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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굴러들어옴-107화 (107/200)

107화: 맑은 하늘 우산(3)

그것보다 더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걸까.

할아버지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눈을 굴리다가 헛기침을 하신다.

-  믿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번에 저 할머니가 병원에 있는 커다란 수목에서 뛰어내리는 걸 봤어요.

".... 네?"

"옵바, 수모기가 모야?"

"나무를 말하는 거야."

"오오! 어려운 말 배워써. 수모기. 나무."

괜히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기 전에 뜸들인 것이 아니었다. 장난이 아닐까, 헷갈릴 정도로 믿지 못할만한 말씀이다.

그 할머님은 못해도 환갑은 훌쩍 넘어보였는데 말이다.

-  그 정도 나이 먹은 양반이 나무에서 뛰어내렸다는 게 당연히 믿지 못할 말이란 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제 눈으로 그렇게 본 것 같다는 말이죠.

"잘못 보신 건 아니고요?"

-  눈은 노안이지만... 그때 안경도 제대로 쓰고 있었고. 애초에 나무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착각해서 보지는 않겠죠.

"그야 그렇겠죠."

아무리 어르신이라 시력이 감퇴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디에선가 뛰어내리는 큰 동작이라면 확실하게 인식할 것이다.

-  그래서 제가 생각해본 건데, 사실 그 할머니가 복을 불러오는 유령 같은 게 아닐까 해요. 수호령 같은. 그래서 우리 같은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는 치매에 걸린 것처럼 특이한 행동을 하는 걸로 보이는 거죠.

"우우... 유령."

윤슬이가 내쪽으로 바짝 들러붙는다.

유령은 무서운 5세였다.

-  수호령은 무서운 게 아니에요. 사람을 지켜주는 역할이니까.

"지켜조여?"

-  그럼요. 옛날에 대학 강단에 섰던 사람이 이런 말하면 조금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나이를 먹다보니 그런 순간들이 있거든요. 신이 아니라면 결코 이룰 수 없을 만한 일이, 두 눈 앞에서 벌어지는 순간이요.

"움?"

그런 건 윤슬이가 이해하기엔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우리 남매는 그런 종류의 일을 실제로 행한 적이 몇 번 있긴 하다.

내 스마트폰엔 오누이라는 신묘한 녀석들과 연결되는 어플리케이션도 깔려있으니 말이다.

저 할아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누이는 우리의 '수호령'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저 할아버지가 오누이와 같은 존재들에 대해 확신하는 바가 있어보이진 않는다.

-  그 할머니가 수호령인데 이 가게를 들렀다는 건 장차 가게가 더 잘 되고, 행복이 찾아온다는 뜻이겠죠.

"진짜루 그러믄 좋케써여."

그 뒤로 할머님에 대한 이야기는 끊겼다.

전 대학교수이시던 할아버지에겐 다음에 오시면 디저트를 하나 서비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죄송한 마음으로 되돌려보냈다.

**

차라라라라락-

경쾌한 파찰음이 창문의 바깥을 두드린다.

윤슬이는 창에 고개를 들이밀며 비 내리는 바깥 풍경을 하염 없이 구경 중이다.

"주룩~ 주룩~ 비가 내림미다~!"

어디서 주워들은 노래인지 또랑한 목소리로 흥얼거린다.

반면 나는 조금 우울하다.

비가 오는 날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빗물로 흠뻑 잠긴 바닥이 떠올라서 그렇다.

"옵바, 옵바. 저거 바바."

"응?"

윤슬이는 창밖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를 부른다.

그곳엔 투명 우비를 입고 거리를 걷는 아이와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저거 윤스리 우비랑 비슷하게 생겨따. 그치?"

"그러게. 윤슬이 거랑 비슷하게 생겼네."

뒤에서 윤슬이를 꼬옥 껴안는다.

머리 냄새를 맡는다.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머리 냄새를 맡고 싶은 이유는 단순히 그 사람에게 호감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란 것이다.

그 사람의 익숙한 체취로부터 안정감을 느끼고 싶기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내 행동이 딱 그에 들어맞지 않을까.

아주 어렸을 적.

집에서 빗길에 내쫓겼던 기억이 있다.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 친모가 나를 집 밖으로 내보냈던 것이다.

자세한 이유와 과정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도 어린 때였다.

윤슬이만큼 어릴 때는 아니었지만 아직 한글로 문장을 자유자재로 쓸 수 없을 만큼, 어린.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던 것 같다.

그날 나는 어딘지 모르는 아파트의 1층으로 들어가 몸을 떨고 있었다.

여름이었던 것 같다.

반팔을 입고 있어서, 비 내리는 날의 찬 공기가 겨드랑이까지 스며 닭살이 돋았던 게 기억이 난다.

'춥다...'

그 두 글자를 입 안에서 조용히 굴리며.

비가 멎기만을 기다렸으나.

여름날의 먹구름은 우람한 기사의 갑주만큼이나 두터웠다.

더는 그치지 않을 기세로 바닥에 쏟아붇던 비를, 지금의 윤슬이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만큼은 영판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치지 않던 비는 나를 점점 옥죄었다.

특별히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며, 물웅덩이에서 손이 돋아나 내 목을 졸랐다거나.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비가 들이치던 아파트 1층의 바닥이 점점 잠기고 있던 것뿐이다.

요즘 아파트라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만, 그곳은 제법 노후화되어 시설이 매우 낙후돼있었다.

지금쯤 재개발에 들어갔을 것이다.

'아아...'

빗물이 한 움큼씩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바닥이 축축하게 잠기고.

어렸던, 작은 내가 온전히 몸을 가눌 공간이 점차 좁아지고 있었다.

내가 점유하고 있는 바닥까지 젖어든다고 해서 무언가 크게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바지와 속옷, 그리고 엉덩이가 젖는 것뿐.

그것뿐이었다.

그런데도 난 그 빗물이 원망스러웠다.

단지 그만큼의 자리에 내가 앉아있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이.

그 날의 기억이 떠올라서 비가 오는 날은 기분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

특히 여름이라면 더욱이 그렇다.

"움... 옵바."

"응?"

아까부터 동생이 그랬던 것처럼, 동공을 흐리며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윤슬이는 창에서부터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짧은 두 팔을 올려 내 볼을 잡는다.

볼이 안쪽으로 살짝 패이며 우스운 얼굴이 되었다.

"윤스리 질문이 있씀미다."

"무슨 질문이 있으세요? 아가씨."

"왜 옵바눈 비가 오므는 맨날 기부니가 안 조아여?"

".... 오빠가 비 오면 기분이 안 좋은 거 같아요?"

"네. 윤스리는 다 알아여."

"윤슬이는 다 알아요?"

"움, 다는 몰라여. 그래서 물어보는 거에여."

동생의 작은 몸을 다시 한 번 끌어안는다.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끌어안는다.

"응... 비가 오면 기분이 안 좋은 건. 왜 그러냐면. 옛날에 비가 올 때 길을 잃어버린 적이 있어요."

"길을 까머거써여?"

"네, 길을 까먹어서. 집을 못 찾고 한참 헤매다가 비를 쫄딱 맞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데, 우리 윤슬이가 오빠 표정이 안 좋으니까 걱정을 했어요?"

"움... 윤스리는 옵바가 기부니가 안 조으면 당연히 걱정을 하지여."

덩달아 윤슬이까지 기분이 꿀꿀해졌는지 입을 우물거린다.

윤기 나는 머릿결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이제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되는데?"

"아니야! 지금 옵바가 별루 안 조은 얼굴을 했슴미다. 그래서 윤스리가 생각핸 게 있슴미다."

"어떤 걸 생각하셨습니까?"

"윤스리랑 가치 산책 나가믄 대자나."

"응? 윤슬이랑 같이 산책을 나가면 돼?"

"웅. 그리구 참방참방 물장구 치구. 빗빵울도 무슨 맛인지 먹어보구. 그리구, 그리구. 길두 제대루 찾아서 집 오므는 대자나. 그러믄 이제 재밌눈 기억두 이쓰니까, 기분 안 나쁘자나."

"...."

자기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은 건지.

아니면 나를 위로해주고 싶어서, 새로운 좋은 기억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제안하는 건지.

윤슬이의 마음을 정확히 알아낼 길은 없지만.

이렇게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고마웠다.

"그럼 오빠랑 같이 빗길에 산책이나 하고 올까?"

"그게 좋케써!"

우리는 곧장 외출 준비를 하고 집밖으로 나간다.

윤슬이는 우비를 입었고, 나는 커다란 우산을 썼다.

우산 위로 도도도독- 하고 떨어지는 빗소리.

집에서 듣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윤슬이는 우비와 장화로 수해 대책에 완벽한 상태다.

그 상태로 전방 10m 정도 앞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물웅덩이를 발견.

씨익- 하고 웃는다.

"윤스리 돌격!"

호다다다다닥!

참방-

".... 히잉."

매서운 기세로 돌격하여 물웅덩이에 두 발을 깊게 박아넣었으나 애석하게도 웅덩이가 그리 깊지 않았다.

물이 튀기는 것도 그다지 드라마틱하지 않았고, 굳이 비유하자면 웍 안에서 기름이 툭툭 튀는 정도로 미미했다.

"옵바! 우리 더 큰 물장구를 찾아야지 대게써."

"지금 막 나왔으니까, 금방 찾을 수 있겠지."

"움! 그렇타."

우선은 조금 걷기로 한다.

산책이란 모름지기 맑은 날 나오는 것인데 이토록 쏟아붇는 날에 밖에 나오니 기분이 새로웠다.

반바지를 입어 정강이 쪽으로 튀기는 빗방울이 시원하고 신발코의 매쉬 부분이 젖어가는 게 엄지발가락부터 느껴진다.

"옵바! 저거 바바라."

"이번엔 또 뭐야."

윤슬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부분엔 키 작은 나무가 있다. 그곳에 빗물이 잔뜩 맺혀있다.

툭 치면 왕창 떨어질 듯 보인다.

"그거 물 떨어뜨려주라."

"응?"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손이 뻗으면 닿을 위치였기에 손가락으로 나뭇잎을 톡 건들였는데.

쑤욱-

나뭇잎이 기울며 물이 좌르륵- 떨어진다.

그걸 보며 윤슬이는 미묘한 쾌감을 느끼는지 어깨부터 부르르- 떨며 전율한다.

"이고야! 옵바 더 해조."

"...? 그래."

툭- 하고 건들면.

쑤욱-

좌르륵!

다시 툭- 하고 건들면.

쑤욱-

좌르륵!

윤슬이는 그걸 보며 깔깔 웃으며 자지러진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웃음 포인트가 있는 것 같다.

근데 괜히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게 재미 있어서 계속 나뭇잎을 건들게 된다.

이번엔 여러 개를 해볼까.

투둑

투두둑-

주르르르르르르르-

촤앗!

"우앙!"

"어이쿠."

한 번에 여러 나뭇잎을 건들었더니 윤슬이 얼굴에 몇 방울이 쏟아져버렸다.

덕분에 세수한 것처럼 얼굴이 축축해졌다.

윤슬이는 자기 손으로 물기를 슬쩍 닦더니 나를 보면서 눈을 꿈뻑인다.

"이잉! 윤스리 복쑤한다!"

그리고는 돌격.

내 배 앞으로 오더니 얼굴을 마구 쓱쓱- 닦아버린다.

티셔츠가 다 젖어버렸다.

"복쑤 성공. 히히."

"그래? 그럼 오빠도 질 수 없는데."

물을 조금 손에 담은 다음에 윤슬이 얼굴이 쓰윽- 묻혀버린다.

"으앙! 다시 복쑤."

얼굴을 다시 쓱쓱- 문데며 티셔츠를 적셔버린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보니 옷을 손으로 비틀어 짜면 물이 주륵주륵 떨어질 지경이었다.

배가 축축하고, 눅눅한 물기가 느껴지는데도 전혀 나쁜 느낌이 아니었다.

"잉... 윤스리가 복쑤를 넘무 심하게 해써. 그래서 옵바 옷이 다 젖어써. 미아냉."

"괜찮아. 그래도 오빠는 윤슬이랑 이렇게 노니까 너무 재밌고 좋은데?"

"움... 진짜루?"

"그럼, 진짜지."

마치, 그 옛날.

어두웠던 기억들이 새로운 추억으로 덧칠해져가는 듯.

이렇게 짧은 순간만으로도 오래된 상처가 아물어가는 듯.

비오는 날이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얼마나 있더라.

싶은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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