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생이 굴러들어옴-73화 (73/200)

73화: 악당다워지는 방법(3)

붕붕이 3호 위에 걸터앉은 윤슬이. 그 옆에 쭈그려 앉은 백수인씨.

나란히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본다. 십중팔구 영화를 보는 것이다. 저번에 윤슬이에게 [황야의 데스페라도]를 보여준 것도 백수인씨인데, 그런 분야에 지식이 많다.

다양한 영화나 만화 등을 보고 빌런 캐릭터를 탐구하는 게 취미라고 한다.

두 사람이 열띤 토론을 벌이는 것도 그런 종류일 것이다. 어떤 악당이 멋있고, 멋 없고, 어떤 게 본받을 만한 느낌인지.

윤슬이는 짧은 다리를 도도하게 꼬아보거나 공중에서 무언가를 사격하는 폼을 잡아보기도 한다.

그걸 보고 만족스럽게 끄덕이는 백수인씨를 보면서 나는.

"질투 난다."

내가 바쁘다고 해서 내 포지션을 빼앗아버렸다. 윤슬이 옆에서 저렇게 놀아주는 건 내 역할인데!

-  여기 제육 하나요.

"네, 제육 하나. 주문 받았습니다."

그러나 손님은 끊일 줄 모르고 들어온다.

주문이 들어오면 그대로 듣고 요리해서 내어드려야 한다.

난 일해야 할 운명인 것이다.

손님이 많이 와주시는 건 늘 반길 만한 일이고, 그래야만 돈도 벌고 오누이와의 거래도 성사시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럴 때만큼은 쉬엄쉬엄 와주셔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잠깐 해본다.

"배가 부른 거지."

지금 이 순간도 어느 식당들은 유지 비용도 채 나오지 않아 문을 닫고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다니.

철이 없었다.

빠르게 자기 반성하고, 요리에 착수한다.

"대신 이따가 브레이크 타임 되면 윤슬이랑 놀아야지."

다가올 브레이크 타임을 향해 바쁘게 달린다.

시간이 흘러, 손님들이 모두 떠나가고 설거지를 마칠 때쯤 점심 장사가 종료되었다.

그러나 백수인씨의 악당 수업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 붕붕이 쪽으로 다가가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한다?

그리곤 윤슬이가 터벅- 터벅-

평소와는 다르게 힘이 들어간 보폭으로 내 앞에 나선다.

"옵. 빠."

"으, 응?"

"쪽... 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빨고 있던 막대사탕을 입에서 빼더니 바깥으로 거칠게 입바람을 분다.

담배 피는 척을 하는 것 같다. 어렸을 때 나도 한 번 정도 해본 적이 있다. 괜히 멋있어보여서.

"윤스리. 강해져따."

"그래? 얼마나 강해졌는데?"

"조은 질문임미다!"

윤슬이는 발걸음을 거칠게 쿵쿵 걸어대며 냉장고 앞으로 향한다.

그리곤 깊게 심호흡하더니.

"끄응!"

턱-

냉장고 문을 빠르게 열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럴 수가! 냉장고 문을 한 번에 열었잖아?"

"바바! 윤스리 강해져써!"

똥배를 앞으로 불쑥 내밀며 턱을 치켜세운다.

본인이 어지간히 자랑스러운 것이다.

원래는 냉장고를 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경우가 많다. 끙- 끙- 대며 냉장고를 여는 모습을 보기 위해 굳이 사이다를 주문하여 윤슬아에게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는 손님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이번엔 부드럽게 냉장고를 여는 데 성공한 것이다. 기합이 거세게 들어가있었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명백한 발전이다.

윤슬이에게 손바닥을 내밀자 폴짝 점프하며 하이파이브를 한다.

"윤슬이가 아주 강력해졌네?"

"웅! 이니 언니가 알려조써."

"수인씨가?"

-  이거 바바.

윤슬이는 웬 스마트폰을 내 얼굴 앞으로 들이민다. 백수인씨의 물건인 것 같다.

-  앗, 그건.

내겐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지 당황하는 수인씨.

무슨 영상이길래 그럴까 하고 들여다보니까.

그럴 만도했다.

"운동 영상...?"

백수인씨가 셀프로 찍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운동 동영상이었다.

바닥에 엎드려 팔굽혀펴기를 하거나 봉에 매달려 턱걸이를 하거나 제자리에서 스쿼트를 하는 등.

브이로그에나 쓸 법했다.

"윤슬이가 이거 보고 따라서 운동한 거야?"

"움... 그거눈 아니야."

"그럼 이걸 보고 어떻게 됐는데?"

"히잇! 기합을 너어써! 그래서 쌔져써. 이제 윤스리가 냉장고 이겨."

우리 집 5세의 적수는 무려 업장용 쇼케이스 냉장고인 모양이다.

윤슬이의 말을 듣고 대강 이해됐다.

이런 운동 영상을 잠깐 본다고 해서 힘이 자랄 리는 없었다. 다시 한 번 냉장고를 열여보게끔 시키니까 이번엔 또 끙끙거리면서 고전한다.

방금 기세 좋게 냉장고 문을 열어낸 것은 운이 좋았던 결과다.

이번엔 냉장고와의 결투에서 고전한 윤슬이가 땀을 닦는다.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불만스런 표정이다.

"이대루는 안 대는데여, 옵바."

"왜 안 될까요?"

"윤스리는 더 강해져야 대여."

"그래서 냉장고를 박살내야 돼?"

"응!!"

"냉장고를 박살내지는 말아줘. 저거 우리 가게 꺼 아니야."

홀 쪽에 위치한 업장용 쇼케이스 냉장고는 대여품이라 잘못되면 업체에 물어줘야 된다.

결심을 굳힌 듯 윤슬이는 굳은 표정으로 수인씨에게 다가간다.

"이니 언니, 윤스리 가르쳐조."

-  운동?

"움! 윤스리가 운동 해이지 대게써."

나를 묵언으로 바라보는 수인씨.

허락을 구하는 시선이다.

가게 안에서 무언가를 할 심산인 것 같은데 굳이 안 된다고 할 이유도 없었다.

다른 손님들도 모두 돌아갔으니.

이 둘이 열심히 땀 뺄 동안 난 저녁 장사의 밑준비를 하면 된다. 오히려 윤슬이 돌봐줄 사람도 생겨서 좋다. 내 자리를 뺏긴 것 같아서 아주 약간 질투나기도 하지만.

내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방긋 웃는 수인씨.

-  땡큐.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하자 나는 주방으로 와 재료 손질에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두 눈은 즐겁다.

두 사람이 투닥거리며 운동하는 모습은 멀리서 보아도 꽤 귀엽게 느껴진다.

특히 윤슬이.

그 옆에서 수인씨가 팔굽혀펴기를 완벽한 자세로 해내는 것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하는지 한 번 해보겠다며 자세를 비슷하게 잡고 시도해보지만.

"우우우 끄읏!!!"

요란한 기합에 비해 배가 땅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반동을 이용하려 골반을 튕겨보기도 하지만 튀어오르는 물고기의 꼴이 될 뿐 효과는 미비하다.

몇 번 시도하다가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내게 쫄래쫄래 달려온다.

"옵바, 옵바."

"응?"

"윤스리 이제 알게써여."

"뭘 또 깨달으셨을까요? 우리 아가씨."

"당장 쌔지는 거눈 너무 힘드러! 그니까 윤스리가 쪼꿈씩 쪼꿈씩 쌔져보께."

딱히 안 쌔져도 되는데. 이 5세는 파괴왕이 되는 것이 목적인지 힘을 지나치게 갈망하는 경향이 있다.

윤슬이는 실망한 듯 풀이 죽어있다.

그런 얼굴에다 대고 강해지지 않아도 된다며 선을 긋는 것도 못할 짓이다.

"그럼 윤슬이가 조금씩 더 쌔지면 더 보스다워지겠네? 천천히 쌔져볼까? 어차피 급할 건 없으니까."

"움, 그게 조케써여."

그런 결론을 내고, 윤슬이는 수인씨와 한 가지를 약속했다. 무릎 꿇고 팔굽혀펴기를 1회 완료해보겠단 것이다. 아직 5살이지만 노력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 약속 때문인지 남는 브레이크 타임엔 내게 책을 읽어달라거나 붕붕이를 타고 산책 나가자거나 하는 요구를 하지 않았다.

팔굽혀펴기 연습에 매진했다.

쪼끄만한 꼬맹이가 바닥에 엎드려 뻘뻘 땀을 흔들리는 게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다치지 않는 선에서는 그냥 내버려 두려고 옆에서 응원만 해줬다.

"무슨 다섯 살이 운동을 저렇게 열심히 하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윤슬이다운 행동이긴 하다.

저녁 시간이 되자 가장 처음 찾아온 손님은 송지아였다. 수영이는 없이, 혼자만 찾아왔다.

오자마자 윤슬이를 보더니 환히 웃는다.

-  윤슬이 오랜만이네?

"오! 지아 언니당. 오늘은 왜 지아 언니만 와써?"

-  응 맞아 언니만 왔어. 수영이는 오늘 가족들이랑 집에서 밥 먹는대.

"루이두?"

-  응, 루이도.

"움... 아깝따."

-  루이가 안 와서 아쉬워?

"응! 윤스리 강해진 거를 보여조이지 대는데."

보디빌더들이 쇼에서 보여주는 포즈를 짓는다. 이두와 전완을 가득 모아 팔 근육을 돋보이게 하는 자세.

한 번 쿡 찔러보니까 몰랑몰랑.

물렁살이다.

"시험 공부하다가 온 거야?"

-  네, 진짜 피곤함.

"저기 앉어, 내가 맛있는 거 차려줄게. 뭐 마실 거 하나 가져다줄까?"

-  사이다! 사이다 주세요!

저번에 수영이에게만 떡볶이를 서비스했으니 지아에겐 약간 미안했다. 그래서 사이다라도 하나 얹어주려는데 윤슬이가 묵묵히 손을 들어올린다.

본인 차례란 뜻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윤슬이가 비장한 표정으로 냉장고 앞에 서는데.

끄응- 끼잉-

끙...

읏?

"옵바, 이거 이상해여."

"왜? 안 열려?"

"웅..."

내가 가서 직접 열어보았다.

떡-

떡 하니 잘 열린다.

"아, 앗..."

당황하는 윤슬이.

방금까지 그렇게 바닥을 궁구르며 팔굽혀펴기로 힘을 뺐으니 당연히 힘도 빠질 만하다. 이 상태로 냉장고와 결투를 벌이기엔 보스로서도 역부족이었다.

지아는 어느 정도 상황을 눈치챈 건지 윤슬이의 뒤편으로 가서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겨준다.

-  힘내.

그러나 우리 보스는 너무도 분해보인다.

이를 앙- 물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지아를 본다.

"지아 언니 잘 바바. 윤스리 쌔졌다눈 말이야. 막 이케이케! 해서! 더 쌔졌눈데. 지금 힘드러서 냉장고 못 연 거거둔..."

아까 팔굽혀펴기를 하던 자세까지 재현하며 필사적으로 변명한다.

-  윤슬이가 쌔졌어? 어디 봐봐.

지아는 윤슬이를 믿어주려는지 높이를 약간 숙여 눈을 맞추어준다. 그런 지아의 기대를 보스는 결코 외면할 수 없었고, 연습했던 팔굽혀펴기에 돌입한다!

허리를 숙이고 땅을 손으로 짚는다.

무릎을 땅에 대고 준비...

시작!

"흐읏... 끄이이잉!"

허나 여지껏 연습한 것으로 힘이 거의 방전되었기에 완벽하게 팔굽혀펴기를 하긴 어려웠다.

아까 연습 중에는 3개를 연달아 성공해낼 정도로 대단한 역량을 보였으나 지금은 냉장고와의 결전에서도 패배할 정도로 많이 약화된 상태다.

그리하여 끙끙- 거리며 올라오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

그러나 우리의 5세는 오기가 발동했다. 방금 지아한테 냉장고를 못 여는 모습을 보였기에 부끄러울 만도 하다.

특히 본인이 강해졌다고 강조하는 와중에서 벌어진 일이니 말이다. 그리하여 조금 걱정스러울 정도로 신음하며 팔굽혀펴기를 한다.

안쓰럽다.

"윤슬아 이제 그만해도 돼... 넌 충분히 노력했어."

하지만 오빠로서 동생의 분투를 섣부르게 말려도 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하여 그만두게 강제하지는 못하고 있던 찰나, 신묘하고 위대한 소리가 꽃 피운다.

뽀오옹-! 스스슥...

어딘가에서 분출된 혼탁한 기체가 대기중으로 퍼져나가는 듯한, 그 신묘한 소리를 듣고 나와 지아는 아무 말 없이 눈을 마주쳤다.

소리의 진원지가 윤슬이의 궁뎅이 한 가운데란 것을 자연스레 알았기 때문이다.

힘을 너무 주어 괄약근까지 영향을 준 것 같다.

"아아, 앗."

우리 둘은 모른 척해주려고 했으나 정작 본인이 당황하여 팔굽혀펴기고 뭐고 다른 것따위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유, 윤스리가 안 그래써! 일부러 안 그래써!!!"

본인이 안 그랬다는 건지 일부러 안 그랬다는 건지 언어의 의미조차 붕괴하기 시작했다.

수치스러웠던 보스는 눈치를 보다가 내 앞치마 안쪽으로 쑥- 들어와버렸다.

"옵바, 윤스리 쫌 숨겨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