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악당다워지는 방법(1)
평소보다 이른 아침.
분주히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행선지는 오누이 식당이 아니라 성래 시장이다.
우리 남매는 시장에 도착하자 한몸에 눈길을 끈다.
곁눈질 하는 할머니들과 대놓고 쳐다보는 몇몇 주부들, 그리고 아저씨들.
물론 그 시선의 끝엔 윤슬이가 있다.
- 어머! 오늘 윤슬이 인물이 좋으네? 지금 입은 치마 오빠가 사준 거야? 이쁘다! 이뻐!
- 그럼 오빠가 사준 거겠지. 우리 주현이가 윤슬이 얼매나 이뻐한다구!
시장 바닥에 앉아 채소를 파시는 할머님들은 반갑게 우리 남매를 맞이해주신다.
특히 윤슬이 여름 복장에 매료되셨다.
일명 '최종 보스' 복장인데, 그 복장에 대해 호평이 떨어질 때마다 윤슬이는 약간 불만스런 표정을 짓는다.
"이거눈... 이뿐 게 아니라 머찐 건데."
입술을 비죽 내밀고야 만다.
내 업보이긴 하지만 이런 반응조차 너무 귀엽다.
"윤슬아, 한 번 패션쇼 해드려야지?"
"움... 알게쏘."
내 요청을 듣고는 잡고 있던 손을 떼어 허리춤에 올린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가며 뺑글뺑글뺑글-
세 바퀴를 연달아돈다.
그리고 팔을 넓게 하늘 위로 벌리며 잠시 멈춤.
"어때여?!"
짝짝짝짝짝-
윤슬이의 트리플 악셀을 보곤 시장 바닥이 요동친다!
방금까지 분주하게 호떡을 팔던 할머님도.
마늘 꼭다리를 까던 할아버님도.
달걀을 옮기던 아주머니와 아저씨도.
심지어 그 옆에서 사탕을 빨던 초등학생 뻘 남자애까지.
모두가 윤슬이에게 주목하게 되었다.
이 정도 반응까지는 예상 못했는지 윤슬이는 얼굴을 밝히고 내 뒤로 숨는다.
그리고 콩콩콩- 하면서 콩알펀치를 내 등짝에 날린다.
데미지는 0에 수렴한다.
"이잉- 옵바 때무니야. 다 윤스리만 쳐다보자나."
"어때서 그래? 이뻐서 그러는 건데."
"우우... 이거눈 이뿐 게 아니라 머찐 거라구 그랜는데..."
"그랬단 말야?"
"옵바가... 체종보쓰... 젤 쎄구 머찌다구 그래짜나!"
"맞다, 맞다. 멋있는 거였지? 그럼 오빠한테 한 번만 더 패션쇼 보여줘봐. 오빠가 헷갈린 걸 수도 있잖아요."
"움... 어쩔 쑤 업찌여."
앞으로 걸어가며 뺑글뺑글뺑글-
세 바퀴를 연달아돈다.
그리고 팔을 넓게 하늘 위로 벌리며 잠시 멈춤.
"이버네눈 어떤데!"
짝짝짝짝짝-
시장바닥에 2차 박수 웨이브가 발령되었다.
방금 막 구워진 호떡을 먹던 아저씨도.
출근하던 회사원도.
머리를 고쳐 묶던 정육점 할머니까지.
10년 전 주말 예능 골든타임급의 주목도를 불러오는 윤슬이의 패션쇼였다.
2차 콩알펀치까지 등에 다시금 들어왔지만 마찬가지로 데미지는 0에 수렴한다.
윤슬이의 여름 패션이 너무도 인기가 많아 한 번 집에서 둘이서만 연습해본 장기인데 예상대로 폭발적인 주목을 불러온다.
이걸 연습하기까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있었던가.
'윤슬아! 너 필살기를 하나 준비해야 되지 않을까?'
'필쌀기?!'
그 세 글자.
이름만 입에 담아도 가슴을 뛰게 만드는, 마성의 단어다.
'그치, 왜냐면 윤슬이는 뭐야?'
'보쓰!'
'근데 보스가 기술이 아무 것도 없으면 폼이 날까요? 아니면 안 날까요?'
'움... 안 날 거 가태.'
'그러니까 필살기를 하나 만드는 거지.'
그렇게 해서 제안한 필살기가 패션쇼다.
누군가 딴지 걸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논리에 어긋난다.
세 바퀴 빙글빙글 도는 게 어떻게 필살기인가?
그런 논리로 접근해온다면,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 되지만 차분하게 생각해봤을 때.
상대는 5세다.
'잉... 그러케 하므는 모가 조은데?'
내가 먼저 패션쇼의 자세를 선보였을 때 윤슬이도 그다지 좋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럴 때 잘 구슬리기 위해 평소에도 손님들과 대화를 이어나가며 말빨을 키운 것 아니겠는가.
'아직 윤슬이는 이해를 못했구나! 이렇게 360도를 세 바퀴 돌면서 주위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거거든? 1080도지? 그러면 섣부르게 공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겠지. 그 틈을 이용해서 윤슬이는 반대로 모든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거야. 왜냐면 360도 전방위를 세 번이나 바라보면서 모든 곳에 대한 시야가 확보됐으니까.
그걸 경계하고, 저항하는 녀석들도 있겠지. 많이 있겠지! 윤슬이는 보스니까. 하지만 그것들도 다 무용지물이잖아? 왜냐면 윤슬이가 제일 쌔니까. 즉 이 기술은 윤슬이가 제일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거야. 녀석들의 행동만 파악할 수 있으면 윤슬이는 무적이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굳이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철저히 개소리였다.
허나 5세에게는.
'오오! 그러쿠나. 역씨 옵바야! 대다내.'
양심이 찔릴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그리하여 연마하게 된 패션쇼인데.
사실 연마랄 것도 없었다. 그냥 빙글뱅글 도는 것뿐이니까.
효과 또한 명확하고도 단순하다.
예쁜 옷을 입은 윤슬이가 3배 정도 더 귀여워보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인류 공동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선한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합리화 미쳤네."
두 차례의 패션쇼를 끝낸 뒤 시장 반대편에 위치한 빵집에 도착했다.
빵집에 들르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아침식사를 빵으로 떼우기 위해서다.
그 앞에 도착하자 윤슬이가 긴장된 표정으로 침을 꿀떡 삼킨다.
그리고 내 바짓춤을 잡고 엉거주춤한 움직임을 보인다.
마치 천적을 앞에 둔 야생의 소형 포유류 같다.
"옵바, 드러가야게찌?"
"윤슬이도 오늘 빵 먹고 싶다며? 그러면 들어가야겠지. 안 그러면 빵을 못 사잖아."
"움... 그치만. 그치만."
이렇게 망설이는 이유가 있다.
시장 빵집의 사장님과 윤슬이는 귀여운 악연이다.
"오빠가 옆에 있으니까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
"움... 그건 맞찌. 아라써."
빵집에 들어가는 게 망설여졌는지 미간이 그늘지다가도 내 얼굴을 보니까 다시 :) 외국 이모티콘처럼 미소짓는다.
내 입장에선 둘의 티키타카를 보는 게 내심 기대된다.
빵집에 들어가자 몇몇 손님들 안쪽에 빵을 열심히 썰고 계신 사장님이 보인다.
30대 초반이며 손이 굉장히 야무지고 풍채가 좋다. 긴 머리를 망으로 묶었으며, 흰 가루가 덕지덕지 붙은 앞치마를 매고 있다.
무엇보다 얼굴이 인상적인데, 눈꼬리가 옆으로 길게 쳐져 상시 눈웃음을 짓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 어머머, 윤슬이가 왔네?! 오랜만~.
"윽..."
저런 외마디 신음은 윤슬이 입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빵집에 오는 것은 내게 그런 의미도 있다.
윤슬이의 새로운 일면을 발견하는 것.
- 주현씨, 나 진짜 윤슬이 보고 싶어서 아침마다 기다린다는 말야. 조금 더 자주 오면 안돼? 자기들한테는 빵도 엄청 많이 얹어주는데!
"자주 올게요. 근데 윤슬이랑 저랑은 빵보다는 밥을 선호하는 편이라. 대신 빵 먹고 싶을 때는 무조건 이 빵집 오거든요. 이 정도 오는 걸로 봐주세요."
- 아아... 한국인은 밥심이라곤 하지. 그럼 아침밥을 우리 가게에서 먹는 건 어떻게 생각해? 내가 빵만 잘 굽는 게 아니라 밥도 잘 하거든.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나름 저도 식당하는 몸이라."
- 단호하긴.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가는 눈으로 지켜보는 윤슬이. 주로 시선은 빵집 사장님한테 향해있다.
명백히 경계의 시선.
윤슬이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낯을 가리긴 해도 금방 친해지는 타입이다.
요 몇 달간 내가 관찰한 결과, 윤슬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인간은 이 빵집 사장님 정도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사장님이 상당히 강적이다.
- 윤슬아, 오늘은 내가 무슨 쿠키 만들었게?
"우우... 말 안했으므는 조켔다."
- 그럴 순 없지. 오늘도 윤슬 타임을 즐겨야 되는데!
"으으... 윤스리 고통!"
고통!
이라며 자기 머리통을 한 손으로 부여잡는 윤슬이.
마치 편두통을 앓는 중년 같은 포즈다.
윤슬 타임이라 함은 이 가게 안에서만 통용되는 단어다. 주로 윤슬이를 고통 주는 시간을 의미하는데.
진정한 의미의 고통이었더라면 보호자로서 적극적으로 막아섰겠지만.
진솔해지자면 윤슬이가 이 시간을 겪는 게 재미있다. 나와 둘이 있거나, 다른 손님들과 있을 때는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으니까.
- 자, 이거 봐봐.
사장님은 가게 한쪽 코너에서 트레이를 통째로 가지고 온다.
그곳에 담긴 것은 편의점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쿠키. 옅은 갈색 표면에 빛나는 당분이 결을 이룬다. 크기에 비해 가볍고 식감은 바삭하니, 인기가 많다.
이태리에서 온 페이스트리 쿠키.
누X띠X라고 많이들 말하지만.
저 과자의 이름은 따로 있다.
- 스폴리아띠네 글라사떼.
"으윽! 가, 강저기다!"
강적이다.
윤슬이의 말이 맞다.
오늘은 유독 상대하는 데에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 한 번 따라해볼까? 스폴리아띠네 글라사떼.
"스.. 스풀리. 띠누. 스뽈리...! 글리쓰... 으아... 앗."
- 스폴리아띠네 글라사떼.
"스포... 스폴리...!"
- 스폴리아띠네 글라사떼.
"스폴리아뜨니? 글라씨?"
- 프흡...
그렇다.
이 사장님은 큐트 어그레션이 심하다.
윤슬이에게 어려운 발음을 요구하곤, 잘 발음하지 못하는 것을 즐겁게 지켜본다.
실제로 혀가 꼬이지 않고, 발음하려 노력하는 윤슬이의 모습은 절로 웃음이 나오게 만들만큼 귀엽다.
잔혹하다면 잔혹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딱히 강제로 시키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명백한 보상이 따르기 때문에 윤슬이는 계속해서 도전한다. 성공하면 저 쿠키를 공짜로 받을 수 있다. 실제로 몇 개 받았던 전적이 있다.
스풀리...
스폴라띠...
글라사...
몇 번이고 입으로 되뇌이며 도전하지만 이내 포기한다. 본질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윤슬이는 아직 혀가 온전히 성장하지 않았다.
오빠도 '옵바'라고 하는 동생이 이태리 말을 온전히 발음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 크흣... 너무 귀엽다.
못 참겠다는 듯이 두 손을 배꼽 부근에 모으며 윤슬이를 관찰하는 사장님.
좋은 취향이라곤 말 못하겠지만 이로써 윤슬이가 더욱 귀여워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윤슬이는 몇 번 더 시도하다가 입을 삐죽 내민다.
결국 포기한 것이다.
"항복..."
왠일로 항복 선언을 하는 윤슬이.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린다.
보통 항복 발언까지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몇 번 시도하다가 성공하는 것이다.
일전에는 고전했던 '스패츌러'의 발음을 완전히 재현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오늘의 강적.
스폴리아띠네 글라사떼는 버거웠던 모양이다.
- 아구... 윤슬이 항복이야?
"웅..."
힘 없이 대답하며 내 허벅지 쪽에 얼굴을 푹 묻어버린다. 그리고 흐느적거리며 슥슥- 비빈다.
어지간히 실망이 컸던 모양이다.
마음이 아프다.
평소처럼 결국엔 발음해내는 데 성공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윤슬이 기가 죽었어요?"
"웅... 윤스리 기가 주거써."
기가 죽었다며 내 얼굴을 보고 양 팔을 넓게 벌린다.
안아달라는 뜻이다.
번쩍 들어 안아주자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다.
"오빠가 우리 윤슬이 기 살아날 때까지 안아주면은 될까요?"
"움... 그러믄 대여. 그러케 해주세여. 그른데 기가 사라날라므는 시간이 쪼끔 걸려."
"그렇게 해드릴게요. 얼마든지 이렇게 있어도 돼요."
- 너무 심했나?
그런 우리 남매를 보며 사장님은 미안하다는 듯이 혀를 삐죽 내민다.
- 그래, 너무 심했어! 우리 윤슬이 저렇게 기 죽으면 시장 바닥 민심 다 돌아서는 거 몰라서 이러나?
- 옳소! 당장 윤슬이한테 사과 안 하면 나 이 집 빵 안 사먹는다!
시장 민심이 다시금 요동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