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더 멀리 있는(1)
가게 확장 공사로 인한 휴가 기간을 공지한 이후.
손님들이 더욱 몰리게 되었다.
자주 들러주시던 손님들이 3주 동안 우리 식당 음식을 못 먹게 된다고 생각하니 아쉬웠나보다.
저녁보다는 주로 점심에 방문하는 손님들이 거의 매일 같이 와주고 계신다.
늘 메뉴가 바뀌니까 딱히 메뉴 고민할 필요가 없다며, 자주 와도 무리가 없다고 하신다.
- 우리 윤슬이 3주 동안이나 못 봐서 어떻게 하냐.
- 그니깐... 회사 다니는 즐거움이 하나 없어졌네. 사실 나 점심시간에 이 식당 와서 윤슬이 보는 게 삶의 낙이었는데.
이런 푸념을 늘어놓는 손님들도 있었다.
식사 내어드리기 전까지 죽을상이었다가 메뉴를 올려드리니 만족하면서 드시고 회사로 복귀했다.
그리고 오늘 브레이크 타임엔 동생이 고대하던 루이와 권씨 남매가 오기로 했다.
꼭 식사가 아니더라도 간단한 디저트라도 내어드릴 테니 얼굴이라도 비춰달라고 연락해두었더니
[권수영: 시험도 끝났으니까 무조건 감! 지아랑 울 오빠 데리고 갈게요!!]
이렇게 문자가 되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윤슬이는 루이가 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가게 문 앞에 주차된 붕붕이에 걸터앉아 학수고대 중이다.
"움... 루이..."
아까는 다른 리트리버 강아지가 가게 근처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가까이서 보니 다른 녀석이었다.
파트너도 수안씨가 아닌, 다른 아저씨였다.
이윽고 저녁 장사를 위해 밑작업을 끝낼 때쯤이 되어서야 권씨 남매와 지아가 찾아왔다.
루이도 함께.
"우아! 루이당."
뭉-!
루이도 윤슬이가 반가운지 가게 앞에 도착하자마자 말랑한 볼을 핥으며 반긴다.
- 맛있는 거 먹으러 우리가 왔습니다!
- 왔습니다!
J 고등학교 여고생 2인방은 평소보다 한층 더 활기가 있어보인다. 기말고사가 드디어 끝난 덕이다.
- 윤슬아, 언니들도 왔는데. 루이만 안아줄 거야?
권수영이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윤슬이를 향해 양팔을 넓게 벌렸으나.
"윤스리는 옵바랑 루이만 안아조."
대차게 거절당했다.
지아와 수영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바 테이블 쪽에 자리를 잡고, 수안씨도 그 옆에 앉았다.
세 사람이 올 때를 계산해 준비해둔 빙수를 꺼내어 내려다준다.
여름철에 빙수만한 게 없다.
- 와, 이거 무슨 빙수에요?
먹는 것에 진심인 지아가 감탄한다.
"위에 채썰어서 올라간 건 망고. 그리고 빙수 얼음에는 연유랑 우유 섞어서 부드러울 거야 한 번 먹어봐."
- 아니, 사장님은 이런 요리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 진짜 볼 때마다 신기하네.
"소량으로 만드는 거면 빙수 기계 없이도 할 수 있어. 나중에 알려줄게."
윤슬이 간식을 따로 사주는 것도 좋지만 내가 만들어먹이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최근 빙수 만드는 연습을 짬짬이 하는 중이다.
지금 이렇게 나눠주는 것도 연습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다. 권씨 남매랑 지아한테 먹여보고 반응을 한 번 확인해볼 생각이다.
예상대로 세 사람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빙수를 즐긴다. 여름철 날씨 버프를 받은 덕에 더욱 맛있을 것이다.
- 주현 오빠, 이거 연유 섞어서 그런지 엄청 맛이 리치하다? 거의 파는 느낌인데.
"괜찮지? 많이 달진 않아?"
- 이런 건 좀 달아줘야지.
맞는 말이다.
더위로 스트레스 받을 때 당분만큼 정신력을 지지해주는 게 또 있을까.
- 사장님 이거 메뉴로 팔아버려요 그냥! 제육이나 가지 튀김 먹고 입가심하기 딱이겠다.
"대량으로 만들기는 힘들다니까."
- 그럼 한정수량으로라도?
"너무 장사치 같지 않은가."
- 맛있으면 됐지. 아무도 뭐라 안 할 걸요?
그건 지아의 말이 맞다.
조금 장사속이 보여도 맛있으면 흔쾌히 수긍하는 게 먹스터들의 생리다.
넉넉하게 담아주었는데도 어느새 수영이의 그릇은 텅 비어있다.
더운 날씨를 견딜 수 없었는지 아니면 빙수가 지나치게 입맛에 맞았는지는 모르겠다.
음식이 떨어지니 수영이의 관심은 저절로 다른 데로 향한다.
- 주현 오빠, 저거 그림에 루이랑 윤슬이 아니야?
"응 맞아. 우리 가게 단골 손님 중에 그림 잘 그리는 분이 한 명 있는데. 그분이 공짜로 그려주셨어."
- 아아... 되게 그림이 따듯하다.
수영이는 잠시간 넋 놓고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한다. 그것을 그린 화가가 제 옆에 앉아있는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나는 조용히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대며 수안씨에게 윙크한다.
눈이 먼 수안씨는 그 모습을 확실히 '인지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 윤슬아! 이리 와봐.
"움?"
루이랑 놀던 윤슬이가 수영이 쪽으로 다가온다.
- 언니가 저거 그림 보고 감명을 좀 받았어. 그래서 너 한 번 그려보고 싶은데, 모델 좀 해주라.
"모델?"
- 응, 루이랑 같이 성북천 앞쪽 나가서 놀고 있으면. 언니가 그거 보고 그려볼게 한 번.
"오오...! 루이랑 가치?"
- 어때?
"갠차눈 거 가태."
내심 좋으면서도 새침하게 답하는 윤슬이.
나를 '주현 오빠'라고 부르는 터라 수영이에겐 가끔 삐죽거릴 때가 있다.
- 오빠, 나 루이랑 애들이랑 같이 성북천 앞에 잠깐만 나갔다올게.
- 그래 다녀와. 나 주현씨랑 놀고 있으면 돼.
- 응! 주현 오빠, 우리 오빠랑 놀아주고 있어요! 금방 올게.
"그래, 다녀와. 윤슬이 좀 잘 돌봐줘, 지아야."
- 저만 믿으세요.
- 엥? 왜 송지아한테 윤슬이를 맡겨? 나한테는 안 맡기고.
"너보단 솔직히 지아가 믿을 만하지. 애 보는 건."
- 압도적 충격.
세 사람과 한 마리는 그렇게 가게를 나선다.
윤슬이가 걱정되긴 하지만 지아와 수영이라면 다치지 않게 잘 보살펴줄 것이다.
그리고 성북천이라면 바로 가게 앞이니,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겠지.
"요즘 생활은 어때요?"
- 마법 같죠. 마법사님 덕분에.
세 사람이 나가준 덕에 비밀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수안씨의 목에는 루이의 얼굴을 본따서 만든 펜던트가 걸려있다. 저 펜던트에 내가 약간의 마법을 부려두었다. 그 덕에 맹인이던 수안씨는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비밀로 하기로 했다.
여러 모로 문제가 커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그런 사실이 가족들에게 알려지면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그림은 계속 그리고 있어요?"
- 네, 그게 좀 문제에요.
"옛날만큼 잘 안 그려지나보죠? 오랜만에 하다보니까 손이 익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긴 할 건데... 그래도 전 저기 걸린 그림 보면서 되게 기분 좋던데."
- 아니 정반대에요. 오히려 너무 잘 그려져서 문제에요.
"응?"
- 오히려 아무 것도 안 보일 때 느꼈던 것들이 그림에 입혀져서 뭔가 새로운 것들이 계속 손끝에서 퍼져나가는 느낌이 들어요.
"드라마틱한 그림작가 한 명의 탄생인가요?"
- 아뇨. 일단 마법사랑 약속했잖아요. 앞이 보이게 된 건 비밀로 하기로. 공식적으로는 맹인인데 어떻게 그림을 팔겠어요.
"그건... 조금 아쉽네요."
그 말을 듣고 그냥 밝혀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곤란하다.
펜던트를 자신의 새로운 눈으로 사용 중이라는 사실을 세간에 밝히게 되면 큰 소동이 될 게 뻔하다.
- 그래도 그림으로 먹고 살 길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에요. 요즘 세상이 워낙 발전해서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걸로 돈 벌기도 가능하더라고요.
"아아... 소설이나 웹툰 같은 데 쓰이는 그림 말하는 거죠?"
- 네, 그래서 그런 쪽으로 한 번 도전해보려고요. 가족들한테는 몰래.
"오히려 그쪽이 문제겠네요."
가족들이라면 한 지붕 아래서 생활할 테니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려면 고생 깨나 할 것이다.
- 그래도 괜찮아요. 빛을 되찾게 됐으니, 뭐라도 도전해보고 싶은 기분이거든요. 약속은 꼭 지킬게요. 마법처럼 새로운 눈도 얻게 됐는데, 그거 하나 숨기는 게 뭐 그리 어렵겠어요?
"그래주면 다행이구요. 꼭 잘 될 거예요."
잘 되길 바랄게요.
보다 잘 될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 고맙습니다.
"근데 그런 일러스트레이트 장비 같은 것도 꽤 비싸지 않아요?"
- 이전에 장애인 근무 시설에서 일할 때 벌어둔 돈이 있어서 그걸로 잘 샀는데... 받아서 방까지 옮기는 게 문제죠.
"이미 사셨구나. 그럼 혹시 저 나중에 그림 하나만 그려주면 안 돼요? 돈은 낼게요."
- 공짜로 해드려야죠. 제 은인인데. 무슨 그림이 필요한데요? 맥락 상 일러스트?
"네, 저희 가게 검색하면 나오는 정보란에 썸네일처럼 등록해두고 싶은데. 그런 것도 따로 일러스트레이터들한테 요청을 해야되더라고요. 근데 그 가격이 꽤 비싸서. 솔직히 부담되거든요."
투자하려면 충분히 투자할 수 있는 금액이다.
하지만 이 세상엔 '지인 찬스'라는 개념이 있다. 이럴 때 절약해야지, 언제하겠는가.
그리고 권수안씨의 그림을 보아하니 우리 가게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일러스트를 그려주실 것만 같다.
- 그런 거면 나중에 조금 더 얘기해보죠. 대강 생각하는 디자인 같은 거 있으면 저한테 메일로 보내줘요. 짬짬이 일러스트 연습도 할 겸, 제가 공짜로 그려드릴게요.
"고맙습니다!"
- 고맙긴요. 제가 더 고맙죠.
반쯤 녹아서 흐물거리는 망고우유빙수를 입에 떠넣으며 말을 잇는 수안씨.
- 요즘은 그림 그리는 거랑 수영이 보는 맛에 정말로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아... 생각해보니까, 수안씨는 동생 모습을 되게 오랜만에 본 거겠구나."
- 그쵸, 그날 중학교 때 수술하고 나서 앞이 안 보였으니까. 그때부터 몰랐어요. 우리 동생이 얼만큼 성숙하게 자랐는지. 대충 키는 알죠. 얼굴형도 만져보면 느껴지고. 그래도 직접 보는 거랑은 차이가 있더라고요. 너무... 너무 이쁘게 자라줘서 고맙더라고요.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빠르게 훔치는 수안씨.
감정이 복받친 모양이다.
"우리 동생도 무럭무럭 자라나줬으면 좋겠는데요."
- 그러게요. 윤슬이도 자라나면 수영이 못지 않게 미인 될 텐데.
"응? 잠시만요. 뭐라구요?"
- 수영이만큼 이쁘게 자랄 것 같은데... 요.
"아니, 잠시, 잠시만요. 물론 수영이도 매력적인 친구지만 저희 윤슬이는 이 우주에서 제일로 귀엽거든요? 나중에 커서도 연예인들 뺨 후려치고 다닐 예정이거든요?"
- 아아...! 저희 수영이는 지금 연예인들 뺨 현재 진행형으로 후려치는 중인데요?
"수영이는 한국 연예인들 뺨만 후려치겠죠. 저희 윤슬이는 지구 상의 모든 연예인들 뺨 후려칠 거거든요?"
- 아뇨, 수영이는 온 우주의 연예인들 뺨 후려치는데요? 암튼 제 동생이 최고거든요.
"놉. 인정할 수 없다. 윤슬이가 최곱니다."
- 수영이가 최곱니다.
오빠 연대.
분단의 위기를 맞았다.
여동생들은 본의 아니게 수십만 명의 뺨을 후려치고 있다. 타의적 폭력이란 이런 것이다.
언쟁은 성북천 다녀온 세 사람이 올 때까지 지속되었다.
어느새 수영이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되었다.
그리고 윤슬이는 우주의 창조신이 되었다.
- 이 오빠들은 대체 뭐하고 있는 거냐?
"윤스리두 몰르게써."
뒤늦게 들어온 세 사람이 사태를 파악하기까진 시간이 제법 걸렸고, 수영이는 수안씨에게 응징을 가했다.
겨드랑이를 푹푹! 장난스럽게 찔렀다.
- 으악! 나 간지럼탄다고...
- 아니까 찌르지, 이 화상아.
남매들은 화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