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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굴러들어옴-33화 (33/200)

33화: 무주의 맹시(2)

내 말을 듣던 강씨 아저씨는 너털웃음을 짓고는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셨다.

자리를 떴다.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다.

패스트푸드 음식점처럼 배를 채우면 자리를 뜨는, 그런 휘발적인 관계일 줄 알았는데.

"우리 동네에 헌책방을 차리는 건 무슨 경우냐고."

오늘처럼 동네를 배회하다가 그 주정뱅이 아저씨가 헌책방을 새로 차리는 걸 발견했지 뭔가.

눈을 마주친 순간 두 남자는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쪽은 그때 제법 취한 상태였을 텐데 나를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 안 고등학생 들어와.'

'안 고등학생이요?'

'응, 고등학생 아니라며. 그러니까 안 고등학생.'

'???'

기억을 거슬러보면 강씨 아저씨는 이때부터 되도 않는 드립을 일삼곤 했다.

나를 안으로 불러들여 갑자기 웃통을 까기 시작했다.

재빠르게 스마트폰에 112를 띄웠으나 제지당했다.

'변태짓하려는 게 아니라고.'

'옷을 벗는 시점에서 충분히 변태적인 것 같은데.'

아저씨의 알몸따위 누가 보고 싶기나 할까.

반쯤 들어올린 웃옷 아래로, 보여주시는 건 등짝이었다. 그걸 보고나서야 왜 굳이 옷을 벗는지 이해는 되었다.

곳곳에 빨간색 손바닥 자국이 단풍잎처럼 눌러붙어있는 게 아닌가.

피멍이었다.

'아내분한테 제대로 혼나셨네.'

'이등병 때로 돌아간 줄 알았어. 오질나게 맞았다.'

'그래도 굳이 웃옷까지 깔 필요가 있을까요?'

'어차피 남정네끼린데 뭐 어떠냐.'

대기업에서 얼마 전까지 회사원을 하셨던 것치곤 구수한 답변이었다.

'그런데 얼마나 힘이 좋으시길래 그렇게 피멍이 들어요? 환자라면서.'

'젊었을 적에 1군 배구 선수였어.'

숙연해졌다.

그런 분한테 저렇게 얻어맞았음에도 살아남았으니 자랑하고 싶을 만도 했다.

되도 않는 드립보다 차라리 이쪽이 더 웃겼다.

'근데 그 정도면 아직 기운이 좋으신 거네요?'

'그렇지, 아픈 티도 잘 안 내.'

'음? 그런데도 회사 그만두신 거예요? 아내분 간병하려고 퇴사하신 줄 알았는데.'

'아니, 그것도 있긴 한데. 회사에 치여살다간 평생 아내 어디 아픈 줄도 모르고 병신처럼 살 것 같아서.

그만두고 책방 차리는 거지. 회사보다는 자유롭게 시간 낼 수 있을 것 같더라.'

'아내분을 많이 사랑하시나보네요.'

'그러니까 결혼했지.'

어차피 학교를 안 가기도 하고, 그때까진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던 시기라 마땅히 할 일도 없었다.

아저씨와 또 한 바탕 수다를 떨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헌책방은 훗날 회사 퇴직하면 아내분과 함께 차려서 운영하려고 했던 로망이라고 했다.

꿈이 많은 부부라고 생각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아이들이 손님으로 많이 오면 좋겠다고 했다.

난임이라 곧 오십인데도 애가 없다더라.

'주현이, 너도 자주 들려.'

'애들 얘기하다가 갑자기 왜 저한테 그러세요? 저 정도면 거의 다 컸는데.'

'어차피 학교 안 다니잖아? 할 일 없을 때 여기 책방와서 몇 글자 읽고 나가.'

'저 책 빌릴 돈 없는데.'

'넌 공짜야, 어른될 때까지는 공짜로 해줄게.'

'그럼 아직 애인 걸로 할게요.'

그게 헌책방에 들리게 된 계기였다.

요즘까지도 윤슬이를 데리고 종종 들리고 있다.

아직까지 나를 애 취급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강씨 아저씨는 책 대여료를 한사코 받지 않으신다.

"쿨... 쿨..."

내 무릎에 누워있던 윤슬이가 어느새 잠든 것 같다.

....

사실 아니다.

"쿨... 쿨..."

"어이구... 우리 윤슬이가 자나보네?"

"윤스리 자고 이써."

작은 목소리로 본인이 자고 있음을 어필한다.

게다가 쿨쿨거리는 것도 콧소리가 아니라 정직하게 입으로 발음한 것이다.

"윤슬이가 자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되나? 여기다 놓고 갈까..?"

"...? 쿨... 쿨..."

"지금부터 헌책방 들리려고 했는데 윤슬이 여기다 놓고 가야겠다. 그러면 아저씨가 주는 초콜렛 나 혼자 다 먹을 수 있는데."

"움!"

그제야 감고 있던 눈을 부릅 뜬다.

무릎을 베고 있는 채로 고개를 스윽 돌려 나를 쳐다본다.

게슴츠레한 눈매.

"옵바..."

"응? 윤슬이가 일어났네?"

"윤스리 다 드러써."

"뭘 들었을까요?"

"옵바 혼자서 초코 아저씨한테 가는 거. 다 드러써!"

"들켜버렸네?"

"그러믄 윤스리는 서우내..."

"서운해? 아이구, 윤슬이 내가 장난친 건데 속았어?"

"쟝난이라두 혼자 간다구 하믄 서우내!"

입술을 비죽 내미는 윤슬이.

진짜 서운해보여서 양팔로 애기처럼 들어안아 달래주었다.

그래도 입술을 말아넣을 생각을 하지 않길래

"특별히 오늘은 윤슬이 초콜렛 다섯 개까지 먹을까? 오빠가 나빴으니까. 그걸로 용서해주면 안돼요?"

"움... 특벼리 용서해여."

이렇게 용서받았는데, 그 대화가 있고 나서 윤슬이가 다시 한 번 작게 중얼거렸다.

"히히... 작전 성공. 아저씨한테 마니 달라 해야지."

내 동생은 어디부터 어디까지 설계한 것인가.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냥 못 들은 걸로 치자.

그 길로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 헌책방으로 향했다.

근데 왠 걸?

도착해보니 책방 셔터가 내려져있다.

드문 일이다.

적어도 내가 몇 년 간 다니면서 예고 없이 문을 닫은 적은 없었다.

"뭐야, 오늘 책방 문 닫았네?"

"안 대!!!"

유달리 윤슬이가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어쩔 수 없이 내일을 기약하고 다시 정처 없이 페달을 밟다가 귀가했다.

근데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헌책방의 셔터는 올라가있지 않았다. 아저씨도 연락 없이 부재였다.

내 기억으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

"손님... 저희가 오늘 준비해뒀던 새우가 다 떨어졌거든요. 그래서 3인분 추가로 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  제육 3인분으로 바꿀게요.

"으엇, 네, 네..."

"우아, 저 언니야 엄청 마니 머근다."

강씨 아저씨가 책방을 여는가 마는가, 그 여부와 상관 없이 내 장사는 지속해야 했다.

신경 쓰이긴 했지만 연락도 받지 않았고, 호연 형님도 사정을 모른다고 하시니

걱정해봐야 마음만 졸일 뿐이다.

이틀이 지난 수요일의 저녁.

어제에 연달아 무지막지한 손님이 들려주셨다.

내 또래의 손님인데 방금 제육 3인분을 주문함으로써 8인분째 식사 중이시다.

먼저 5인분은 새우볶음밥을 드셨다.

새우를 오늘 들여와 시험용 메뉴로 몇 번 권유했었는데 생각보다 식재료를 많이 주문했는지, 남을 뻔했다.

근데 마침 이 손님이 오셔서 다 처리해주셨다.

"제육까지 드신다고 할 줄이야."

웍을 화구에 굴리면서 중얼거린다.

내 기억으로 어제는 4인분 드시고 귀가하셨다.

혼자서 그만큼 먹는 사람은 처음 보았는데, 심지어 오늘은 8인분에 도전하신다.

아니, 도전이 아니라 이 정도의 양이 저 손님에겐 보통인 걸지도 모른다.

바 테이블에 앉으신 대식가 손님.

우리 가게에서 제일 큰 접시에 제육을 담아 손님 상에 올린다.

원래는 1인분씩 따로 나가는 메뉴인데, 혼자서 3인분을 요구하시니 어쩔 수 없었다.

"제육 3인분 나왔습니다."

-  네.

과묵하다.

외마디 대답과 함께 조용히 목례하곤 식사하신다.

현재 손님이라곤 이분뿐이다.

오늘 장사가 쪽박친 것은 아니고, 그만큼 늦은 시각이다.

가게 마감까지 30분 남았다.

"언니야, 더 머글 쑤 이써여?"

끄덕끄덕-

"얼마나여."

-  다섯 그릇은 더 먹어.

"우오오오! 윤스리는 하나만 머거두 배 빵빵인데?!"

식사 중이신 손님 옆에서 윤슬이가 계속 말을 건다.

저런 대식가는 좀처럼 보기 힘드니까 신기한 것도 이해된다.

어제도 그랬기에 한 번 내가 제지하기도 했다. 식사하시는데 방해될까봐.

근데 그때 손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윤슬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  괜찮아요.

그렇게 말씀하시기에 지금도 내버려두는 중이다.

저 손님이 와주시면 좋은 점도 명확했다.

[요리의 길(LV. 3)- 숙련도 87%]

[숙련도 100% 달성 시 다음 단계로 레벨업합니다.]

한 분이 음식을 왕창 주문하니, 숙련도 증가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1인분 메뉴를 만들 때와 3인분 메뉴를 만들 때의 요리 감각은 미묘하게 달랐다.

한 그릇에 다인분의 음식을 만들어내야 하는 경험은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그 차별된 경험이 숙련도에 더욱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언니야, 더 머글 거야?"

-  으응...

한 눈 판 사이에 대식가 손님이 그릇을 텅텅 비웠다.

음식 내어드린지 15분은 됐으려나.

주방에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친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인다.

뭔가 원하는 바가 있을 때, 윤슬이도 저렇게 한다.

"아직 배고프세요?"

-  네.

"그럼 더 주문하세요."

-  시간이...

공식적으로 식당 마감까지 10분 남았다.

그걸 신경 쓰는 듯했다.

"어차피 지금 손님 한 분밖에 안 계시잖아요. 그냥 주문하세요. 다른 손님들까지 같이 계셨으면 눈치 보여서 안 되는데. 오늘은 넘어갈게요."

손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내가 사장이니 어차피 내 맘이다.

알바생도 없으니 말이다.

-  제육 3인분이요.

손가락 세 개를 펴며 해맑게 말하는 모습이 어린 애 같았다. 분명 내 또래처럼 보이는데, 대화를 섞는 데 서툰 사람인 것 같다.

"언니야, 우리 옵바 음식 마시찌?"

-  으응... 응.

망설이다가 대답한다.

-  이 근처 식당 중에 제일, 제일 맛있어.

저 대식가 손님이 우리 가게에 와서 뱉은 문장 중, 가장 긴 것이었다.

결국 손님은 다시 가져다드린 제육 3인분까지 바닥을 긁으셨고, 밥값을 치룬 뒤 가게를 나가셨다.

나갈 때 허리를 크게 굽혀 인사를 하시던데, 그게 배꼽인사를 하는 윤슬이와 묘하게 겹쳐보였다.

[요리의 길(LV. 3)- 숙련도 88%]

"덕분에 숙련도 1% 더 올렸네."

마감 시간은 10분 정도 늦어졌지만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암튼 돈도 벌었으니 말이다.

"옵바, 아까 그 언니야 엄청 마니 머거."

"그러게, 잘 드시더라. 윤슬이도 키 크려면 그만큼 먹어야 되는데?"

"이잉? 근데 그 언니야는 키가 별루 안 커여. 옵바가 훨씬 커."

"그 정도면 큰 편이긴 할 건데."

대식가 손님이 나가시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는데,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염색한 지 얼마 지난 듯 뿌리가 검게 올라온, 붉은 머리카락. 키는 165 전후로 보였다.

익숙한 몸놀림으로 본인 바이크에 올라타 길을 떠났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으나 바이크 기종은 할리였던 것 같다. 텅텅 거리는 배기음이 특징적이었다.

"되게 개성 있는 손님이긴 하지?"

"움, 내일두 오나, 언니야."

윤슬이는 그 손님이 마음에 들었는지 줄곧 '언니야'라고 부른다.

수영이나 지아, 혹은 신혼부부의 아내분과 다른 무언가가 있는가보다.

그 바이크가 마음에 들었으려나.

"글쎄 우리 가게 음식이 마음에 드셨으면 오지 않을까?"

"그러믄 또 오게따. 옵바 요리가 제일 마시따고 그래써."

아마 이 정도로 가게 음식을 주문할 정도라면 만족도도 제법 올랐을 것이다.

굳이 확인하진 않았으나 확인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 길로 가게를 닫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자전거를 끌고 왔기에 동생을 뒤에 앉히고 페달을 굴리는데, 성북천을 마지막으로 옆에 끼는 골목에서 윤슬이가

"옵바, 저기 바바."

"응? 어디?"

"초코 아저씨."

라고 주의를 끌었다.

헌책방이 장사 중에도 은근히 신경 쓰였던 나는 그 말을 듣고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윤슬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성북천 벤치에 처량히 앉은, 산적 같이 수염을 기른 남자가 보였다.

강씨 아저씨였다.

밤길의 미약한 조명 아래, 멀리서 보아도 얼굴이 여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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