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레종 데트르(7)
오누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윤슬이가 매개 음식으로 인해 발생한 과거 회상에 간섭할 수 있다는 것.
[달님: 저희는 아직 확신하진 않고 있었습니다만, 어쩌다 그렇게 생각하시게 된 거죠?]
[나: 그 이유는.]
설명한다.
내가 매개 음식을 만들어내어 과거를 회상케 한 횟수는 3번.
윤슬이와 집에서 간장국수를 만들어먹었을 때.
강씨 아저씨의 아내분이 다시 한 번 암 확진을 받았을 때.
그리고 불과 며칠 전 호연 형님이 안주를 만들어달라고 하셨을 때.
'윤스리가 혼내조써. 빨리 집에 가라구.'
강씨 아저씨가 계란 볶음밥을 먹고 정신을 차린 뒤, 윤슬이는 분명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
눈 앞에서 아저씨를 호통치거나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음에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땐 굳이 5세의 행동을 일일이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다.
'호여니 삼촌? 윤스리도 으네 해써!'
조금 전 이 책방까지 오면서 윤슬이가 뱉은 말이다.
'은혜'라는 말의 활용법이 조금 잘못됐지만 무언가 좋은 일을 호연 형님에게 한 것은 틀림 없었다.
배를 불룩 내미는 행동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허나 마찬가지로 호연 형님이 가게에서 목살을 드시던 때, 윤슬이는 옆에서 제 몫을 먹고 있을 뿐 별 일을 하진 않았다.
이 두 가지 언동의 공통점.
윤슬이 앞에서 매개음식을 만든 직후에 있던 일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단서는.
'옵바.... 왜 우러여?'
윤슬이와 간장국수를 만들어먹던 그날.
매개음식이 불러온 회상.
어렸을 적, 부모님과 간장국수를 먹던 기억에 휘말린 그때. 나를 그 기억에서 끄집어서 현실로 불러온 것은 윤슬이였다.
기억과 현실의 경계에서 제 정신을 찾게끔 만들어주었다.
[햇님: 과연... 그런 것들을 하나 하나 직접 보고 느꼈다면 그렇게 추측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나: 근데 말투를 보니까, 너희가 윤슬이한테 그런 능력을 따로 만들어준 건 아닌가보네?]
[달님: 그런 일이 있으면 적어도 형한테 허락은 받고 하겠죠!]
맞는 말이다.
오누이는 가끔 돌발적인 일을 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 남매를 위해주는 녀석들이니까.
[나: 미안해. 그것도 모르고 조금 욱했던 것 같아. 윤슬이가 걱정돼서.]
남의 기억을 엿볼 수 있다는 상황 자체가 내 생각엔 윤슬이에게 다소 위험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음식에 관련된 어느 기억이 일부 끌려나오는 것뿐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기억이 트라우마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윤슬이가 의도치 않게 끔찍한 광경을 목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살짝 불안해졌다.
[햇님: 이해해요, 주현 오라버니 입장에서 그런 능력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저희밖에 모를 테니까요.]
그 이유가 크다.
내가 음식으로 타인의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는 것도.
요리 지식과 스킬이 늘어난 것도.
모두 오누이의 덕이니까, 그런 비현실적인 현상은 모두 녀석들과 관계해있을 것이라 멋대로 단정지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나: 그래도 미안해. 너희를 괜히 의심한 것 같아.]
오누이에게 다짜고짜 거친 말투를 쓴 것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달님: 괜찮아요. 대신 사과의 의미로 저희 주소로 단백질 쉐이크 신상 10KG짜리 한 포대만 보내주세요. 이번에 아보카도 맛이 나왔는데 먹어보고 싶거든요.]
[나: ?]
어차피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보낼 수 없을 텐데 저렇게 장난으로 얼버무려주는 게 고맙다.
[햇님: 저희한테 미안한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더 중요한 건 윤슬이잖아요?]
[나: 응, 솔직히 난 윤슬이가 다른 사람들 기억을 엿보는 게 걱정돼.]
내 동생은 좋은 것, 이쁜 것만 보고 자랐으면 좋겠다.
[달님: 이제부터 매개 음식을 영영 안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네요. 어차피 가게 꾸리는데 필수 요소는 아니니까요.]
달님이의 말이 옳다.
고객들의 만족도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말고도 여럿 있으니.
하지만.
[나: 달님이 말대로 그것도 방법이지만 중요한 건 왜 윤슬이가 그렇게 됐는지 알아보는 거 아니야?]
[햇님: 그쪽도 중요하긴 하죠. 저희 말고 다른 누군가가 윤슬이한테 미리 접촉했거나 했다는 얘기인데, 솔직히 지금으로썬 알 방법이 없어요.]
그렇다면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
[달님: 지금으로썬, 없다는 거죠. 아까 은근 슬쩍 말씀드렸지만 저희가 윤슬이 체모를 하나 몰래 슬쩍했거든요.]
[나: 몰래 슬쩍한 주제에 꽤 당당하게 말하는구나?]
[달님: 지금 말하지 않으면 형이 화낼 것 같았거든요.]
확실히 지금 화내긴 애매한 타이밍이다.
내 동생 체모를 체취해가다니!
사태가 사태이니 눈 감아준다.
[달님: 이걸 활용하면 어느 정도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윤슬이에게 이 능력을 준 존재가 누구인지 알아낸다던가. 아니면 윤슬이가 기억에 개입하지 못하게 막는다던가.]
달님이의 설명을 듣자 고민된다.
매개 음식이라.
안 만들면 그만이긴 하다.
그런 것 없어도 손님들의 만족도를 올릴 자신이 있다. 최근 들어 점점 장사 경험도 쌓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강씨 아저씨와 호연 형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두 분은 각각 계란 볶음밥과 목살 소금구이를 먹고 기쁜 얼굴을 하셨다.
오래 뵀던 분들이지만 그간 본 적 없을 정도로 밝고도 환한 미소였다.
"그런 얼굴을 자주 하는 사람들이 아닌데 말야."
분명 매개 음식을 통해 좋은 기억을 본 것이리라.
혹은 윤슬이가 그 안에서 무언가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기억을 더욱 좋게 바꿔줄 만한 일을.
행동력이 아주 뛰어난 내 동생이니까.
두 사람의 그런 얼굴을 보는 것은 진심으로 기뻤다.
내 지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요리를 통해 사람들을 미소 짓게하는 것은 나의 본망이다.
[나: 그럼 너무 속단하지 말고, 우선 너희 조사 결과를 기다릴게. 아무튼 매개 음식을 손님들한테 먹이면 만족도가 많이 오르는 것만큼은 확실하니까, 그 이점을 쉽게 버리고 싶지도 않아.]
[햇님: 현명한 선택이네요.]
[나: 윤슬이 체모...를 잘 분석해줘.]
[달님: 맡겨만 주세요.]
직접 타자를 치면서도 손이 떨린다.
허나 어쩔 수 없었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의료 행위로 머리카락을 하나 병원에 제출한 셈쳐야겠다.
그렇게 오누이와의 채팅을 일단락지어도 윤슬이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새근새근.
잠든 윤슬이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내 동생이 세 살만 더 많았더라도 직접 물어볼 텐데 말이다.
최근에 이상한 경험한 적 없느냐고.
윤슬이는 다섯 살이다.
가끔 의도를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하기도 한다.
거기다 대고 "윤슬아, 너 혹시 초코 아저씨나 빨모 삼촌 기억을 직접 본 적 없니?"
라고 물어보기는 애매했다.
오히려 내 상상회로를 더욱 비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책이나 조금 더 읽고 있을까."
다시금 쉽다고 주장되는 프랑스 철학 책을 펼친다.
그리곤 5분도 안 돼서 접어버린다.
"이건 내 취향은 아닌 것 같다."
철학 서적은 앞으로 손 대지 않기로 한다.
너무 어렵다.
윤슬이가 잠에서 깨지 않게 조심히 일어나 책방 내부를 배회한다.
배회라고 해봤자 좁은 공간을 순찰하듯 천천히 걸어보는 것뿐이다.
오랜만에 온 김에 더 안쪽 공간까지 들어가보기로 했다.
서점의 바깥 쪽에는 상대적으로 인기가 많은 소설이나 그림책이 주를 이루지만 안쪽에는 다른 장르가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시집이네."
낡고 얇은 시집들이 열을 맞춰 서있다.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한 것들끼리 모여있는데, 그 덕에 디자인에 부조화가 없어 책장이 깔끔해보인다.
별로 찾고 싶지 않던 것을 찾는 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찾았다기보단 그 이름이 세로로 적힌 시집이 내 시선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이주희 시인]
나와 윤슬이의 친모.
그 사람의 이름이다.
반년, 아니 세 달만 전이었더라도 외면하며 다른 장르의 코너 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애초에 이런 것을 발견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시집이 있는 쪽으로는 발길을 옮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지금은 다르다.
윤슬이 덕에 마음도 차분해졌고, 안정되었다.
"읽어볼까."
이 시집을 펼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아까 프랑스 철학책에서 본 레종 데트르라는 말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내 존재의 이유는 이 인간일 것인데 그 인간이 어떤 글을 썼는지 신경 쓰였다.
내 나이보다 젊은 시집에 쓰인 문장들을 정독한다.
유독 '사랑'이라는 단어가 많이 쓰인 게 신경쓰인다.
무엇이 사랑이라던가.
누구를 사랑한다던가.
그런 간지러운 문구들이 나열돼있다.
그 행과 열의 반복을 보며 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느꼈다.
왜냐면 시집의 제목이.
"윤스리?"
"어? 윤슬이 언제 왔어?"
"옵바 놀래켜줄라구, 살금살금 와써."
"그럼 작전 성공이네요? 오빠 놀랐는데."
윤슬이는 히히- 하고 웃더니 두 팔을 활짝 벌린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이렇게 애교를 부릴 때가 있다. 그대로 안아서 들어올린다.
그리고 윤슬이의 어깨와 승모 사이에 살짝 코를 묻었다.
익숙한 냄새가 나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윤슬이가 직접 읽은 그대로다.
시집의 제목은
윤슬.
그런 제목의 시집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많이 담겨있어서 다행이다. 적어도 이 아이만큼은 사랑했다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아니, 그 인간의 사랑이 어찌 되었건 적어도 그간 윤슬이에겐 단 한 번도 몹쓸짓을 하지 않았겠거니 싶어서
그것만으로 안도한다.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시집을 제자리에 꽂아두었다.
"윤슬아, 이제 가게에서 읽을 책 몇 개 챙겨서 집에 갈까?"
"아러써."
"오늘은 집에서 맛있는 거 먹자."
"마싯는 거?"
"윤슬이 뭐 드시고 싶으세요?"
"윤스리는 옵바가 만드러주는 거므는 몽땅 다 마시써여."
"그럼 오빠랑 같이 제육 볶음 조물조물해서 같이 만들어 먹을까?"
"응! 조아!"
그렇게 다시 헌책방의 문을 닫고, 귀가하던 길.
강씨 아저씨한테 문자를 보냈다.
[나: 아저씨, 저희 오늘 책방 들러서 책 몇 권 빌려갑니다. 덤으로 먼지도 털어뒀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 회신이 왔다.
사진이 첨부된 문자였다.
[강필중: 땡큐!]
라고 보내온 문자에 담긴 사진엔 두 사람이 있었다.
"윤슬아, 이거 봐봐 초코 아저씨다."
"움? 그러네."
아저씨가 초코를 들고 있지 않아서인지 윤슬이의 반응은 그냥 시큰둥하다.
내가 보기엔 좋은 사진인데 말이다.
강씨 아저씨 부부 두 분이 나란히 찍은 사진이다.
아저씨는 늘 그렇듯 건강해보이고, 아저씨의 부인 되시는 아주머니는 환자복을 입고 계신다.
치료가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듯, 이전에 봤을 때보단 수척해보였지만 그래도 표정만큼은 밝았다.
두 분 다 핸드폰 카메라를 향해 어색한 표정으로 엄지를 척 치켜올려 세우셨다.
아저씨가 수염을 정리한 게 눈에 띤다. 예전에 헌책방 차리면서 다신 샐러리맨으로 안 돌아가겠다면서 기르던 건데 이번에 정리했나보다.
병원에서 지저분한 꼴로 돌아다니는 게 신경쓰였을 수도 있겠다.
"잘 지내고 계시나보다."
호연 형님도 그 할머님의 무덤에 찾아가는 데 성공했고, 강씨 아저씨도 부인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모두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엔 굳이 쓸 필요 없던 마스크를 끝내 벗지 않는 윤슬이를 보며 생각한다.
우리 남매도 틀림 없이 그럴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