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어떻게 상어가 105cm (2)
"이게 모지?"
윤슬이는 본인이 들고도 그 정체를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네모난 꼴로 접혀있는 데다가 포장용 포장지를 뜯어도 그 안에 투명 비닐로 한 번 더 쌓여있는 형태였다.
바깥을 감싸던 빨간 포장지는 미정 선생님이 선물용으로 따로 고른 물건인 듯하다.
- 윤슬이. 그것두 한 번 열어바.
미정 쌤 옆에서 눈을 빛내던 유민이가 어느새 윤슬이 옆까지 다가왔다.
실실 웃는 걸 보면, 이 친구는 내용물이 뭔지 아는 것 같다.
윤슬이는 포장지를 뜯다가 오기가 생겼는지 투명 비닐을 풀어헤치는 데 적극적인 자세로 임한다.
미간까지 찌푸려가며 빈틈을 공략하여 이번엔 빠르게 뜯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완벽하게 열린 비닐 아래로 흐물거리며 떨어지는 내용물.
여전히 지느러미가 눈에 띤다.
그 지느러미를 잡고 윤슬이가 들어올리더니 유심히 바라보고는.
표정이 매우매우 심각해진다.
"옵바..."
"응?"
"이거! 상어닷!"
"그러게, 상어네? 왜 상어가 저 포장지 안에 들어있었을까요?"
"후후후... 윤스리는 알구 이써."
추리소설의 모 형사 같은 웃음소리다.
"이거눈! 선샌님이 상어를 자바서 온 거야! 그리구 고기는 다 머거버려서 이케 껍질만 남아써! 마찌?!"
자신의 추리가 완벽히 들어맞지 않았냐는 듯 호기로운 표정으로 김미정 선생님을 바라보는 윤슬이.
그 기세는 명탐정과 다를 바 없었으나.
- 애석하게도 아닌데.
".... 윤스리 실맹."
아무리 생각하더라도 오답이었다.
얼마나 실망을 했으면 실맹이라고 발음을 할까.
"윤슬이가 어떻게 그렇게 기발한 상상을 했을까?"
"움... 왜냐믄 저번에 유미니가 알려조써."
"뭐라구 알려줬는데?"
- 앗...!
옆에서 유민이가 화들짝 놀란다.
뭔가 말하면 안 되는 비밀이라도 되는 양.
"선샌님은 엄청엄청 쌔서 곰도 이긴다구 그래써. 저번에 유미니가 직접 봤다구 그래써. 곰도 이기니까 상어두 이기게찌! 윤스리두 선샌님처럼 쌔지구 싶다."
- .... 그거는! 말하며는...!
유민이가 사색이 된다.
어느새 6세의 등 뒤엔 타칭 '곰을 이기는 여자'가 위풍당당하게 서있다.
- 아들?
- 넵.
- 엄마가 언제 곰을 이겼지?
- 그, 그게 아니구.
- 잠깐만 진솔하게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까?
- 웅...
두 사람은 쪽문으로 들어갔다.
침실처럼 보였고, 그 안엔 킹사이즈 침대가 하나 구비돼있다.
유민이는 얌전히 그 위에 누워 배꼽에 두 손을 올려두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문이 닫힌 뒤 한동안 유민이의 웃음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간지럼 고문을 당한 것 같다.
윤슬이의 귀를 막아두고 몰래 모자의 대화를 들었는데, 대충 윤슬이가 강하고 쌘 사람을 좋아하니까 호감을 끌고 싶어서 미정 선생님의 전투력을 올려치기 해서 말한 듯했다.
실제로 곰을 이겼을 리는 없지.
판타지 세계도 아니고.
윤슬이에게 그런 비밀은 묻어두기로 했다.
상어를 시착해본 것은 유민이가 한풀 진정된 이후의 일이다.
당연히 진짜 상어의 가죽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아동용 수영복이다.
"우아! 윤스리 상어 대써."
"그렇네? 윤슬이가 상어가 됐네? 무서워라."
상어 모양의 수영복을 입은 윤슬이는 가히 귀여움의 정점이다.
등판에 달린 날카로운 지느러미와 사나워보이는 꼬리!
는 모두 폴리 소재로 이루어져 위협감은 사라졌다. 크기도 매우 작아서 앙증맞다.
얼굴이 어디로 나왔느냐.
그 포인트가 중요한 점인데 상어의 아가리 부근에 윤슬이가 얼굴을 빼꼼하고 내밀고 있다.
마치 상어에게 먹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 덕에 머리까지 꽁꽁 수영복에 싸매어져있어 굳이 수영모를 구매할 필요가 없어보인다.
기능성까지 챙긴 수영복이라고 할 수 있다.
"옵바 자버머거."
나를 잡아먹는다며 어깨 부근을 잘근잘근 씹는다.
언제나 그렇듯 데미지 0.
그러다가 불현 듯 정신을 차리고 어깨를 흠칫 떤다.
"앗! 생각해보니 옵바가 아니라 유미니를 머거야게써. 옵바가 업쓰면 아무도 윤스리한테 초코를 안 주자나."
- 우아... 고래 먹힌다... 나두 고래가 댔는데.
"상어가 고래보다 더 쌔거둔."
- 읏, 그건. 그러치.
유민이도 윤슬이처럼 수영복을 입어보았다.
같은 회사에서 만든 디자인이지만 범고래 모양이다.
상어와 범고래.
두 종 모두 바다에서는 최상위 포식자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5세와 6세 사이엔 기묘한 상하관계가 존재한다.
범고래는 상어의 친구이자 부하인 것이다.
범고래는 상어가 잘근잘근 씹는 걸 잠자코 참아주고 있다. 얼핏 보면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 이제 수영복도 입어봤으니까. 바로 바다로 나갈까?
"그러죠. 3박 4일이면 은근 긴 것 같으면서도 짧잖아요."
"옵바, 이제 바다루 가?"
"그래야 될 것 같은데? 선생님이랑 유민이랑 차 타고 바다 가서 놀자."
"오오...! 윤스리는 상어니까는 바다 가므는 물꼬기가 잡혀주겠찌?"
".... 글쎄 노력은 해보자."
윤슬이와 유민이는 서로 손을 잡고 반드시 물고기 사냥에 성공할 것을 결의한다.
- 그래. 우리 상어랑 범고래들. 이제 바다 가야 되니까 다시 옷으로 갈아입을까?
"움? 선샌님, 이거 입구 가므는 안 대여?"
- 입고...? 그럼 너무 눈에 띠잖아.
"윤스리 이거 선샌님이 준 거 선물 마음에 들어써. 그래서 꼐속 입고 입구 시퍼여."
자기 주장이 확실한 5세.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선생님의 바지춤을 잡는다.
유민이도 눈치를 보더니 그 반대편 바지춤을 잡고 선생님을 올려다본다.
- 유미니두 입구 가는 게 조아.
"애들 그냥 이대로 가는 게 어때요? 어차피 아까 로비에서 보니까 수영복 입고 돌아다니는 아이들도 있던데."
여행지까지 트레이닝복을 입고 온, 이 체육교사는 본래 귀여운 것, 이쁜 것, 잘 생긴 것 등에 사족을 못 쓴다.
헤죽 웃더니.
- 그래! 까짓거 그러자. 우리 귀요미들이 이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선생님이 외면하겠어? 어차피 금방 차에 탈 거니깐.
선생님의 허가가 떨어지자 상어와 범고래는 만세를 부르며 하이파이브 한다.
죽이 잘 맞는 친구들이다.
이내 필요한 것만 간단히 챙겨서 바다로 향한다.
로비까지 내려오니 사람들이 흘깃거리며 쳐다보긴 했지만 자기 일행들끼리 떠들고, 체크인하느라 바빴기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SUV에 다시 한 번 탑승해 바닷가로 향했고, 운 좋게 주차할 만한 자리를 빠르게 발견했다.
모래사장을 밟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 꼬마들 집합!
위엄 있는 목소리로 꼬맹이 둘을 집합시키는 미정 쌤. 역시 체육 담당답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보고 있었는데.
- 뭐해, 주현이.
"??? 저도 꼬맹이인가요?"
- 그럼. 나한텐 너도 꼬맹이지.
정정.
위엄 있는 목소리로 꼬맹이 셋을 집합시키는 미정 쌤. 나도 꼬맹이라고 한다.
열 살 이상 차이나니까 그다지 틀린 말처럼 생각되진 않는다.
상어와 범고래에 이어 나란히 서서 김미정 선생님을 마주 본다.
그리고 준비 운동 시작.
하나 둘-
하나 둘-
"이게 얼마만에 체조냐."
- 수영하기 전엔 몸을 풀어줘야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은 성수기의 해수욕장이다.
사람은 셀 수 없을 만큼 많고, 개중에서 특이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곧잘 눈에 띠기 마련인데.
우리가 딱 그렇다.
웬 1미터 전후로 보이는 상어와 범고래 그리고 성인 남녀. 네 명이서 구령에 맞추어 체조를 하고 있으니 어그로가 안 끌리는 게 이상하다.
하나 둘-
하나 둘-
....
수치심을 견디며 어떻게든 체조를 마쳤다.
25년 인생에서 가장 고달픈 체조 모먼트였다.
"움! 체조를 하니까 더 강력해진 기부니야."
허나 105cm짜리 상어는 만족한 듯 주먹을 불끈 쥐어본다. 그 모습을 보니 수치심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네 사람은 돗자리에 짐을 풀어두고 곧장 바다로 향했다. 이미 자외선 대책도 세워 선크림을 희게 뜰 정도로 발라두었다.
윤슬이가 자신 있고, 당당한 기백으로 파도와 마주한다.
쏴아아-
스르르륵...
밀물과 썰물이 매서운 기세로 진득한 모래를 갉아먹는다. 강릉은 동해 바다이고, 동해는 파도가 거센 것으로 유명하다.
상어의 팔꿈치에 손을 얹고 한 발자국 뒤에 있는 범고래. 파도가 칠 때마다 한 번씩 흠칫하고 어깨를 떤다.
- 윤슬이, 안 무서어?
"윤스리눈 갠차나. 아마두."
자세히 보니 상어의 다리도 미세하게 떨리는 게 눈에 띠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해의 파도는 5분에 한 번쯤은 거대하게 몰아치기도 한다.
무서운 것은 둘째치고 위험하기도 하다.
"우리 상어랑 범고래는 오빠랑 같이 들어갈까요?"
"유, 윤스리두 파도 이길 쑤 이써여..."
"그럼 우리 윤슬이가 파도 이길 수 있지. 근데 윤슬이랑 유민이랑 같이 놀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그거는 괜찮잖아."
"움! 그거눈 갠짠치."
- 응! 조아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은 냉큼 내 쪽으로 달려와 한 손씩 꼬옥 잡는다.
몇 발자국 뒤에서 미정 쌤은 우리 세 사람의 사진을 스마트폰을 찍고 계신다.
자박자박
자박자박
걸어들어와 발목까지 담구는 데 성공했다.
상어와 범고래는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는지 서로 마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옵바, 쪼꿈만 더! 쪼꿈만."
"조금만 더 들어가야 되겠어? 유민이는 괜찮아?"
- 응! 갠찬아여. 더 들어가여.
윤슬이의 의지를 떠받드는 범고래.
결국 발을 철벅거리거나 몸이 조금씩 흔들리면서도 허벅지까지 물이 차는 데까지 바다에 들어왔다.
물 흐름에 익숙해지다보니 점차 몸을 비틀거리는 일도 적어진다.
나를 따라서 팔과 어깨에 물을 끼얹으며 몸을 적신다.
그러다가 윤슬이는 호기심이 들었는지 손가락을 쿡 바다에 찍어 혀를 낼름거리며 맛본다.
"우엑! 이거 모야. 옵바, 바다가 물이 아니라 국이야."
"짜다는 뜻이지?"
"웅, 대게 맛업써. 옵바가 만드는 요리가 더 마시써."
바다가 짠 걸 국이라고 표현할 줄은 몰랐는데.
창의적이다.
유민이도 궁금했는지 한 번 쿡 찍어서 맛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 음, 엄마가 만드는 거랑 비슷하다...
과연 삼십대 중반 김미정씨는 여섯 살 난 아들한테 어떤 요리를 만들어주는 걸까. 심히 궁금하다.
"옵바, 옵바! 윤스리 쫌 바바."
"그럼 보고 있지."
아이들 둘을 데리고 바다에 와있으니 항상 두 아이 모두 팔이 닿는 범위에 두고 있다.
윤슬이는 나를 부르더니 갑자기 코를 막고 잠수한다.
그리고 다리를 들어올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둥둥 떠오른다?
몇 초 간 물에 코를 박고 떠오른 상태로 버티다가 푸하! 하고 다시 일어선다.
"윤슬이 너 잠수하는 것도 할 줄 알어?"
"움! 함모니가 알려조써."
"할머니가?"
할머니가 가르쳐주셨다고 하면 아마 댁에 있는 욕조였을 거다. 거기에 물을 받고 알려주시지 않았나 싶다.
고작 5세인데도 잠수를 할 줄 알다니, 역시 내 동생은 천재다.
"윤스리눈 지금 상어니깐 잠수할 쑤 있는 거야."
"그러게? 상어가 됐으니까 잠수도 할 수 있는 거네."
- 읏, 나두 할 쑤 있어.
자신도 해보겠다고 선언한 범고래.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을 굳힌 듯 코를 틀어막는다.
그대로 잠수.
그러나 유민이는 아직 몸을 띄우는 법까진 배우지 못한 것 같다.
금방 물에서 빠져나와 호흡을 고른다.
실망한 듯 어깨가 축 처진다.
그 모습을 발견한 범고래의 모친.
잽싸게 달려온다.
밝은 미소를 지으며 범고래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린다.
- 엄마만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