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더 멀리 있는(5)
"주희?"
"응, 주흰데."
너무도 태연한 얼굴로 서있는, 어린 딸내미가 눈 앞에 있다.
그 얼굴을 보니 슬픈 감정이 마음을 허리끈처럼 조른다.
하지만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교복을 입은 딸, 주희.
오늘은 평일인 듯했다.
안순연은 일을 가야 하고, 이주희는 등교해야 한다.
그게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주희, 오늘은 엄마랑 같이 집에 있을까?"
".... 갑자기?"
"응, 오늘은 엄마 일 가기가 싫다."
"진짜 그래도 돼?"
"엄마가 사장이잖아. 원래 일하고 말고는 사장 마음이야."
"치잇, 좀 진즉에 그럴 것이지!"
딸이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
그 진즉에 그러란 말이 가슴을 후벼팠다.
허나 안순연씨는 "그러게."라며 같이 웃어넘겼다.
난생해본 적이 없던 일탈이 시작되었다.
하루종일 딸과 함께했다.
유난히 짧은 것만 같은 하루.
순두부찌개를 끓이는 뚝배기들을 화구에 잔뜩 나열하곤 팔에 튀기는, 국물방울들을 상대하던 그 시간들은 지겹도록 길게 느껴지는데.
이주희와 함께하는 시간은 짧게 느껴졌다.
귀이개로 딸의 귀를 청소해주고.
나란히 앉아서 라디오를 듣고.
좋아하는 시집은 무엇이냐고 묻고.
어제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듣고.
그런 일들로 하루를 채워갔다.
그 어떤 날보다 의미 있는 하루였고.
딸 말마따나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만했다.
하루는 영원하지 않다.
안순연씨는 내심 알고 있었다.
이 날이 저물면 모든 게 끝나는 것이고, 그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노라고.
"엄마! 나 배고프다."
"그래? 저녁 먹어야겠네."
"순두부 끓여주라."
".... 그게 그렇게 좋아?"
"응, 난 엄마가 끓여주는 것 중에 그게 제일 좋더라."
"자주 먹잖아."
"자주 먹어서 그런지 더 좋아."
딸이 실실 웃으며 끓여달라는데 거절할 수 있는 엄마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결국 늘 하던 일.
또 순두부찌개를 끓인다.
칼질은 숙달되었지만 파를 썰고, 마늘을 다지는 일을 조금 천천히 하기로 했다.
옆에서 자신이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딸을 더 오래 지켜보고 싶었다.
순두부에 괜히 넣지도 않던 감자를 넣기로 했다.
익는 데까지 오래 걸리니까.
그러나 순두부찌개는 결국에 완성된다.
딸이 먹고 싶다는데 까맣게 태워먹을 순 없지 않은가. 요리하던 불을 끄고, 밥상에 올린다.
"먹자, 주희야."
"응! 잘 먹겠습니다."
펄펄 끓던 순두부를 앞접시에 담아 후후 부는 딸.
성격도 급하다.
음푹 퍼 입에 넣으려는데, 입술에 대더니 기겁한다.
"아뜨!"
"방금까지 끓던 건데 당연히 뜨겁지. 조심해."
"알게쒀."
정말 모전자전이라더니.
제 딸내미, 윤슬이랑 똑같이 행동한다.
손녀도 저렇게 뜨거운 음식을 입에 성급히 대려다가 당황하곤 한다.
....
잠깐만, 윤슬? 그게 누구더라.
기억이 혼란스럽다.
"엄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가게 쉬었대? 평소엔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가게는 열던 사람이."
"그냥 오늘은 그런 기분이었어."
"그냥 그런 기분? 그런 게 어디 있어. 엄마는 나처럼 기분파가 아니잖아."
"네가 누구 배에서 나왔는데 그래? 엄마도 가끔 기분 파일 수도 있잖아."
"그건 그렇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가게를 쉬었을까.
돈을 벌어야 하는데.
그래서 딸을 부족한 것 없이 키워야 하는데.
이럴 만한 여유는 그다지 없었을 텐데.
왜 가게를 쉬었을까.
그 자문에 대한 답은 명료했다.
꼭 전하고 싶은 한 마디가 있었다.
또, 시간이 얼마 없다.
딸의 그릇에 놓인 밥이 바닥을 보여간다.
누굴 닮아 저리도 급한지.
좌우지간 저 그릇이 비게 되면 이 환상은 영영 끝나는 것이라고 안순연씨는 알고 있었다.
이곳은 자신이 평생 만들던 음식, 순두부찌개가 보상이라도 하듯 만들어준 꿈 같은 세계니까.
그릇이 비게 되면 환상도 끝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 말을 꺼내려면 지금뿐이다.
줄곧 마음에 담아두었던, 그러나 전혀 건넬 자격 없는 말.
엄마답지도 못했던 엄마가 하고 싶은 말.
반드시 묻고 싶은 말.
"주희야."
"응?"
"너는 다음 생에 태어나면 뭐할래?"
"그런 게 어디 있어. 다음 생 같은 게."
"누가 안다니?"
"난 알아. 그런 거 없어."
"엄마는 모른다구. 그러니까 한 번 생각해봐. 넌 다음 생에 뭐할지."
"시 쓸게. 다음 생에나 이번 생에나 똑같지 뭐."
".... 그래? 똑같구나."
그 말을 듣고 안심되었다.
"엄마는 조금 다르게 살고 싶어."
"왜? 지금 불행해?"
"아니."
"그럼 왜?"
"너랑 조금 더 시간 많이 보내줄 걸 그랬어."
".... 뭐야? 갑자기."
"너랑 더 많은 곳도 가보고. 더 많이 밥도 같이 먹고. 친구는 얼마나 있는지. 학교는 어떻게 다니는지. 어떤 시를 좋아하는지. 왜 그 시를 좋아하는지. 남자친구는 있는지, 없는지. 귀 밑에 점은 언제 생겼는지. 일곱 시 라디오에 투고는 몇 편이나 보냈는지. 조금 더 알아볼 걸 그랬다. 일 같은 건 적당히 내려놓고."
"...."
딸은 웃는다.
아무 말 없이.
"그러니까, 엄마는 그렇게 변할 테니까. 한 번만 엄마 부탁들어주라. 다음 생에도 한 번만 다시 태어나주라, 내 딸로. 주희야."
딸은 웃는다.
"그땐 더 맛있는 것도 많이 해줄 테니까. 조금 더 옆에 있어줄 테니까."
아무 말 없이.
"나쁜 짓하면 혼내고, 그러지 말라고 말리고. 네 꿈도 옆에서 잔뜩 응원해줄 테니까."
딸은 웃는다.
아무런 말도 없이.
"한 번만 더 내 딸 해주라. 다음 생에."
그 부탁에 답은 긍정이었는지.
부정이었는지.
아무 말 없던 딸이 입을 벌리고, 무어라 웅얼거릴 때쯤 제한시간이 다 되었다.
딸의 그릇은 어느새 다 비어있었고, 환상은 이제 끝이다.
끝내 주희의 대답은 듣지 못했다.
**
"잉? 함모니 왜 우러?"
어느새 잠에서 깬 손녀가 안순연씨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어리고 맨질거리는 얼굴로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니 마음이 더욱 안 좋아진다.
"크흠! 할머니가 울긴 뭘 울어. 이거 소주가 튄 거다."
뺨을 문지르며 변명한다.
"움? 아닌 거 가툰데."
"할머니가 거짓말 치는 거 봤니?"
"윤슬이, 이리 오자. 낮잠에서 금방 깨버렸네?"
"움! 옵바랑 놀라구 인나써."
눈치 빠른 큰 손주가 윤슬이를 데려간다.
자신이 지금 왜 이리도 격한 감정에 잠겨있는지, 안순연씨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홀가분하다.
큰 손주의 솜씨가 제법인지 마음을 울리는 요리를 만들 수 있게 된 것 같다.
윤슬이를 품에 끌어안고 머리 냄새를 맡는 송주현.
소주를 마셔서 그런지 눈이 풀린 듯 보인다.
"옵바, 옵바."
"응?"
"옵바가 한 가지 잊은 게 이써여."
"오빠가 뭘 잊었을까요?"
"오늘 윤스리 머리 안 깜아써여."
"아."
"오늘 아까 아침에 바쁘다구 빨랑 나오느라 머리 안 깜아써여."
"맞네. 오빠가 그걸 까먹고 윤슬이 머리 냄새를 맡았어?"
"웅, 옵바가 까머거써."
"근데 오빠는 윤슬이가 머리 안 감아도 하나도 안 더러우니까, 냄새 그냥 맡을게."
킁킁-
킁킁-
"히힝... 간지룹다."
손주들이 귀엽게 얽히는 걸 바라보고 있는 안순연씨의 마음엔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다 송주현이 무언가 잊고 있던 걸 생각해냈는지 눈썹을 까딱인다.
"할머니, 잠시만요."
"응?"
윤슬이를 다시 내려놓고는 챙겨온 캐리어 쪽으로 향한다.
드르륵-
지퍼를 열어 캐리어를 한참 뒤적이다가 사각형 책을 한 권 꺼낸다.
그리고 안순연씨 쪽으로 들고온다.
"이게 뭐냐?"
"시집이요."
"그건."
그건 안순연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시집의 작가, 그러니까 시인의 이름이었다.
[윤슬]
[이주희 시집]
안순연씨의 딸.
그리고 송주현과 장윤슬의 친모.
그녀의 시집이었다.
안순연씨는 큰 손주가 이것을 갖고 오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두 사람은 결코 좋은 인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 부르기조차 민망하고, 서러운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송주현은 이것을 가지고 왔다.
"아.... 우연히 발견했는데. 할머니가 보시면 좋아하실 것 같아서. 가지고 왔어요."
이전, 강필중의 헌책방.
그곳에서 발견했다가 다시 꽂아두었다.
솔직히 그닥 눈에 담아두고 싶은 물건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구태여 챙겨서 강릉까지 들고 온 이유는 따로 있다.
"거기 한 번 목차 보실래요?"
큰 손주의 말에 따라 시집을 펼친다.
목차에 나열되는 시의 제목들.
익숙하거나 생경한 단어들이 나열되는 가운데.
딱 하나 시선을 사로 잡는 단어가 있다.
[엄마]
"...."
마른 침을 삼키고, 페이지를 연달아넘긴다.
다른 시들의 다른 단어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딸의 시집.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딸이 죽기 전엔 손주들을 신경쓰느라.
그리고 딸이 죽고 나서는 감정에 휩쓸릴까봐.
등등.
다양한 이유를 대며 외면해왔다.
그러나 손주가 이렇게 갖고 온 이상, 그것을 외면해서는 안 되었다.
왜냐면 그 누구보다 이 시집을 경멸할만한 사람은 송주현이었다.
엄마.
그 두 글자짜리 제목으로 지어진 시는 두 줄짜리였다.
아들을 낳았다
감기 걸리면 아직도 엄마를 찾는다
엄마를 찾는다.
그 두 어절이 마음에 낚시바늘처럼 걸린다.
"아이... 참."
낚아올리는 듯하다.
"이게 왜 자꾸..."
무언가가 자꾸 얼굴에서 쏟아진다.
세상의 윤곽이 부드럽게 뭉그러진다.
"나이 먹으니까... 주책이지."
떨어진다.
뚝뚝.
"젠장."
딸의 정신세계를 두 줄짜리 문장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두 어절.
엄마를 찾는다는 말만큼은 딸이 직접 적어낸 말이다.
자신의 문장으로, 자신의 시집, 작품에 적어낸 말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에 와닿았다.
그래도 나는 한 번쯤 되돌아봐줄만한, 아플 때 한 번쯤 생각나는, 그런 엄마였구나.
그렇게 마음 속으로 납득하게 되었다.
"함모니!"
손녀가 발견해버렸다.
방금 전과는 다르다.
이제 안순연씨에겐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나이가 몇십 살이나 차이나는 손녀에게 우는 모습을 들켜버리고 말았다.
한심한 일이다.
주저앉은 안순연씨의 머리를 짧고 마른 팔이 감싼다.
손녀의 팔이었다.
"함모니 울지 마러."
"안 울어. 울기는 뭐를."
"윤스리 안 속아. 함모니 울자나."
그 작고 여린 손으로 안순연씨의 퍼석하고 거칠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윤스리가 더 쌔져서 함모니 지켜줄게. 그니까 울지마러. 아직 윤스리가 애기라서 못 지켜주지마는. 윤스리가 옵바만큼 크므는 옵바랑 함모니 다 지켜줄 꺼야. 그니깐 그때까지만 참어!"
손가락도 고사리만한 게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걸까 싶다가도 웃음이 난다.
그 전에 비하여 씩씩해진 것도 같으다.
확실히 큰 손주와 함께 지내고 나선 또래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구석도 생겼다.
송주현도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두 사람을 가득 껴안는다. 이중에선 체격이 가장 컸으니 품이 꽤 넓게 느껴졌다.
그리곤 어찌 남의 감정까지 세세히 헤아린 듯.
깊게 웃으며 건네는 말.
"할머니 딸은 할머니가 좋았나봐요. 저는 감기 걸리면 꼭 의지하고 싶은 사람만 찾게 되더라고요. 되게 치사하게."
".... 그래, 그러게 말이다."
손주가 이곳까지 저 시집을 들고와준 것이 그토록 고마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