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오늘의 입맛(2)
"우... 안 대는데..."
- 뭐가 안 돼?
"옵바는 윤스리랑 살 거에여!!"
- 도토리만한 게! 오빠는 결혼하면 안 된다는 거야?
"히잉... 윤스리랑 살 건데..."
- 그럼 오빠 결혼시키구, 윤슬이가 얹혀 살면 되잖아. 오빠 집에.
"이이...! 안 대는데...!"
윤슬이를 들어올려 안아준다.
입술이 오리처럼 튀어나오고
볼이 호빵처럼 빵빵해졌다.
너무 놀리셨다.
"괜찮아, 오빠는 윤슬이랑 살 거야. 결혼 안 해."
"힝... 저 함무니가 짜꾸 옵바 결혼 시킨다구 그래써!"
"결혼 시킨다구 그랬어? 괜찮아 괜찮아. 윤슬이랑 계속 식당에서 장사해야 되는데. 그쵸?"
"웅! 마자."
품에 안아서 등을 토닥여줘도 샐쭉인다.
삐진 것 같다.
거칠게 씩씩 거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 흐히히... 미안하다, 주현아. 내가 애기 너무 놀렸네.
- 이 여편네야, 그러다 윤슬이 울겄어.
- 애가 저래 귀여운데 우째? 그럼.
옆에서 고기를 썰고 계신 정육정 할아버지. 가만히 있다가 한 마디 하신다.
보통 손님이 오시면 주문은 할머님께서 받으시고, 할아버님은 고기를 썰어내신다.
뼈에 붙어있던 살점까지 남김 없이 도리는 게, 내공이 보통이 아니시다. 잠깐 본 것만으로도 칼질이 깔끔한 게 느껴진다.
"그래요, 할머님 너무하셨어요. 이러다 윤슬이 진짜 울면은 시장에서 다 정육점까지 찾아와서 화내실 텐데. 위험한 거 아니에요?"
- 흐하하! 그치 그치, 윤슬이가 우리 시장 스타지, 스타야. 내가 미안해~. 할머니가 잘못했다.
호쾌하게 웃으며 사과하신다. 윤슬이는 단단히 삐졌는지 얼굴을 내 목덜미에 묻고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윤슬이가 이렇게 극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육점 댁 따님을 한 번 뵀기 때문에.
내가 알기로 연세가 42살이시다.
때를 놓쳐 결혼 못한, 골드미스라나?
부모님 뻘인 아주머님이랑 오빠가 결혼한다고 하면 아무리 다섯 살이라도 충격을 받기 마련이다.
- 그래서 주현이, 오늘은 뭐 가지러 왔어? 목살?
"아뇨, 삼겹 여덟 근만 주세요."
- 주현이는 한 번 올 때 많이 사가주니까 좋단 말야.
"거의 장사할 때 쓰다보니까요."
여덟 근이면 4.8kg.
못해도 30인분 정도는 뽑을 수 있다.
이 정육점은 고기 퀄리티도 괜찮고, 부부 두 분께서 인심도 좋으신 편이다.
- 오늘 윤슬이를 할머니가 거의 울릴 뻔했네?
"으응... 윤스리 안 우러여."
지난 번의 산타 얘기가 효과가 있었는지, 심통이 났을 뿐 울지는 않는다.
등을 토닥여주자 기분이 조금 나아진 듯 할머님 말씀을 들어드린다.
- 할머니 사과 받아주면, 오빠한테 고기 조금 더 얹어주마.
"언져조?"
- 더 준다구.
"앗! 사과 받아써. 윤스리 갠차나져써여."
태세 전환이 상당히 빠르다.
이렇게 휙휙 태도를 바꾸는 것도 우리 윤슬이 매력이다.
- 하하하! 애기 참 귀엽네 진짜... 옛다, 고기 한 근 가격은 안 받아버릴게, 그냥.
- 에잉... 고기 써는 건 이짝인데, 더 주는 건 저짝이네! 씨잉... 서글퍼서 고기 썰겠나?
- 영감은 그럼 단골한테 더 주는 게 아까워? 요 집에서 우리 가게 자주 오는 거 몰라서 이래?!!
- 누가 아깝댔나! 가져가, 그냥!
두 분 다 연세가 꽤 있으신데도 사이가 좋으시다.
머쓱하게 웃으며 썰려나오는 고기를 받아든다.
5키로에 육박하는 양이라서 무게감이 꽤 있다.
고기와 윤슬이를 한꺼번에 들 수는 없어서 바닥에 내려줬다.
고기가 얼마나 무거운지 흥미를 보인다.
두 손으로 검은 봉지의 밑면을 바쳐보더니 미간에 주름이 생기며 표정이 심각해진다.
작게 혼잣말.
"윤스리는 애기라서 못 드러..."
본인이 애기라고 자각하는 게 이렇게 귀여운 일인가? 입술을 말아넣으며 웃음을 참는다.
"아이구, 오빠 한 쪽 손이 비어서 윤슬이랑 손 잡아야겠는데? 손이 시린데?"
"움? 그러믄 윤스리가 잡아조."
"오빠 고기 드는 동안 수상한 사람 오면 윤슬이가 지켜줘야 되는데? 그쵸?"
"윤스리한테 맡겨!"
내 옆으로 바짝 붙어 검지와 중지를 한 손에 꼬옥 쥔다. 고기 봉지를 들어주는 중책은 아직 윤슬이에겐 버거우므로 에스코트를 부탁하기로 한다.
저번에 [황야의 데스페라도]를 시청한 이후, 우리 집 다섯 살 난 맹수는 조금 더 와일드해졌다.
자주 들르는 손님들께는 손가락 권총을 빵야- 빵야- 쏴줄 정도.
그 무형의 총알세례에 손님들은 식사 도중에도 혼수 상태에 빠지곤 한다.
가게에 도착해선 평소처럼 점심 장사 준비를 했다.
고추장 삼겹살을 따로 팔 계획이기에 가게 앞 칠판에 [오늘의 메뉴: 고추장 삼겹]이라고 써두기도 했다.
가게를 오픈하자 두세 팀씩 테이블에 앉아 자리를 채워주신다. 오늘의 메뉴를 보고 맛있겠다 싶어 들어오신 분들도 계시고, 제육이나 가지 튀김에 꽂혀 오신분들도 계신다.
이런 식으로 손님들이 와주시는 것이 어느새 익숙해졌지만, 최근 통장 잔고를 보니 손님들께 더욱 잘해드려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입맛이 매운 맛이라 그런가? 고추장 삼겹이 불티나게 팔리네."
한 시가 아직 안 됐을 무렵, 벌써 고추장 삼겹만 스무 그릇이 팔렸다. 윤슬이가 식사 전인데도 말이다.
요리사의 촉이 알려주는 정보를 활용하고 나선 이런 일이 종종 있다.
"간지럼 정도는 감수할만하지. 장사에 이렇게 유용하니까."
특히 그날 사용할 만큼의 재료를 거의 남기지 않고, 모두 활용할 수 있단 점이 아주 큰 메리트였다.
그만큼 음식물 쓰레기가 남지 않으며, 신선한 재료를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
"옵바, 윤스리 배가 텅텅임미다."
"5분만 기다리면 밥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삼겹쌀?"
"그렇죠."
"오우 예아~!"
저 추임새도 영화를 보고 따라하는 것이다.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른 손님들의 주문과는 별개로 윤슬이가 먹을 고추장 삼겹은 덜 맵게 따로 만들어줄 생각이다.
어른들 입맛에 맞게 고추장을 잔뜩 발랐다가는 장이나 위가 다칠 수도 있다. 매운 맛은 본질적으로 통각이라고 하니 말이다.
양념장엔 고추장을 살짝 줄이는 대신 진간장으로 향을 더하고, 설탕을 섞는다.
"음! 이러면 먹을 만하겠다."
장을 맛보니 충분히 윤슬이도 먹을 수 있을 만한 맵기였다.
양파와 파를 팬 위에 먼저 팬 위에 수북이 깔아버린다. 삼겹살을 올리는 건 그 위쪽이다.
양념이 발라진 삼겹을 그대로 팬 위에 올려버리면, 당분 때문에 까맣게 양념장이 타버려서 숯덩이처럼 보인다.
"파랑 양파 타고 올라오는 수분에 익으면 향이 진하게 배지."
칼집이 세밀하게 나있는 삼겹살 표면에 꾸덕한 소스를 꼼꼼하게 바른다. 칼집 사이로 소스가 스미며 간이 더욱 진해진다.
그 삼겹살을 파와 양파 위 쪽에 두고 중약불로 데워버리면, 다 익는 데까지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바 테이블 끝쪽에서 숟가락과 에디슨 젓가락을 양 손에 들고 있는 윤슬이 앞에 삼겹살과 흰쌀밥을 대령한다.
테이블 쪽에는 가스 버너가 따로 있기 때문에 반쯤 익었을 때, 팬 통째로 갖다드렸다.
하지만 윤슬이는 끝까지 조리해서 따로 접시에 담아준다.
"잘 먹게씀미다~!"
후- 후-
아움!
"움무... 쬰덕행..."
삼겹살을 먹으며 행복해보이는 윤슬이.
그 모습을 말 없이 지켜보던, 윤슬이 옆옆 자리 아저씨 손님이 내 쪽을 쳐다보신다.
- 사장님, 저거는 손님들한테 나가는 거랑 살짝 다른 느낌인데요?
"애가 아직 다섯 살이라 너무 매우면 안 좋을 것 같아서요. 양념을 살짝 다르게 했죠."
- 으응... 그렇구나. 사장님 저거 하나만 나한테도 만들어줄 수 있어요?
"어... 어렵진 않은데. 이미 밥 다 드신 거 아니에요?"
손님 상 위에는 양념 정도만 그릇에 드문드문 묻어 있는 가지 튀김 그릇이 놓여있다.
그 옆의 밥 한 공기까지 남은 밥풀 없이 비웠다.
- 저거 보니까, 한 그릇 더 먹고 싶어서 그러는데.
"주문하시면 요리해드리는 게 원래 밥집 사장 역할이죠."
- 한 그릇 부탁해요.
"1인분 알겠습니다."
덜 익힌 채로 버너에 올려드리는 것보다는 손이 더 가긴 하지만 추가 주문까지 해주신다는데 이 정도는 해드려야지.
아니나 다를까, 이 손님을 시작으로 윤슬이가 밥 먹는 모습을 보며 여럿 몰려들었다. '윤슬 효과'는 여전했다.
여러 이유로 오늘 점심 장사는 평시보다 잘 되었고, 아침에 시장에서 들여온 돼지고기는.
"세 근밖에 안 남았네?"
보통 점심 때보다 저녁 장사 때 매출이 더 잘 나오는 걸 생각해보면.
"이따가 시장 한 번 더 다녀와야겠다."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어야지.
두 근 정도 사오면 딱 남지 않게 팔 수 있을 것 같다.
윤슬이랑 다시 시장에 가기 위해 가게를 나서려는데 익숙한 얼굴이 가게 안으로 들어온다.
해병대 출신들이 쓸 것만 같은 빨간 모자 취향은 여전했다.
"빨모 삼초니다!"
"윤슬이가 이 큰 오빠를 아직도 기억해주는구나. 직접 본 지는 거의 두 달 돼가는데."
"우움... 아닌데."
"뭐가 아니야?"
"옵바는 요기."
라며 내 바지춤을 쿡 하고 땡긴다.
그쪽은 삼촌.
이라는 말이 생략돼있는 것 같다.
무안하게 웃던 호연 형님은 테이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신다.
"잠깐 앉아도 돼? 지금 보니까 브레이크 타임인 것 같던데."
"어휴, 뭘 물어보세요. 당연히 괜찮죠."
호연 형님이 테이블을 잡고 자리에 앉는다.
윤슬이와 나는 눈을 마주친다.
"사이다?"
"그렇지, 윤슬이가 사이다 하나 가져다드릴까요?"
"응!"
끙끙거리며 냉장고 문을 열어선 가장 밑칸에 정리해둔 사이다 한 캔을 꺼낸다. 그리고 호연 형님께 가져다 드린다.
"어이구? 땡큐."
"어쩐 일로 들리셨어요?"
"꼭 무슨 일 있어야 들리냐, 그냥 잘 되고 있는지 보러온 거지."
"보러와주시는 거야 당연히 감사하죠. 저희 가게 열 때도 엄청 도와주셨는데. 근데 그게 아니라 오늘 가게 휴일 아니지 않아요?"
호연 형님도 오래도록 고기 장사를 하고 계신데, 오늘은 그쪽 가게가 쉬는 요일이 아니었다.
"아아, 우리 가게 한 3일 동안 내부 공사해야 돼서 문앞에다 공지 써붙여놨다. 으휴, 젠장할."
"음... 또 환기구 망가졌어요?"
"정답."
실내에서 고기를 굽다보면 필연적으로 자욱한 연기가 생긴다. 그걸 빨아들이기 위해 환기 배관을 설치해야 하는 건 거의 모든 고깃집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배관에 이물질이라도 들어가면 쉽게 뺄 수 없어 골머리를 앓는다.
그런 공사 때문에 자리를 비우신 거라면 특별히 할 말이 있어서 오셨다기보다는, 그저 장사 잘 되는지 정말 신경 쓰여서 와주신 것 같다.
그럼 오신 김에 그것에 대해서도 의견을 들어봐야겠다.
"주현아, 근데 어째 바깥에 오늘의 메뉴인가? 그렇게 쓰여있던데 그건 뭐냐?"
"그거 칠판은 최근에 가져다놓은 건데, 날마다 메뉴 바꿔가면서 하나씩 넣는 거예요."
"응? 날마다 메뉴를 바꾼다구?"
"네, 생각보다 반응 좋아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 뜨는 호연 형님.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한다. 형님이 항상 나한테 주장하던 것은 일정한 메뉴를 기준으로 단골 손님들을 공략해야 장사를 오래 끌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퀄리티만 유지되면 메뉴를 크게 바꿀 필요 없는, 돼지고기 장사를 시작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말이다.
"그래? 오늘 점심에는 삼겹살 구워판 거야?"
"네, 고추장 발라서요."
"어허... 잘 팔린다는 말야?"
"그럼 매출이라도 보여드려요?"
두 남자의 시선은 포스기로 향한다.
그 모습을 보고 윤슬이도 한 마디 거든다.
"오늘... 삼겹쌀 마시썻눈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