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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굴러들어옴-35화 (35/200)

35화: 무주의 맹시(4)

"따듯하다. 그리고 보슬보슬하네."

볶음밥의 맛은 편차가 적지만, 방금 만들어서 그런지 더 선명한 맛이라고

강필중은 생각한다.

회사 다닐 적 아내가 가끔씩 싸주던 도시락은 다섯 번 중 네 번이 계란 볶음밥이었다.

간단한 이유였다.

요리 솜씨가 형편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말이나 평일 저녁엔 강필중이 상을 차릴 정도였으니.

'안 싸줘도 된다니까 그러네...'

'그냥 가져가서 먹어라, 강필중. 나 요리 연습하는 겸해서 만들어준 거니까.'

'야, 넌 요리 연습한다는 애가 맨날 계란 볶음밥만 만드니?'

'이게 제일 자신 있는 걸 어쩌라는 거야? 회사에서 맛 대가리 없는 거 먹고 싶냐?'

'아니, 잘 먹겠다고.'

'그래, 빨리 출근이나 해.'

어느 날 아침의 대화를 회상한다.

유치한 캐릭터 그림이 그려진 도시락통.

그곳에 우겨담은 듯 한가득 담긴 계란볶음밥.

사무용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주위의 풍경은 강필중에게 멀어졌지만 너무도 익숙한 곳이었다.

"회사?"

K 기업의 본사 기획팀 사무실.

모 프로젝트의 PR을 맡게 된 탓에 야근을 해야만 했다. 무한경쟁 사회의 일면에서 보면 참 행운인 일이었지만 육체는 피로했다.

달이 희게 떠있는데도 아직 저녁도 못 먹은 상태였다.

슬슬 입에 물려가는 계란 볶음밥을 먹을까 말까.

고민 중이다.

원래 같았으면 점심에 먹어치워야 했지만, 그땐 내키지 않아 팀원들과 중식으로 떼웠다.

허나 지금 시간엔 나가서 밥을 먹기엔 애매했다.

오늘 스스로 정해둔 작업 분량을 마치지 못했는데, 지금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간 시간이 애매하게 뜰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선택지가 없잖아."

밥알이 훌훌 날리는 볶음밥을 한 술 떠 입에 넣었다.

차고 심이 살아있는 듯 딱딱하다.

"맛으로 먹냐, 살려고 먹지."

그나마 볶음밥이라 식었는데도 이 정도 맛을 보장해주는 것이라 자기 위로하며 입에 우겨넣는데.

웬 꼬맹이가 옆에서 옷자락을 땡긴다.

꾹꾹-

"초코 아저씨."

"으응? 넌."

눈에 익었는데,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회사 동료의 아이인 것 같은데.

야근하는 사람은 강필중, 자신 말고도 몇 있었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 이러구 이쓰믄 안 대는데."

"꼬마야, 그게 무슨 소리야?"

"보끔밥, 빨리 먹구 가야 대."

"어디를?"

"집에여."

이 아이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강필중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애시당초 누구 집 아이인 거지?

혹시 부장?

"싸었자나여! 화해하러 가야대!"

싸워? 내가? 누구랑?

누구랑.

이라고 하면 강필중이 다툴 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다.

아내, 최영현.

그녀를 떠올리자니 한 가지 강박이 가슴을 후벼팠다.

가슴에 파인 구멍에서 한 가지 문장이 새어나왔다.

"영현이 병원 가야되는데...?"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강필중, 스스로도 몰랐으나 그래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단전에서 솟아올랐다.

그것도 꽤 급하게, 몸놀림을 재촉했다.

하지만 모니터에는 아직 정리가 다 되지 않은 프로젝트의 자료가 산발적으로 전시돼있다.

프로젝트.

프로젝트...?

"씨발, 지금 일이 중요하냐?"

강필중은 달린다.

가죽 가방

고급 울 코트

심지어 도시락 통까지 그대로 놔둔 채로.

사무실을 나서며 이름 모를 꼬맹이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꼬마야! 고맙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꼬마라고 불린 다섯 살 난 아이는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죽대며 웅얼거린다.

"꼬마가 아니라 윤스리인데...!"

강필중이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린 것이다.

다음에 따져주기로 한다.

강필중은 달린다.

도로의 인파를 넘어 달린다.

구두의 단단한 굽이 바닥에 받친다.

무릎이 아려온다.

그래도 달린다.

불규칙한 포장도로의 벽돌에 신발코가 걸린다.

오른발이 접질린다.

이 정도면 부어오르겠는데.

그래도 달린다.

하아- 하아-

숨이 차오른다.

겨울철인지 희끗하게 입김이 오른다.

자켓이 불편하다.

벗어 젖힌다.

대도로변으로 나온다.

택시를 잡고 총알 운행을 요구한다.

다행이 길은 막히지 않고

그리고 마침내.

"집이다.."

어쩌자고 출퇴근 카드도 안 찍고 여기까지 왔는지 황당했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은 없었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탁탁탁탁- 연달아 누른다.

빌어먹을, 얼만큼 좋은 아파트에 살건 엘리베이터는 일관성 있게 느리고 지랄이다.

띵동-

느지막이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타서도 발을 동동 구르는 강필중.

15F라고 쓰인 버튼을 누르면서도 괜히 고층을 샀나 후회한다.

이윽고 15층에 도착한 강필중.

무언가에 쫓기듯 달려가, 집문을 연다.

그곳엔 네가 있다.

"최영현."

아직 건강한 모습의 네가.

그리고 지금에서야 확실히 보인다.

알 것 같다.

네 목이 어색하게 부어올랐다는 걸.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

일 때문에 아내의 사소한 변화에 눈치채지 못한, 강필중의 부주의했던 시야가 변한다.

"뭐야, 강필중? 오늘 막차 탈 것 같다고 그러더니."

"영현아."

"응? 뭐야, 이 양반 왜 이래."

"병원 가자."

"너 아프니?"

"아니. 내가 아니라 네가 아파. 너 암이야."

"무슨 개소리야."

"설명할 시간 없어, 빨리"

"야, 야, 야... 뭐야 강필중!"

처음으로 최영현의 손목을 거칠게 잡고 집 밖으로 끌고 나간다.

파자마 차림의 아내를.

그제야 마음을 좀먹던 강박이 눈녹듯 사라지는 것만 같다.

중년 남자의 거친 볼을 타고 한 줄기 눈물이 흐른다.

드디어, 늦기 전에 말했다.

네가 아프다고.

내가 먼저 알아주었다.

네가 아프다는 걸.

그렇게 강필중은 볶음밥이 빠뜨린 기억의 바다에서 헤어나왔다.

**

"주현아, 이건 볶음밥이 너무 맛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응, 뭔가 내가 전에 먹던 것보다 훨씬 맛있어서 아예 다른 음식 같다, 야. 다음에 올 때 한 번만 더 만들어줘."

"재료 남아 있으면 해드릴게요."

강필중은 그릇의 바닥까지 싹싹 비웠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장윤슬의 머리를 자상하게 만져준다.

"윤슬아, 다음에 아저씨가 가게 올 때 비싼 초콜렛 사올게. 고맙다."

"잉? 윤스리 까머근 거 아니네?"

그 짤막한 대화의 흐름을 송주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또, 한 가지.

볶음밥을 입에 우겨넣던 강필중의 표정이 전과 달리 훨씬 밝아져있었다. 단지 계란 볶음밥이 맛있기 때문에 저렇게까지 바뀔 리는 없는데 말이다.

좋은 기억이라도 되살아난 걸까.

"뭐지..?"

무심코 의문을 뱉는다.

"주현아, 가봐야 되겠다. 챙겨줘서 고마워."

"가세요? 어... 괜찮으신 거 맞죠?"

"응, 괜찮아. 가볼게."

강필중은 손을 두어 차례 설레설레 흔들고, 곧장 가게 밖으로 나갔다.

송주현 입장에선 다소 갑작스러웠다.

"윤슬아, 아저씨 기분이 갑자기 괜찮아지신 것 같은데...?"

"어! 윤스리 알아, 왜 그러는지."

"응? 왜인데?"

"윤스리가 혼내조써. 빨리 집에 가라구."

배를 뽈록 내미는 장윤슬.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전후 관계였다.

허나 지금 당장 생각해보면 그 일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재빠르게 스마트폰을 꺼내어 강필중의 가게 만족도를 확인한다.

"아니, 이 정도로 올랐다고?"

[오누이 타이쿤!]

[헌책방 주인 강필중]

[종합 만족도: 100%]

[헌책방 주인 강필중 – 패밀리로 등록됩니다!]

"패밀리 등급...!"

단골 이상의 등급이다.

타이쿤 어플의 규정 상 만족도 80%가 단골.

100%를 달성해야만 패밀리 등급이 된다.

애초 송주현의 노림수는 우수 고객 정도였다.

매개 음식은 강필중의 상황처럼 특정 요리를 통하여 어느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추억을 부르는 음식은 향수에 깊이 젖게 하듯 호감을 부르기 마련이다. 곧바로 가게 만족도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달님: 이렇게 될 줄은 저희도 몰랐는데, 여기까지 예상하고 볶음밥을 만드신 건가요?]

[송주현: 당연하지.]

우선 긍정하기로 했다.

[송주현: 이제 아저씨를 도와드릴 마음이 생겼나?]

[달님: ...? 무슨 말씀이신지. 물론 강필중씨가 패밀리 등급이 돼서 가게 지명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면 저희도 좋기야 하지만

그게 아저씨를 도와드려야 할 이유랑 직결되지는 않는 걸요.]

[송주현: 그건 조금 안일한 생각이지 않나?]

[달님: ?]

[송주현: 강씨 아저씨는 지금 어플 상에서 우리 가게에 대한 만족도가 가장 높은 손님이야.]

[달님: 그렇죠, 그래서요?]

[송주현: 그렇다면 우리가 손님을 잘 관리하도록 도와줘야 하지 않겠어? 서로 윈윈하는 차원에서. 만약 강씨 아저씨가 아내분 때문에 풀 죽은 상태가 지속되면 가게에 발길을 끊으시겠지.

그런데 저런 손님 하나 잃는 건, 너희 입장에서도 손해잖아?]

[달님: 흠, 그런 관점에서 보자는 말이군요.]

[햇님: 틀린 말은 아니네요. 저 정도 만족도를 보이는 손님을 잃을 수는 없죠, 가게 입장에서.]

논리에 어긋나지 않은 설득이었다.

적어도 그들을 도와야하는 명분만큼이 얼마간 생긴 셈이다.

**

"후우, 겨우 들어왔네."

"뭐냐, 강필중. 지금 면회 시간 한참 지났는데."

"몰래 들어왔지."

"이럴 때 보면 참 간 큰 양반이라니까."

"그러니까 너랑 결혼했지, 최영현."

"지랄."

중년 부부 사이에서 어색한 공기가 맴돈다.

조용한 병원의 개인실.

소등 시간은 지났지만 환자는 아직 잠들지 않았다.

순찰을 도는 간호사들의 감시를 피해 이곳까지 들어온 강필중은 또 다른 고비와 마주했다.

아내, 최영현에게 사과하는 것.

청승 맞은 소리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평소 같았으면 우물쭈물대다가 어물쩡 넘어갔겠지만 아까 오누이 식당에서 어느 기억에 젖었기 때문일까.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안해.""

부부의 목소리가 겹친다.

다시 한 번 공기가 어색해진다.

"너 때문 아니야."

먼저 입을 연 것은 최영현 쪽이다.

"응?"

"너 때문 아니라고, 등신아. 의사가 그러더라. 저번에 암 치료할 때 방사선을 많이 쫴서 재발한 것 같더라고."

"...."

"그러니까 네 탓 아니야. 바보 같이 자기 탓으로 몰고 가지 좀 말아. 그리고 아까 때려서 미안해. 아팠냐?"

"응, 아프더라."

"그러니까 내 말 잘 들으라고."

강필중은 멋쩍게 웃는다.

"나도 미안해. 나보다 힘든 건 넌데, 내가 괜한 소리해서 더 스트레스 받게 한 것 같아."

"알았으면 좀 잘해!"

그렇게 말하곤 본인의 입을 틀어막는 최영현.

목소리가 컸다는 걸 스스로 인지한 것이다.

다행히 근처 복도에 간호사는 없었다.

최영현은 화해의 표시로 오른손을 내민다.

마찬가지로 병상까지 다가가 최영현의 손을 맞잡는다.

....

그리고 난데없이 팔씨름이 시작된다.

부부가 자주하는 장난이자, 화해의 수단인 것이다.

손으로라도 스킨십을 자주하면 부부 사이가 원만히 유지된다는, 서로의 생각이 이젠 버릇처럼 자리 잡았다.

책방에서는 이따금씩 송주현에게 심판을 부탁하곤 했었다.

식사할 때나 펼치는 밥상 위에 남녀가 팔을 올리곤 팔씨름을 한다.

간호사가 이 장면을 목격했더라면 두 사람이 50대란 사실을 믿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토록 유아틱하고도 아기자기한 장면이다.

단판 승부.

한쪽 팔이 우세를 점하여, 상대방을 넘어뜨리기까지 걸린 시간, 약 3초.

결과는 언제나 그렇듯 최영현의 승리였다.

배구 선수 출신은 무시할 게 못된다고, 언제나 강필중은 생각했다.

"야, 강필중. 봐봐 나 아직 힘 좋지? 생각보다 몸 상태 괜찮은가보다."

"응 그렇네."

잠시 정적.

"지랄하네."

다시 정적, 그리고.

최영현의 눈에선 좀처럼 볼 수 없던, 눈물이 흐른다.

"뭐가."

"왜 져주냐고, 등신아."

"넌 선수 때도 지면 코트 나오면서 욕부터 뱉었잖아. 나한테까지 지면 욕이 두 배로 늘 것 같아서 그랬다."

"나 지금 많이 약해졌지?"

"아니, 똑같애."

"거짓말 치지마."

"거짓말인 줄 알면 좀 속아줘라."

"나쁜 새끼..."

"나이 먹어도 욕은 안 줄어드는구나."

부부는 입을 맞춘다.

입과 입 사이 좁은 간격이 생기며 두 사람은 원숙한 미소를 짓는다.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남몰래.

이 나이 먹고 남들 앞에서 이런 애정행각을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허나 그렇다기엔 송주현에게 설득당한 오누이가 부부의 상태를 살피러 이곳으로 시선을 돌린 이후였다.

"그러니까 너랑 결혼했지, 최영현."

이라는 오글거리는 대사부터 모두 관람한 햇님과 달님이었다.

"음, 중년 로맨스도 달달하네?"

"당분이 치사량을 넘는데요, 오라버니?"

달님은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튕긴다.

"이제 볼장 다 봤으니까, 고객 관리나 좀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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