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남자사람형제(3)
혀를 길게 내밀어 손에 들린 사과를 낚아채버렸다.
그대로 으적으적
두어 번 씹더니 꼴딱 목구멍으로 넘겨버린 루이.
그 모습이 신기한지.
"오오...!"
감탄사를 뱉고는 사과채를 하나씩 루이에게 건네준다.
그것을 만족스럽게 받아먹는 루이.
손님이 밥 먹는 것을 그저 지키고만 있을 때보다 표정이 밝았다.
윤슬이의 손에 들린 것을 하나씩 빼먹더니 어느새 썰어둔 사과가 모두 루이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만족했는지 부윽- 하고 트름한다.
그리고 선글라스 손님도 그릇을 비울 때쯤 무언가 눈치챈 듯했다.
식당이라기엔 너무도 고요했기 때문이다. 손님과 루이. 외부인이라고는 이 둘뿐이었다.
-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 지금 브레이크 타임인가요?
"그렇긴 한데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식당으로 들인 거니까요."
- 아이고, 죄송해서 어쩌죠.
"괜찮아요. 마침 저희 꼬맹이가 루이한테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요."
윤슬이는 내 말을 듣더니 "움?" 하고 뒤를 돌아 나를 슬쩍 보다가 다시 루이에게 집중한다.
이번엔 루이의 앞발을 들어 발바닥의 부드러운 부분(소위 젤리라고 불리는 곳)을 슬슬 만져보는 중이었다. 참을성 있는 대형견은 그런 행동을 딱히 개의치 않으며 코만 낼름거린다.
-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손님은 다시 한 번 내쪽을 향하여 목례한다.
나도 똑같이 응수했다.
비빔국수를 다 드시고 빈 그릇을 내 쪽으로 건네주시는 손님. 상을 짚고 조심스레 일어나자 루이도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든다.
"계산 이쪽에서 도와드릴게요."
내 말을 듣더니 손님은 계산대 쪽으로 걸어오신다.
제 값을 계산하고 나서려던 찰나.
윤슬이가 손님을 불러세운다.
"아저씨 또 올 꺼에여?"
- 응? 또 오냐구?
"윤스리는 루이랑 또 놀구 시프다. 그러니까 또 오므는 조케써여."
- 사실 집 밖에서 밥을 자주 먹는 건 아니라서 많이 오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힝..."
- 그래도 오빠가 요리를 엄청 잘하시더라고? 그러니까 언제 한 번 시간 되면 꼭 다시 올게. 그때도 루이랑 같이.
"루이랑 가치 와여! 우리 옵바 요리눈 딴 데 가므는 절때 못 머거. 젤루 마싯는 건데."
- 알겠어. 꼭 루이랑 다시 한 번 올게. 약속.
손님은 윤슬이에게 새끼 손가락을 내민다.
그걸 보고 윤슬이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새끼 손가락을 꼬옥 건다.
- 이제 약속했으니까 안 지키면 큰 일 나는 거야.
"움? 큰 일 나여?"
- 그럼! 약속 안 지키면 큰 일 나지. 루이보다 훨씬 큰 멍멍이가 나타나서 잡아먹거든.
"헛...!"
루이보다 크면 대체 얼마나 크다는 거지!
라는 표정을 하며 머리를 움켜잡는 5세.
역시 권수영을 여동생으로 둔 만큼 애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다.
약속을 나눈 뒤에 가게를 떠나려던 손님.
그 찰나에 루이가 들뜬 듯 앞발로 지면을 박차며 제자리에서 들썩거린다.
뭉-! 멍!
- 루이 왜 그래?
투명문의 바깥을 직접 볼 수 없던 손님은 루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겠으나.
우리 남매에겐 바깥에 서있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 오빠?
권수영이다. 주말이라 사복 차림이었다.
언제나 가게 브레이크 타임때 멋대로 돌격해오듯 오늘도 그랬던 것이다.
허나 이곳에 자신의 혈육이 있으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표정이 얼음장 같다.
**
"루이, 우리 운명인 거 가타! 윤스리랑 더 가치 놀자."
뭉?
다시 가게 한 켠에 엎드린 루이에게 다가가 루이의 목덜미를 껴안는 장윤슬.
훈훈한 그쪽 방향과 달리 권수영, 송주현, 권수안.
이 세 사람이 위치한 테이블 쪽은 분위기가 다소 침침하다.
오빠가 왜 여기 있어?
루이 산책 시킬 땐 나랑 같이 나가자고 했잖아.
또 안 좋은 꼴 본 건 아니지?
그래? 그럼 다행이다. 고마워요, 주현 오빠. 우리 오빠 도와줘서.
밥 값은?
계산했구나. 그랬구나.
그 짧은 시간 내에 권수영은 이와 같은 대사를 뱉으며 목소리를 떨었다.
아이를 과보호하는 부모님의 모습.
송주현은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권수영이 지금껏 오누이 식당에서 보여준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하지만 권수영의 태도에 이해되는 부분도 있었다.
권수안이 가게로 오게 된 경위도 길가에서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온화한 성격 탓에 그런 것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성미인 것이리라고.
그리고 그런 오빠를 걱정하느라 권수영은 평소보다 과격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송주현은 결론지었다.
"미안해요, 주현 오빠. 내가 쪼금 흥분했던 것 같아."
"아냐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권수영은 친오빠, 권수안의 옆자리에 앉아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다.
송지아나 김미정.
그 사람들과 있을 때와 달리 훨씬 차분하다.
"수영아, 밥 먹고 가. 오늘 비빔국수 되게 맛있어. 그쵸 수안씨?"
"네, 엄청 맛있더라고요. 여기가 수영이 자주 오는 식당인 줄은 몰랐는데. 우리 동생이 괜히 단골 된 게 아니네?"
그 말을 듣고도 권수영은 어색한 침묵을 유지했다.
원래 같았으면
"주현 오빠 음식은 못 참지!"
혹은 "그럼 여기까지 와서 밥을 안 먹고 집에 갈 순 없잖아요?"라며 당돌하게 답할 텐데.
그런 활기찬 답이 권수영의 입에서 나오지 않아 송주현은 내심 섭섭하다.
"오빠는 방금 밥 먹었다며. 그럼 나 여기 있는 동안 뭐하려고?"
"루이랑 윤슬이랑 얘기하면서 기다리면 되잖아."
"움? 아저씨두 윤스리 부하?"
"그건 아니고."
권수안은 재빠르게 장윤슬에게 선을 그었다.
5세는 아깝다는 듯이 땅에 발을 구른다.
"아냐, 나 배 별로 안 고파졌어. 나가자 우리."
의지를 넘어선 고집이 풍긴다.
권수안은 거절할 수 없었고, 송주현도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는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권수영은 손님이고, 본인이 식사를 하지 않겠다는데 무리하게 붙잡는 것은 권리를 넘어서는 행동이다.
결국 권씨 남매는 가게를 떠났다.
장윤슬은 루이와 재회한지 10분도 되지 않아 헤어져야했기에 아쉬웠다.
쩝쩝-
입맛을 다신다.
"옵바, 옵바."
"응?"
"방금 다시 들어온 걸루 약쏙이 끝난 거눈 아니게찌? 루이랑 저 아저씨 또 오는 거게찌?"
"그럼. 오빠 음식이 맛있다고 몇 번이나 그랬잖아. 꼭 다시 올거야."
"응! 마자. 옵바랑 윤스리가 루이한테 사과도 챙겨조쓰니까, 루이도 여기 다시 오고 시플 거야."
그랬으면 좋겠다고 송주현도 바랬다.
권씨 남매 사이에 맴돌던 눅진한 분위기가 괜스레 눈에 밟혔다.
다시 귀가하는 길.
묵묵히 거리를 걷는 루이.
그리고 권씨 남매.
둘 사이엔 아무런 소통도 없다가 못내 신경쓰이는지 권수안이 먼저 입을 연다.
"수영아, 너무 내 걱정 안 해도 돼."
"...."
"루이도 이렇게 든든하고, 오늘 산책할 때 별 일 있지도 않았어. 그냥 어린 애들이 와서 루이랑 놀고 싶어했던 거밖에 없거든. 그러니까."
"오빠, 저번에 뭔 일 있었는지 잊었어? 길 가다가 누구랑 부딪혀서 욕 얻어먹고. 한 번은 다른 개한테 루이가 물릴 뻔하기도 했잖아."
"응, 그랬지."
"오빠 괴롭히려고 이러는 거 아니잖아. 걱정돼서 그래. 그러니까 내 말 한 번만 들어줘. 내가..."
오빠 지켜줄게.
라는 말은 쑥쓰러웠는지.
아니면 주제 넘은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권수영의 입에서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는 오빠와 그런 약속을 주고받았던 적도 있는 것 같은데.
애초에 권수안은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시력을 잃었던 것인가. 그 이유를 권수영은 여지껏 알지 못했다.
꽤나 어렸을 때부터 그랬으니까.
부모님께 물어도 오빠한테 물어도 가르쳐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또, 쉽게 물어볼 수 있을 만한 얘기도 아니다.
"암튼 루이 산책시킬 땐 나한테 말해. 그리고 뭐 필요한 것도 나나 엄마 아빠가 하교길에 다 사다줄 수 있으니까."
"알았어 수영아. 고마워."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은 생활적으로 여러 문제를 안고 산다. 아무리 그 생활이 익숙해졌더라도 보통 사람처럼 살긴 어렵다.
그런 인간을 친형제로 두고 있는 권수영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특히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건 시선이다.
이번 학기 초.
권수안과 함께 루이를 산책 시키던 저녁의 골목.
같은 반 친구들을 마주친 적이 있다.
어떠한 대화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못 볼 것을 봐버렸다는 듯 눈을 피하며, 자리를 떠나던 친구들.
친하게 지내자고 인사를 나누던 아이도 있었는데.
그딴 것 다 쓸모 없었다.
왜 그래 수영아?
라고 묻는 권수안의 질문에 얼버무리며 괜찮은 척했지만. 괜찮은 척에 불과했다.
같은 반이 된 친구들이 왜 저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 이유는 명확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함께했던 오빠가 조금
'미워질 뻔했다.'
**
그날 수영이의 친오빠, 권수안씨가 우리 가게에 들리고 나서 당분간 두 사람 다 우리 가게에 들리지 않았다.
권수안씨는 둘째 치고, 수영이도 그렇다.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것 같지?"
수영이의 말본새를 되짚어보면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잠깐 본 것뿐이지만 적어도 권씨 남매의 사이가 나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평범한 남매들에 비해 훨씬 사이가 좋다고 해도 무방하다(물론 윤슬이와 나 정도의 사이는 아님).
"움? 옵바."
"왜 그러세요, 아가씨."
"왜 이러케 얼굴이 심각해여?"
"얼굴이 심각하다고?!"
내 동생이 벌써부터 외모를 디스하기 시작했다?
"움... 움... 아니야. 움... 표정이 심가캐."
"아, 표정이."
내 동생이 또래에 비해 독특한 취향과 어른스런 가치관을 갖고 있기야 하지만 언어까지 폭력적으로 변해버리면 매우 슬플 것 같다.
"그럴 만도 하죠. 지금 손님을 잃게 생겼어요."
"잉? 아까 점시메 손님들 마니마니 와써. 옵바 엄청 바빠써. 뚝딱뚝딱."
"그렇긴 한데."
뚝딱뚝딱이라며 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흉내내는 윤슬이. 그 말대로다. 오늘 점심 장사는 분주했다.
매출도 평시에 비해 좋았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은 불편하다.
수영이가 가게에 들르지 않은 지 거의 일주일이 다 되어간다. 이 정도면 기록 갱신이다. 그 정도로 자주 와주던 친구인데.
덩달아 지아까지 찾아와주지 않고 있으니.
이건 위기다.
[오누이 타이쿤!]
[J 고등학교 2학년생 권수영]
[종합 만족도: 82%]
[J 고등학교 2학년생 송지아]
[종합 만족도: 70%]
두 친구는 우리 가게 손님들 중 가장 높은 만족도를 보이기도 하고, 그만큼 자주 들러준다.
그런 손님을 잃는 것은 가게 입장에서 장기적으로 큰 손해다. 여태껏 친해진 터라 서운하기도 하다.
여러 모로 근심이 굉장히 큰 상황인데.
"그러믄 옵바가 어뜨케 하므는 웃어조?"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윤슬이.
그 질문만 들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어! 웃었따! 옵바가 벌써 웃어써."
"우리 윤슬이만 옆에서 있어주시면 오빠는 항상 미소 짓는데?"
"움? 윤스리 대다내?"
"아주 대단하지."
"히힝-"
지금은 이렇게 웃고 있지만 윤슬이도 권씨 남매가 다시 찾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
수영이와도 꽤 친해졌고, 무엇보다 제2의 부하인 루이가 오지 않으면 조직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윤슬이는 루이와 놀고 싶다.
그래서 지원군을 요청한 상황이다.
"슬슬 오실 때가 됐는데."
가게 문쪽을 바라보고 있으니 아니나 다를까 지금 막 도착한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회색 추리닝을 입은 체육 선생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