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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굴러들어옴-108화 (108/200)

108화: 맑은 하늘 우산(4)

"우우... 옵바 옷이가 다 젖어써. 그래서 더 딲아두 소용이 업써."

"그러게. 윤슬이 얼굴에 물기가 축축하네."

우비를 썼는데도 물방울이 얼굴에 맺혀있다.

우비 모자 쪽엔 챙이 걸려있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그럼에도 저만큼 물이 묻은 것은 방금 장난친 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그만큼 비가 많이 내리는 까닭이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날엔 그냥 집구석에 박혀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제 집에 갈까?"

"움... 그게 좋케써. 이러다가 옵바가 또 감기 걸리므는 약쏜을 또 해이지 대자나."

"약손하면 윤슬이가 지쳐서 쓰러져?"

"윤스리를 몰루 보눈 검니까! 그 정도루 약하지 않어."

라고 말하는 5세는 지난달 내 배를 격정적으로 문지르다가 풀썩 쓰러진 전적이 있다.

"집 가서 싹싹 씻고 저녁 먹자."

"움! 좋쏘."

윤슬이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따봉을 1스텍 적립하곤 앞장 선다.

어차피 집 근처였으므로 동생을 앞세워보내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골목을 돌 때쯤 윤슬이가 덜컥 멈춰버렸다.

"차가 오나?"

고개를 앞으로 빼어 골목의 저편을 보니, 그곳엔 밑동부터 서서히 젖어드는 박스와 우산이 보였다.

종이박스는 곧 허물어질 듯했고, 그것이 젖는 것을 막기 위해 우산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우리 윤슬이 얼굴이 젖어들 정도로 내리치는 거센 비는, 우산으로 수비하기에 역부족이다.

"옵바, 저기 빡쓰 이써."

"웬 박스가 길거리에 있다냐."

박스가 길에 방치돼 있는 상황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게 젖는 것을 막기 위해 우산이 씌워져 있는 상황은 누가 보더라도 이상하다.

"궁금허당."

윤슬이는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그곳으로 쫄래쫄래 뛰어간다. 혹여 넘어질까 뒤를 바짝 붙어 쫓아가는데.

우리 남매가 그 상자 앞에 도착할 때쯤.

귀에 익은 울음소리가 상자 속에서 들려온다.

니양-

"움?!"

윤슬이는 화들짝 놀라 몸을 슬며시 뒤로 젖힌다.

"옵바! 여기서 냥이 소리가 나써."

"응, 오빠도 들었어..."

그제야 왜 상자 위에 우산이 씌워져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우리는 다급하게 펼쳐진 우산을 살짝 들고는 박스 안을 확인했다.

그 안에 있는 고양이는 어디선가 본 듯한.

아니, 확실히 면식이 있는 녀석이었다.

"이 냥이눈!"

"저번에 루이랑 같이 들어온 애잖아."

며칠 전.

루이와 함께 지아, 수영이가 가게로 밥 먹으러 왔던 날.

산책 도중에 윤슬이를 따라서 이 고양이가 우리 가게로 들어왔던 적이 있다.

노란색 모종에다가 목에 연보라색 방울목걸이를 걸고 있는, 그 고양이다.

지금도 방울을 달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우리를 보더니 반가운지 손을 공중으로 휘휘 흔들며 관심을 끈다.

"우우... 춥겠다. 어뜨케 해."

윤슬이는 고양이를 안아주려다가 흠칫 한다.

자신의 몸에 덕지덕지 물이 묻어있다는 것을 곧장 인지한 것이다.

오히려 우비를 입은 상태로 고양이를 안아주었다간 털이 젖어 체온을 더욱 떨어뜨릴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다니, 배려도 깊다.

"옵바가 냥이 좀 안아조."

"그렇게 할까?"

우산을 목과 승모 사이에 끼우고 고양이를 안아든다.

비가 온 탓에 대기 중에 습도가 높은 상태인데도 모질이 퍽퍽한 게 피부로 느껴진다.

전에도 그렇게 느꼈지만 나이가 제법 있는 고양이인 것 같다.

니야앙....

니양....

고양이를 안아주었는데, 웬 걸.

싫다며 몸을 옴싹거린다.

다시 놓아주었더니 박스로 폴짝 들어가버렸다.

"이잉.... 거기 이쓰믄 추워. 냥이야."

냥-

"너는 거기 있구 싶으니?"

니양...!

"잉, 감기 걸려. 그러믄 윤스리가 약쏜 안 해주므는 안 나아. 마니 아퍼."

니야아아앙-

"어휴, 이 냥이눈 완저니 고집불통이야! 안 대게써 옵바. 우리랑은 가기가 싫으대. 빡스 안이 좋으대."

방금 진짜로 대화가 통한 거라면 난 동생을 지상파 방송국에 제보해야 될지도 모른다.

[동물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영재 5세, 장윤슬 전격 공개!]

같은 느낌으로.

기억을 거슬러보면, 저번에 가게에 왔을 때도 저런 느낌으로 루이랑 저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다.

내 동생의 재능은 어디까지인가.

그 끝을 알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하냐. 저기 있어도 되려나?"

"움..."

우리는 박스의 밑바닥이 걱정이다.

우산이 제법 넓어 물이 밖에서부터 들이칠 것 같진 않아보인다.

고양이가 앉은 박스 밑쪽을 확인해보니, 두꺼운 방석이 깔려있어 그나마 지금까지는 고양이가 무사할 수 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슬슬 젖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닥부터 물이 차올라 방석의 밑쪽부터 물이 스며오르는 것이다.

"잉... 이러믄 냥이가 젖자나. 위험해."

"그러게. 누가 이렇게 해놨대. 싫다는 애를... 억지로 옮길 수도 없고."

상자 째로 들고 집으로 옮긴 다음에.

비가 멎은 내일즈음에 보호센터나 동물 병원에 데려가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상자를 자꾸 만지작거리는 게 불만인지 고양이는 신경질적으로 울음소리를 낸다.

건드는 것을 그다지 원치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윤슬아, 잠깐 집에 들렀다가 다시 나올까?"

"왜여?"

"집에서 남는 플라스틱 박스 하나 갖고 와서 고양이 쓰게끔 해주자. 내일 와서 다시 가져오면 되잖아."

"그러믄 냥이는 어뜨케 해?"

"오늘은 여기에서 자게 하고. 내일 다시 생각해볼까?"

"움... 그러자. 냥이두 여기 있눈 게 더 조은 거 같애. 우리 맘대루 딴 데다가 옴기므는 냥이가 별루 안 조아하자나."

어차피 고양이가 있는 장소에서 우리 집까지는 걸어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우리는 서둘러 집에 들어가서 남아있는 리빙 박스를 하나 들고 나온다.

예전에 물건 정리를 위해 대량으로 구매했던 것인데 어쩌다보니 하나 남게 되어서 그대로 썩혀두던 물건이다.

이런 데라도 쓰게 돼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박스 밑에 리빙박스를 깔아 물에 밑동이 더 젖지 않게끔 도와주자 고양이는 기쁜 듯 꼬리를 살랑거린다.

우리랑 가는 것은 별로 원치 않지만 상자가 젖어드는 상황도 그닥 기쁘지 않았던 것 같다.

혹시 몰라서 박스 밑쪽에 지난 봄철에 사두었던 손난로까지 깔아두었다.

체온 유지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옛날.

젖어들던 아파트 바닥이 생각나서 어떻게라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다.

"냥이야. 내일까지 무사해야 대. 윤스리랑 가치 아푼지 안 아푼지 알아보러 가자."

니양-

고양이와 약속을 나눈 뒤 우리는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 샤워했다.

그냥 산책만 할 생각이었는데, 의외의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샤워를 할 때도.

그 뒤에 저녁 식사를 할 때도.

윤슬이는

움-

하고 한 번 고민하는 듯한 작은 신음을 내더니.

"옵바, 냥이 갠찮겠찌?"

하고 한 번씩 물었다.

창밖에 비는 도저히 그치지 않을 기세로 지면으로 추락하고 있었고.

그 풍경은 우릴 걱정하게 만든다.

"괜찮아. 윤슬아. 오빠가 손난로도 넣어놨으니까. 안 추울 거고. 우산 쓰고 있으니까 비도 안 맞을 거야."

"움... 맞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걱정되는지 내 품 속으로 쏙- 하고 파고 들어 고개를 부비적거린다.

그런 윤슬이를 가만가만 안아주었다.

**

".... 업짜나."

"누가 데리고 가셨나."

온데간데 없이, 그 고양이는 행방불명되었다.

고양이와 박스가 어디에 있는지.

그 장소는 명확하게 기억해두었다.

혹시나 몰라서 스마트폰으로 사진까지 찍어두었으니 헷갈릴 여지는 없다.

정확히 같은 장소에서 그 고양이와 박스, 그리고 우산만 삭제된 것처럼 사라져있다.

그 자리만 다른 부분들에 비해 덜 젖어있는 걸 보아하니, 누군가가 고양이를 데려간 것 같다.

내가 놔둔 리빙박스 채로 말이다.

윤슬이는 매우 실망했는지 입술을 비죽 내민다.

머리를 쓰담아주었다.

"괜찮아, 윤슬아. 다른 분이 데려가주셨다는 거잖아."

"그치만..."

"오히려 좋은 거지. 아마 고양이를 박스까지 통째로 챙겨서 데려가주신 정도면. 자상한 분일 거야."

무신경한 사람이라면 박스나 우산 같은 것은 그대로 내버려두고 고양이만 훽 데려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박스와 우산 등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으면 미관 상 좋지 않으니 치워주신 거다.

그런 데까지 배려가 미치는 사람이라면 분명 좋은 사람일 것이다.

"우웅... 그치? 냥이한테는 조은 일이겠찌?"

"그럼. 엄청 다행인 거지."

완벽하게 납득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윤슬이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내 손을 꼭 잡는다.

"움! 갠차늘 거야. 이제 병언 가자."

"그래. 우리 윤슬이 장하다."

"당연해! 윤스리눈 원래 장해."

오늘은 다시금 대학병원에 들르기로 했다.

건강검진 결과 자체는 대부분 당일에 듣게 되었는데, 전에 심장병 수술한 것과 관련해서 추가 검진을 한 번 진행해보는 게 좋다고 해서.

날을 따로 잡은 것이다.

추가요금이 없다길래 하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은 가게 정규 휴일이니 말이다.

검진은 금방 끝날 것이고, 밖에 나온 김에 식당에 잠깐 들러서 윤슬이랑 맛있게 고기나 구워먹을 계획이다.

기분이 꿀꿀할 땐 구운 고기가 약이다.

그렇게 검진을 위해 병원에 도착했다.

특유의 약 냄새와 진득한 사람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다지 오래 있고 싶은 장소는 아니었다.

병원 로비에 들어서자 윤슬이가 갑자기 움찔거린다.

정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응? 왜 그래 윤슬아."

"옵바 저기 바바."

동생이 바라보던 방향을 그대로 따라서 쳐다봤다.

윤슬이만큼 어린 아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아이.

사진과 똑닮아 있었다.

".... 시후?"

본인 이름을 '시온'이라고 말씀하셨던.

그 할머니가 보여주었던, 손주로 추정되는 아이가 있다.

기억을 거슬러보면 그 할머니가 시후를 보러 이 병원에 들른다고 하셨던 것 같다.

그러니까 저 아이가 이 병원의 로비에 있는 것은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윤슬이는 시후를 보더니 갑자기 앞으로 펄쩍 뛰쳐나가 말을 건넨다.

"너가 시후니?"

-  으, 응?

"시후!"

-  응... 내가 시후인데.

"나는 윤스리."

-  윤, 스리? 이름이 스리야?

"이익... 어뜨케 이름이 스리야! 윤스리라고."

-  아, 윤슬? 그렇구나.

시후는 몸상태가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은지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나간다.

부모님은 잠시 자리를 비우셨는지 시후만 얌전히 로비의 의자에 앉아있는 상태다.

-  근데 너 누구야?

"움? 윤스리라구."

-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시후라는 건 어떻게 알아?

"들어써."

-  누구한테?

시후 입장에선 다짜고짜 꼬맹이가 들이닥쳐 자기 이름을 불러대니 놀랄 법도 하다.

윤슬이는 놀래킬 생각으로 저러는 건 아니다.

그냥 자기 또래인데 얼굴을 아는 친구가 눈 앞에 보이니 말을 걸어본 것이다.

요근래 자신감이 많이 붙은 5세는 손님들과도 이야기를 많이 나누며 성격이 점차 쾌활해지고 있다.

"시온 함모니."

-  시온 함모니? 할머니? .... 시온?

"웅, 시온 함모니. 시후랑 칭구라고 그래써."

-  친구.... 시온.

시온의 이야기를 꺼내니 점잖던 시후가 갑자기 훌쩍인다. 윤슬이는 여지껏 보인 적 없을 정도로 당황하며 뒤로 폴짝- 작게 점프한다.

"응으엉...?! 왜 우러."

-  시온... 보구 싶어.

"시온 함모니?"

-  시온한테 할머니라구 하지마... 우리 고양이야. 아직 건강하다는 말이야.

우리 남매는 잠시 얼어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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