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휴가는 내 맘대로 가는 게 아니다(2)
아침을 든든히 먹고 가게로 출발한다.
휴일엔 한 번도 출근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이게 바로 주말 특근을 맞이하는 직장인들의 마음일까.
일하러 가는 것은 아니지만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하는 게 매너이므로 못해도 11시 50분까지는 도착할 계획이다.
곧 8월이다.
자전거를 타느라 그나마 바람이 시원하게 볼을 스치지만 볕이 따끔하게 피부를 찌른다.
윤슬이한테는 철저히 선크림을 발라놓았으니, 피부 탈 염려는 덜겠지만.
나도 힘들다.
"옵바, 너무 더우..."
"더워?"
"햇니미 화가 잔뜩 나써. 윤스리 막 공격하구 이써."
날이 뜨겁다는 걸 창의적으로 표현한다.
지금으로선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최대한 빠르게 가게까지 도착해서 에어컨의 은총을 받는 수밖엔.
선크림을 피부에 발라놓아 텁텁해진 것이 더 덥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런데 가게로 향하는 도로변에서 반가운 물건을 발견한다.
어느 할아버지가 잡동사니를 늘어놓은 수레를 세워두고 계신다. 판매용인 것 같다. 가격표가 일일이 손글씨로 적혀있다.
눈에 띠는 것은 밀짚모자다.
잠시 자전거를 멈추고, 수레쪽으로 향한다.
"할아버지, 저거 모자 얼마에요?"
- 오천 원.
"요기 제 동생이 쓸 건데, 작은 사이즈도 있어요?"
- 으응... 애기가 쓸 거여? 그러믄 이게 젤루 적은 건데. 한 번 씌어봐봐.
"애기 아니구 윤스린데..."
윤슬이는 낯을 가리는 듯 나한테 찰싹 달라붙어있으면서도 자기 이름만은 확실하게 주장한다.
할아버지가 거친 손길로 윤슬이 머리 위에 얹는다.
쏘옥-
머리가 너무 작아서 밀짚모자의 음푹 패인 구멍 안으로 빠져버린다.
바람이 불면 휑하고 날아갈 것 같다.
그래도 오히려 이렇게 큰 걸 씌우니까 귀여워보이기도 한다. 오천 원이면 가격적으로 나쁘지도 않으니까, 사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 흐음, 아가 이뿌장한데, 대굴통도 짝아버리네. 나중에 티비 나오게 시키믄 쓰겄다.
"움... 대굴통."
대굴통이란 단어가 인상적이었는지 입으로 되뇌이는 윤슬이. 할아버지는 쓴웃음을 짓고 다시 모자를 빼앗아간다.
수레 안쪽에서 끈을 꺼내어 모자와 연결한다. 꽤 능숙한 손놀림이다.
가위질을 하고 몇 번 쓱쓱 묶더니 턱에 걸 수 있게끔 고무줄이 붙게 되었다.
- 이제 한 번 다시 씌워봐.
내게 모자를 건네주신다.
윤슬이 머리에 씌우고 고무줄을 땡겨 턱에 건다.
바람이 불어도 뒤로 살짝 넘어갈 수도 있긴 하겠지만 떨어지진 않을 것 같다.
몸집이 워낙 작아 모자가 만들어주는 그늘에서 시원해보이기도 한다.
"윤슬이, 이러면 햇님이 덜 공격하지?"
"웅! 햇니미 화가 안 나써!"
자연물의 마음까지 파악할 수 있는 5세였다.
물론 오누이 중의 동생, 햇님이가 아니라 저 멀리 우주에서 이글거리는 분을 말하는 거다.
윤슬이가 밀짚모자를 쓴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서 화를 조금 덜 내기로 자기 타협하게 되었을지도.
할아버지께 값을 지불하고, 다시 자전거에 오른다.
찌르르르-
페달을 느슨히 밟자 체인이 돌아가는 소리가 향수를 불러온다.
쮸르르르- 쮸르르
하고 윤슬이가 페달 소리를 따라하다보니 금세 가게 앞에 도착했다.
[11:47]
예정대로 일찍 도착했으나, 건물주 정민구씨가 먼저 와있었다.
- 오셨네요. 미안해요, 쉬는 날 불러서.
"아뇨 아뇨. 괜찮아요. 덕분에 윤슬이 귀여운 모자도 하나 사줬거든요. 더운데 빨리 들어가서 에어컨의 은총을 받도록 하죠."
- 좋은 생각이네요. 솔직히 밖에서 5분 정도밖에 안 기다렸는데. 어후.... 힘들어요.
7월 말의 더위는 그만큼 본격적이다.
가게를 열고 들어오자마자 손은 에어컨 리모콘 쪽으로 향한다.
삐빅!
우리의 세이비어, 에어컨에 시동이 걸리고 얼음장 같은 바람이 더위를 잠재운다.
찬 공기가 코끝을 찡하게 울린다.
구원받았다.
에어컨을 틀 동안 윤슬이는 민구씨와 인사를 나눈다.
얼마 전 가게에 처음 들러주신 이후로도 몇 번 찾아주셨는데, 윤슬이와도 사이가 좋아졌다.
이상한 별명까지 생겼다.
"오랜마니에여. 밍구쓰."
- 그러네? 윤슬이 잘 지냈어?
"움! 윤스리는 맨날 잘 지내."
- 오빠가 맛있는 거 많이 해줬어?
"옵바는 뭐를 해두 마시써."
- 그렇지. 오빠가 음식을 참 잘해. 그게 윤슬이한테 복이지.
밍구쓰.
두 사람의 나이는 족히 30살이 넘게 차이나는데, 저런 호칭이 되어버렸다.
처음엔 나도 말리려고 했다.
예의에 어긋나기도 하고 정민구씨가 불쾌할 수도 있었다. 근데 반응은 정반대였다.
오히려 정감 있어서 좋다며 윤슬이한테 더욱 자신을 '밍구쓰'라 불러달라고 그쪽이 요청해오는 게 아닌가.
그쯤 되면 내가 말리기도 애매했다.
애초 이렇게 된 것의 가장 큰 원인은 권수영이다.
일전에 권씨 남매가 이른 점심에 식사를 하러 온 적이 있었다. 때마침 민구씨도 같이 있었는데.
- 우리 반에도 민구라는 애 있는데, 애들이 다 밍구쓰라고 부르는데. 건물주 아저씨도 그런 별명 있어요?
- 수영아... 그건 무슨 질문이야.
옆에서 극도로 어이 없는 표정을 짓는 권수안씨의 표정이 꽤 볼만했다. 본인 여동생이 사교성이 좋은 수준을 넘어 이상한 질문을 던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때 수영이와 민구씨는 처음 보는 사이였다.
그때 민구씨는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가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성격이 좋은 사람인 것은 확실하다.
그 대화를 윤슬이가 그대로 듣고, 밍구쓰라고 부르는 사태까지 이어졌고. 상황은 현재로 귀결된다.
결국 우리 가게 건물주의 호칭은 '밍구쓰'가 되었다.
식당을 하다보니, 자주 오는 손님들끼리도 은근슬쩍 친해져 이런 상황이 종종 보이는 것 같다.
- 오늘 가게 쉬는 날만 아니었으면 주현씨한테 밥 만들어달라고 징징거려보는 건데. 아깝네요.
"만들어드리고는 싶은데. 재료가 없어서 안 될 것 같아요."
- 그러니까요. 매일 식재료가 바닥나는데, 쉬는 날에 남는 게 있을 리가 없지. 아쉽다.
"대신 여유될 때 또 들리세요."
- 그렇게 할게요. 이거 먹어요, 윤슬이랑 같이.
"움? 윤스리두?"
민구씨는 가방에서 초콜렛 한 박스를 꺼낸다.
외제인데, 내 기억으로 벨기에 회사에서 만드는 제품이었던 것 같다. 바다 생물들, 해마나 조개 모양의 초콜렛들이 박스에 고급스럽게 포장되어 있다.
- 오늘 휴일인데 부르는 거라서. 죄송해서 갖고 왔는데. 윤슬이 먹을 거지?
"밍구쓰가 가져와쓰니까 어쩔 쑤 없어여! 윤스리가 안 머그므는 다 썩어버려여."
"아가씨, 침부터 닦고 말씀하실까요?"
"쓰읍-"
윤슬이는 입가를 핥는다.
확실히 고급진 포장 덕분인지 초콜렛의 향이 더욱 달게 느껴진다.
민구씨가 윤슬이한테 초콜렛을 하나 집어주자 덥썩 받아서 반쯤 베어문다.
볼에 손을 살포시 얹고는 만족스럽게 오물오물 초콜렛 시식을 시작한다.
나도 한 입 먹자 민구씨가 입을 연다.
- 먹으면서 들어요. 나쁜 얘기는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요.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 가게 잠시만 쉴 생각 없어요? 여름 휴가 다녀온다 생각하고 3주 정도만.
"갑자기요?"
- 아, 그렇죠. 그렇게 말하면 갑작스럽긴 하겠네요. 다름이 아니라, 주현씨네 가게 있는 공간을 조금 공사하고 싶어서요.
"딱히 문제되는 부분이 있던 것 같진 않은데요. 가스랑 수도 쪽에도 문제 없었는데."
건물주가 이렇게 먼저 말을 꺼내는 경우는 보통 내부 설비나 배관에 문제가 생긴 경우다.
가게에서 일하면서 그런 문제를 체험했던 적은 없다. 화장실이 조금 낡긴 했지만 기능적으로 문제도 없다.
- 어디 문제 생겨서 그런 게 아니라요. 좋은 기회가 생겨서요. 관청이랑 얘기를 좀 해봤는데.
"관청?"
- 가게를 바깥 쪽으로 확장하고 싶어서요. 지금 여기 식당 높이 보면 가게 앞 포장도로 아스팔트 지면이랑 낙차가 꽤 있잖아요? 그래서 작은 계단으로 올라오게끔 만들어놨어요, 제가.
"그렇죠."
- 그런데 그 계단을 허물고 발코니 형으로 목재 바닥으로 해서 베란다 느낌으로 1층만 살짝 확장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요.
"그래서 관청 얘기가 나왔던 거군요."
- 네, 드물게 관청에서 허가를 해주더라고요. 원래 이 앞에 차도랑 인도가 같이 있는 거리라서 법적으로 허용되는 공사 범위가 있는데. 특이하게 저희 상가 앞쪽만 공간이 넓게 구조가 돼있어서, 문제 없다더라고요.
이게 무슨 횡재인가.
가게에 발코니가 확장되면 그곳에 테이블을 둘 수 있다는 얘기다. 어느 정도의 발코니인지는 들어봐야겠지만 3주 공사를 염두에 둔다는 것은 결코 작은 크기는 아닐 것으로 추측된다.
[햇님: 저는 알죠. 저랑 오라버니가 얼마나 힘썼는데. 근데 비밀이에요. 서프라이즈 선물 같은 거거든요.]
햇님이가 서프라이즈 선물이라고 했던 게 기억난다.
뒤에서 오누이가 어느 정도 힘써준 게 아닌가 싶다.
고마운 친구들.
"그래서 공사 기간 동안은 저희가 쉬는 게 더 편할 것 같아서 말씀하시는 거군요?"
- 그렇죠. 가게 안쪽까지 뭘 건드려야 되면 주현씨가 남아서 봐주시는 게 좋긴 한데. 그런 과정은 없다고 공사 업체에서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미안하지만 가게 입장에서 나쁜 얘기는 아닐 테니까, 휴가 가는 셈치고 쉬어주면 안 될까 싶어서요. 어때요?
3주의 휴식이 부담되긴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무조건 이득인 이야기다.
그리고 어차피 이번 여름엔 윤슬이랑 한 번 강릉에 들릴 예정이긴 했다. 조금 휴가를 길게 다녀오는 셈치면 나쁠 것 없을지도.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근데 당장 오늘 내일부터 공사 시작한다고 하시면, 그건 조금 어려울 것 같은데. 찾아주시는 다른 손님들도 계시는데, 갑자기 문 닫혀있으면 곤란하실 것 같아서요."
- 그럼요. 최대한 주현씨랑 일정 조정해서 진행할게요.
"그렇게 해주시면 저희도 좋을 것 같아요. 오히려 감사하죠, 그렇게 공간 늘린다고 하시면."
- 발코니 쪽 늘리면 주현씨네 가게에서 편한대로 쓰셔도 좋아요. 어차피 그렇게 활용하려고 늘리는 거니까.
여기까진 우선 좋게 마무리되었지만 아직 한 가지 문제가 남아있다.
공간을 확장한다고 한다면 이어지는 얘기는 월세다.
현재 활용하고 있는 공간 대비 월세는 저렴한 편이다. 그런데 이걸 확장하여 사용하게 해주신다고 하는 거니까, 심지어 건물주가 금액을 부담해서 공간을 확장하겠다고 하는 거니까.
어느 정도 월세를 올린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마음은 아프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 주현씨, 지금 월세 올라갈 것 같아서 걱정 중이죠?
"솔직히 그렇긴 해요. 아무래도 자영업자다보니까, 이런 거 일일이 따지게 되더라고요."
- 그게 현명한 거죠. 아직 젊은데, 이해타산 잘 따지는 게 똑부러져서 더 좋아보여요.
"하하, 워낙 어렸을 때부터 요식업 쪽에서 일하다보니까. 이런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게 돼버렸네요."
그 말을 듣곤 민구씨는 환하게 웃으며 단언한다.
-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월세 많이 안 올릴게요. 딱 3만원만 더 받을게요.
"3만원이요?"
대체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걸까.
눈물이 날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