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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굴러들어옴-36화 (36/200)

36화: 무주의 맹시(5)

지난 밤 어떤 난리가 있었든 장사는 해야 했고, 우리 남매는 출근했다.

어제 귀가가 늦어진 까닭에 자연스레 취침 시간도 늦어졌다. 그래서 평소보다 2시간 정도 덜 잤는데, 그것 때문에 윤슬이는 가게에 출근해서 곧바로 '간이 의자 침대'로 향했다.

"옵바... 뒤는 부타캐..."

라며.

의자를 두 개 붙여 주방 한 켠에 드러누운 것이다.

그런데 이게 또 의외의 효과를 불렀다.

주방 안쪽이 보이는 다찌석이 인기몰이를 했다.

바 테이블 쪽에 앉아 고개를 슬쩍 들어올리면 새근새근 잠든 윤슬이를 볼 수가 있는데, 이게 또 손님들 입장에선 볼만했던 것 같다.

-  윤슬이 잔다. 우물거리는 거 엄청 귀여워...

-  코고는 거 녹음해도 돼요, 사장님?

"네 녹음해주세요. 그리고 다음에 윤슬이한테 들려주세요. 오빠 일하는데 너 혼자 자면서 코골았다고 한 마디 불평해주게.

그런데 동영상이나 사진은 안 돼요."

-  넵!

내가 허락하자 몇 손님들이 주방 안쪽까지 핸드폰을 들이밀어 윤슬이 코고는 소리를 녹음한다.

녹음된 걸 재생하고는

-  오오, 소리 키우니까 잘 들리네.

-  애기들은 어떻게 코 고는 것도 귀엽냐.

라며 소란이다.

주방의 식기 소리가 시끄러울 텐데, 그 소음을 뚫고 무사히 녹음된 모양이다.

2시간 못 잔 것 치고는 윤슬이의 숙면은 길어졌다.

점심 장사가 끝날 때까지 일어나질 못했으니 말이다.

윤슬이가 밥을 먹어주지 않은 탓에 평소보다 손님의 수는 적었다.

하지만 오히려 다행이었다.

나 역시도 잠이 부족한 건 사실이니, 평소만치로 손님이 들어왔더라면 더욱 피곤해졌을 것이다.

브레이크 타임에 접어들어 나도 잠깐 졸았다.

꾸벅꾸벅.

저녁 장사 준비를 마쳐놓고 말이다.

그때 누군가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어이구, 깨워버렸나?"

졸린 눈의 흐릿한 시야.

산적 같은 실루엣이 눈에 익다.

목소리도 익숙하다.

강씨 아저씨다.

"어, 오셨어요?"

"미안하다, 이것만 몰래 두고 나가려고 했는데."

아저씨 손에는 열쇠 꾸러미가 들려있다.

저것도 어디서 본 듯하다.

"화해는 잘 하셨어요?"

"그렇지 뭐, 너희 덕분이다."

"뭘 저희 덕분이에요. 그냥 두분이서 알아서 해결하신 거지."

기지개를 켜며 몸을 늘린다.

잠시 정적.

아저씨는 내가 앉아있던 테이블 앞에 열쇠 꾸러미를 내려두신다.

"이거 뭐예요?"

"기억 안 나냐. 책방 열쇠야."

"이걸 왜 저한테 주세요?"

"당분간 네가 맡아달라고, 책방 좀."

"그렇게 결정하셨구나."

"응, 곧 아내 수술 날짜도 잡힐 텐데. 이번엔 재발이다 보니까 치료 자체가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 표적 치료라던가 뭐라던가. 그래서 최대한 옆에 붙어있어 주려고."

"그럼 그동안 책방 월세는 어떻게 하시게요?"

"그 건물 내 명의야."

"수신."

전직 배구 선수 + 전직 대기업 사원의 자본력이란, 과연 내가 걱정할 형편은 아니었다.

뒤이어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금색 포장지로 된 뾰족뾰족한 밤 모양의 초콜렛 더미를 꺼내어 열쇠 꾸러미 옆에 올려두셨다.

"그리고 이것도."

"오? 이거 비싼 건데."

"어제 윤슬이한테 주기로 했거든."

"무슨 일 있으셨어요? 윤슬이랑."

"글쎄 뭔 일이 있던 것 같긴 한데, 잘 기억은 안 나. 근데 윤슬이한테 왠지 되게 고맙고 그렇더라고.

그리고 이 정도는 사줄 수 있는 거잖아? 우리 사이에."

그런 낯간지러운 말씀을.

나이 먹으면 감성적이게 변한다던데, 나도 저렇게 될는지.

"책방을 주기적으로 열어달라거나 그런 건 아냐. 그냥 윤슬이 보고 싶은 책 있다고 할 때, 가끔 들려서 한두 권씩 골라서 가져가라고.

그때마다 한 번씩 책장 털어주면 너무 고맙고."

"그래요. 책장 먼저 터는 것 정도는 해드릴게요. 우리 사이니까."

그렇게 작은 합의가 있고는 아저씨는 곧장 병원으로 돌아가겠다며 가게를 나가셨다.

마침 잠도 깬 터라 핸드폰을 꺼냈다.

타이쿤 어플로 접속한다.

[나: 어떻게 됐어?]

[햇님: 오늘 광배가 아주 잘 먹었어요. 이따가 오라버니랑 단백질 쉐이크 한 잔 때릴 계획인데요.]

[나: 아니, 너네 운동하는 거 말고.]

[햇님: 아, 그 얘기가 아니었나요?]

[나: 당연하지.]

[햇님: 그럼 강필중 아저씨 얘기겠네요. 그쪽은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나: 어떻게든이라니?]

[햇님: 너무 자세히 알려드릴 수는 없어요. 저희도 나름의 규칙과 입장이라는 게 있거든요. 또, 필중 아저씨의 아내분이 완전히 쾌유하실 거란 보장도 없습니다.]

오누이로부터 직접 전달듣기엔 비극적이었으나,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오히려 녀석들이 조금이라도 병세 약화에 도움을 준다면야 그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는 게 도리다.

[햇님: 그래도 어제 아내분의 모습을 지켜봤는데, 심성이 강한 분이더라고요. 병에 쉽게 무너질 만큼 약한 분은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장담할 순 없지만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의사는 아니지만요. 예로부터 병을 이기는 건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하잖아요?]

[나: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조금 낫다. 도와줘서 고마워.]

[햇님: 주현 오라버니, 착각하지 마세요. 도와드린 게 아니라 식당의 고객 관리를 했을 뿐이니까요. 저희 입장에서도 필요한 일이었을 뿐이라고요! 흥.]

헬스맨에 이어 또 다른 컨셉을 밀고 있는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가볍게 무시하기로 했다.

"우웅... 옵바."

어느새 윤슬이도 일어났다.

강씨 아저씨가 들락거리는 소리 때문에 정신이 든 것 같다.

내 앞에 우뚝 서서 나를 한참 괄목한다.

"우움..."

"왜 그래?"

그러다 눈썹을 까딱인다.

내가 앉아있는 의자 위로 낑낑대며 오를려고 하길래 들어서 무릎에 앉힌다.

"휴우... 옵바가 마자여."

"이번에도 착각하면 안 되니까 확인한 거예요?"

"느에... 큰 일 날 뻔해써."

얼마 전, 다른 손님의 다리에 매달렸다가 까무러치던 동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무릎 위에서 몸을 쭈욱 피며 기지개를 켠다.

그러다 테이블 위에 놓인 고급 초콜렛과 열쇠 꾸러미를 발견한다.

"옵바, 초코다."

"이거 아저씨가 두고 간 거야."

"초코 아저씨?"

"응, 방금 가셨어."

"에엥... 윤스리 안 보고?"

"윤슬이 자는 거 보고 귀엽다고 초콜렛 놓고 간 거잖아. 어제 늦게까지 못 자서, 지금 자고 있는 거라고 했더니 아저씨가 선물 주시는 거야."

"흐응, 그렁가."

못내 아쉬워하는 듯 입술을 비죽이길래 초콜렛을 뜯어주었다. 바스락거리는 금박 호일을 뜯자 견과류가 알알이 박힌 초콜렛이 자태를 드러낸다.

척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초코를 보고선 윤슬이의 표정이 급변한다.

혀를 배쭉 내미는 게 여름철 더위 타는 강아지 같다.

"옵바."

"응?"

"저번에 약쏙한 거... 윤스리 기억 다 하구 이써여."

"약속? 무슨 약속이요?"

"있자나.. 옵바가 윤스리 초코 마니 머거두 댄다고 그랬자나."

"아... 공원에서?"

"응! 다섯 개!"

다섯 손가락을 쫙 피며 수를 강조한다.

원래는 이 썩을까봐, 세 개까지밖에 못 먹게 하지만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다.

어른이 약속 어기는 걸 보고 자라는 아이는 그걸 그대로 보고 배울 테니 말이다.

"그러면 대신 오빠가 맨날 초콜렛 먹은 다음에 뭐해야 된다고 하지?"

"양치!"

"초코 먹고 양치는 꼭 하기에요?"

"네!"

내 무릎 위에서 신이 나서 엉덩이를 쿵쿵 찧어댄다.

가벼워서 타격감도 없다.

윤슬이가 무서운 기세로 초콜렛을 까서 입에 넣기 시작한다.

그걸 흐뭇하게 보고 있는데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이 진동한다.

"뭐지? 햇님이가 읽씹했다고 화났나."

들여다보자, 문자의 출처는 전혀 달랐다.

[고객님의 소중한 상품이 내일 배송 예정입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택배 기사님이었다.

"내일 딱 맞춰서 도착한다, 윤슬아."

"우물우물.... 모가?"

"내일 보시면 압니다요."

"움..? 느엠..."

비싼 초콜렛 시식에 정신이 팔려있다.

할머니께 들었는데, 윤슬이는 제대로 생일을 챙긴 적이 없다고 한다.

5월 5일.

어린이날과 겹쳐 다소 비극적인 날짜다.

할머니 손에 자라서 또래 애들마냥 선물을 받거나 케익을 썰었던 적이 없다고 한다.

다만 미역국은 꼬박 챙겨먹이셨다고.

그래서 올해는 내가 챙겨줄 계획이다.

미역국은 둘째치고 선물이랑 케이크는 꼭.

**

한편 다른 남매 쪽도 한가로운 때를 보내는 중이다.

오늘의 연락 담당은 햇님이었지만 금일 장사 추이를 보니 송주현으로부터 더 연락이 올 것 같진 않았다.

"흐으... 왜 네가 연락 담당인 날만 한가한 것 같냐?"

"원래 일복이 많은 사람은 따로 있잖아요. 오라버니가 복이 많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달님이가 만화책에 얼굴을 묻으며 불평한다.

나란히 누워있는 오누이.

머리맡에는 왜제 만화부터 외제 카툰까지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쌓여있다.

"쉐이크 마실 때까지 몇 시간 남았지?"

"1시간 13분이요."

"으아... 가져온 거 다 봤는데."

오늘 분할량인 운동을 모두 마친 달님이.

할 일이 고갈되었다.

....

밀려오는 권태감을 이기지 못하고, 햇님이를 찔러보기로 했다.

"햇님쓰?"

"네?"

흠칫.

대답할 때, 간극이 있었다.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단 얘기다.

남매이기 때문에 아는 아주 사소한 신호.

달님은 누워있는 동생의 눈빛을 보았다.

얼굴의 방향은 만화책에 고정돼있으면서도 눈동자만 자신을 향한다.

짜증이 섞여있다.

'큰 일 났다.'

원래대로라면 보리보리쌀이나 같이 할까, 제안하려던 달님은 생각한다.

'괜히 실 없는 소리했다가는 엄청 짜증낼 것 같아.'

햇님이는 무언가에 몰입하려했을 때, 그걸 방해당하는 일을 싫어한다. 별 생각 없이 동생을 부른 행동을 후회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무안했다. 오히려 그랬다간 더 화를 낼 것이다.

"그나저나 오누이 식당 장사가 잘 돼서 다행이네!"

결국 일 얘기로 화제를 전환하기로 한다.

"그렇네요. 특히 어제 일은 식당 입장에선 큰 호재죠."

"그러게 단골 등급도 아니고, 패밀리 등급 손님이 하나 생길 줄이야."

"제가 아까 가게 지명도 수치도 확인해봤는데, 다음 단계까지 반절 정도 남았더라구요. 이 정도면 여름될 때쯤 지명도 레벨 2 달성하지 않을까 싶어요."

"엄청 빠르잖아?! 역시 우리가 파트너 하나 잘 찍었다니까?"

"그러게요, 주현 오라버니가 확실히 믿을 만한 사람이긴 하죠."

달님이는 한숨 돌린다.

성공적으로 화제를 끌어내, 욕 얻어먹는 것만은 회피했다.

그런데 이내 햇님이의 표정이 심각해지며 벌떡 일어난다. 역시 때리려는 줄 알고 달님이는 가드를 올린다.

....

"오라버니, 뭐하세요?"

"아, 아니 그... 눈부셔서 눈 가린 거야. 가드 올린 게 아니라."

"흐응..."

때리려던 게 아니었다.

달님이는 두 번째로 한숨 돌린다.

"근데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어떻게 매개 음식을 먹은 것만으로 가게 만족도가 거기까지 오르죠?"

"흐음, 그게 보통 일이 아니긴 하지."

달님이가 매개 음식의 개념을 굳이 비밀 폴더에 저장해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식당 운영에 그리 중요치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애초 비밀 폴더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쓸데 없는 것들인데, 그냥 있어보이기 위해 그런 폴더에 그런 네이밍을 해둔 것뿐이다.

가령 매개 음식의 경우 식당에 적용하기 적절한 시스템은 아니다. 사람마다 각자 추억이 담긴 음식은 다를 터인데, 손님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그런 메뉴를 일일이 준비할 수야 있겠는가?

식재료 수급과 요리사의 메뉴 풀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게다가 그걸로 만족도가 100까지 오르는 경우는 오누이도 상상치 못한 결과였다.

"저희가 모르는 누군가가 개입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강필중 아저씨가 본 기억에 말이에요."

햇님이의 표정은 짐짓 어두웠다.

근심 어린 듯.

달님이는 조심히 동생에게 다가가 머리를 어루 만진다.

"심각해질 건 없잖아? 어차피 가게 입장에서든 우리 입장에서든 손해본 건 없으니까."

"그건... 그렇죠."

"그리고 만약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일이 발생했다는 건, 그건 우리가 몰라도 되는 일이라는 거야."

평소에 장난끼 많은 오빠였지만 햇님은 그 말만큼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단순히 주현 오라버니의 요리 실력이 좋아서 음식이 불러온 기억을 좋게 보정한 게 아닐까요?"

"나름 일리 있는 가설이긴 하네. 지금은 그렇게 정리하자. 그리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형한테 다른 손님의 매개 음식을 한 번 더 만들어달라고 부탁드리자."

"그러는 게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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