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분홍색 맛 났어!(4)
[나: 그러니까 오류가 맞다는 거지?]
[달님: 그쵸, 재능 설정에 조금 오류가 있었나보네요. 원래 이렇게 설계되진 않았는데. 식품군도 아닌 걸 먹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따라서 먹게 되었다면 확실히 오류에 의한 현상일 것 같은데요.]
[나: 이미 벌어진 사태를 수습할 수는 없지?]
[달님: 그렇죠. 저희라도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나: 그래, 그러면 문제된 부분 수정해줬으면 좋겠어.]
[달님: 지금 바로 그렇게 할게요. 괜히 안 좋은 기억을 심어드린 것 같아서 죄송해요...]
[나: 아니, 꼭 그렇지만도 않아. 나름 재미 있었어. 다른 사람들 반응도 생각보다 좋았고.]
꽤 특별한 경험이었다.
빠르게 달님이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
이런 해프닝이 생긴 게 윤슬이가 받은 재능 때문이라는 것은 일목요연했다.
윤슬이가 냠냠하고 벚꽃잎을 씹자 그 모습을 본 몇 행인들이 떨어지는 그것들을 하나씩 입에 넣기 시작했다. 건강에 해가 되진 않겠지만 누가 보더라도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다.
다 큰 어른들이 하기엔 너무 어리숙한 행동이지 않은가.
다만 재미있는 건 군중심리였다.
"어떻게 하나둘 먹기 시작하니까, 점점 늘어가냐고."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다.
3의 효과. 세 명 이상이 똑같은 행동을 하면, 그 행동을 따라하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더라.
윤슬이가 꽃잎을 먹는 장면을 직접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석촌호수엔 널린 게 사람이고, 그만큼 윤슬이에 대한 주목도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장면을 직접 본 몇 사람이 추락하는 꽃잎이나 땅에 이미 떨어진 것 중 그나마 깨끗한 것을 씹었고.
다른 사람들도 따라하기 시작했다.
- 뭐야? 왜 사람들 저걸 입에 넣지?
- 몰라... 그런 축제 기간인가?
- 우리도 하나 먹어볼까?
- 그래, 어차피 저거 먹는다고 죽지도 않잖아. 옆에 섬나라에선 차에도 띄워마시니까.
순식간에 석촌호수의 수많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벚꽃을 입에 물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작은 윤슬이의 능력이었지만 그 이후는 거의 분위기에 휩쓸려 진행된 단체 행동이었다.
뒤늦게 석촌호수에 진입해 사태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본인들도 동참하거나 핸드폰을 꺼내어 동영상을 찍었다.
벚꽃을 입에 물고 셀카를 찍는 사람들.
사람들 눈치 보며 몰래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보는 사람들.
부모님 입에 하나씩 넣어주는 아이들.
회사 동료가 들고 있던 커피에 쏙 집어넣는 샐러리맨.
사태가 커졌다는 생각이 들어 처음엔 어떻게 하지 싶었는데, 그 뒤로는 금세 침착해졌다.
왜냐면 꽃잎을 입에 문 사람들도.
그들을 구경하는 사람들도.
입에 넣어도 되는지 주저하는 사람들도.
모두 동심에 휩쓸린 듯 즐거워보였기 때문이다.
- 야! 바보 같이 그걸 따라서 입에 넣으면 어떻게 해.
- 좀 바보 같으면 어떠냐? 남들 다 할 때 한 번쯤 해보는 거지. 이 나이 먹고 언제 떨어진 벚꽃잎 씹어볼래?
- 그건 그렇긴 한데.
- 어차피 여기까지 일하러 온 것도 아니고 잠깐 쉬러, 놀러나온 거잖아.
- 으휴... 그러던지.
그 풍경은 놀라웠다.
그전까지 석촌호수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양복쟁이들도 더러 있었고, 근처에서 일하다가 잠시 점심시간을 빌미로 나온 것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월요일이기에 그렇다.
그런 분들은 결코 마음 놓고 산책을 즐길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회사라는 전쟁터로 돌아가야 하니.
하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꽃잎을 입에 물고, 스스로 바보 같은 행동이라 자각하면서도
끝내 그 분홍색을 맛 보는 순간은 순수히 들떠보였다.
"다행이다."
여러 모로 다행이었다.
윤슬이가 돌발적으로 벌인 행동이 여러 사람들에게 즐거운 한 때를 선물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또 그들의 월요일, 한 주 중 출근하기 가장 피로한 날의 점심이, 특별한 추억으로 덧씌워질 것 같아 다행이었다.
"우리 윤슬이가 사람들을 즐겁게 해줬네?"
"윤스리가?"
본인은 모르겠지.
**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은 단순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었다. 웃고 즐기다가도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던 이들은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허나 떠나던 그들의 입가엔 분명 미소가 감돌았다.
윤슬이와 호수를 한 바퀴 정도 더 돌다가 자리를 떴다. 근처에 있는 야외 놀이공원을 보고 다음에 한 번 와야겠다 싶기도 했다.
가게 일 생각하면 훗날이 되겠지만.
"참, 동생 생기니까 가야될 곳도 많네."
"옵바랑 가야댈 곳이 마나, 지금 밥두 머그러 가야 대."
"가볼 만한 곳 내가 찾아놨으니까, 믿고 따라오셔요."
"옵바랑 나와서 머그는 거는 첨이당."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잠실과 석촌호수 인근에는 먹을 거리가 많다.
백화점의 푸드코트에 밀려 동네 상권이 약할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골목 맛집이 많은 곳이 이 근처다.
그리고 오늘 정한 식당은 조금 특별하다.
"도착이다, 들어가자."
건물은 누가 봐도 20세기에 지어진 듯, 허름했다.
회색 벽에 거뭇거뭇하게 떼가 묻어있다.
식당의 위치는 2층.
계단은 윤슬이 기준 지면에서부터 무릎까지의 높이보다 크기가 커, 혼자 오르기엔 버거워보인다.
겨드랑이에 손을 쑥 집어넣어 들어올리자 윤슬이가 입술을 삐죽댄다.
"윤스리가 할 쑤 있눈데여..."
"그러다 넘어지면 다치죠?"
2층까지 올라오자 식당 앞에선 상호보다 메뉴판이 더 눈에 띠었다.
[오늘의 메뉴: 짜글이]
"쨔그리?"
정겨우면서도 술 냄새 진하게 나는 음식. 당연히 음주하러 온 것은 아니다.
또, 메뉴 자체보다 '오늘의 메뉴'라고 쓰여있는 점이 더 신경 쓰인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따랑땅-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종소리가 울린다.
어둑한 분위기에 주홍빛 조명.
칠판과 비슷한 색의 식탁보.
애매하게 고풍스러운 목재 의자.
아직 이른 저녁이라 손님은 우리 둘뿐인 것 같다.
"우와, 진짜 경양식 식당이네."
나도 경양식 식당에 빠삭한 세대는 아니다. 나보다 열 살 정돈 많아야 그래도 익숙하다고 자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여섯 살 때쯤엔 이런 식당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주로 경양식 돈까스를 판매하는 가게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부른다.
- 두 사람?
"아, 네 두 사람입니다."
- 편한 곳 앉아.
"아, 넵!"
허리가 굽은 할머니께서 무미건조한 말투로 맞이해주신다. 우리 외할머니와도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조명이 어두운 까닭에 외려 주름이 더욱 부각되면서도 이런 분위기의 가게와 어울리는 사장님이란 생각이 든다.
"옵바, 저 함무니 엄청 무섭게 생겨써."
"쉬잇."
윤슬이가 내 귓가에 대고 본인의 감상을 속삭인다.
흘끗 보면 쫄 법한 인상이긴 하다.
하지만 저렇게 겉으로는 무심해보이는 분들이 마음은 따듯하기도 하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동그란 플라스틱 쟁반에 식전 스프 두 그릇을 들고 오신다.
- 딸?
"아뇨, 동생이요."
- 흐응.
먼저 말을 걸어주시면서도 과묵하시다.
윤슬이는 사장님의 포스를 보더니 한껏 쫄아 몸이 딱딱하게 굳는다.
스프를 우리 앞에 가지런히 놓아주시고는 다시 주방 쪽으로 돌아가시면서 한 마디.
- 고년, 이쁘장하게 생겼네.
그 말을 듣고 윤슬이는 눈썹을 까딱인다.
사장님께서 주방으로 완전히 들어가시자 한 마디.
"고녀니 아니라... 윤스리인데."
앞에다 대놓고 불만을 토로하지는 못하는 방랑 5세였다. 윤슬이는 불만스럽고 거칠게 숟가락을 들더니 스프를 한 입 뜬다.
아뜨뜨-
김이 폴폴 나는 스프를 한 입 가득 삼키려 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나도 어렸을 때, 식전 스프의 열기에 혀를 데었던 적이 있다.
보통 스프를 주는 건 경양 돈까스 가게이긴 하지만, 이 식당도 그런 관습을 따르는 것 같다.
"윤슬이 혀 안 다쳤어?"
"뜨거... 근데 마시써여."
그 다음부터는 후후 불어서 잘 먹길래 나도 한 입 떠보았다.
"양파랑... 감자?"
무난한 맛의 스프였다.
그런데 양파 특유의 향과 감자 전분의 끈적함이 잘 어우러져 적당히 식감을 돋궈준다.
또, 스프 위에 자잘하게 뿌려진 후추가 킥이다.
- 양파랑 감자 쓴 건 또 어떻게 알았대?
"먹어보니까 맛이 나던데요?"
- 어디서 요리 좀 했는가?
"하하하, 그렇죠."
- 젊은 게 제법이네.
스프의 바닥을 긁을 때쯤, 짜글이가 나왔다.
꽤 빠르게 나오네 싶었는데, 버너와 함께였다.
식탁에서 끓여먹는 방식이다. 기사 식당의 백반을 떠올리게 한다.
낮은 바닥의 냄비에 갖은 재료가 제멋대로 섞여있다.
거의 익은 돼지고기와 감자.
깍둑 썰린 두부.
양파와 녹색 파, 그리고 청양고추의 조합.
"기본적이고 탄탄한 구성이네요."
- 애기가 있어서 고추는 평소보다 덜넣었어.
"감사합니다. 마침 조금 걱정됐거든요."
동생이 불쑥 끼어든다.
"윤스리 매운 거 머글 수 이써여."
- 아가가 진짜 매운 걸 못 먹어봤는가?
"우우..."
나이 있으신 분이 저렇게 말하니 살벌하게도 들린다.
- 익을 때 되면 말해줄게. 어차피 손님도 없는 거.
옆에서 다 익을 때까지 끓여주실 모양이다.
운이 좋다.
이 식당에 온 목적은 식사보다 이 사장님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니 말이다.
"이 집이 30년 넘었다면서요?"
- 그런 밥집이 이 세상에 한둘인가?
"그래도 한 자리에서 30년 버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러세요."
- 흥, 됐네. 다 먹고 살라구 하는 일이지.
"그렇다기엔 재료 하나하나에서 정성이 느껴지는데요?"
- 무언 소리야?
"파, 두부가 썰린 굵기랑 모양이 일정하잖아요. 또, 짜글이에 넣는 돼지인데도 근막이 다 제거돼있어요. 보통 끓이는 고기는 이렇게까지 공들이지는 않던데. 이건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라는 거죠."
- 어디서 또 배운 건 있는갑네.
요행으로 이 자리에서 30년 유지한 집은 아니다.
인근 상권은 치열한 편이다.
거대한 백화점도 들어서 있고, 골목 자체에 맛집도 많으니 말이다.
기본적으로 사장님 음식 솜씨가 좋은 것이다.
헌데 놀랄 부분은 단지 그것만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보고 왔는데, 메뉴를 매일 다르게 하신다면서요?"
- 별 거 아냐. 그냥 내가 잘하는 것 중에 돌아가면서 내는 거지.
"그렇게 해도 가게가 운영이 되나요?"
- 자네 입으로 이 집 30년 됐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 그랬었죠."
지금 우리 눈 앞에 나온 짜글이도 가게 앞에 쓰여있던 것처럼 '오늘의 메뉴'다. 내일이면 또 다른 메뉴가 나온다는 얘기다.
그 점이 이 가게에 온 이유다.
가게 메뉴를 매일 다르게 하면서도 30년 유지한 사장님의 비법. 그것만 알 수 있다면 우리 식당에도 틀림없이 큰 도움이 된다.
그것이 윤슬이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게끔 돕는 수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사장님, 가게 운영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 좀 가르쳐주시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