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5세, 낭만을 쏘다(1)
- 음! 오늘 이 메뉴 너무 맛있다.
맑은 하이톤의 목소리가 홀쪽에서 들려온다.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누군지 곧바로 알 수 있다.
자주 오시는 덕에 최근엔 통성명까지 했다.
오늘은 왠지 모르게 남편을 떼고 온, 항상 유쾌한 손님 신혜원씨다. 내심 신혜원씨보다는 남편인 천연우씨가 오는 걸 기대했다.
저번에 윤슬이가 실수로 그분 다리에 기댔다가 둘이 어색한 사이가 되었는데
둘이 다시 마주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약간 궁금했다.
"덮밥 먹을 만해요?"
- 네! 이거 위에 고기 목살이라고 그랬죠?
"목살이요."
- 와, 간장소스가 달달해서 너무 잘 어울리는데요?
"울 옵바가 요리를 잘해여. 체고지?"
- 응, 윤슬이네 오빠가 짱이네?
신혼부부 신혜원씨에게 내 칭찬을 들으며 득의양양해진 윤슬이였다.
"윤스리두 알어~"
라며 턱을 내밀곤 우쭐한 표정을 짓는다.
- 이쪽 집 남매는 왜 이렇게 서로 자랑하기 바쁜 거야? 난 오빠랑 맨날 싸우는데.
"옵바가 요리를 해주믄 대. 그러믄 해워니 언니두 친해져."
- 으휴, 세상의 모든 오빠가 주현씨 같은 줄 알아? 우리 오빠가 할 줄 아는 요리는 라면밖에 없거든.
"잉? 아닌가?"
- 전혀.
어느새 윤슬이가 혜원씨를 기만하는 쪽으로 대화가 변질되고 있었다.
오늘 판매하는 메뉴는 절찬리에 인기를 끌고 있다.
간장 목살 덮밥.
아직 점심 장사가 한창인데, 스무 그릇이나 팔렸으니 말이다.
제육의 수요를 조금 나눠가져간 듯했다.
[요리사의 촉]을 사용하여 간지러움을 견뎌내고는 확인해본 결과.
오늘의 입맛은 단맛으로 확인됐다.
'음, 오늘은 달달한 맛이 인기를 끄는가보다.'
'그러믄 초코를 팔므는 대겠다.'
'그건 안 돼요.'
'왜여?'
'윤슬이도 초코는 좋아하지만 밥으로 먹진 않잖아?'
'해주믄 머거.'
그런 대화를 나누며 진심으로 밥 위에 초코를 올려줘볼까.
잠깐 고민하기도 했다.
단 맛으로 단독 메뉴를 낼 만한 게 뭐 있을까 생각하다가 떠오른 게 돼지였다.
돼지고기는 육류 중에서도 특히 단 맛과 잘 어울린다. 오죽하면 멕시코에선 돼지 스테이크에다가 파인애플을 주재료로 쓴 살사 소스를 발라먹는다고 한다. 정확한 정보인지는 모르겠다.
그중에서도 목살을 사용해볼까 생각했다.
저번에 호연 형님에게 매개 음식을 만들어주면서 목살을 사용해봤는데, 소스에 약간 졸여도 괜찮을 것 같았다.
워낙 육향이 강한 부위이기에 소스에 졸여도 그 식감과 향이 기본적으로 고기 안에 남아있다.
그래서 양념육치곤 고급스러운 맛을 낼 수 있는 것이다.
"단가가 좀 비싸긴 하지만, 잘 팔리니까."
목살을 조금 넉넉히 넣다보니 단가는 만 원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원가율을 높이진 않았다.
주문하신 손님들도 대체로 만족하며 드시는 듯하다.
신혜원씨는 얌전히 식사를 하다가
- 이거 적양파죠? 되게 쪼끄만데 이게 목살이랑 엄청 잘 어울린다.
"아아, 그거 적양파 아니고 샬롯이에요."
- 샬롯? 거미?
"아뇨, 그 샬롯은 영화에서 나오는 친구고. 이건 채소에요."
자주색을 띤 작은 양파 모양의 채소인데, 이게 양파에 비해 단 맛이 더 강하다.
그 덕에 설탕을 조금 덜 쓰게 됐고, 덮밥의 전체적인 완성도도 높여준다.
온라인에서 대량으로 싸게 판매하길래 한 박스 사봤다. 원래 같았으면 단가가 비싸서 적양파를 사용하는 게 나은데, 순전히 운이 좋아서 샬롯을 쓰게 됐다.
혜원씨만이 아니라 다른 손님들도 샬롯을 보면서 신기하게 생각하는지 입에 넣으면서도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다.
꿀떡 삼키고는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사람이 태반이다.
"그런데 오늘 연우씨는 어디 가셨대요? 맨날 같이 오시더니."
- 그 양반 고향 내려갔어요. 친구들 보러.
라고 말하는 혜원씨는 아주 잠깐동안 링에 오른 파이터의 얼굴을 띠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더 묻고 싶지 않아졌다.
혜원씨의 남편 얘기를 하자 옆에 있던 윤슬이가 괜히 뜨끔한 표정을 짓는다.
일전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듯해서 괜히 우습다.
눈치를 보다가 다시 손에 들고 있던 그림책에 집중한다.
스스로 읽어보려고 시도 중이다.
엊그제 헌책방에서 빌려온 책이다.
"구... 구르미? 마... 말그.. 마끄..."
열심히 읽으려고 노력 중인 것 같다.
저 나이대에 저 정도 읽는 게, 발달인 느린 건지 빠른 건지는 모르겠다.
때마침 혜원씨가 반응한다.
- 어? 뭐야. 윤슬이 책 읽어?
"움, 윤스리 그림책 조아."
- 다섯 살이면 아직 한글 떼기엔 엄청 이른 나이인데 그래도 몇 글자씩 읽네? 대단하다!
"움? 그렁가?"
새침하게 그런가?라고 대답하면서도 입꼬리가 히죽이는 게 분명 속으로는 들떠있다.
- 우리 오빠네 애가 윤슬이랑 동갑이거든요. 근데 걔는 아직 한글 못 떼었던데. 윤슬이만큼도 못 읽어요.
"애들마다 크는 속도가 다른 거니까요."
라며 우선 겸손한다.
하지만 우리 윤슬이가 또래들에 비해 우수하다는 말을 들은 건 매우 기쁘다.
우수한 윤슬이.
우수한 동생.
아아.
우수하다란 말이 이토록 심금을 울릴 줄이야.
우리나라 학구열이 왜 이렇게 뜨거운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 주현씨는 윤슬이한테 평소에 책 읽어주시는 거예요?
"보통 브레이크 타임에나 그러죠. 집에서 쉬는 날이나."
- 요즘은 되게 좋은 것도 많이 나오던데.
"좋은 거라 하심은?"
- 어... 뭐, 저도 애가 있는 입장은 아니니까 자세하게는 모르고 저희 오빠 집에 들를 때나 가끔 목격한 정도인데. 되게 좋은 것도 많던데. 정액제 가입하면 애들 보는 만화 무료로 틀어주는 거나. 아니면 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도 있고.
들어는 본 것 같다.
그런 게 있다고.
헌데 나도 해봤자 윤슬이를 데리고 살기 시작한지 오래 된 것은 아닌지라 그런 정보에 빠삭하진 않다.
- 윤슬아, 이거 한 번 봐볼래?
"움?"
혜원씨는 핸드폰을 꺼내서 윤슬이에게 화면을 보여준다. 그곳엔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져있다.
TV 채널을 돌리며 한 번쯤 봤던 것도 같은 유명한 캐릭터다.
지하철을 의인화한 캐릭터인데 해외에 IP가 팔려나갈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더라. 대형마트에 가면 저 캐릭터를 상품화한 장난감을 많이 팔고 있다.
- 윤슬이는 이런 거 안 좋아해?
"별루."
단호하다.
고개를 훽 돌리곤 다시 읽던 그림책 쪽을 쳐다본다.
- 엥? 윤슬이는 이런 거 별로야? 마법소녀 쪽이 더 좋은가.
"윤스리는 마나는 별루."
취향이 확고하다.
- 만화는 별로야? 그러면 윤슬이는 뭐가 좋은데?
"윤스리는 옵바."
- 오빠 말구.
"움... 자동차."
- 자동차는 저기 많이 있잖아. 다른 거는?
"움... 초코."
- 으아.
혀를 내두르는 혜원씨.
우리 윤슬이 캐릭터가 좀 독보적이긴 하다.
오기가 생겼는지 다시 한 번 윤슬이 앞에 핸드폰을 들이밀며 여러 캐릭터들을 보여준다.
아기자기하게 생긴 게 보통 애들이라면 좋아할 것도 같다.
하지만.
"별루."
윤슬이는 그 화면의 캐릭터만큼 아기자기한 손을 쫙 펴서 거부하는 제스쳐를 보인다.
그제야 혜원씨는 윤슬이 주의를 끄는 것을 포기한다.
- 윤슬아, 이런 것들은 별로야?
"응, 별루."
- 책이 더 좋아?
"윤스리는 그림책 조아해."
- 이런 것들은 왜 별로인데?
하도 단호하다보니 꽤 끈질기게 묻는다.
근데 윤슬이 입에서 나오는 답이 진짜 의외다.
"마나는 낭마니가 업써여."
-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만화에는 낭만이 없대요."
내 해석을 듣고 옆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손님들도 밥 먹다가 피식- 하고 웃는다.
반면 혜원씨는 해탈한 표정이다.
- 그래... 낭만이 없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이 5세가 낭만을 추구한다는 다소 놀라운 사실을 듣더니 깔끔하게 포기하는 혜원씨였다.
목소리가 유난히 힘 없게 들린다.
평소 윤슬이의 행태를 생각하면 내 입장에선 납득이 가는 답변이다.
- 다음엔 윤슬이 흥미를 끌 만한 걸 한 번 잘 생각해볼게요.
굳은 의지를 표하며 혜원씨는 곧장 계산하고 귀가하셨다. 윤슬이에 대한 집착이 제법 있으신 듯하다.
그리고 다음날.
가게를 오픈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아직 한적한 시간. 한 남자가 어정쩡한 자세로 가게에 들어온다.
"응?"
- 하하... 안녕하세요.
멋쩍게 웃으며 걸어오는 젊은 남자.
천연우씨다.
"앗..."
윤슬이는 연우씨가 들어오는 걸 보더니 애써 외면한다. 저쪽도 마찬가지다. 윤슬이를 보더니 표정이 차게 굳는다.
"제 동생이랑 싸우기라도 하셨어요?"
- 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쫌 그래서요.
다섯 살 난 애한테도 저렇게 구는 걸 보면 쑥쓰럼을 많이 타는 성격인 건 확실하다.
윤슬이도 굳이 따지자면 명랑한 성격인데 천연우씨의 어색함이 옮은 것 같다.
"일단 앉으시죠."
바 테이블 쪽을 권유한다.
적당히 의자를 하나 빼서 앉는다.
윤슬이도 바 테이블 쪽에 앉아있었는데, 서로 한 자리의 간격을 두고 있다.
애매한 거리감이 신경 쓰인다.
"혜원씨는 어쩌고 오늘은 연우씨만 오셨대요?"
- 제가 실수를 좀 해서.
"고향에 친구들 보러 다녀오셨다고 하던데요?"
- 아! 혜원이가 이미 다 말했나요?
"다는 아니고, 그냥 거기까지만 딱 들었어요."
아아 그렇구나.
라고 혼자 중얼거리더니 메뉴판을 슬쩍 쳐다보다가 입술을 핥는다.
"주문 뭐로 도와드려요?"
- 아... 그, 오늘의 메뉴로 주세요.
"목살 덮밥이요?"
- 네.
이틀 연속으로 오늘의 메뉴를 같게 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다른 메뉴를 재탕한 적은 있어도 연속으로 같은 메뉴를 낸 적은 없었다.
어제 반응이 너무 좋아서 한 번 이어보기로 했다.
오늘도 [요리사의 촉]에 따르면 단 맛이 인기를 끈다고 하니 굳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샬롯도 꽤 많이 남았기에.
내가 요리를 하려고 팬을 화구 위에 올려두자 윤슬이가 눈치를 보더니 주방으로 들어온다.
그리곤 싱크대 앞에 둔 받침대에 털썩 앉는다.
"윤슬이 왜 거기 있어?"
"윤스리 여기 이쓸래."
"거기 있을 거야?"
"응..."
저런.
천연우씨랑 애매한 거리를 두고 계속 앉아있기 불편했던 모양이다.
심지어 연우씨는 그걸 눈치채고는 되려 본인이 더 당황하며 입술을 입 안으로 말아넣는, 이상한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이 공간이 처음으로 숨막히기 시작했다.
웬만한 손님들과의 의사소통엔 여태껏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이 인간은 강적이다!
"덮밥 맛있게 해드릴게요!"
- 아, 네... 네!
천연우씨는 이제 삑사리까지 낸다.
옆에 혜원씨가 없기 때문일까?
그나마 부인이 옆에 있었을 때는 대화도 곧잘 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윤슬이랑도 잘 대화했던 것 같은데, 혜원씨가 없는 게 문제인 것 같다.
일단 요리에 집중하기로 한다.
분명 호평이었던 목살 덮밥을 먹으면 이 불편한 분위기도 누그러들 것이다.
요리엔 그런 힘이 있다고 믿는다.
냉장고에 재워두었던 목살을 꺼내려던 도중 연우씨가 먼저 입을 연다.
- 유, 윤슬아!
"웁...?"
움?이
웁...?으로 변한 미묘한 차이를 난 감지했다.
보기 드물게 눈매를 좁히며 연우씨 쪽을 쳐다보는데 갑자기 표정이 급변한다?
좁아졌던 눈매가 다시 똘망해지며 입까지 떡- 하고 벌어진다.
뭐 때문에 저러는가 싶어 다시 연우씨를 쳐다보니까.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연우씨의 손엔
낭만이 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