠지. 딱히 피해주는 것도 아니니까."
김밥을 모두 먹고 나자 윤슬이가 만족스레 배를 두드린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같이 한 번 두들겨봤다.
동동-
초등학교 때 쳤던 소고랑 비슷한 소리가 난다.
이번엔 내 쪽으로 와서 내 배를 두들겨본다.
찰싹-
"잉, 옵바 배는 살이 업써."
"윤슬이 배도 살이 얼마 없는데?"
"윤스리 배는 똥똥거리는데. 옵바 배는 똥똥 안 거려."
"그거 왠지 모르지."
"몰르게써."
"윤슬이 잘 때 있잖아? 몰래 오빠 뱃살을 윤슬이 쪽으로 옮겨놔서 그래."
"으엇..!"
하고 놀라더니 자기 배를 어떻게든 움켜쥐려고 애쓴다. 애초에 그냥 밥을 먹었기에 배가 부푼 것뿐이지 군살이 있는 것은 아니다. 끄응끄응거리다가 내 쪽으로 배를 들이민다.
"윤스리가 이거 가져도 대? 안 빠져."
"응 윤슬이 가져, 그 정도는 있어줘야 나중에 키가 쑥쑥 크는 거야."
"옵바만큼 커?"
"오빠보다 훨씬 더 커지는데요?"
"오오! 엄청 크다."
윤슬이는 내 키가 엄청 커보이나보다. 실제로 작은 편은 아니다. 180을 약간 넘기니까.
잘 생각해보니까 윤슬이가 내 키를 넘기면 무지하게 큰 편에 속하겠네.
소화도 시킬 겸 자리를 뜬다.
잠깐 걷다보니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모님들도 계셨는데, 그 일행이 윤슬이의 흥미를 끌었다.
바아아아앙-
- 아들, 재밌어?
- 응! 재미따. 아빠 더 빨리!
- 너무 빠르게 달리면 다른 사람들하고 부딪히지? 안 돼요.
저런 게 있다고는 들었는데,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유아용 전동차.
B사의 자동차를 모델로 만들어진 차인 것 같은데 윤슬이 또래의 아이가 신나게 타고 있다.
그 모습을 넋 놓고 보다가 윤슬이는 내 손을 잡아당겼다. 빠르게 지나쳐가자는 듯.
한 달 전이 떠올랐다. 윤슬이한테 처음 장난감 사주던 날. 머뭇거리면서도 절대 나한테 자동차를 사달라고 말하지 않았었는데.
오늘도 비슷한 상황이다.
본인이 원한다고 해서 선뜻 해달라, 사달라 말하지 않는 게 내 동생 장윤슬이다.
무언가를 요구하더라도 그 보이지 않는 선이 명확히 그어져 있다.
정했다.
다음달 찾아오는 윤슬이 생일엔 절대로 저 전동차를 선물해줘야지. 그래봤자 애들 장난감인데 얼마나 하겠는가.
"윤슬이 속 더부룩하거나 하지 않지요?"
"더부룩?"
"트름이 많이 나와?"
"안 나와여. 갠차나여."
조금 걷다보니까, 먹은 김밥 다 소화됐구나.
오늘은 저녁까지 밖에서 먹고 들어갈 생각이다.
그 식당에 손님을 지나치게 불러들이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물론 있지만 내 나름의 방법을 고안했다.
안팎을 통유리가 아닌 벽으로 가려 윤슬이의 모습이 잘 안 보이는 식당으로 가면 된다.
"어차피 서울에 널린 게 식당이니까."
그런 식당으로 들어가면 영향을 줄 가능성도 훨씬 적어지는 것이다.
멀리 나들이 나온 김에 도시락도 싸서 먹고, 외식도 하는 거지.
"음? 윤슬이 왜 그래?"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윤슬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어느 나무를 지긋이 바라본다. 키작은 벚나무인데 외형이 약간 괴상하다. 줄기는 유독 고동색에 가깝다. 흉터도 나있다.
"이, 이거 나무! 개물..!"
"괴물이라고? 아, 아까 이게 보여서 그렇게 말했던 거야? 확실히 괴물 같이 생기긴 했네."
아이니까 상상력이 풍부하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그런데 내 바짓자락을 쿡쿡 잡아댕기며 무언가를 원하는 눈치다.
"옵바, 윤스리 목마."
"으응? 여기서요?"
"네, 한 번만 해주면 좋겠다."
핫..!
방금 눈망울을 반짝이며 너무 또박또박 이쁘게 말했다. 자타공인 동생 바보인 나, 송주현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애교섞인 부탁이었다.
"읏차."
행인들의 시선따위 개의치 않고 윤슬이를 목마 태운다. 어차피 다섯 살 난 애인데 이런다고 누가 흉보겠어? 싶었는데 윤슬이의 대사가 심상치 않다.
"히히히 날 머근 복수다, 이 개물."
머리 위에 있는 터라 무얼하는지 잘 보이지 않는데, 무언가를 툭- 하고 뜯는 소리가 났다.
"설마..?!"
황급히 목마를 내리자 윤슬이가 벚꽃잎 하나를 손에 쥐고 오물오물 씹고 있다.
그 모습이 아기자기해서 귀엽긴 하지만 당황스럽다.
"유, 윤슬아? 너 그걸 왜 먹니?"
"우물우물... 복쑤야. 얘가 나를 먼저 머거써."
"걔가 너를 먹었다고?"
또 이상한 꿈이라도 꾼 걸까.
그냥 냅두는 게 낫겠다. 어차피 저거 하나 정도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주위의 반응이 기묘하다.
오늘보다 조금 더 추웠던 초봄날에 동대문에서 겪었던 것과 비슷한 광경.
- 왜 갑자기 벚꽃이 먹고 싶지?
- 나도 하나만 씹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