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남자사람형제(2)
- 쉬잇.
미정 쌤이 입으로 날쌘 바람 소리를 내며 우리를 멈추었다. 입가엔 검지 손가락을 갖다대었고, 남은 한 손으로 우리를 막아선다.
수영이와 선글라스 남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움? 시이이-?"
- 시이이-
윤슬이와 유민이는 그 소리를 입으로 내는 게 신기한지 입을 넓게 벌려 따라해보지만 정직하게 '시' 발음이 된다.
"그 사람 누군데 그래요?"
- 비밀.
선생님이 우릴 멈추게 한 이유는 그 남자일 것 같았다. 선글라스를 낀 내 또래의 성인 남자.
평소 같았더라면 오히려 골목이 쩌렁- 울릴 만큼 큰 소리로 "야! 권수영 어디 가냐!" 하고 부르셨을 텐데.
마치 수영이 앞에서 우리의 존재를 숨기듯 소리도 죽이고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했다.
"비밀이면 어쩔 수 없긴 하죠."
그럼에도 추궁하고 싶진 않았다.
미정 선생님은 현재 수영이의 담임이다. 수영이만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계신 듯하다. 방금 그 남자는 수영이의 사생활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가족이라던지.
연애라던지.
최근에 친해졌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직접 밝히기 전까지 깊게 사정을 파고드는 것은 좋지 못하다.
분명 그런 이유에서 미정 쌤도 우리와 그 두 사람을 마주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비미른 어쩔 쑤가 업써. 윤스리한테만 알려조바."
- 응? 윤슬이 궁금해?
- 엄마 나도 궁금해.
두 꼬마는 오히려 비밀이라는 단어에 끌리는지 선생님의 추리닝을 꾹꾹 잡아댕기며 물고늘어진다.
그러자 고개를 숙여 양 팔에 한 명씩 잡고 속닥거린다. 내게도 희미하게 들렸다.
- 너네 잡아먹힐 수도 있어...! 방금 멍멍이 못 봤어?! 엄청 크잖아.
"헤엑!"
윤슬이가 어깨를 떨며 놀랜다.
두 사람이 끌고 가던 대형견이 한 마리 있던 것 같기도 하다. 날이 어둑해서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골든 리트리버였다.
윤슬이랑 유민이보다 덩치가 2배는 크다.
- 그러면 엄마가 우리 지켜준 거야?
- 그럼. 엄마가 좋지?
- 응!!
유민이가 엄마의 목에 원숭이처럼 매달렸다. 그 모습을 보고 윤슬이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내게 다가온다.
"옵바, 옵바."
"응?"
"윤스리는 얼마나 더 크므는 이-따만큼 큰 멈멍이 이길 쑤가 이써?"
"그러게. 오빠만큼 크면 이길 수가 있겠다."
"허억...!"
실망한 윤슬이는 작게 중얼거린다.
"윤스리는 아직두 애기야... 절때 몬이겨..."
그런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쇼핑백을 팔뚝 쪽에 걸고 윤슬이를 들어올려 안았다.
"대신 윤슬이는 멍멍이를 이길 생각하지 말고 다른 방법을 쓰면 되잖아요."
"움? 어떤 거여?"
"멍멍이랑 친구를 하면 싸울 일도 없이 같은 편을 할 수가 있죠?"
"어...!"
눈을 빛내며 고개를 수 차례 끄덕이는 윤슬이.
"그러므는 대겠다! 멈멍이두 부하루 만들므는 대! 역씨 옵바가 젤루 똑똑해!!"
내 의도와는 다른 결론이었지만 윤슬이는 금방 기운을 차렸다.
동생을 금방 달랜 내 모습을 보더니 옆에서 미정 쌤이 소리 나지 않게 작은 박수를 쳐주셨다.
육아 실력을 인정 받은 느낌이었다.
- 쫌 하는데?
**
윤슬이의 하복 차림에 대해 손님들의 반응은 좋았다.
특히 자주 들르는 손님들은
- 그 옷 오빠가 사준 거야? 너무 잘 어울리네!
- 식당 유니폼 같아서 더 귀엽다.
라며 극성을 부리기도 했다.
허나 그런 반응을 윤슬이는 별로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거눈... 기여운 거 아니구, 멋찐 건데..."
눈에서 하트를 날리는 손님들에게 작게 항변하는 5세였다.
점심 장사 타임이 끝나고 찾아온 브레이크 타임.
오랜만에 붕붕이 3호를 이끌고, 성북천으로 향하기로 했다.
최근엔 날이 더워 곧잘 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윤슬이가 반팔을 입더니 "이제 햇님을 이길 쑤가 있게써!"라고 발언했기 때문이다.
이 5세는 언젠가 태양계까지 지배할 심산인 걸까.
저녁 장사의 준비를 마치고 산책 나오는 길.
유독 길가에 사람이 몰려있어 우리 남매의 눈길을 끈다.
"움? 저기 모야?"
"누구 다쳤나."
무언가를 빙 둘러싼 듯한 모양새로 사람이 네다섯 명 정도 있다. 분위기가 붕 떠있고, 어수선하다.
가까이 가보니.
- 이름이 뭐야?
- 얘 엄청 순하다! 난 큰 개는 무섭던데.
- 무는 거 아니지? 만져봐도 되나?
큰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있는 남자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남자와 나머지 사람들은 일행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대부분이 중고등학생인 듯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어리다.
"옵바. 저 멈멍이."
"응, 맞아."
저번에 봤던 그 사람과 리트리버다.
선글라스를 끼고, 수영이 옆을 걷던 남자.
오늘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또, 리트리버는 노란색 옷을 입고 있다.
"안내견이잖아."
그날 밤중엔 어두워서 못 봤는데 지금 보니까 명확하다. 저 리트리버는 안내견이다. 저런 폴리 재질의 노란옷은 안내견들만 입는 옷이다.
그날 저 남자가 어두운 와중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게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다.
잠깐.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도와드리기로 했다.
안내견과 함께 있는 남자는 당황한 듯 표정이 굳어있었다. 저 개와의 스킨십을 허락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잠시만요. 저희 일행이라서 조금 지나가도 괜찮을까요?"
무리를 뚫고 들어왔다.
그러자 학생들은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 바빠요?
라고 묻는다.
순수히 강아지와 더 교감하고 싶어보인다.
그럼에도 모질게 끊어낼 필요가 있었다.
"지금 만나서 어디 가기로 하던 참이에요. 여기서 있는 줄 몰랐네. 빨리 가자."
- 아하, 응.
선글라스를 낀 남자도 처음엔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도와주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침착해졌다.
근처였던 터라 그대로 우리 가게까지 데리고 들어오게 됐다.
윤슬이는 '멈멍이'가 조금은 낯설고 무서운지 내 다리 한쪽에 딱 붙어 녀석과 거리를 유지했다.
-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제가 멋대로 행동한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 곤란하던 참이었어요. 와주셔서 살았어요.
정확히 내가 서있는 방향을 향하여 목례한다.
청각 등의 감각이 뛰어나거나 시각이 완전히 차단된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
"어디 가시던 중이었나보네요?"
- 그냥 산책 중이었어요. 루이가 나가고 싶어해서.
강아지 쪽을 바라보며 말한다.
저 리트리버의 이름인 것 같다.
"루이...?"
윤슬이도 그 이름을 한 번 입에 담아본다.
- 여기는 식당인 것 같네요?
"네, 음식점이에요."
어떻게 아셨어요?
라는 질문은 실례였다.
어디선가 들은 바로는 시각을 잃은 인간들은 그만큼 다른 감각들이 더욱 발달한다고 한다.
청각, 후각, 촉각 등.
그것들을 단서로 사물과 장소를 판별하는 능력이 향상된다.
생활하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 지금 장사하시나요?
"네, 주문하시겠어요?"
- 뭐가 맛있어요?
"오늘은 채소가 되게 신선한 게 들어왔거든요. 매콤한 거 괜찮으시면 비빔국수 어떠세요?"
- 좋네요. 비빔국수로 하나 부탁드리겠습니다.
브레이크 타임인 것은 맞지만 주문하신다면 내어드리고 싶었다. 저분이 지금 배가 고픈 상태라면 어딘가 식당에 들어가기 쉽진 않을 것이다.
음식점 입장에서 개를 출입시키란 위생 및 분위기 등의 이유로 꺼려지니까. 대형견이라면 더욱이.
우리 식당은 안내견이라면 대환영이다.
"멈멍이..."
- 이름. 루이야.
"루이..."
여전히 먼발치서 루이를 지켜본다.
혀를 내밀며 헥헥- 거리는 대형견의 모습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아보이지만 윤슬이의 시선에서는 조금 다른가보다.
루이랑 한참 마주보다가 선글라스를 낀 남자에게 다가간다.
"움... 윤스리 루이랑 노라두 대여?"
- 응, 루이는 목덜미 만져주는 거 좋아해.
어딘가로 향하는 길이라면 몰라도, 가게에서 가만히 있는 동안은 안내견을 만져도 문제 없을 것이다.
살금- 살금-
평소에 걷는 것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루이에게 다가간다.
그때 크게 하품하는 루이.
순둥한 외모에 비해 거대한 송곳니가 위협적이다.
그것을 보고 겁을 먹었는지 윤슬이는 멈추어 침을 꿀떡 삼킨다.
하지만 그 정도에 포기할 영보스가 아니었다.
결국 루이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쓰다듬는 데 성공했다.
헥헥- 거리며 꼬리를 거하게 휘두르는 루이.
그 꼬리가 윤슬이의 말꼬랑지에 두어번 부딪히기도 한다.
"루이야."
헥헥-
"너 음청 멋찌게 생겨따."
헥헥-
살랑살랑-
칭찬해준다는 걸 알아듣는지 루이의 꼬리가 조금 더 크고 긴 궤적을 그린다.
"혹씨 윤스리 부하 해줄 쌩각은 없니?"
뭉-!
입을 닫은 채로 조용히 짓는 루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었으나.
"오! 고마어 루이!"
윤슬이는 긍정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았다.
자발적인지 타의적인지 헷갈린다만 루이는 장윤슬 산하 조직의 3번째 멤버가 된 것 같다.
루이와 윤슬이의 대화를 들으며 선글라스 손님은 작게 웃는다.
"저희 동생이 아직 다섯 살이라서요. 본인만의 세계가 확고해요."
- 아아, 딸이 아니라 동생이구나. 제 동생도 어렸을 때 저랬어요. 이해합니다. 그리고... 엄청 귀엽네요.
제 동생.
그 단어를 듣고 권수영과의 관계성이 짐짓 예상되었다. 혈육인 것치고는 권수영에 비해 훨씬 침착하고 차분한 분이다.
배고프실 테니 비빔국수를 빠르게 준비해드리도록 한다. 루이가 열심히 윤슬이도 놀아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 덕에 붕붕이 3호와 산책을 가던 도중이던 것도 완전히 잊고 있다.
잘 삶아진 소면에 양념장을 부으면 이미 90% 완성이다. 준비만 잘 되어있다면 국수만큼 금방 내어드릴 수 있는 음식도 적다.
양념장엔 매실액과 식초가 들어가 산미와 단 맛이 적당히 잡혀있다.
국수 위에 얹어줄 채소들.
작은 상추와 오이, 열무김치 그리고 얇게 채 썬 사과. 시장에서 오늘 들여와서 신선한 것들이다.
"마지막 화룡점정은."
라임 껍질 제스트.
이게 킥이다.
비빔국수는 기본적으로 신 맛과 단 맛이 베이스가 되니 그곳에 상큼한 향이 얹히면 더욱 특색을 살려준다.
손님 상에 내어드리자 표정이 극적으로 밝아진다.
- 비빔국수인데 향이 되게 좋네요?
"비밀 재료가 하나 들어가거든요. 채소도 싱싱하니까 잘 비벼드세요."
후루룩-
후룩-
정돈되고 얌전한 식사.
외형은 또래처럼 보이지만 어른스러움이 물씬 느껴진다.
식사하는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다가 안 것인데 선글라스 안쪽으로 눈두덩이에 옅은 흉터가 남아있다.
수술자국인 듯하다. 저걸 숨기기 위해 선글라스를 끼는 것 같다.
손님이 드시는 걸 보고 루이는 귀를 쫑긋대며 코를 여러 번 핥는다. 자기 주장은 하지 않지만 본인도 무언가 먹고 싶은데 참는 것으로 보인다.
"옵바, 루이는?"
"루이도 배가 고프대?"
"움... 루이두 윤스리 부하라서 챙겨조야지 대여."
"그렇단 말야?"
줄 만한 게 있는지 주방에서 찾아보다가.
채썰다가 조금 남은 사과가 눈에 띤다.
"손님, 루이가 사과 조금 먹어도 괜찮죠?"
- 너무 많이만 안 주시면 루이도 좋아하면서 먹을 것 같아요.
허락을 받고 채 썰린 사과를 들고 간다.
윤슬이에게 몇 점 건넸다.
"윤스리가?"
"응, 윤슬이가 한 번 루이 줘봐. 친구 하기로 했잖아?"
"움... 알게쏘!"
긴장된 표정으로 내게서 사과가 든 플라스틱 용기를 받아든다.
그리고 썰린 걸 한 조각 집어들어 루이의 코 끝에 슬며시 가져다댄다.
킁킁-
킁킁...
냄새를 맡는 루이.
낼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