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분홍색 맛 났어!(5)
- 뭐가 궁금한데?
"그냥 알려주시게요?"
솔직히 처음엔 호통을 치실 줄 알았다.
가게 사장님의 인상이 무서워보이는 것도 사실이고, 말투도 건조하시니 말이다.
그런 이미지였다.
그런데 순순히 알려주실 생각이신 것 같다.
- 못 알려줄 건 또 뭔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요?"
- 대가? 푸흣, 뭐 대단한 거 알려준다고 대가를 바라겠는가. 가게 음식에 들어가는 비법 소스를 물어보면 그런 건 돈을 받겠지.
"아..."
- 근데 우리 가게 운영하는 건, 그냥 사람 사는 얘기 아닌가. 별루 숨길 것도 드러낼 것도 없는, 가담항설이지.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가게 유지에 제일 큰 도움이 되는 것은 결국 음식의 '맛'이니 말이다.
윤슬이가 기다리기 지겨운 듯 숟가락 뒷부분으로 식탁을 툭툭 두들긴다.
"옵바, 쨔그리 다 돼써?"
"잠깐만요, 한 번 먹어볼게 기다려봐."
익을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감자와 국물을 떠 후후- 분다. 불 때부터 짜글이 특유의 짜고 매운 냄새가 풍긴다.
기분 나쁘지 않고, 침샘을 자극한다.
스읍-
김이 펄펄 끓는 지라 입술만 데어 국물을 맛 보고 그 다음에 감자를 어금니 쪽으로 조심히 밀어넣는다.
열기가 솟지만 허- 허- 하고 입김을 뿜으며 잘 씹어삼킨다.
뜨거웠지만 이렇게 먹으니까, 또 이만의 맛이 있다.
"윤슬아, 다 익었다. 퍼드릴 테니까 앞접시 이쪽으로 주세요."
"응!"
동생 접시에 먼저 국자로 퍼주는 내 모습을 보고 사장님께서
- 거진 딸이나 다름 없는데?
라고 한 마디 하신다.
그 말을 추임새 정도로 넘기고 대화를 잇는다.
"음식 솜씨 좋으세요, 역시."
- 운 좋아서 30년 동안 한 자리 챙긴 건 아니지.
"뭐야, 나름 자부심도 있으시네요."
- 까불라구 사람 붙들고 있는가?
"아, 아뇨. 죄송합니다. 사실 저도 가게 운영하고 있거든요. 이제야 한 주됐지만."
- 흐응.
"지금은 우선 가게 메뉴를 딱 두 개로 정해서 판매 중이긴 한데, 이걸 좀 바꿔야 되나 싶더라구요."
- 이유가 뭔데?
"음... 손님들이 더 다양한 맛을 원하시더라고요."
- 일주일만에 그런 손님들이 생겼어?
"아... 그렇게 됐어요. 어쩌다가."
제대로 된 사정을 설명하기엔 무리가 있다.
윤슬이의 능력을 십분 활용하기 위해선 가게 음식을 먹여야 하는데, 그렇다고 똑같은 메뉴만 먹이고 싶진 않은 오빠 마음 때문에
메뉴의 변화를 도모하고 있는 사정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몇 손님들은 메뉴가 두 개뿐인 것에 대해 아쉬워하기도 했다.
- 흐음... 그래도 자네도 요리를 꽤 하나보네?
"그건 제 입으로 이렇다 저렇다 말하긴 애매하죠..."
- 아니, 그건 그냥 그 정도 들어보면 알아. 차린 지 일주일 밖에 안 된 식당은 메뉴 고민을 잘 안 해. 손님 어떻게 끌어모을지를 고민하지.
"듣고 보니 정말 그렇겠네요."
- 그렇지? 그니까 자네는 지금 일주일밖에 안 됐어도 어느 정도 손님이 계속 와줄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메뉴 바꿀까 말까 고민할 수 있는 거야.
역시 장사 경력이 긴 만큼 통찰력이 뛰어나시다.
"사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 우리 가게에서 그걸 물어본다는 건 메뉴를 고정으로 두는 게 아니라 주기적으로 바꾸는 걸 생각 중인 건가?
"네, 맞아요."
사장님은 그 말을 듣더니 걸걸 웃으신다.
노쇠한 목청에서 긁는 듯한 쇳소리가 섞인다
그걸 듣고는 짜글이를 숟가락에 떠서 입김을 부는 윤슬이도 슬쩍 눈길을 돌린다.
- 무슨 별 일이라구. 그런 거라면 별 방법이랄 것도 없네. 그냥 자네가 자신 있는 음식으로 꾸려서 메뉴를 하나씩 조금씩 바꿔보면 될 일 아닌가?
"네, 그 말씀이 맞죠. 그런데 중요한 건 그렇게 메뉴를 바꾸면서 어떻게 단골을 유지하냐는 거거든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한 없이 단순하다.
사장 마음대로 매일 메뉴를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속 편하고 좋은가.
허나 골목 장사라는 게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식당에 찾는 이들은 본인이 원하는 테이스트를 염두에 두고 들리는 것이다.
특히 단골이라면 더더욱, 그 가게의 맛에 길들여져 자주 찾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가게의 메뉴가 매일 같이 바뀐다면 그 전에 자주 들리던 손님들도 당황할 것이다.
반면 이 가게는 그 사태를 방지하여 골목에서 살아남았다는 얘기다. 어찌 보면 모순을 돌파한 것이다.
- 메뉴가 바뀐다고 꼭 음식 맛이 바뀌는가?
"보통... 그렇긴 하죠."
- 맞아. 보통 바뀌지. 보통이라기보단 서로 다른 음식인데, 같은 맛을 낸다는 것 자체가 논리에 맞지 않아.
사장님은 잠시 말을 멈추신다.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하는 듯했다.
묵묵히 짜글이를 푹 떠먹는 윤슬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신다.
- 자네도 말하지 않았나? 손님들이 다양한 맛을 원했더라고.
"네, 그렇죠. 그 부분이 조금 모순되는 것 같기도 한데."
- 아니, 그건 모순되는 게 아니야. 그건 표현의 문제지. 굉장히 좋은 징조야.
"좋은 징조요?"
- 그건 자네 손맛에 좋은 반응이 온 거거든. 우리 가게도 그런 케이스지.
손맛.
추상적이면서도 그 개념이 뭔지 알 것만 같았다.
식전 스프와 이 앞의 짜글이.
전혀 다른 맛을 지향하지만 오묘하게 비슷한 느낌이다.
- 단순히 말하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자네 음식이 좋은 것뿐일세.
"아... 그런 건가."
- 음식에 특색을 주면서도 일정한 느낌을 줄 수 있다면, 메뉴를 바꾸더라도 단골이 찾는 이유가 될 수 있겠지.
그 말씀을 듣고 짜글이를 한 움큼 퍼 앞접시에 담고
그릇 째로 후루룩- 들이마신다.
감자 전분 탓에 눅진해진 국물이 목구멍을 짓누르며 위에 쏟아진다.
속이 확 풀리는 느낌.
만약 소주를 진탕 마시고 왔더라면 이 가게에 단골이 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이 짜글이를 먹으니까 손맛이란 게 뭔지 알겠네요."
- 흥, 또 까불긴. 궁금한 건 좀 해결됐나?
"네! 덕분에 어떻게 해야할지 알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 잘 될 거야.
"네..?"
- 남의 음식에 얼만큼 정성이 들어가있는지 알아보는 사람은, 본인 음식엔 몇 배의 정성을 들이게 돼있어. 그런 음식은 손님들이 먼저 알아봐서 찾아주셔.
그 말씀을 끝으로 사장님은 주방으로 돌아가셨다.
얼마 있지 않아 단골처럼 보이는 사장님 또래의 손님들이 들어와
- 오늘은 메뉴 뭐야?
- 내가 밖에 써뒀잖아.
- 안 보고 왔으니까, 좀 알려줘라.
- 짜글이.
- 그럼 소주 세 병.
- 염병, 몇 시나 됐다고.
사장님과 이런 대화를 주고 받는다.
가게에 일찍 들리게 되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고, 그 뒤론 식사에 집중했다.
밥 한 공기를 다 비운 윤슬이는 콧물을 줄줄 흘리기도 했다.
"윤슬이 매웠어?"
"윤스리.. 허어 허어, 매운 거 잘 머거."
"알겠으니까 이쪽으로 와보세요, 콧물 닦아줄게."
"네..."
휴지로 콧물을 쓱쓱 닦아주자 마침 옆을 지나가던 사장님께서
- 아무리 봐도 딸인데?
또 한 마디 하시더라.
**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러 모로 사장님 덕분에 배웠는데 답례도 안 하는 건 죄송스러워서 2만원을 내고, 잔돈은 받지 않았다.
거스름돈 안 가져가냐고 핀잔을 주시길래 윤슬이를 한 쪽 팔에 끼고 그 자리에서 도망쳐버렸다.
그러자 뒤에서 사장님이
- 여기 쟁여둘 테니까 담에 가져가!!
하고 크게 소리치셨는데, 그냥 빨리 지갑에나 넣으셨으면 좋겠다.
당장 내일 출근할 때부터 사장님 조언대로 우리 가게만의 '손맛'을 연구해볼 계획이다.
"옵바, 윤스리 피고나다..."
"그래두 씻고 자야겠지?"
"그 전에 옵바한테 누어서 충전을 좀 해야대."
침대에 양반다리로 앉은 내 무릎을 베고 눕는다.
가벼워서 무게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윤슬이가 스마트폰이야? 무슨 충전을 해."
"바떼리가 다 닳았씀미다."
"그럼 충전을 좀 하셔야겠네. 대신 잠 들면 안 돼요."
"느에..."
TV 전원을 켠다.
우연히 경품으로 당첨돼 공짜로 얻게 된 물건.
윤슬이가 집에 오고 나서부터 유용하게 쓰고 있다.
혼자 있을 때는 굳이 TV를 보기보다는 핸드폰을 이용했으니 말이다.
아까 아침에 날씨를 확인하는 겸 보던 뉴스 채널이 틀어진다. 뉴스를 보다가 바로 끄고 외출을 나왔기 때문에 바뀌지 않은 것이다.
화면에 비치는 것은 오늘 아홉 시 뉴스의 헤드라인.
위아래로 떨어지는 헤드라인 중 유독 눈에 띠는 것이 있다.
[석촌호수, 벚꽃 시식단?]
"으아..."
"어! 우리 갔따가 온 곳."
절로 탄식이 나온다.
벚꽃 시식단이라니, 어중간한 센스다.
하지만 이파리 하나 정도 입에 물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렇게 보였을지도.
"몇 명이 핸드폰으로 동영상 찍는 것 같더라, 그거 뉴스 채널에 보냈나보네."
확실히 한두 사람이면 몰라도, 석촌호수를 지나던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똑같은 행동을 벌였으니 제법 기현상이긴 했다.
[석촌호수 벚꽃 시식단]이라는 제목의 리포트가 흘러나온다.
제보된 동영상이 재생되는데, 그곳엔 익숙한 실루엣의 남매가 비친다. 아까 경양식 식당 사장님의 말씀대로 부녀처럼 보이긴 한다.
"옵바랑 윤스리 나와따!!"
윤슬이가 흥분해서 TV 앞까지 순속으로 달려간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우리의 모습을 가리킨다.
영상 속 윤슬이는 다리 맡에서 해맑게 웃고 있다. 벚꽃을 입에 문 사람들을 쳐다보며.
그 영상이 전시된 이후엔 웬 전문 패널의 인터뷰 녹취본까지 재생해준다.
[리포터: 서울 소재 S대학 식품영양학과, 천만호 교수는 이 현상이 우연이 아니라고 분석합니다. 현대인들의 업무 과다로 인한 우울함이 원인이라는 지적인데요.]
[천만호 교수: 제가 오래 전부터 주장하고 있던 부분입니다. 벚꽃의 잎에는 아직 정확히 규명되진 않았으나 미량의 항우울 성분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 성분과 석촌호수에서 있었던 일이 연관이 있지 않나,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
그 뒤엔 사회심리학자가 나와 심리 상태가 불안정할 경우 이성을 잃고 집단 행동에 휩쓸리는 경향이 더욱 심하다는, 당연한 소리를 있어보이게 설명한다.
이 뉴스 채널에서는 어떻게든 석촌호수에서의 그 일을 업무 과다로 인한 현대인들의 스트레스와 연관 짓고 싶은 것 같다.
"그딴 게 아닌데..."
그냥 내 동생이 이파리 하나 뜯어먹어서 그렇게 됐다고 가서 말해주고 싶다.
전문가들의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계속되자 윤슬이는 흥미를 잃은 듯 다시 내 무릎에 얼굴을 묻는다.
"윤슬이 이제 충전 몇 퍼센트 됐어요?"
"3퍼센트."
"충분하구먼, 씻으면 딱 잘 수 있겠다."
"느엥..."
말을 무의미하게 늘어뜨리는 꼴이 피곤하긴 해보인다.
"오빠랑 같이 얼른 씻고 누워서 잘까? 내일은 가게 출근해야지."
"응!"
식당 얘기가 나오자 벌떡 일어나서 옷을 벗어제끼고 화장실로 튀어들어간다.
그걸 주섬주섬 주워 화장실 앞에 개어두고 뒤늦게 따라간다.
샤워를 마치자 윤슬이는 머리도 안 말리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새근새근 잠들었다.
"하루 정도는 머리 안 말려도 괜찮겠지."
동생의 자는 머리를 쓰다듬는다.
축축하지만 부드럽다.
핸드폰 앨범을 확인한다. 호수에서 찍은 사진들은 다양하고 윤슬이가 귀엽게 찍힌 것도 여러 장 있었다.
"근데 나는 왠지 모르게 이 사진이 제일 마음에 든다는 말이야..."
핸드폰 화면에 뜬 사진은 윤슬이와의 셀카.
얼굴에 초콜릿을 묻혀두고 씨익 웃으며 승리의 V자를 그리는 게 너무도 당당하게 찍힌 이것.
"설정 완료."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등록해버렸다.
그 후 나도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곤 잠들었는데, 다음날 배경화면을 보더니 윤슬이가 볼멘소리 했다.
"으으... 그거 사진 윤스리는 별룬데."
"당분간만 이걸로 해둘게요."
"언제까지여?"
"윤슬이가 손가락으로 숫자 칠천까지 셀 수 있을 때까지."
그 말을 듣고 윤슬이는 한 동안 시간만 나면 손가락을 꼬박 접어가며 숫자를 세었고.
내가 알기로, 때마다 최대 수가 늘긴 했지만 1,000을 넘기지 못해 결국 어느 순간 포기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