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호수의 마음(1)
여행의 셋째날이 밝았다.
정말로 운이 좋게도 8월인데 휴가 내내 하늘이 맑아있다. 비가 하루도 내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름도 드물 정도다.
모처럼 오는 동해바다 여행을 하늘마저도 축복해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특히 오늘의 행선지는 더욱 맑은 하늘과 잘 어울린다.
경포호.
쾌청한 하늘은 그대로 호수의 잔잔한 물결에 비친다. 윤슬이 그 자리에 있으며, 태양의 둥근 자태도 어렴풋 수면 위에 어린다.
넓디 넓은 호수가 눈 앞에 펼쳐진다.
강릉의 핫플레이스 중 하나지만 바다만큼 사람이 많지도 않다. 그 덕에 숲이나 들풀 같은 자연의 경관과 어우러져 근처에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진다.
"우무우무... 이거 디게 마시 조아. 옵바두 머거바."
"그래? 한 번 먹여줘봐. 아아-"
"이잉, 진쨔 옵바는 윤스리 업쓰면 안 댄다니까는."
입 안에 퍼지는, 은은한 순두부 향과 차가운 온도. 그리고 부드러운 식감.
무엇보다 단 맛이 그리 강하지 않아 식감과 향이 더욱 살아나는 느낌이 일품이다.
미미(美味)!
우리는 경포호가 잘 보이는 카페에 앉아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평범한 카페라면 굳이 들르지 않았겠지만 이곳에서는 무려 순두부가 함유된 젤라또를 맛볼 수 있다.
단순히 순두부만이 아니라, 말차나 바닐라가 함께 들어가 다양한 맛을 선보인다.
우리는 네 사람인 만큼 네 종류를 주문해서 하나씩 맛 보는 중이다.
여름인데도 그리 습하지 않아 불쾌지수가 높지 않았고, 야외의 파라솔 아래서 순두부 젤라또를 맛보니 그 어느 때보다 휴가라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 아들, 엄마도 한 입 먹여줘야지.
- 웅, 아아-
- 아아...
나를 필두로 서로 먹여주는 행동이 유행처럼 퍼진다.
유민이와 미정 선생님도 서로 먹여주며 모자 간의 애정을 쌓는다.
이번엔 윤슬이가 입을 아- 하고 벌리며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비행기 들어갑니다."
한 번 유치하게 놀아보기로 했다.
내가 주문했던 젤라또를 듬뿍 떠서 비행기처럼 공중에서 몇 바퀴 돌린다.
윤슬이의 똘망한 눈동자가 내가 조종하는 작은 플라스틱 스푼을 따라 회전한다.
"옵바, 빨리! 윤스리 턱 떨어져여."
슈웅-
슈웅-
돌다가 윤슬이의 얼굴 앞에 도착했을 때.
콕.
"아앗! 비행기가 잘못 부디쳐써!"
"으억, 비행기 추락한다."
윤슬이의 입 속이 아니라 코에 살짝 콕하고 찍어보았다. 오빠의 장난에도 윤슬이는 상황극에 맞춰주며 극박한 목소리를 내어준다.
이 얼마나 착한 5세란 말인가.
"구조 요청! 구조 요청! 지금 당장 윤슬이 입에 안 들어가면 태양 열에 녹아버립니다!"
"으앙, 녹으므는 안대!"
윤슬이는 다급하게 스푼을 입에 가져다대 앙! 하고 먹어버린다.
우물우물...
꿀꺽-
"움! 다 녹아버리기 전에 윤스리가 머거치워써. 이러믄 만족하게찌?"
"그렇겠지."
어제부터 내 동생이 잔혹해진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순전히 기분 탓인 걸까.
순두부 젤라또의 그릇을 모두 비운 뒤엔 자전거 대여소로 향한다. 이 호수 주변을 자전거로 한 바퀴 도는 것이 강릉에서 한 번쯤 해봐야 할 일 중 하나다.
넓은 호수의 전경을 다각도에서 구경해보는 것도 재미있으니까.
자전거 대여소 앞에 도착했으나 문제 상황 발생.
어떤 자전거를 대여하는 것이 합당한가.
선생님과 나, 즉 어른들의 입장과 꼬맹이들의 입장에서 차이가 발생했다.
"윤스리의 생각을 들어주시믄 조케써."
"그래, 윤슬씨 한 번 말씀해보세요."
"윤스리, 유미니, 옵바, 선샌님. 우리는 네 명이자나."
"옳지. 숫자도 잘 세네."
"그러타구 볼 쑤 이찌! 저번에눈 윤스리 혼자서 손까락으루 천이백까지 셌거둔 .... 앗! 그게 아니라 윤스리 말을 끝까지 들어주시믄 조케써!!"
"이어서 말씀해보세요."
"움... 그니깐 우리는 저거 자전거를 빌리는 게 맞다구 윤스리는 봄니다."
윤슬이가 가리키는 곳엔 4인용 자전거가 있다.
그런데 그냥 4인용 자전거가 아니라 성인 4명을 상정하고 제작한 자전거다.
즉, 페달을 밟아야 하는 좌석이 4개라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나와 선생님이 자연스레 고르려고 했던 자전거는 4인용 자전거이긴 하나 페달을 밟아야 하는 좌석이 두 곳이다.
즉, 유아용 좌석이 앞쪽에 두 개 구비돼 있어 그곳에 아이들이 탑승하여 풍경을 얌전히 감상할 수 있다.
상석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우리의 자립심 강한 5세는 그런 편안한 길에 안주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본인이 직접 페달을 밟고, 고난을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 동생은 설마 4대 성인 중 하나인 예수의 재림인 것인가.
"그래 좋아요, 아가씨. 우리 동생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오빠는 네 뜻을 막을 생각이 없어."
"후후... 그러믄 윤스리 말대루 해주는 거로구나!"
윤슬이는 신이 나서 배를 볼록 내민다.
"아니, 잠시 대기."
"움?"
"그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일이 있어."
"몬데?"
"윤슬이 한 번 저기 자전거 좌석에 직접 앉아보세요."
"알게쏘."
폴짝-
폴짝-
4인용 자전거 앞에 도착한 윤슬이.
그러나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5세의 신장, 105cm로는 도저히 자전거의 안장에 스스로 앉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오, 옵바 윤스리를 지금 저기에 올려다주므는 조케써여. 그러믄 윤스리가 이케 이케 밟아서 자전거 움직일 쑤가 있거둔."
"오냐, 한 번 해보세요."
번쩍 들어 윤슬이를 안장 위에 얹었다.
그리고 어른들이 이미 예견했던 일이 벌어졌다.
"우우... 안 닿아!"
윤슬이의 짧은 다리는 결코 페달에 닿을 리가 없었다. 허공을 휘휘 젓는다.
휘휘-
휘휘...
추욱...
두 얇은 다리가 공중에서 늘어진다.
윤슬이 어깨도 축처진다.
"윤스리는 아직두 애기야..."
기운 빠진 5세의 옆에 그녀의 부하가 다가가 기운을 북돋아준다.
- 내 눈엔 어른 같애. 힘내, 윤슬이.
"유미니... 고마어."
좌절한 5세의 모습을 끝으로 가벼운 실랑이는 종결되었고, 4인용이지만 페달을 밟는 좌석은 두 개뿐인 자전거로 대여했다.
그런데 앞 좌석에 앉더니 금방 윤슬이의 표정은 밝아졌다.
자전거가 출발하자마자 잔잔하게 밀려오는 호수 바람이 얼굴을 쓰다듬으니 편안한 마음이 들었나보다.
"후우... 바라미 조아."
등받침에 차분하게 기대어 호수의 풍경을 바라보는 윤슬이. 그 뒷모습이 식사를 막 마친 아기곰 같다.
선생님과 나는 두 꼬맹이의 치명적인 뒷태를 구경하며 느긋하게 페달을 밟는다.
아까 점심 먹었던 게 다 꺼지는 느낌이다.
- 선생님이 재밌는 거 알려줄까?
"뭔데요?"
- 이 호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오오... 웬일로 유익한 정보를."
- 나 현직 교사야.
"근데 담당 교과가 체육이잖아요."
- 체육 교사가 이런 것도 좀 알 수 있는 거지, 임마. 운동만 잘하면 선생 할 수 있는 줄 아니?
"아니, 그렇다곤 안 했잖아요. 호수가 생기는 과정 같은 건 복잡하니까 놀랠 수도 있죠."
- 흠흠, 그렇지. 솔직히 말하자면 아까 카페 안쪽에 써있던 안내문을 읽어봤거든. 거기서 알아낸 거야.
당당하게 본인의 지식이라고 주장한 것치곤 출처가 가까이에 있었다.
"윤스리 궁금해여 선샌님."
- 그래? 우리 윤슬이가 궁금하구나! 그럼 선생님이 알려줘야지.
우리 집 꼬맹이가 귀여운 목소리로 궁금하다고 물어보니까 선생님 입가가 풀어진다.
귀여운 거 좋아하는 성격은 어디 안 간다.
- 옛날엔 이 호수가 바다의 일부였다고 하더라.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네요. 원래는 이 근처까지 바닷물이 차있었다는 얘기죠?"
- 정답. 빙하기가 끝나면서 그렇게 됐다고 하더라고. 두꺼운 얼음이 원래 이 근처를 뒤덮고 있었는데, 그게 결국에 다 녹아버렸잖아? 그럼 자연스럽게 해수면이 높아지겠지.
"그래서 이 근처까지 바닷물이 차오른 건가요?"
- 그렇대. 근데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대관령 산맥이고, 고도가 높아지니까 너무 멀리까지 퍼지진 않았겠지.
흥미로운 얘기였다.
자전거 앞 좌석에 앉은 베이비들이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얘기는 아니었으나.
"움... 움... 그러믄 이상하자나."
- 윤슬이, 뭐가 이상해?
"움... 선샌님, 이짜나. 그러믄 왜 이 호수가 바다랑 가치 안 이써여? 지금은 바다랑 호수가 따로 따로 이짜나. 사이가 나빠져써?"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만약 빙하가 녹아내려 해수면이 높아졌고, 그 때문에 이 근처까지 해수가 들이친 것이 경포호가 되었다면.
어째서 지금 호수와 바다는 별개의 공간이며, 이별하였는가.
윤슬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이가 나빠졌다.'고 할 수 있겠다.
-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엊그제 우리가 놀러갔던 바닷가 있잖아? 그쪽이 산처럼 솟아오르는 중이래.
"뿔룩 튀어나와여?"
- 그렇지. 그래서 산처럼 불룩 튀어나와서, 바다랑 호수 사이가 갈라진 거야. 그러니까 원래 호수는 호수가 아니라 바다였던 거지.
그렇게 생각해보면 한 가지 걸리는 지점이 있다.
경포호.
이 거대한 호수의 이름이다.
동시에 '경포'라는 두 글자를 공유하는 바닷가가 있다. 경포대.
방금 선생님이 설명하신 역사를 바탕으로 그 이름의 연관성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럴 듯해진다.
바닷가 부근의 지면이 융기하면서 경포라는 이름의 두 거대한 물이 헤어지게 된 것이다.
지나친 감정이입일 수도 있지만 슬픈 영화 같기도 하다. 어차피 이 지구 상에 흔한 자연현상 중 하나다.
허나 우리 눈 앞에 펼쳐진 공간이 어떤 과정에 의하여 탄생했는지, 그 뒷얘기를 듣는 것은 신비로운 느낌을 받게 한다.
"움... 움..."
윤슬이도 제 나름 느낀 바가 있는지 앞 좌석에서 호수를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자전거 페달을 한참을 굴린다.
호수의 주변을 반쯤 돌아 숨이 거칠어질 때쯤 자전거를 세운다.
마침 근처에 벤치가 있어 그곳에 앉아서 휴식하기로 했다.
제격인 장소다. 호수를 등지고 있어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불고, 원목 자재로 이뤄진 의자와 테이블이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휴가철인 덕이다.
의자에 앉아 몸을 늘어뜨린다.
햇발이 쨍하게 비추고, 등판에 선선한 바람이 부니 기분이 좋다. 마치 에어컨을 틀고 이불을 덮은 것만 같은 느낌.
몸을 늘어뜨린다기보다 몸이 절로 늘어진다는 게 적확한 표현이다.
"우웅, 옵바."
내 옆에 앉아있던 윤슬이가 돌연 내 품으로 파고 든다. 앉아있던 내 무릎에 자기 머리를 기대어 눕는다.
그러자 책상의 모서리에 기대어 엎드려있던 나와 눈을 마주친다.
"어쩐 일로 무릎에 쏙 들어오셨어요?"
"윤스리 기부니 이상하다."
"응? 왜 그래? 속 안 좋아?"
"으응, 아니에여."
유심히 동생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다지 아프거나 피곤한 얼굴은 아니었다.
입술을 오므렸다가 폈다가.
그걸 반복하면서 내 허벅지에 얼굴을 슬며시 비빈다.
이럴 때는 보통.
"윤슬이 지금 슬프구나?"
"옵바는 윤스리 맘 다 알어..."
정답이다.
"우리 윤슬이가 왜 슬퍼졌어요?"
"왜냐믄 호수가 불쌍해서여."
"호수가 불쌍했어?"
"웅... 바다랑 헤어졌자나."
나이대에 비해 뛰어난 공감 능력.
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뒤에 이어진 말을 들으면 결코 웃어넘길 수만은 없었다.
"윤스리는 옵바랑 헤어지믄 너무 슬프구 힘드러. 그니깐 호수도 힘들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