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더 멀리 있는(2)
시간이 되었다.
오누이 식당은 3주 간의 휴식에 돌입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그동안 계획된 것은 하나뿐이다.
"윤슬이, 오랜만에 할머니 보러 가려니까 좋지?"
"함모니!"
할머니란 말을 듣자마자 만세를 부르는 윤슬이.
남매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기차표를 끊는 것이다.
미리 티켓을 예약해두지 않으면, 입석으로 가거나 버스를 타야될 수도 있다. 이왕 할머니 뵈러가는 길이고, 여행도 겸한 것이니 기차를 타고 싶은 마음이 있다.
"윤슬이 바다 가봤어?"
"바다! 물꼬기 이써."
"할머니랑 가봤나보네."
"우움... 함모니랑은 근데 앞에만 가봐써. 모래만 마니 이써서 발 뜨거워써."
이전에 갔던 경험을 되살리는 듯 눈을 좌우로 굴리린다. 얘기를 들어보니 바다에서 수영을 하진 않고, 모래사장까지만 나간 듯하다.
그건 아쉽게 됐다.
"그럼 이번엔 오빠랑 같이 바다에서 같이 놀면 되겠네?"
"옵바랑 바다? 물꼬기 잡어머거?"
"물고기를 직접 잡진 않지만 생선 요리도 먹어야지."
물고기 먹는다는 소릴 들으니까 두 손을 머리 위로 모아 헤엄치는 물고기를 흉내낸다.
가게에선 두목님 모드지만 집에서는 영락없이 꼬맹이다.
"그러믄 함모니 집까지눈 어뜨케 가여?"
"기차 타고 가려구요."
"오오... 근데 윤스리 궁금한 거 생겨써."
"뭔데?"
"티비에 나오눈 그 엄청엄청 빠른 자동차눈 못 타?"
"레이싱 카?"
"웅!"
그건 어떻게 생각해도 무리였다.
언젠가 윤슬이랑 그런 대화를 주고 받았던 것 같다.
경주용 차를 타고 열심히 엑셀을 밟으면 1시간만에 강릉에 도착할 수 있다고.
아마 그 기억이 떠올라서 묻는 게 아닐까.
"윤슬아 그건 오빠가 좀 더 돈을 많이 벌어야 탈 수 있을 것 같아."
"움... 얼마나 마니마니?"
"윤슬이가 오빠만큼 커질 때쯤엔 시도 정돈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조차도 꽤 터프한 꿈이다.
"힝, 윤스리는 아직뚜 애기인데..."
차를 못 타는 것보다 자신이 5세라는 것에 실망한 듯했다. 그러나 이내 기운을 차리고는 주먹을 불끈 쥔다.
"그러문 윤스리가 조은 생각이 이써."
"어떤 좋은 생각인지 한 번 알려줘보세요."
"이짜나여, 윤스리가 마니마니 돈 벌어서 옵바한테 사주므는 대자나. 그러믄 탈 쑤가 이써."
"정말 그렇네. 윤슬이는 돈 많이 벌면 오빠한테 자동차 사줄 거야?"
"응! 그리구 마싯는 것두 마니 사주고, 옵바랑 오래오래 행보카게 살 거야."
"그럼 되겠다. 대신 당장 사기는 어려우니까 이번엔 기차 타고 갈까? 기차 타면 재밌는 것도 많아."
"모가 재미써?"
"그거는 기차 타면 알려드리죠."
"우우... 궁금하당."
**
8월이 되었다.
기차를 예약해둔 날.
윤슬이와 짐을 챙겨 이른 오전에 집을 나선다.
이왕 여행 가는 김에 캐리어까지 사서 윤슬이랑 내 짐을 챙겼다.
어젯밤에 짐을 챙기는데 이 가방이 마음에 든다며 그 안에 몰래 탑승하면 조금 악당처럼 보이지 않느냐며 내게 물었다.
잠입요원 같다고 생각한 것 같다. 5세는 창의적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머니 댁에 가는데 짐을 챙길 수 없다며 만류했고, 윤슬이는 약간 섭섭해보였다.
한 번쯤 캐리어 안에 넣어서 사진을 찍어줘야겠다.
그 기세에 이어 여행을 떠나는 오늘도 내내 들떠있다. 덕분에 나도 경쾌한 마음가짐이다.
"옵바, 혹씨 기차에서 윤스리랑 옵바를 노리는 악땅은 업겠찌? 그러믄 위험한데."
"글쎄 대신 그렇게 하면 윤슬이가 오빠 지켜주면 되니까 괜찮잖아."
"그거눈 맞찌!"
청량리역에 도착해 기차 시간을 기다리는 중이다.
널찍한 기차역엔 사람이 북적거리고, 한쪽엔 계단형으로 구현된 의자가 늘어서있다.
그곳에 앉아 검은색 전광판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초록색과 노란색 글씨가 기차 시간을 난잡하게 표현해뒀는데, 가독성이 떨어진다.
오래된 물건이라 그런 것 같다.
기차가 언제 들어오는지 확인하려고 계속 전광판을 보고 있었는데, 윤슬이가 심통이 나버렸다.
"옵바 윤스리한테두 관심을 조야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다.
"어이구, 오빠가 관심을 안 줬어?"
"웅! 그러믄 서운하지."
"미안해요. 기차 오는 시간 확인하느라 그랬어. 우리 못 타고 지나가면 할머니 보러 가는 시간 늦어지잖아."
"흥, 아라써. 용서해주께."
용서해준다면서 엉덩이를 내쪽으로 바싹 붙여앉는다.
그러면서도 내 반대쪽을 쳐다보곤 자그마한 손만 내 무릎 위에 떡하니 올려둔다.
볼은 여전히 빵빵하다.
이 생물 귀엽다.
"그럼 오빠가 윤슬이 서운하게 했으니까, 저기 편의점 가서 맛있는 거 사자."
"마싯는 거... 몬데여."
"훈제 계란이죠."
"훈제? 그게 모야."
"한 번 가서 확인해봅시다, 아가씨."
윤슬이랑 손을 잡고 역사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한다.
전광판으로 확인해보니, 아직 기차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약간 남아있다.
강릉까진 시간이 적잖이 걸리니까, 물이나 간식들을 넉넉히 챙겨두면 좋다.
편의점 안쪽으로 들어오자 요란한 벨이 울린다.
띵동띵동!
문이 열릴 때마다 나는 소리인 것 같다.
역사 안에 있는 편의점이라서 간식 코너가 다른 데보다 눈에 잘 띤다.
그곳으로 직행.
이미 구매할 품목은 정해져있다.
"윤슬이, 초콜렛 하나 골라."
"움!"
초콜렛 소믈리에, 약칭 초믈리에인 5세를 들어올려 초콜렛이 종류별로 갖추어진 선반을 보여준다.
초믈리에의 무서운 눈초리가 한쪽에 꽂혔다.
오늘의 픽은?
"이게 마음에 들었구나."
"이거 음청 마시써... 무시할 쑤 없는 마시야."
종종 윤슬이가 접했던 금박지로 둘러싸인 초콜렛이다. 견과류가 알알이 박혀있어 식감까지 챙긴, 그 녀석. 평소에 집에 잘 사두진 않지만 여행 갈 때쯤은 나쁘지 않을지도.
과감히 두 세트 챙긴다. 윤슬이는 만족스럽게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발걸음을 옮겨 훈제 계란도 한 줄 집었다.
그랬더니 윤슬이가 깜짝 놀래서 훈제 계란을 집은 내 손을 덥석 잡는다.
"옵바! 이거눈 안 대!"
"으, 응? 왜 안 되는데."
"바바! 윤스리가 발견해써. 이거 껍질 바바."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훈제 계란의 겉껍질을 가리킨다.
"이거 다 타써! 머그믄 안대. 뉴쓰에서 바써. 탄 거 먹으므는 병 걸려!"
뭔가 대단한 걸 말했단 듯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똥배를 내밀곤 턱을 치켜세운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윤슬이가 그런 것도 아네? 근데 괜찮아요. 이건 원래 이렇게 생긴 거야."
"움? 이거눈 갠차나?"
"응 이건 원래 살짝 까만 계란이야."
"앗... 몰라따. 미안함미다..."
정중하게 배꼽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이는 윤슬이.
"괜찮습니다."
나도 따라서 맞절해주었다.
편의점 알바생이 흘끗 보고선 피식- 하고 웃는다.
간식을 구매한 뒤 곧바로 승강장으로 향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고, 좌석을 찾아 앉는다.
윤슬이는 경치를 즐기면서 가라고 창가 쪽으로 앉게 해주었다.
창가에 앉아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지켜보는 것도 기차 여행의 묘미다.
그러나 기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다.
"옵바..."
"응? 왜 그래?"
"윤스리 바깥이 안 보여."
등받이에 기댄 채로 고개를 슥슥 돌리며 창밖을 보려하지만 짧은 신장 때문에 각도가 안 나오는 것 같다.
등받이에서 등을 때면 문제가 없지만 지금은 초콜렛 때문에 테이블을 꺼내둔 상황. 그 상태에선 자유롭게 움직이긴 어렵다.
"오빠 테이블 쪽으로 초콜렛 옮겨. 그리고 윤슬이 쪽 테이블 접으면 창밖 볼 수 있잖아."
"움..."
내 말 뜻은 이해한 것 같았지만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듯 작게 신음하다가 나를 똘망하게 바라본다.
"윤스리는 옵바 무릎에 앉으구 싶다."
원래 그게 목적이었을지도.
내 눈치를 슬슬 본다.
위험하진 않을까 잠깐 고민하다가.
"그럼 만약에 기차 직원분이 오셔서 안 된다고 하면 다시 오빠 옆자리에 앉을 거야. 그래도 괜찮지?"
"그러믄 대게써!"
무릎에 앉히자 그제야 만족스럽게 발을 살살 구르며 바깥 풍경을 만끽한다.
이렇게 하면 나도 창가 쪽에 앉을 수 있어서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또 빈 자리에 짐과 간식을 놔둘 수 있어서 이게 더 편한 것 같기도 했다.
우리 반대편 열에 앉아있던 커플이 우리 남매를 보고 슬며시 웃음짓는다.
- 저기 남매끼리 왔나봐. 대화가 귀엽지 않아?
- 그니깐... 오빠가 동생 엄청 챙긴다. 누나도 나 좀 챙겨봐.
- 알았어, 더 잘할게.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애써 안 들리는 척했다.
기차 내부에서 조는 사람들이 많아 그 커플의 목소리가 크지 않았는데도 귀에 닿았다.
초콜렛을 입에 까넣다가 윤슬이의 시선이 그을린 훈제 계란 쪽으로 향한다.
기차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다.
"옵바, 저거 마시써?"
"그냥 계란이랑은 다르지. 까줄까?"
"움... 윤스리가 해보께."
손에 계란을 받아든다.
그때였다.
아까 우리를 쳐다보던 커플들도 훈제 계란을 먹고 있는데, 까는 방법이 도전적이다.
탁-!
머리로 깨기 신공을 펼치고 있다.
서로 가위바위보를 해서 지는 쪽 머리에 부딪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5세는 눈썹을 까딱인다.
달걀을 다시 내 손에 쥐어주더니 자기 머리를 들이민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정수리 쪽을 포인팅한다.
"옵바, 요기."
"그러다 머리 꽁- 하고 다치는데."
"갠차나 윤스리 머리 딴딴해."
그야 사람 머리니까 계란보다야 훨씬 단단하겠지만 아픈 게 문제다.
"진짜 괜찮지?"
"윤스리만 미더."
단호하게 말하지만 대체 뭘 믿으란 건지 모르겠다.
계란 하나 깨는데 그렇게 비장해질 일인가.
에라, 모르겠다.
어설프게 치면 안 깨져서 더욱 아플 테니 한 번 냅다 갈긴다.
팍-!
윤슬이 이마 쪽을 조준했던 계란이 완벽히 깨졌다.
이 정도면 안 아팠겠지?
싶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생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우우... 갠짜나."
눈물을 글썽인다.
"안 괜찮아보이는데?"
"저녀 갠짜나...."
전혀 괜찮아.
전혀 괜찮다는 건 문법에 어긋나지 않던가.
예상 외로 아팠나보다.
그러나 끝까지 센 척하고 싶어하는 동생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 윤슬이가 머리로 계란도 깨고 엄청 쌔네?"
"대, 대나나지...?"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띄워주니까 이마를 한 손으로 꾹꾹 문지르면서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본인이 만족하니까 괜찮겠지 싶다.
나머지 계란은 내 이마로 부시는 걸로 했다.
윤슬이가 훈제 계란을 쥐고 내 이마에 내리쳤는데, 이럴 수가 힘이 모자라서 몇 번이나 깨지지 않고 버텼다.
덕분에 혹이 날 뻔했지만 끝내 내가 헤딩을 하는 식으로 계란을 깨는 데 성공했다.
초콜렛이랑 같이 맛있게 먹었다.
몇 달 전만 했어도 윤슬이와 함께 이렇게 공공장소에서 무언가를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명도 레벨2를 달성하고, 오누이에게 따로 부탁해두었다. 윤슬이의 능력을 일정 수준 제어할 수 있도록.
기차는 달리고
시간은 흐른다.
"오오! 옵바, 저기 강릉이라구 써이써!"
"그러게?"
윤슬이가 창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표지판을 보고 반응한다.
'강릉'이란 글씨는 읽을 수 있나보다.
도착하기까진 체감 상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