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레종 데트르(1)
한 시 반이 조금 넘었을 즈음.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이 장사 중이다.
점심 드시러온 손님들은 슬슬 빠져나간다.
홀엔 교복을 입은 송지아와 윤슬이뿐이다.
지아의 밥 그릇은 소스에 물러진 양파 몇 점이 남아있을 뿐, 깔끔하다.
"흥힝힝~."
- 으응?
"흥힝히힝~."
- 윤슬이 어쩐 일로 이렇게 기분이 좋아?
"윤스리 차 사써, 옵바랑!"
- 차를 샀어?
"응! 마니마니."
- 많이... 많이? 얼마나 많이?
"우움? 몰르눈데. 엄청 마니. 손까락 다 써도 못 세어."
동공이 떨리는 송지아.
- 사장님, 혹시 재벌 3세인 거 아니죠? 식당 운영하는 것도 취미라던가?
"이렇게 들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사실 우리 가게 운영하는 거 회장님이 시키신 거야."
- 회장님?!!
"응, 할아버님. 집안 이미지에 도움 될 거라면서 가게 운영하라고 차려주시더라고.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취미보다는 일에 가깝긴 하지. 근데 생계 유지형은 아니야."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꼬리를 말아내리는 송지아.
크게 배신당한 정치가의 얼굴을 하고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 당했을 때, 딱 저런 표정이지 않았을까.
브루투스, 너마저!
"이따가 옵바랑 차 장식할 꺼야. 그러기루 해써. 언니두 가치 하자."
- 차를 장식한다고? 설마 튜닝?
"응, 이따가 잠깐 브레이크 타임에 튜닝 좀 하러 갔다오려고. 지아도 같이 갈래?"
- 지금 살짝 기만 당하는 기분이거든요?
"기만일 게 뭐 있어. 어차피 우리가 우리 돈 쓰는 건데."
- 그건 그렇지만... 그렇지만! 저는 그동안 이 식당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구요.
"그러믄 몬데?"
윤슬이도 흥미가 있단 듯이 지아에게 묻는다.
- 난 정글 같은 도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자 매일 같이 노력하는! 정 많고 훈훈한 남매가 운영하는 가게라고 믿었어! 그런 비밀따위 알고 싶지 않았는데.
"움, 모라고 하는 거지...?"
윤슬이의 이해력이 임계점에 달한 듯하다.
너무 상황을 꼬아버렸다.
"그럼 다음에 수영이랑 같이 한 번 들려. 너희는 워낙 자주 와주니까 고마워서라도 맛있는 거 한 번 대접할게."
- 마, 맛있는 거?
송지아는 마른 침을 삼킨다.
꿀꺽-
"글쎄 트러플 오일을 곁들인 샤토브리앙 정도면 되려나? 안심에서도 최고급 부위니까 별미이긴 한데."
- 역시 돈 많은 지인 하나쯤 있으면 좋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네요!
결국 현실에 순응한 듯 엄지 손가락을 치켜드는 송지아였다.
그 옆에서 윤슬이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따라하자는 듯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고는
고사리만한 엄지손가락을 콕- 치세운다.
덧붙이자면 수영이는 오늘 선생님들께 '은밀한 행동'이 발각되고 말았다고 한다.
월담하다가 하필이면 그 근처를 지나던, 두 사람의 담임인 체육 선생님한테 걸렸다고.
담을 오르던 중 공중으로 발사된 그레이트 제노사이더(망가진 목재 의자 다리를 청테이프로 돌돌 감은 것, 애용하는 무기라고 함.)에 의해 완전 격추되었다고 한다.
- 자, 잠깐만요 선생님! 저, 저기! 송지아도 학교 째려고 하잖아요! 저거 정문으로 걸어나가는 거 안 보이세요?
- 야! 지아는 지금 어머님 편찮으시다잖아. 근데 너는 담을 넘어서 학교를 째는 명분이 있긴 하니?
- 아시잖아요! 송지아 저거 구라에요. 지아네 어머니 엄청 건강해요. 어제도 뵀는데!
- 수영아, 누가 그거 모르니?
- 엥?
- 나도 알아. 근데 이 세상이 원래 그런 법이야. 명분이 있으면 그래도 눈 감아줄 수 있어. 달에 몇 번씩 할머니가 아프시다, 동생이 집에 혼자 있어서 돌봐줘야 한다~ 그러는데. 내가 모르겠냐고. 알면서 보내주는 거야. 근데 너는? 그냥 도망가는 것밖에 안 되잖아.
- 그건 맞죠.
- 그치? 맞지? 그니까 좀 맞자.
- 아재 개그 뭐야.
대략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고 한다.
결국 권수영은 사회가 돌아가는 원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을 얻었노라고 송지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더라.
[권수영: 그런 점에서 학교는 참된 교육 기관인 것 같아.]
미묘한 지점에서 납득하는 권수영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체벌 금지라고 하던데, 체육 선생님들의 참교육 역량은 여전하시니?"
- 아뇨, 말은 그렇게 하셔도 안 때려요. 5년 전쯤에는 그래도 좀 휘두르셨다고는 하던데. 요즘은 잘못 그랬다가는 큰 일 나니까요.
내가 중학생일 때까지만 해도 체육 선생님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말이다.
요즘도 비슷하겠지만 약간의 차이가 생긴 것 같다.
"어! 옵바, 옵바!"
"응?"
"차 와써!"
가게의 투명 문 밖으로 보이는 탑차를 가리키는 윤슬이.
택배 차가 드디어 가게 앞까지 도착했다.
오늘 하루 종일 기다렸던 택배인지라 더욱 기대하는 눈빛이다.
"그러게 드디어 왔구나."
- 음식 재료 주문하신 거예요?
"아니, 차 주문했는데."
- 자동차?
""응!""
남매의 목소리가 겹쳤고, 지아의 시선은 자동적으로 구석에 멋들어지게 주차되어있는 '붕붕이 3호' 쪽으로 향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듯 뒤통수를 긁적인다.
- 설마.
택배 배달원은 물건을 확인 받고 내 정강이쯤 오는 키의 직사각형 박스를 차례로 내려놓는다.
"옵바! 빨리 뜯으자."
"잠시만 기다리시라."
대충 분위기를 보아하니 손님이 금세 들어오거나 하진 않을 것 같았다.
커터칼을 꺼내 테이브를 긋고, 박스 내용물을 꺼낸다. 윤슬이 말마따나 자동차가 많이 많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들어있다.
그걸 보고 지아는 가볍게 숨을 고르더니 조심스레 묻는다.
- 어디부터 어디가 사실이며, 어디부터 어디가 거짓인가요?
"네가 믿는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해둘게."
멋진 대사를 뱉었다고 생각하지만 지아는 원망의 눈초리로 날 노려본다.
큼, 크흠-
헛기침으로 그 감정을 무마시키고 윤슬이랑 모형 자동차들에 집중한다.
"자! 윤슬아 지아 언니랑 오빠랑 같이 이거로 장식이나 해볼까?"
"해보까!"
- 그래, 어디 해보자.
지아도 같이 해줄 생각인 것 같다.
내 농담을 진심으로 믿고 있던 것 같아서 미안했다.
앞머리도 없는 아이인데, 얼굴에 서늘한 그림자가 드리운 듯하다.
사이다 한 잔을 서비스하기로 했다.
**
- 뭔가 손님이 오지도 않았는데, 가게가 북적북적한 느낌인데요?
"좋지 않아?"
- 저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모형 자동차라서 처음엔 괜찮을까 싶기도 했는데, 오히려 산만해서 좋다고 해야 하나?
"음! 그런 느낌. 알지 알지. 보통 일본식 라멘 가게 가면 피규어 많이 세워두잖아? 찬장 같은데. 딱 그런 느낌 아니냐?"
- 네, 딱 그런 느낌.
"알지 알지!"
옆에서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
알기는 하는 걸까.
:)
윤슬이는 영어권 이모지(Emoji)처럼 입꼬리를 말아올린다.
그걸 보니 이렇게 꾸미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벽걸이 선반과 바 테이블의 구석, 포스기 근처에 자동차를 깔별로 세워두자 남매의 덕심을 자극한다.
또, 빈 벽에는 드문드문 트랙 위를 날쌔게 달리는 스포츠카 포스터가 걸려있다.
"메뉴판만 둬서 어딘가 빈 것처럼 느꼈었는데, 이제 알차보이네."
- 다음에 권수영 오면 놀라겠네.
"그럼 올 때 놀라게 하게, 인테리어 꾸몄다는 얘기는 하지 말아주라."
- 오키, 그 정도는 입 닫아 드릴게요.
[오누이 타이쿤!]
[가게 분위기가 '그럭저럭'에서 '훈훈함'으로 상향 조정됐습니다.]
[이후 고객 만족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얼마나 영향을 주려나."
며칠간 살펴봐야 될 것 같다.
그렇게 가게 인테리어를 꾸미고, 지아는 가게를 나갔다. 오늘 수영이랑 놀러가기로 했는데, 먼저 그쪽 카페에 가서 기다리겠다나.
이대로 브레이크 타임까지 손님이 하나도 안 오는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만나는 분이 가게를 들르신다.
- 아직 브레이크 타임 아니죠?
"네, 아직 장사합니다. 여기, 바 테이블 쪽 앉으세요."
"어서 와여!"
윤슬이는 일반 손님인 줄 알고 배꼽 인사를 하며 맞이해준다. 하지만 그냥 손님이라기엔, 우리 가게와 조금 더 관계가 깊은 분이다.
- 제육 하나 주세요. 호연 형님이 여기 가게 오면 제육부터 무조건 하나 먹어보라고 그러셔서. 주문해봐야겠네요.
"제육 하나 확인했습니다."
"움? 호여니? 움... 빨강 모자 삼쵼?"
- 애기도 형님 이름을 아는가보네.
"애기 아니구, 윤스리."
- 그래, 윤슬이.
호연 형님과 비슷한 듯 아닌 듯, 슬쩍 닮다가 만 정도의 외모. 허나 옆에 나란히 세워두고 가족이라고 하면 믿을 만한 비주얼이다.
오누이 식당이 자리 잡은, 약간 작고 낡은 상가의 주인분이다.
저번에 상가 자리 임대를 논의할 적에 윤슬이도 같이 있긴 했었는데, 워낙 짧았던 만남인지라 잊은 것 같다.
처음 만난 손님인 것처럼 대한다.
"아저씨."
- 응?
"싸이다 하나 마실래여?"
- 사이다? 이따가 음식 나오면 주문해볼까?
"그러믄 윤스리한테 말하믄 대."
- 알겠어. 윤슬이한테 말할게.
전에 뵀을 때도 느꼈지만 성격이 순한 편이시다.
윤슬이 말을 들을 때도 허리를 숙여 경청한다.
제육은 이제 눈 감고 만들 수 있을 정도였고, 고기가 잘 익었을 때쯤 넉넉하게 퍼올려 접시에 담는다.
평소에 손님들께 나가는 양보다 0.5배 정도 더 많다.
"신세 지고 있는 분이니까."
공기밥과 함께 상에 올려드리자 깜짝 놀란다.
- 양이 꽤 많네요?
"점심 아직 안 드신 것 같아서, 넉넉하게 넣어드렸어요."
- 마침 배고팠는데... 감사합니다.
"저희가 더 감사하죠."
상가 주인분은 "흐흐, 아닙니다."라고 머쓱하게 웃으며 물을 한 모금 들이키다가 우리집 꼬맹이를 찾는다.
- 윤슬이, 아저씨 사이다 하나 마실게.
"윤스리가 접쑤해쏘."
전쟁에 나서는 장군처럼 엄숙한 말투.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냉장고로 향한다.
끙- 끙-
흐이이잇!
장엄한 기세에 비해 냉장고 여는 것에 애를 먹는다.
쩌억-
냉장고 문이 열리자 식은 땀을 닦으며
휘유- 심호흡.
그렇게 사이다 하나를 손에 넣었다!
쫄래쫄래 걸어와 상가 주인에게 사이다를 두 손으로 넘긴다.
"움, 쪼끔 고생해쏘."
- 그래 보이오. 수고하셨소.
"움!"
이번에도 턱을 불쑥 내밀며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고 퇴장한다. 그리고 한껏 폼을 잡으며 붕붕이에 착석한다.
뒤를 돌아 빵실빵실 웃는 게 멋있었다고 본인 스스로 생각하는 것 같다.
"요즘 저희 꼬맹이가 컨셉에 먹히는 일이 많아서요. 다른 손님들한테도 저래요."
- 귀엽네요.
"그쵸?"
- 딸 키우고 싶네요.
"그쵸?"
두 남자는 마음이 통했다.
제육을 드시기 시작한 건물 주인분.
근데 식사법이 특이한 편이다.
보통은 밥그릇 위에 제육을 덜어 밥 술에 올려드시거나
제육 따로 밥 따로 입에 넣는데.
이분은 밥을 제육에 한 번에 쏟아 비벼서 드신다.
"아예 덮밥으로 해드릴 걸 그랬네요. 그 정도는 미리 말씀해주시면 만들어드릴 수 있는데."
- 그렇게까진 안 해주셔도 돼요. 이렇게 먹는 게 취향이라서요.
제육을 밥에 비비자 먹는 시간은 단축되었다.
호연 형님이 연상되는 식사 방법이었다.
그 형님도 예전에 가게 운영이 한창 바빴을 시절엔 큰 보울에다가 재료들을 다 비벼 숟가락으로 한 입씩 퍼먹곤 했다던데.
친척이라 닮은 것일까.
- 잘 먹었습니다. 정말 형님 말씀대로 맛이 좋네요. 자주 와야 겠어요.
"언제든 들려만 주세요. 제육이든 가지든 더 얹어드릴 테니까."
- 안 그러셔도 되는데, 죄송스럽게.
"그 정도는 해드려야 저도 마음이 편하죠. 월세도 깎아주시는데."
온전히 마음의 문제였다.
이 건물주는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타인이었다.
그럼에도 월세를 10% 선뜻 깎아주셨다.
호연 형님이 부탁하신 일이긴 하지만.
형님과 친척이고, 두 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다고 한들 그게 직접적인 명분이 되진 않는다.
세를 깎아줄 명분 말이다.
수영이 말처럼 사회가 돌아가는 원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명분이다.
그 이유가 문득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