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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굴러들어옴-84화 (84/200)

84화: 더 멀리 있는(6)

한바탕 눈물바다가 되고 난 뒤엔 평화의 시간이 찾아왔다.

저녁에는 할머니와 시내까지 나가서 외식을 했다. 윤슬이는 생선 요리를 기대했지만 두부를 먹게 되었다.

강릉은 바다도 유명하지만 두부도 유명하니까.

이왕 여행 온 거 명물을 먹어보게 된 것이다.

할머니는 그냥 집에서 먹지 무얼 나가서 먹냐고 투덜대셨지만 그래도 손주들과 외식을 하는 것이 싫진 않아보였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옵바, 윤스리 오늘은 함모니랑 자야게써... 하암."

하품을 크게 하며 할머니와 같이 자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오랜만에 할머니와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나보다. 내일부터 인근 리조트의 객실에서 머물 예정이니 말이다.

할머니 댁엔 거실을 제외하고, 방이 두 개 있었으므로 나 혼자 한 방을 쓰게 되었다.

침대에 눕자 적적하게 느껴진다.

윤슬이랑은 요 몇 달간 쭉 같이 자다보니 떨어지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옆에서 쪼매난 게 꿈지럭거려야 되는데. 또, 없으니까 아쉽네."

가끔 잘 때 지나치게 부대끼게 되는 경우가 있어 불편한 경우도 있는데, 없으니까 허전하다.

남매란 그런 존재구나, 새삼 생각한다.

혼자 푹신한 침대에 누워 낯선 천장을 보고 있자하니 잡생각이 몰려온다.

특히 매트릭스도 평소와 촉감이 달라 감각을 더욱 민감하게 만든다.

"이주희..."

친모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

할머니의 기억을 통해서 어린 날의 그녀를 보았다.

결코 악인처럼 보이진 않았다.

할머니께서 윤슬이와 그 사람을 겹쳐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나중에 동생이 크게 되면 정말로 둘이 닮게 될 것만 같았다.

그보다 중요한 건 할머니가 제 딸을 사무치도록 그리워했다는 것이다.

딸에게 생전에 못해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부모로서 안타까워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는 생각한다.

다만 그걸 목격하고 내 마음 속엔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왜 내 기억이랑은 성격이 다르지?"

물론 이주희란 사람에 대한 내 기억은 극도로 모호하다. 아주 어린 날의 기억만 단편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기억의 상에 맺힌 그 여자의 모습은 다소 호전적이고, 싸늘하고, 냉정하고, 거침 없고, 압도적이다. 특히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엔 더욱이 그렇다.

할머니의 기억 속에 비친 이주희의 모습은 그런 성격과는 판이했다.

"사람 기억이란 게 원래 믿을 만한 게 못 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둘 중에 굳이 정확한 것을 따지자면 할머니의 기억이 더 정확할 것이다.

유년의 시각보다야 성년의 그것이 더 적확하리란 판단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내 머리 속에 있는, 그 끔찍한 기억들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인가.

나는 아직도 그 모든 것들을 흐릿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다.

감정적으로는 극복했으나, 망각하여 머리 속에서 잘라내어버린 것은 아니다.

"아휴."

괜히 머리가 복잡해져 한숨을 내쉰다.

생각해봤자 별 수 없는 문제다.

평소엔 윤슬이가 깰까봐 밝기를 최저로 해두는 스마트폰을 킨다. 밝기를 조절해 조금 더 밝게 한다.

[오누이 타이쿤!]

어딘가에서 우리 남매를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남매에게 연락해볼 시간이다.

[달님: 여행은 어떤가요? 모두부 맛있게 드셨어요?]

[나: 맛은 있는데, 윤슬이 취향은 아닌 모양이더라. 내일 유민이랑 미정 선생님 만나는데 그땐 생선이나 조개 먹어보려고.]

[달님: 메뉴 선택이 탁월하네요!]

[나: 왜 '탁월'하다고까지 평가하는 거야?]

[달님: 왜냐면 두부, 조개, 생선이잖아요.]

거기까지만 말해도 알 것 같았다.

[달님: 모두 단백질! 심지어 두부로 식물성 단백질을 보충하고, 조개랑 생선으로 동물성 단백질을 보충하는, 근성장을 위한 최적의 식단. 감탄스럽네요.]

[나: 세상의 모든 것들을 보디빌딩의 기준에서 보지 말아줘.]

세상이 두 쪽 나도 오누이의 운동 사랑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만 같다.

[달님: 저희가 윤슬이 능력에 온/오프 달아둔 건 잘 쓰고 계시죠?]

[나: 맞아, 덕분에 윤슬이랑 마음 편히 외식도 하고, 기차에서 달걀이랑 초콜렛도 먹었어.]

평소에 윤슬이를 바깥에 데리고 나가서 무얼 먹을 엄두가 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

식신이라는 능력 때문이다.

그 능력 탓에 일전에 석촌호수에서는 사람들이 길가의 벚꽃을 주워먹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 정도로 주변 사람들의 식욕을 증진시킨다.

우리 가게 운영에는 아주 큰 도움이 되는 보배지만 길거리에서 우발적으로 발동되었다가는 별로 좋지 못한 꼴을 보게 될 게 뻔하다.

그래서 우리 식당의 지명도 레벨2를 달성하고, 오누이의 힘이 조금이나마 강해졌다는 것을 이용했다.

햇님에게 물어보니 이제 온/오프로 식신을 발동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곧바로 부탁했더니 [오누이 타이쿤!] 어플에 기능이 추가된 것은 순식 간이었다.

마법 같은 친구들이다.

[나: 조사는 잘 돼?]

[달님: 윤슬이 말씀하시는 거죠?]

[나: 응, 오늘도 아무튼 할머니한테 만들어드렸으니까, 매개 음식.]

할머니께 매개 음식을 만들어드린 이유 중 하나다.

결국 매개 음식으로 기억에 간섭하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거쳐, 오누이에게 표본을 쌓아주는 일.

오늘은 윤슬이가 잠들었긴 했지만 기억에 간섭하는 힘 자체는 유효하게 발동되었다.

그 덕분에 할머니의 기억을 엿볼 수 있던 것은 나뿐이다.

능력이 발동되었으니 또 하나의 표본으로써 오누이의 윤슬이 조사에 도움이 됐을 것이다.

[달님: 네, 저번에 권씨 남매 때랑 이어서 이번에 안순연 할머니까지. 두 개의 표본이 누적돼서 그 전보다는 조사가 진척되고 있어요.]

[나: 그럼 다행이고.]

[달님: 아마 다음 표본까지 관찰해보면 뭔가 알아낼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하고.]

석연찮은 대답이다.

그러나 조급하게 마음 먹을 필요는 없다.

이쯤 되면 윤슬이가 그런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싶다.

사실 매개 음식만 만들어내지 않으면 굳이 일상 생활에서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능력이다.

또, 그 능력을 이용해 지금껏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

그런 점에서 윤슬이가 그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거나 불안하진 않다.

그저 호기심에서 비롯된 조사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과연 오누이가 아니라면 어떤 녀석이 윤슬이에게 그런 능력을 부여했는가.

인간이 아닌, 초월적인 존재가 오누이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런 또 다른 존재가 윤슬이에게 능력을 주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무리 귀엽고 사랑스럽다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 이쁨 받는다는 것은 다소 부담스런 일이다.

[나: 너무 급하진 말고, 천천히 하자. 어차피 느긋하게 장사하다보면 점차 알게 되겠지.]

[달님: 그렇긴 하죠.]

[나: 나는 나대로. 너희는 너희대로. 잘 해보자.]

[달님: 킁킁... 어디서 청춘물 냄새가.]

파이팅 좀 해보려고 했더니, 또 달님이가 장난을 친다. 가볍게 웃으며 스마트폰을 머리 맡에 두고 잠을 청한다.

끼익-

그때였다.

방문이 천천히 열린다.

그리곤 말꼬랑지를 풀어헤쳐, 머리가 찰랑거리는 천사 한 명이 빼꼼하고 고개를 들이민다.

"쿨... 쿨..."

"옵바가 자는 척한당."

"...."

쿨... 쿨... 이라고 육성으로 소리를 냈더니 단박에 알아차리는 5세. 두목과 악당에 이어 탐정의 호칭까지 탐내는 걸까. 날카로운 추리다.

"윤슬이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어?"

"움... 소리 한 번 들어바."

윤슬이는 방문을 살짝 연 채로 비켜선다.

문 바깥에서는

드르르릉- 드렁!

크르르르릉...

코고는 소리가 천둥 같이 울린다.

외할머니다.

술을 드셔서 그런지 코골이가 거세다.

여기까지 들릴 정도인데 바로 옆에서 들으면, 그 소리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할머니가 코를 골아서 옆에서 잠을 못 자겠어?"

"웅... 윤스리 포기해써. 참아볼라구 했눈데. 안대게써, 옵바랑 잘 꾸야. 힘드러쪄."

수마가 자꾸 괴롭히는지 혀까지 짧아진다.

베고 있던 베개와 몸을 옆으로 치워 자리를 확보한다. 널찍해진 옆자리를 두어번 두들긴다.

수신호를 이해한 윤슬이가 히힝! 하고 웃으며 침대 쪽으로 기어들어온다.

내 눈치를 보더니 가슴팍에 파고든다.

얼굴을 마구 부비부비한다.

"오늘은 왜 이렇게 애교를 부리시나요?"

"함모니 바서 조아."

"오랜만에 할머니를 봐서 기분이 좋았어?"

"조아써."

"자주 와야 되는데 오빠가 일이 바빠서 자주는 못 오겠네. 미안해라."

"갠짜나. 저나두 자주하자나."

괜찮아. 전화도 자주하잖아.

"영상 통화 자주하니까 그래도 괜찮아?"

"웅."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가 다시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다. 집에서도 종종 이런다. 잠에 잘 못 드는 밤이면 더욱.

그럴 때마다 배를 문질러주면 스르르 잠들곤 한다.

윤슬이 배에 손을 얹어 살살 문지른다.

그럼 입가가 부채꼴처럼 호형을 그리더니 눈매에 힘이 풀린다.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이내 호흡이 고르게 변하고.

고로롱-

작게 코를 고며 잠에 든다.

"옆에 있는 게 낫네."

신기하게도 방금 혼자서 침대에 누워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 안정적이게 느껴진다.

동생이 옆에 있는 게 익숙해진 덕이겠지.

"나도 자자..."

눈을 감는다.

머리를 비우고 잠에 들려는데.

고로로롱-

고롱!!

"...."

5세도 남말할 처지는 못 됐다.

오늘 강릉에 오느라 아침부터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탓에 지쳤는지 코골이가 상당히 거세다.

누구 손녀 아니랄까봐 코고는 소리도 문밖에서 나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린다.

이럴 땐 방법이 있다.

코 끝에 검지 손가락 첨단을 살포시 내려두고 버튼처럼 꾹- 누르면.

고롱...

새액, 새액...

잠시 동안이지만 코 고는 소리가 멈춘다.

이 또한 육아 생활의 지혜라고 볼 수 있겠다.

동생을 옆에서 재운 지 어언 반 년이 다 되어간다. 이 정도 지식쯤은 기본이다.

나는 이 신묘한 현상에 대해 '코골이 멈춤 버튼'이라고 정의내렸다.

"이제 진짜 자자..."

버튼을 눌러놓았다고는 하나 언제 5세의 코골이가 다시 습격해올지 모른다.

정신을 내려놓는다.

마침 오늘은 나도 일찍 일어난 터라 피곤했다.

**

이른 아침.

눈을 부비적거리며 주방 쪽으로 나가자 할머니가 무언가를 끓이고 계셨다.

"설마 순두부?"

술안주로 순두부찌개.

전날 저녁으로 모두부를 먹었다.

그런데 아침까지 순두부찌개를 또 먹는다?

아무리 외할머니가 끓여주시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만큼은 견딜 수 없다.

"아니, 순두부 아니고 미역국이다."

"휴... 다행이다."

"얘는, 아무리 순두부 좋대도 물릴 때까지 먹진 않아요! 이거 미역 오늘 아침에 사온 거니까 맛 좋을 거다."

"오, 맛있겠다."

미역의 떼깔이 곱다.

바다를 낀 동네에서 먹는 미역은 또 한층 다른 맛과 식감을 보여줄 듯했고.

실제로 맛있었다.

우리 가족 셋이서 도란도란 맛있게 나누어먹었다.

그리고 리조트 체크인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마침 미정 선생님한테서도 연락이 왔다.

[김미정: 우리 곧 그쪽으로 도착.]

짐을 챙겨서 떠날 때가 되었다.

할머니와 포옹을 하며 인사를 나눈다.

머무는 건 하루뿐이었지만 좋은 시간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이틀이고, 삼일이고 더 있고 싶었는데 할머니가 그냥 하루만 있다가 가라고 먼저 엄포를 놓으셨기 때문에 일정을 이렇게 잡았다.

올 여름엔 친구들이랑 막걸리를 드실 예정이라고 한다.

참 정정하신 분들이다.

"함모니 다음에 또 오께! 옵바랑."

"그래. 또 연락하구. 핸드폰으루."

"네,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나가려던 차에 윤슬이가 할머니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다시 다가가 허리춤을 끌어안는다.

"함모니 다음에 또 볼 꺼야..."

"그럼, 할머니를 또 봐야지. 다음에 시간 나면 할머니가 서울 다시 갈게. 윤슬이랑 오빠 보러."

"약쏙."

윤슬이는 새끼 손가락을 내민다.

할머니도 그에 맞춰서 걸어주신다.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윤슬이 오빠 말 잘 들어야 된다?"

"웅! 윤스리는 옵바랑 잘 지내."

"오빠가 잘 해주지? 맛있는 것도 많이 주고."

"윤스리는 옵바가 요리하는 게 젤루 머시써. 그리구 함모니두 요리하는 거 머시써."

윤슬이가 그렇게 말하며 할머니 배쪽에서 얼굴을 부비적거리자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고맙네, 노인네한테 멋있다고 해줘서. 우리 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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