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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굴러들어옴-78화 (78/200)

78화: 휴가는 내 맘대로 가는 게 아니다(3)

월세를 3만원만 올리겠다는 말에 놀라는 송주현.

무리도 아니다.

식당에 이용할 수 있는 평수가 몇 평 정도 더 늘어나는 건데, 3만원 월세 올리는 것으로 퉁치는 거라면 식당 주인 쪽이 훨씬 남는 장사다.

정민구가 이런 선택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일전에 진호연과 가졌던 술자리에서 어느 이야기를 들었던 덕이다.

친척인데 마침 거주지가 가까우니 두 사람이 술자리를 갖는 것은 연중에 몇 번쯤은 있는 일이다.

"형님, 얼마 전에 고향 갔다오셨다면서요?"

"그랬지. 알아볼 게 좀 있어서."

"본가 다녀오신 게 아니라요?"

"본가도 들리긴 했지. 근데 거기 말고도 여러 모로 갈 곳이 있어서."

"어디요?"

"묘지, 성묘 다녀왔다."

고향까지 성묘를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정민구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진호연은 바쁘다는 이유로 명절을 제외하고는 고향에 잘 올라가지 않는다. 조부모의 제사에는 빠짐없이 참여하지만 굳이 따로 시간을 내어 갈만한 인간은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가족의 성묘일 가능성은 적었다.

마침 정민구가 의아하단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진호연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입을 연다.

"예전에 우리 같이 살던 옥탑방 집주인 할머니 있지? 그분 성묘 다녀온 거야."

"아... 그분이요? 되게 뜬금 없네요. 저희랑 같은 동네 출신이시구나."

"그치. 뜬금 없지."

소주 한 잔을 거칠게 입에 털어넣으며 진호연은 그날의 일을 고백한다. 굉장히 심적으로 내몰렸을 때, 집주인 할머니가 자신을 도와줬다는 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한다.

진호연은 그 연탄 사건에 대해 정민구에게, 아니 가족들에게 여태껏 함구하고 있었다.

이미 지난 일이라고는 하나 괜히 마음쓰게 하기 싫기도 하고, 잔소리 듣는 것도 싫으니까. 오히려 가까운 사이이기에 말하지 못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지금에 와서야 느지막이 정민구에게 털어놓는다. 지난 번 성묫길에 일어났던 기적적인 경험 덕분에 응어리졌던 마음이 한결 풀어졌기 때문이다.

그때 들었던 집주인 할머니의 목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울리듯 선명하게 기억한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저는 형님이 그때 그런 줄도 모르고, 얹혀 살게 됐으니."

"아니, 너가 옥탑방에서 같이 살기 시작한 건 그때보다 훨씬 나중 일이니까 관계 없어."

두 사람은 머쓱하게 웃으며 술 잔을 부딪힌다.

술자리에서 마음에 닿는 감정은 술잔으로 깨뜨리는 것이다.

탁-

경쾌하게 울리는 술잔의 타음이 어색한 공기를 누그러뜨린다.

"그런데 그 할머니랑 형님이랑 그렇게 관계가 친밀했던 것 같진 않은데요, 제 기억엔."

"오히려 서먹했지."

"그런데도 어떻게 어디에 묻히셨는지, 위치까지 아셨네요. 연락은 쭉 주고받으셨나봐요?"

"아니. 그것도 엄청 최근에 운 좋게 알게 된 거야. 오랫동안 찾아다니긴 했는데. 남의 집 어르신이 어느 땅에 묻혔는지 알긴 어렵잖아."

"그러니까요. 그게 조금 신기하네요."

"더 신기한 게 뭔 줄 아냐?"

"뭔데 그래요."

"그 무덤 위치 알려준 게 주현이야. 너희 상가 1층에서 일하는, 그 젊은 애."

"주현씨가 그걸 알려줬다고요? 무슨 재주로요?"

정민구는 여러 모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덤의 위치를 알아봤다는 것은 적어도 진호연과 그 할머니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는 얘기다. 가족보다 먼저 털어놓은 것이다.

그 할머니와 송주현 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진호연이 그에게 보이는 신뢰가 여간 두텁지 않다는 걸 실감했다.

"글쎄 말이야! 그건 내가 묻고 싶어. 근데 뭐 걔가 호의로 알려준 건데 캐묻기도 좀 그렇고. 그냥 그러련히 하는 거지."

"흐음...."

진호연의 말이 맞았다.

사실 송주현이 어떤 과정을 통해 그 할머니의 묘를 알아냈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다만 본인 일이 아닌데도 선뜻 나서서 찾아준 게 고마울 뿐이다.

"그래서 고향 내려가서 알게 된 게 하나 있는데. 그 할머니가 혼자 사셨잖아?"

"네, 1층에서 혼자만 사셨죠."

"그런데 원래는 가족이 있었다고 하시더라고. 고향에서 살 때까지만 해도. 이장님이 말해주더라. 이장님이랑 이웃 사이였대 원래."

"아, 그렇구나. 그럼 가족분들이랑은 어쩌다 떨어져 살게 된 거래요?"

"돌아가셨대. 할머니 빼고."

"...."

"그것도 한겨울에 연탄 불 사고로."

골머리가 아파오는 얘기다.

너무 멀지도 않은 과거에 심심하면 한 번쯤 있던 사고다. 그 시절엔 보일러란 게 잘 되어있지 않아 연탄불에 일가가 의지해야만 했는데.

부주의나 불행 탓에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었다.

그런 사고 속에서 일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게 그 집주인 할머니다.

그렇다면 그날.

진호연이 연탄을 방에 피워두고 세상과 이별하려 결심했던 날.

그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할머니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 인간은 이 지구 상에서 극히 드물 것이다.

어떤 심정으로 난리통에서 젊은 진호연을 끌어냈으며, 꾸짖었으며, 병원보다 먼저 고깃집으로 데려갔는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입에 담는 것조차 불경스럽게 느껴질 지경이다.

정민구와 진호연은 다시 한 번 잔을 부딪히고 소주를 입에 털어넣는다.

"크흐... 민구야."

"네."

"주현이 잘 좀 챙겨줘라. 너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여러 모로 주현이 덕을 많이 봤다고 생각하거든.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지만 그놈한테 뭐라도 베풀어놓으면 배로 부풀어서 되돌아오더라고.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주현씨가 사람이 괜찮긴 하죠. 밥도 맛있게 하고. 성격도 좋고."

"정말 괜찮은 놈이야. 그러니까 민구야. 뭐 네가 베풀 수 있는 거 있으면 걔 좀 도와줘, 나 대신이라도.

내가 요즘 가게가 바빠서 자주 못 가서, 챙겨주고 싶은데도 그러기가 힘들더라. 맛있는 거라도 사주려고 했는데, 시간이 도저히 안 되네."

"기회가 되면 그렇게 하죠."

"고맙다."

그리고 그 기회는 머지 않아 찾아왔다.

**

그 술자리에서 오고갔던 얘기를 민구씨는 차분하게 들려주신다.

내 칭찬을 하도 많이 해주시는 탓에 낯이 뜨거워졌다. 그 형님은 왜 내가 없는 자리에서까지 내 얘기를 그리도 좋게 해주시는 것인가.

정말 못 말린다.

-  아무튼 그래서 월세는 쪼금만 올리기로 했어요. 거의 명목 상 올리는 정도죠. 나머지 제가 못 버는 값들은... 그냥 호연 형님한테 용돈이라도 얹어달라고 하죠 뭐.

"하하, 여기까지 계산하고 제가 그 주소 찾아드린 건 아닌데. 운이 좋네요."

-  운이 좋긴요. 다 주현씨가 평소에 주변 사람들한테 잘 하니까 복이 돌아오는 거죠.

"그런가요."

쑥쓰러움을 숨기려 머쓱하게 웃어넘기는데 윤슬이가 내 반팔 소매를 쿡쿡 잡아댕긴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어느새 초콜렛을 5개 넘게 먹어버린 동생이 천진하게 웃고 있다.

내 입가에 초콜릿을 들이민다.

달콤한 향기가 콧구멍을 쑤신다.

"옵바가 윤스리한테두 잘 해주니깐 윤스리두 이거 주께."

"윤슬이가 오빠 먹여주는 거야?"

"옵바한테만 먹여주는 거야. 따른 사람들은 안 대."

5세의 초콜렛 직접 먹여주기는 아무래도 레어 이벤트인 것 같다. 냉큼 받아먹는다.

달다.

새로운 단 맛이다.

초콜렛도 달지만, 지금 이 상황이 너무도 반가워서 더 달게 느껴지는 것 같다.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내가 먼저 선의를 베풀었기에 돌아온 대가였다.

기브앤테이크가 훈훈하게 이뤄진 경우다.

이럴 때마다 아무리 '각박하다.' '흉흉하다.'란 수식이 붙는 요즘 세상도 아직 살아갈만하구나 싶다.

-  그럼 가게 확장 공사는 동의하시는 걸로 알아도 될까요?

"네, 오히려 부탁 드리겠습니다."

-  좋네요.

민구씨는 가볍게 악수를 청했고, 나는 받아들었다.

윤슬이는 부러웠는지, 아니면 자기만 따돌린다고 생각했는지 초콜렛을 먹던 손으로 그 위에 그대로 얹어버렸다.

민구씨 손에 그대로 진득거리는 초콜렛이 묻어버렸다.

-  윽.

"아앗... 미아내여 밍구쓰..."

자기 실수를 눈치챈 윤슬이가 빠르게 사과한다.

양손 검지를 가운데로 모아 비비 꼰다.

곁눈질하며 민구씨를 바라보는 게 눈치 보는 강아지 같다.

-  아니, 괜찮아! 한 번 더 묻힐래?

윤슬이가 너무 귀여운 나머지 밍구쓰가 고장나버렸다. 초콜렛이 안 묻은 반대 손을 내밀며 이상한 소리를 시전한다.

결국 공사를 원하는 날짜까지 합의했다.

업체 일정까지 고려해야겠지만 그리 많이 차이나진 않을 거라고 건물주가 못 박았다.

그대로 민구씨는 돌아갔고, 나와 윤슬이는 남았다.

한 가지 공지사항을 쓰기 위해.

[....까지 건물 공사 관계로 오누이 식당 휴업합니다. 더 맛있는 음식과 따듯한 서비스로 찾아뵙겠습니다. 8월에 다시 만나요.]

"이 정도면 되려나?"

공사 기간까지 명시했으니, 의도한 바는 전달 되겠지.

공지사항은 가게 앞쪽에 늘 내려두는 앉은뱅이 칠판에 해두었다. 이렇게 써둔 채로 가게 안쪽, 문 바로 앞에 놔두면 밖에서 읽기 어렵진 않을 듯하다.

어차피 저때 방문하면 공사 중인 것도 바로 눈에 보일 테니 가게가 무슨 이유로 휴무하는지는 명확할 거다.

"움... 너무 비어써."

윤슬이는 내가 적어둔 공지사항 옆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비어보인다고 생각해서 남은 공간을 채우고 싶어한다.

크레파스처럼 펜을 쥐고 동물을 그리기 시작한다.

명확히 종을 식별하긴 어려우나, 오빠로서 가지게 된 제6의 감각을 바탕으로 추측컨대.

"지금 루이 그리는 거지?"

"오오...! 옵바가 바로 맞춰써! 역씨 옵바야."

루이에게 확립된 자아가 있다면 이걸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선이 삐뚤빼뚤하기에 얼굴이 뒤틀리고 일그러진다.

하지만 5세의 그림이란 이런 느낌이 대부분이다.

"다음주부터 가게 닫으니까, 그전에 루이랑도 한 번 만나야 되는데. 그치?"

"마저. 루이가 빨리 와야지대 안 그러므는 너무 오래 못 보자나여. 그러믄 윤슬이 속쌍해."

5세가 똑땅하면 곤란하다.

그전에 한 번 권씨 남매를 부르던지 해야겠다.

물론 부르지 않아도 들릴 가능성이 있지만 아무래도 수안씨는 수영이에 비해 행동을 조심하고 있다.

차라리 불러주는 편이 그쪽에서도 좋아하겠지.

"오빠랑 같이 여기 칠판 빈 구석 조금만 더 채우고, 집 가서 맛있는 거 먹을까?"

"움! 그게 조켔다. 윤스리는 옵바 그릴래."

"그럼 오빠는 윤슬이 그릴게."

....

시간이 흘렀다.

남매가 서로를 그린 그림이 완성되었다.

두 사람의 그림을 비교해보았다.

둘 다 지독하게 못 그렸다.

서로의 특징이 전혀 잡히지 않은 그림이 나란히 공간을 채우자 오히려 하이퍼리얼리즘 계열, 현대미술 같아보이기도 한다.

좋게 포장하자면 그렇고, 나쁘게 말하면 낙서다.

"옵바랑 윤스리 그림이 똑가태. 그래서 조운 거 같애 윤스리는!"

"윤슬이는 마음에 든다는 말이야?"

"그렇다구 볼 쑤 이찌!"

다행히 5세는 대만족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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