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영보스의 오른팔은 6살입니다(2)
"일단 앉으세요."
- 어, 그래...
설마 여기서 이렇게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100% 우연이다.
세상 모든 인과는 연결되어 있고,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지만, 그렇게 완전한 우연이라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만남은 돌발적이었다.
자기 엉덩이 밑으로 필사적으로 그레이트 제노사이더를 눌러넣던 수영이의 표정이 아리송해진다.
윤슬이도 미정 쌤의 등장이 수상한지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며 괄목한다.
선생님은 팔자걸음을 걸으며, 곧장 권수영의 맞은 편에 앉는다.
- 수영이가 여기에 있었네?
- 그렇네요? 이쁜 수영이가 여기 있었네요!
- 넌 이따가 차분히 나랑 둘만의 시간을 가지면 될 것 같애.
- 하앗, 그것은 참 가슴 설레는 말씀이네요.
- 설레기만 하겠어? 아주 심장이 두근두근할 걸?
- 하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자리 배치 상 수영이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윤슬이가 자기도 앉겠다며 내게 두 팔을 벌렸다.
슬쩍 들어 무릎에 앉히자 미정 쌤이 한껏 찌푸린다.
우리 남매의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확신에 찬 표정으로 한 마디.
- 애기 생겼구나? 아내분은.
에서 말을 멈추더니, 왜 고개를 돌려 권수영을 쳐다보는가.
"제 동생입니다. 그리고 그 시선 멈추세요. 당장요. 117에 신고하겠어요."
"그리구 애기가 아니라 윤스리임미다. 신고하게써여."
- 아아, 그렇지. 그래야지. 네가 내 아들만한 딸이 있을 리가 없지. 그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웃으며 말을 잇는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웃으면 미인이시다.
체육 선생님이라는 타이틀에 맞지 않을 정도로 기품 있고, 세련된 아우라를 풍긴다.
다만 복장이 추레할 뿐이다.
- 네 동생이 맞는 것 같긴 하네. 엄청 이쁘게 생겼다, 윤슬이.
"엇?"
윤슬이가 선생님의 말을 듣고 아래서부터 내 얼굴을 올려다본다. 볼이 발개진 게 기분이 좋아진 것 같다.
"옵바, 옵바."
"응?"
"저 아줌마 조은 사람?"
"응... 쫌 애매해."
- 아, 아줌마...!
평소에 선생님이라 불리다가 호칭이 아줌마로 바뀌니 충격을 받은 듯하다.
무슨 마음인지는 알겠지만 윤슬이에겐 생판 남이니 연령대를 보아 아줌마가 맞다.
그래봤자 30대 초중반이겠지만.
"미정 쌤 J 고등학교로 오셨나보네요?"
- 그치, 이제야 2년 됐어.
내가 다니던 중학교와 거리도 멀지 않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고등학교와 중학교는 선생님들이 종종 양쪽을 넘나든다고 하니 말이다.
- 근데 권수영이 참 약았어. 하필이면 주현이 있는 대로 오고 말야. 이 가게 자주 오나보다?
"수영이 저희 식당 자주 와요. 가끔 학교 째고 오기도 하고. 학교 제끼고 오기도 하고. 몰래 학교 담 넘어서 오기도 하고."
- 주현 오빠, 세 개 다 똑같은 거잖아요!
- 흐음... 그럼 수영이가 도망치면 여기로 잡으러오면 되겠구나.
"아, 그건 안 돼요. 저희 주요 고객이라서 그렇게 안타깝게 놓치기는 싫거든요. 수영이 밥 다 먹으면 제가 따로 연락드릴 테니까 그때 잡으러 오세요."
- 콜.
- 지금 절 앞에 두고 무슨 합의를 하시는 거죠? 심지어 오늘은 제 시간에 하교했습니다만.
오랜만의 사제 재회가 이토록 화목할 수 없다.
나와 김미정 선생님은 원래부터 사이가 좋은 편이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왜 사이가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순전히 선생님의 성격 탓이다.
- 주현이 성장한 거 보니까 마음이 흐뭇해지는 구만.
윤슬이 쪽으로 거칠은 손을 뻗어 허공을 집는 시늉을 하는 선생님.
뺨이 느슨해진다.
- 그 동생도 너무 이쁘게 생겼어!! 우리 아들이랑 같이 세워두고 사진 찍고 싶다!!
김미정 선생님은 이쁘고 잘생긴 인간을 어마어마하게 좋아한다.
교육자로서의 자질이 의심될 수준으로 말이다.
예전부터 얼굴이 조금 반반하게 생긴 친구들이 체육 시간에 뭘 잘못하면 10만큼 혼낼 걸 3 정도밖에 안 혼냈다.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난 단 한 번도 혼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수영이가 이곳으로 도망친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우리 남매 앞이면 도깨비 같은 김미정 선생님의 성화가 누그러들지 않을까.
그런 얕은 생각으로 이곳까지 도망쳐온 것이다.
하지만 큰 변수가 있었다.
선생님과 내가 아는 사이라는 것이다.
- 자, 일단 수영아. 내 그레이트 제노사이더를 돌려줄까? 지금 돌려주면 감형을 고려할게.
- 여기 있습니다.
선생님이 웃으며 얘기할 적에 재빠르게 돌려드리는 수영이. 현명한 선택이다.
윤슬이가 계속 제노쓰.. 제노싸..
하는 게 그 이름이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옵바."
"응?"
"그레트 제노싸가 모야?"
"저거 초록색 방망이."
"으응... 아니야. 으응... 무슨 뜨시야?"
"뜻?"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작명했을 당사자에게 질문의 시선을 보낸다.
- 그냥 멋있어서 붙인 이름인데.
그렇다고 한다.
예전에 우리 학교에서 사용했던 걸레봉은 이름이 주작 언월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삼국지에서 이상하게 배껴온 것이다.
지금 언월도와 함께 하지 않은 걸 보아하니, 그 녀석은 수명을 다했나보다.
수영이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그레이트 제노사이더가 무슨 의미인지 검색해보는 것 같다.
- 그레이트는 그레이트(Great)인데... 제노사이드(Genocide)가 뭐냐면. 국민, 인종, 민족, 종교 따위의 차이로 집단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행위... 라는데요?
윤슬이를 제외한 세 사람은 숙연해졌다.
그냥 멋있어서 붙였다기엔 지나치게 살벌하고 공포스러운 뜻이 내포되어있었다.
- 교육자가 붙일 만한 이름은 아니었구나.
"반성하시는 게 좋겠네요, 미정 쌤."
- 이건 진심으로 반성할게.
선생님은 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신다.
- 주현아 여기 식당이지?
"보시다시피 그렇죠."
- 맛있냐?
"그건 앞에 계신 단골분께 여쭤보세요."
수영이는 방긋 웃으며 양 엄지를 치켜세운다.
그걸 보며 윤슬이도 똑같이 따라한다.
"옵바 요리가 체고야."
- 헛...!
윤슬이의 귀여움에 치명상을 입은 듯 왼쪽 가슴을 움켜쥐는 미정쌤.
그 모습을 보고 총에 맞은 카우보이를 연상했는지 윤슬이는 사악하고도 영악한 얼굴로 손가락 총을
"빵! 빵!"
하고 쏴준다.
그대로 김미정 선생님의 의자는 뒤로 넘어가버렸다.
꽈당-
뒤통수를 손으로 마구 비비며 일어나는 선생님.
- 리액션을 살짝 과하게 했구나, 미안하다. 정신을 잃을 뻔했어.
"괜찮아요?"
- 으아... 선생님은 이 정도론 괜찮아. 나름 체육 담당이잖아. 튼튼하지.
"아니, 선생님 말고 의자요."
- 야! 넌 선생님보다 의자를 먼저 걱정하니?
이렇게 하여 윤슬이와 수영이의 적극적인 영업에 선생님은 넘어왔다.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가셨다.
과감히 제육볶음 3인분을 주문해 수영이와 나눠먹는다는 선택을 하셨고, 슬슬 저녁 장사 오픈 시간이 되어서 곧바로 요리해드렸다.
드시다가 선생님은
- 야, 안 되겠다! 주현아 여기 맛집 맞다. 다음에 아들 데리고 올게.
라는 감사한 말씀을 남기셨고.
90도로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윤슬이도 내 옆에서 배꼽인사를 따라해 다시 한 번 선생님의 심장을 거세게 가격했다.
[오누이 타이쿤!]
[고객이 음식 솜씨에 감탄합니다.]
[J 고등학교 체육 담당 김미정: 식당 만족도가 23% 상승했습니다!]
[종합 만족도: 23%]
"새로운 단골의 예감?"
결국 수영이의 밥값까지 선생님이 한꺼번에 결제했다. 밥을 얻어먹으려고 그 무기를 절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결말이었다.
김미정 선생님은 이러쿵저러쿵 해도 좋은 분이다.
내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장난끼도 많고, 미인이신지라 그 나이대 아이들이 곧잘 따랐다.
심지어 선생님은 학교에서 친구가 많이 없는 애들을 따로 학교 밖으로 불러 밥을 사주신 적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중 한 명이 나였다.
그런 미정쌤이었기에 '주작 언월도'로 얻어맞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이따금씩 나왔던 것 같다.
관심이라도 한 번 받고 싶은 사춘기 소년들의 마음이란 원래 복잡하다.
**
다음날이 되었다.
- 주현아! 우리 아들내미!
- 안녕...
선생님은 이른 저녁 시간부터 아들을 데리고 찾아오셨다.
힘도 좋으신 게 양팔로 곰인형처럼 들어올려 앞으로 불쑥 내민다. 나도 윤슬이를 들고 저렇게 할 자신이 없는데 팔 근육이 대단하다.
윤슬이 또래처럼 보인다.
이 나이대 아이들의 공통점인지 모르겠는데 볼살이 빵떡처럼 부풀어있어서 귀엽다. 그리고 눈매가 날카로운 게 선생님과 닮았다.
방금 안녕- 이라고 말한 것을 토대로 미루어보아 윤슬이보다 발음 자체는 약간 더 정확하다.
"이름은 뭐라고 해요?"
- 유민이. 차유민.
- 유미니.
엄마 말 따라서 본인 이름을 읊조린다.
자기 또래 아이가 가게에 찾아온 것이 낯설었는지 윤슬이는 내 다리 뒤에 숨어있다.
그러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서 살짝 수줍게.
"유미니... 어서 오세여."
라고 인사한다.
나름 손님 대접해주려고 그러는 걸까.
거기다 대고 유민이는
- 응... 어서 왔어여.
라고 고개를 슬쩍 숙인다.
두 아이의 모습이 마냥 귀엽기만하다.
긴장감이 달콤하고 말랑하게 맴돌았다.
"일단 유민이랑 앉으시죠."
- 바 테이블 쪽에 앉아도 상관 없지?
"편할 대로 하시면 됩니다."
선생님은 테이블에 앉는다.
유민이를 들어올려 옆자리에 앉힌다.
그러는 모습을 윤슬이는 한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줄곧 관찰 중이다.
말을 걸고 싶긴 한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 것 같다.
그때였다.
유민이가 작은 목소리로 선생님을 부른다.
- 엄마...
- 응?
- 나 내려조.
- 화장실 가고 싶어?
- 아니, 내려조.
선생님은 가게 인테리어를 쓱 둘러보더니 알만하다는 표정이다. 자동차 포스터와 모형 자동차가 가득한 우리 가게다.
저 또래 남자 아이라면 흥미를 보일 법도 하다.
- 대신 말썽 부리고 그러면 안 돼?
- 아라써.
그렇게 의자에서 내려서 짤막한 다리로
조심히 다가간 방향엔 윤슬이가 있다.
가게의 인테리어에 흥미가 있던 게 아니었나보다.
"움?"
의외란 듯이 몸을 흠칫 떨더니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또래의 아이가 오히려 대하기 어려운지 신발로 가게 바닥을 쓱싹 긁는다.
그리고 시선을 빙빙 돌리다가 입술을 살짝 내밀고 나를 쳐다본다. 그런 윤슬이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지만 친구를 사귈 수 있게끔 도와주고 싶다.
환하게 웃으며 윤슬이에게 엄지척을 해주었다. 그제야 눈썹을 까딱이며 움!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용기를 얻은 것 같다.
유민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마주한다.
- 이르미 모야?
"윤스리."
- 윤스리? 이뿌다.
"움, 이뻐. 너두 이뻐. 유미니."
- 응. 유미니 이름 이뻐.
두 아이는 그다지 영양가 없으면서도 달달한, 초콜렛 같은 대화를 잇는다. 유민이가 먼저 다가와준 게 기쁜지 윤슬이의 기세가 점점 오른다.
평소에 나나 친해진 손님을 대할 때와 비슷한 수준까지. 가게 곳곳을 돌며 유민이에게 이것저것 알려주는 것 같다.
"저거 바바."
- 우아. 저거 모야?
"붕붕이 3호. 옵바가 사조써."
- 옵바?
"웅, 옵바. 저기서 요리 맨드는데, 엄청 마시써. 그리구 머시써."
윤슬이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유민이가 물끄러미 쳐다보길래 손을 설레설레 흔들어줬다.
그 모습을 보더니 유민이는 한 마디 더 얹었다.
- 디게 잘쌩겨따! 옵바다, 옵바!
재차 말하자면 유민이는 김미정 선생님의 아들이다.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