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우리 집에 왜 왔니?(1)
추적추적-
우산 막에 부딪히는 가느다란 빗방울.
4월의 가랑비가 내린다.
"기어코 오늘도 비가 내리네."
"우우우... 그래서 레이싱 자켓을 몬 입어여."
두 남매는 아침부터 오늘 날씨처럼 저기압이다.
각자 이유가 다른데 난 비 오는 날 일하는 걸 유독 싫어해서 그렇고.
동생은 아끼는 옷을 입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 윤슬이는 우비 입어도 이쁘지?"
"그렁가.."
심드렁하다.
봄 날씨를 버티기 위해 줄곧 입혔던 옷인지라 애착이 붙은 걸까.
유독 그 옷을 고집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비와 자켓의 크기 차이 때문이다.
'윤슬아, 자켓이 너무 커서 우비 안에다가 입지를 못하겠다. 오늘만 벗고 갈까?'
'이잉, 그치만.'
'윤슬이 다 젖어요, 비 내려서.'
'그치만 옵바가 사준 건데, 가지구 가고 시푼데.'
집에서 나서기 전에 이것 때문에 잠시 고민했다.
윤슬이가 웬일로 심통난 듯 툴툴거렸던 것이다.
자주 그러는 아이가 아니고, 이유마저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대안을 내기로 했다.
'그럼 대신 오빠가 가방에 챙겨갈게. 출퇴근하는 길에만 우비 입고, 가게에서는 이거 자켓 입을까요? 그러면 돼?'
'앗! 그러면 댄다! 옵바가 똑똑해.'
무슨 대단한 방법이라도 생각해낸 것처럼 밑에서 나를 우러러보는 동생이었다.
지하철 역사에서 나와 가게까지 걷는 길.
비가 온 터라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자전거를 끌고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성북천을 옆에 끼고 걷는다.
"엇, 옵바! 바바."
"응?"
윤슬이가 가르키는 건 나무들이었다.
한 때 가지에 벚꽃잎들을 붙들고 있던.
요근래, 연일 비가 내리더니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나무 밑동 부근에는 분홍 꽃잎들이 쓰레기들처럼 굴러다닌다.
눅진한 흙먼지와 나뒹군다.
"아쉽다. 꽃 이뻤는데. 윤슬이도 아쉬워?"
"윤스리는 갠차나."
"괜찮아요?"
"네! 왜냐믄 내년에 옵바랑 또 보면 대자나."
"정말 그렇네, 그때쯤이면 윤슬이도 여섯 살이겠다?"
"으억."
여섯 살이란 말을 듣고 윤슬이는 고민에 빠진 얼굴로 머리통을 움켜잡는다.
"왜 그래?"
"그래봤짜 여섯 살밖에 안 대... 아직두 애기야."
그게 신경쓰였던 건가.
하긴 나도 어렸을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한 시간이 도무지 지나지 않을 것처럼 길었고.
하루는 버틸 수 없을 만큼 길게 느껴졌다.
윤슬이도 그런 시간 감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을 이해 못해줄 것도 없다.
헌책방에서 그런 내용의 책을 읽었던 것 같다.
나이를 먹기 싫어지면 그때 어른의 문턱을 비로소 넘은 것이라고.
그러니까 시간이 빨리 흐르기 원할 적엔 아직 어린이라는 뜻이다.
"윤슬이는 빨리 어른 하고 싶어?"
"으응... 네!"
"왜요?"
"그래야 빨리 옵바랑 요리하자나."
"윤슬이는 나중에 크면 나랑 가게에서 요리할 거야?"
"당연해."
"저번엔 카 레이싱 선수할 거라면서?"
"그것두 할 건데? 둘 다 하믄 대여."
단순명료해서 좋다.
내년에도 똑같은 질문을 하곤 어떻게 대답하는지 지켜봐야겠다.
동생과 쓰잘데기 없는 대화를 나누다보니 마음은 한결 차분해졌고, 어느새 가게 앞에 도착했다. 가게 문을 열자마자 입구 앞쪽에 카페트를 깔아둔다.
비 오는 날에는 바닥이 지저분하고, 미끄러워져서 골이 아프다.
"윤슬이, 여기다가 발 쓱쓱 긁어서 물기 덜어내."
"쓱쓱!"
발을 닦는 윤슬이의 우비를 벗겨 문 밖에다 물을 털고는 잘 개어둔다.
그리고 선풍기를 약한 바람으로 틀고, 아끼는 자켓을 입혀준다.
"윤슬이, 이거 자켓 입으세요."
"예이!"
신이 나서 자켓에 팔을 마구 우겨넣는다.
자켓을 입힌 윤슬이를 선풍기 앞에 앉혔다.
"오빠 주방에서 재료 준비할 동안, 옷 좀 말리고 계세요.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알게씀니다!"
또 어디서 봤는지 '다나 까' 어투를 사용하며 왼손으로 경례하는 윤슬이.
학력 탓에 군대는 안 다녀왔지만 좌수 경례가 잘못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한다.
오늘 사용할 식재료들을 정리해두고, 가게 오픈 시간이 되기 10분 전쯤.
동생을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주고 있었는데 가게 바깥에서 익숙한 실루엣의 두 여자가 문을 가볍게 톡톡 두들긴다.
[드. 려. 보. 내. 주. 세. 요.]
투명한 통유리로 된 문 앞에서 입모양만으로 신호하는데, 딱 이런 문장으로 보인다.
"그냥 말해도 들리는데 굳이 입모양으로 그렇게 하는 건 무슨 이유야?"
- 그냥 이게 더 느낌 있잖아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같은 느낌. 들어가도 돼요?
- 야, 권수영. 지금 오픈 시간 전인데 당연히 안 된다 하겠지.
- 시바, 그래서 물어보는 거잖아. 주현 오빠 괜찮죠?
"들어와. 대신 물기는 잘 닦아주라. 나 바닥 더러워지는 거 살짝 예민하거든..."
- 오키오키. 일찍 들여보내주는데, 주현 오빠 예민하게 하면 안 되지.
권수영과 송지아.
인근 J 고등학교 재학생이다.
2학년이라던가, 3학년이라던가.
문제는 지금이 아직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간이며, 평일이라는 점이다.
즉, 이 친구들은 학교를 도망쳐나온 셈이다.
가게 문을 열고 카페트에 신발의 물기를 덜어내는 고등학생 두 명.
"오늘은 무슨 핑계 대고 나왔니?"
- 권수영은 말 없이 월담했고, 저는 할머니 편찮으시다고 하고 나왔어요.
- 야! 송지아, 너네 할머니는 무슨 달에 한 번씩 아프시냐?
- 원래 나이 먹으면 멀쩡한 곳 없는 거 몰라? 너도 한 번 팔십 정도 먹어봐 앓는 소리 안 하나.
-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직 스무 살도 안 됐는데. 60년 더 보던지. 앓는 소리 하는지 안 하는지.
- 흥, 그러던지!
얘들 둘은 친구라면서 매일 싸운다.
심지어 갑자기 훈훈하게 마무리하는 건 무슨 경우냐.
이 녀석들이 가게에 오래 있으면 소란스럽기도 하고, 어른으로서 고민도 된다.
학교를 몰래 빠져나와 이렇게 돌아다니는 게 잘하는 짓은 아니니, 훈계라도 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나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다. 고등학교도 안 나온 주제에 무슨 잔소리를 늘어놓겠는가.
[오누이 타이쿤!]
[J 고등학교 2학년생 권수영]
[종합 만족도: 50%]
[J 고등학교 2학년생 송지아]
[종합 만족도: 40%]
무엇보다 지아와 수영이는 우리 가게에 자주 들려준다. 그 사이 반말도 텄다.
식당 입장에서도 놓치기 아쉬운 손님들이다.
- 어? 윤슬이다. 언니들 왔는데 인사 안 해줄 거야?
"안 하거둔."
송지아가 내 무릎에 앉은 윤슬이를 보고는 키를 낮춰 눈을 맞춘다.
허나 윤슬이는 오늘도 역시 이 둘에겐 철벽이다.
- 왜 안 해?
"윤스리는 옵바랑 놀 거야."
시니컬하게 답한 윤슬이는 고개를 훽 돌리곤 내 가슴팍에 자기 얼굴을 푹 묻어버린다.
그 모습을 본 권수영은 장난끼 섞인 목소리로 따져든다.
- 윤슬아, 주현 오빠가 너 꺼야? 우리도 좀 나눠갖자. 그래도 손님인데.
"옵바는 내어줄 쑤 없쏘."
말투는 사극 투에다가 완강했다.
그걸 보고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권수영도 사극 투를 따라한다.
- 좋소, 윤슬. 그럼 주현 오빠를 부위 별로 나눠서 가지는 건 어떻소? 우린 지금 밥을 먹어야 하니 요리해줄 양 팔을 갖도록 하겠소.
"나너서..? 움... 생각해보게쏘."
"왜 너희 마음대로 나를 능지처참하니?"
그렇게 떠들다가 가게 오픈 시간이 되었고, 두 사람은 앉아 오늘은 무얼 주문할지 고민했다.
기회였다.
"얘들아, 나 요즘 메뉴 때문에 고민하고 있어서 그런데 오늘은 메뉴판에 없는 다른 요리 먹어볼 생각 없어?"
- 오! 저는 완전 찬성. 솔직히 이 가게 자주 오고 싶은데 메뉴가 2개밖에 없어서 좀 고민됐거든요.
마침 수영이의 반응이 아주 긍정적이다.
지아도 흥미를 보인다.
- 어떤 메뉴인데요?
"너희가 좋아할지는 모르겠는데... 돼지김치말이찜."
- 와, 미쳤어. 빨리 두 그릇 가져다주세요. 아 그리고 맥주도 두 잔?
"우리 가게 술 안 판다. 그리고 너네 술 마시려고 하면 학교에 신고할 거야."
- 으엇! 주현 오빠, 신고는 하지 마세요. 저희 술 한 번도 마신 적 없단 말이에요.
권수영이 손사레까지 치며 필사적으로 해명한다.
표정에서 진심이 느껴지긴 한다.
"그럼 그런 말은 왜 해?"
- 농담이죠...
별 시덥잖은 농담을 다 한다.
그런데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의외다. 편견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학교를 빠져나오는 꼴을 보아 탈선을 즐기는 녀석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 있을 때 별 냄새가 나지도 않았어서, 담배를 피는 것 같지도 않다.
"그냥 공부하기가 싫은가보다."
주방에 들어와 오늘 특별히 들여온 돼지고기 부위를 꺼낸다.
삼겹살.
지방이 곳곳에 박혀 선홍빛을 띠는 귀여운 녀석이다.
잘 갈아진 칼로 칼집을 내준다.
"이러면 간도 잘 스미고, 식감도 살거든."
오차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삼겹살을 썬다.
그리고 밑간. 맛술, 생강, 마늘.
돼지 잡내도 잡히면서 맛을 풍부하게 한다.
특히 코리안이라면 마늘이지.
밑간이 된 고기를 냅두고 김치를 꺼낸다.
적당히 익은 김치.
지나치게 시면 설탕을 더 넣어야 해서 맛의 밸런스가 망가질 수도 있다.
김치를 쭉 늘어놓고 밑간된 돼지를 돌돌 말자 벌써 이쁘다.
솥에 차곡차곡 넣고 멸치 우린 국물, 김치 국물, 간장 설탕 등과 자작하게 한소끔 끓인 뒤
마무리로 홍고추와 청양고추를 넣어 완성.
"수영이 말대로 술 땡기는 맛이긴 하겠다."
하지만 윤슬이가 이 가게에 있는 한 결코 맥주 한 잔이라도 판매할 계획 없다.
시계를 보니 평소보다 요리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찜이기 때문에 아무리 솥에 끓여도 20분 정도는 걸린 것이다.
다행히 다른 손님이 아직 안 와서 망정이지, 괜히 손 꼬일 뻔했다.
"얘들아 미안, 오래 기다렸지?"
솥에서 꺼낸 돼지김치말이찜을 대접에 정갈하게 쌓아올리곤 홀에 나가자 의외로 윤슬이가 두 사람과 웃으며 이야기 중이다.
- 아뇨, 윤슬이가 저희 놀아주고 있어서 기다릴 만했어요.
"마자!"
당당하게 똥배를 내미는 장윤슬.
근데 그렇다기엔 송지아의 손에 아까 나와 함께 읽던 책이 그대로 들려있다. 지아가 센스를 발휘해 책으로 윤슬이의 주위를 끈 것 같다.
마침 권수영이 책의 내용을 온 몸으로 재현하는 중이다. 책은 전래 동화.
제목은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마침 헌책방에 들렸는데 있길래 빌려봤다.
- 아...
날 보더니 권수영이 그대로 얼어붙는다.
포즈가 우스꽝스럽다.
SNS 동영상에서 본 것 같은데, 군인 특수부대원들이 훈련할 때 밭줄을 붙잡고 올라가는 모습.
과장된 손짓 발짓으로, 그걸 재현하고 있다.
"수영아, 오누이가 동앗줄을 붙잡고 올라가는 장면을 표현한 거니?"
- 흐읏, 네.
"잘 어울린다."
- 수치스러우니까 못 본 척해주세요.
나한테 보여지는 게 수치스러울 거면, 가게에서 그런 걸 왜 하냐.
라고 따지고 싶지만 나도 석촌호수에서 비슷한 수치를 경험했기에 한 번 묻어준다.
윤슬이한테 호감을 사고 싶었나보다.
"얘들아 근데 문득 생각해봤는데, 오누이는 실제로 보면 몸이 엄청 나게 좋지 않을까?"
- 크흠,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수영이가 헛기침을 하더니 묻는다.
별 생각 없이, 권수영의 수치심을 줄여주기 위해 말을 돌린 것뿐이다.
"밧줄을 잡고 오르내리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아서. 오죽하면 군대에서 그런 훈련들도 있잖아.
저번에 동영상으로 봤는데, 군인들도 막 실수하고 그러더라고."
"어! 윤스리 알아!"
갑자기 윤슬이가 내 웃옷 시보리를 쿡쿡 잡아댕기며 자기를 봐달라는 듯 관심을 요구한다.
"오누이 몸 짱 조아."
보디빌더 흉내를 내듯 팔을 안쪽으로 모아 알통을 만들어보인다.
물렁살이다.
"오누이 몸이 좋다고? 그걸 윤슬이가 어떻게 알아?"
"윤스리가 봐써."
"그렇구나."
조금 이따가 사실인지 직접 물어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