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남자사람형제(1)
곧 7월이 다가온다.
기온은 25도를 웃돌고 해가 쾌청하다.
휴일을 맞아 외출하기로 했다.
윤슬이한테는 혹시 몰라 선크림을 발라주었다.
끈적거린다며 처음엔 거부하려들었지만 이걸 바르면 초콜렛 네 개를 먹게해주겠다고 하니 금세 수긍했다.
'네 개로 유혹하므는 윤스리는 바루 넘어갈 쑤밖에 업써.'
라던가.
길거리는 여름맞이 준비를 하고 있다.
가로수는 점차 녹색으로 물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반팔을 입고 있다.
그나마 습도는 높지 않아 옷과 피부 사이가 끈적하게 들러붙지는 않아 천만 다행이다.
"옵바, 옵바."
"응?"
파닥파닥-
파닥파닥-
윤슬이는 작은 손바닥을 두 개 붙여 내 얼굴을 향해 부채질한다. 미미한 바람이 일긴 하지만 딱히 시원해지진 않는다.
낙차가 심한 탓이다.
"더우지?"
덥지?
"오빠는 괜찮은데 윤슬이 더워?"
"움, 윤스리 땀 날 거 가태."
"그럼 빨리 백화점 들어갈까?"
"배카점 가므는 시언해?"
"백화점 가면 시원하지. 에어컨 틀어놨을 테니까."
"힝, 붕붕이를 가져와야 대따. 그러믄 엄청 빨리 갈 쑤 있눈데. 그치 옵바?"
"그렇네. 아깝다."
그 유아용 전동차(붕붕이 3호)가 정말로 빠르다고 생각하는 걸지 아니면 그런 설정을 염두에 두고 얘기하는 건지 헷갈린다.
오늘은 윤슬이와 반팔을 사러 가는 중이다.
작년에 입던 것을 할머니가 몇 벌 보내주시긴 했는데 다 작아지고 말았다.
몸통을 아래로 집어넣는 데만 해도 낑낑대며 고생한다.
그래도 무럭무럭 크고 있다는 증거다.
요즘은 이전보다 경제 상황도 넉넉한 터라 충분히 돈을 투자하고 구매할 수 있다. 그런데 무려 지갑에 있는 돈을 하나도 들이지 않고 옷을 구매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기회의 출처는 강씨 아저씨다.
[강필중: 저번에 우리 책방 청소해줬다길래 잠깐 확인하러 들렸더니 깔끔하게 잘 돼있더라. 꽤 고생했을 것 같아서 너희 식당 주소로 백화점 상품권 하나 보냈으니까, 그걸로 뭐라도 사서 쓰고 그래.]
이런 문자가 날아온 당일에 곧바로 배송이 왔다.
무려 10만원짜리 상품권 2장이 담긴 봉투였다.
화폐를 선물로 받아보는 것은 설레었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긴 한데."
평소 책값 대신으로 했던 일이긴 하지만 그 대가를 따로 주신다면야 마다할 필요는 없다.
강씨 아저씨 부부는 날 너무 좋아해서 탈이다.
백화점 1층에 위치한 카페로 발을 옮긴다.
사람이 제법 많아 눈이 핑핑 돌지만 김미정 선생님만큼 인상착의가 획일적인 사람도 드물다.
카페 구석에 앉은 후줄근한 트레이닝 복을 입은 여자. 옆에 윤슬이만한 애도 데리고 있으니 멀리서 보아도 확실했다.
"옵바, 저기 유미니 이써."
"그러네, 가서 인사하자."
윤슬이 손을 잡고 그쪽 좌석까지 걸어들어가는데, 무너진 자세로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미정 쌤보다 유민이가 우릴 먼저 발견했다.
당황하더니 입가를 손으로 쓱쓱- 문지른다.
테이블 위에 놓인 초코 케이크는 밑동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다.
얼굴에 묻지 않았을까 괜히 신경 쓰였나보다.
"아직 쪼그만 게... 윤슬이가 그렇게 신경 쓰이나."
혼자서 작게 중얼거린다.
오빠이자 보호자로서 간과할 수 없다.
"유미니!"
- 윤스리...
"안녕!"
윤슬이가 먼저 유민이한테 밝게 인사하자 유민이가 수줍어진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미정 쌤은 곁눈질로 본인 아들을 흘기더니 입꼬리를 씨익- 하고 올린다.
- 왔냐?
"선생님은 선생님이면서 공공장소에서 너무 프리하게 지내는 거 아니에요?"
- 뭐 어때? 오늘은 휴일인데. 학교에서만 제대로 하면 됐지.
"그건 인정."
오늘은 월요일이지만 선생님은 휴가를 내셨다고 한다. 토일월, 3일을 붙여서 쉬려는 전형적인 직장인의 속셈이다.
그런 김에 같은 육아 동지끼리 여름옷을 보러왔다. 애들은 금방 크니까 옷을 자주 사게 된다며 유민이를 위해 동행하신 것이다.
곧 시험기간이라서 바쁘지 않냐고 여쭤보니까 J 고등학교는 체육 과목에 한하여 1학기를 통째로 수행평가로 대체하고 2학기만 시험을 본다고 한다.
그 덕에 다른 선생님들에 비해 여유가 있다고. 오히려 동료 교사들이 휴가 못 낼 때 본인이 다녀오는 게 여러 모로 일정 맞추기가 편하다나.
교과가 체육이라서 더 널널한 걸 수도 있다.
"일어나시죠?"
- 그래, 일어나야지. 근데 원래 이런 자세일 때가 제일 일어나기 힘든 거 알지? 아들?
- 응?
- 엄마 좀 도와줘.
- 으으.
유민이는 명백히 껄끄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제 엄마의 한 손을 잡아준다. 낑낑- 거리면서 들어올리지만 선생님은 전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 아들! 난 널 그렇게 나약하게 키우지 않았는데?
- 으읏...!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면서도 선생님을 필사적으로 끌어올리는 유민이. 근데 시선은 자꾸 윤슬이 쪽을 흘끗거린다.
이 녀석.
자신의 힘을 과시하면서 윤슬이에게 잘 보일 생각이다. 허나 엄마는 그 마음을 몰라준다.
꿈쩍도 않는다.
- 으으...
유민이는 실망이 큰지 어깨를 늘어뜨린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미정 쌤은 상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일어난다.
- 이제 가볼까!
"그렇게 일어날 거면 방금 유민이한테 일으켜달라고 부탁한 이유가 뭔데요?"
- 응? 아들이랑 스킨쉽 좀 하려고. 그리고 지금 유민이 얼굴 좀 봐봐.
얼굴에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는데, 유민이가 워낙 귀엽게(절대 윤슬이만큼은 아님.) 생긴 터라 확실히 볼 맛이 나긴 한다.
그런 유민이의 다양한 표정이 보고싶으셨던 모양이다.
- 내 아들 잘 생겼지?
"네 근데 윤슬이가 최고에요."
- 흥, 나한텐 내 아들이 최고야.
어른들끼리 이런 대화를 하는 사이에 윤슬이는 힘을 다해 유민이를 위로해줬다.
"유미니 수고해써."
- 응... 고마어.
"더 몸짱이 대므는 대. 운동을 열씨미 하므는 쌔져. 오누이가 그래써."
- 오누이?
오누이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유민이는 윤슬이가 위로해준다는 사실이 마냥 기분 좋은지 금방 표정을 풀었다.
선생님과 꼬마 둘을 데리고 그대로 위층으로 올랐다.
유아용 의복은 백화점의 위층에 있었기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했다.
워낙 사람이 붐비는 곳인지라 한 층마다 멈춰서서 차라리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는 게 빠를 뻔했다.
그럼에도 꼬마 둘은 엘리베이터가 신기한 듯 들뜬 모습이었다. 백화점의 엘리베이터는 투명한 유리로 벽면을 처리해놓아서 바깥을 훤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옵바! 저거 바께가 다 보인다. 싱기하다."
- 엄마, 저거 차 다 보여.
라며 들뜬 꼬마들의 모습.
소란스러웠지만 아이들이 귀여워서 같이 탑승한 승객들도 쿡쿡- 웃으며 넘겼다.
아동복 코너가 위치한 백화점 6층에 도착하자 미정 선생님이 앞장 선다.
- 가자, 주현아. 나 예전부터 입혀보고 싶던 게 있어.
"응...? 네, 일단 가시죠."
예전부터 입혀보고 싶은 게 있다는 선생님 말씀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말씀을 유민이를 보면서 하는 게 아니라 윤슬이를 보면서 하셨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아용 옷이 천지에 깔린 브랜드 쪽으로 우릴 끌고 가신다.
"유민이가 아니라 윤슬이 입혀보고 싶단 말씀이셨어요?"
- 내 아들은 이미 많이 입혀봤지. 근데 윤슬이는 여자애잖아! 못 참는다, 난.
"뭘 못 참으신다는 건지?"
- 원피스! 치마! 블라우스! 점프수트!
슬프게도 윤슬이가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것들이다. 성격이 활달하다보니 블라우스나 리본 달린 것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레이싱 자켓이 최애템일 정도니까.
그래도.
"입혀보고 싶긴 하네."
솔직한 심정은 그렇다.
- 윤슬아, 선생님이랑 같이 저거 옷 입어보러 갈까?
"아줌마랑?"
- 윽, 그래... 아줌마랑.
윤슬이는 가게 앞에 서서 잠깐 고민에 빠진다.
무얼 파는지 슬쩍 들여다보다가 움- 움- 소리를 내며 고민하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윤스리 입어보께."
그다지 내키진 않아도 나와 선생님의 기대감을 은근히 인지한지 입어주겠다고 한다.
얼마나 착한 5세인가.
그리고 이어진 윤슬이의 패션쇼.
선생님이랑 오는 건 좋은 선택이었다.
모델이 좋으니 어떤 옷을 입히든 이쁘고 귀엽지만 특히 김미정 쌤의 초이스는 무시할 수 없었다.
워싱이 들어간 데님 민소매에 반바지.
타탄체크 무늬가 특이한 점프수트.
검은색 프릴이 들어간 블라우스와 세트로 맞추어진 하늘거리는 스커트.
작은 꽃무니가 알알이 들어간 원피스.
다양한 스타일을 하나씩 입혀보며 뭐가 제일 어울리는지 분석까지 해주신다.
- 데님은 윤슬이 이미지랑 살짝 어긋나는 느낌? 그래도 너무 이쁘다!
- 이야... 애라서 그런지 점프수트가 이렇게 어울리네? 근데 이건 자주는 못 입을 것 같다.
등등.
우리 남매보다 더 신났다.
개인적으로 패션 센스가 좋은 편은 아니기에 미정 선생님이 와주신 건 천만 다행이긴 하다.
근데 그렇게 옷에 관심이 많으면서 본인은 항상, 심지어 백화점에 올 때까지 추리닝을 고집하는 게 특이한 점이다.
결국 미정 쌤의 픽 중에서 세트로 맞추어진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하나씩 구매하기로 했다.
윤슬이 옷은 전부 활동적인 것들인지라 격식을 갖춰야되는 자리에서 입을 만한 게 없다. 하나쯤 있는 게 좋을 듯하다.
가끔 가게에 입히고 가면 인기 폭발할 게 벌써부터 눈에 선하다.
"편하게 입을 만한 것도 골라야 되는데."
블라우스랑 스커트를 구매했지만 아직 자금엔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조금 더 돌아보려는데.
"옵바, 윤스리 사야대는 거 이써."
"뭘 사야 되는데?"
"유미니랑 가튼 걸루 사야대."
"옷을?"
"응."
지금까지 이토록 격렬한 분노를 느낀 적이 없었다.
나한테도 같은 옷을 입자고 한 적이 없었는데!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유민이랑은 커플옷을 맞추려고 하는 것인가.
- 나랑 같은 옷...!
유민이가 쑥쓰러워하는 게 보인다.
더욱 괴롭다.
"응! 유미니랑 가튼 걸루 하나씩 사므는 팀처럼 보이자나."
"팀?"
"윤스리가 보쓰자나."
그런 거였구나.
- 흐흥, 애들 너무 귀엽다. 유니폼처럼 입으려는 건가봐. 그치 윤슬아?
"정답임미다."
윤슬이는 귀엽게 검지손가락을 들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서 정답을 선언했다.
그 귀여움에 이끌린 윤슬바라기 세 사람은 저절로 설득되고 말았고, 그 이후로는 이리 저리로 2인 조직의 유니폼을 찾으러 다녔다.
그 결과.
"윤슬이 맘에 들어?"
"움! 이거 빨강이라서 조아! 히힝- 옵바가 사조써."
정열적인 빨간색 반팔을 유니폼처럼 맞추게 된 윤슬이와 유민이였다.
브랜드 로고가 팔쪽에 패치로 붙어있고, 카라가 있는 폴로티이기에 언뜻 보면 어느 카페의 유니폼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둠의 조직이 맞춰 입는, 그렇고 그런 의복들과는 거리가 있지만.
두 꼬마는 그 유니폼이 마음에 들었는지 귀가하는 길에 입고 가기로 했다.
- 보쓰, 나 이거 어울려?
"움! 역씨 윤스리 오른팔이야. 잘 어울려."
- 히히.
꿀 떨어지는 대화를 나누는 두 꼬마를 보며 미소를 짓는 한편 손은 떨어진 추처럼 떨렸다. 조금 더 커서 남자친구 생겼다고 하면 어떻게 될지 스스로가 걱정된다.
백화점까지 나온 김에 이르지만 저녁까지 넷이서 함께 먹었다.
그러는 사이 날은 저물고, 박명이 하늘을 옅은 자주색으로 물들인다.
집까지 가는 길이 비슷했으므로 아직 미정 쌤과 떨어지지 않은 시점. 한적한 골목어귀에서 익숙한 실루엣의 여자를 발견했다.
권수영이었다.
"음?"
특이한 건 수영이 옆에 웬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함께하고 있다는 점이다. 얼핏 보아 내 또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