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레전드 오브 맛짱짱(2)
- 오늘의 메뉴로 주세요. 이름이 신박하던데. 치킨 인 헬?
"넵, 오늘의 메뉴 하나요."
- 토마토 소스 베이스에 닭고기 나온다고 칠판에 써있던데, 밥도 나오나요?
"밥도 반 공기 정도 나오는데. 쪼금씩 덜어서 비벼 먹는 게 제일 맛있어요."
- 오케이, 새로운 음식 도저언!
황치호씨는 흥얼거리며 스마트폰을 열고는 무얼 마구 적는다.
그 모습을 먼발치서 윤슬이가 흘기고 있다.
치호씨가 오면 대략 저런 모습이다.
일전에 동화책을 하나 추천해주셨는데, 그 이야기의 전개가 윤슬이 마음엔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약간의 불신과 불만이 쌓인 상태다.
게다가 치호씨의 성격이 워낙 장난스런 터라 윤슬이를 곧잘 골려주곤 한다.
그게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고 볼 수 있다.
오죽하면 치호씨가 사이다를 가져다달라고 하면.
'흥! 고구마 아저찌는 스스로 갖따머거야대.'
라며 매몰차게 거절할 정도이니 말이다.
원래 우리 가게는 원칙 상 음료랑 물이 셀프라서 불만을 토로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다.
그러나 오늘.
윤슬이는 그런 태도를 바꿔야할지도 모른다.
치호씨에게 치킨 인 헬을 내어드린다.
- 오... 비주얼 보게.
스마트폰을 꺼내어 찰칵- 사진을 찍는다.
확실히 먹는 맛뿐만 아니라 '보는 맛'도 신경을 조금 썼다.
붉은 토마토 소스에 계란이 퐁당퐁당 빠져있고, 그 위에 파슬리가 듬성이 뿌려져있어 먹음직스러워보인다.
계란과 토마토 덩이들을 거두면 그 밑으로 잘게 썰린 양배추까지 함께 있어 더욱 풍성해보이기도 한다.
먼저 한 입 드시는데.
[오누이 타이쿤!]
[고객이 음식 솜씨에 감탄합니다.]
[판타지 웹소설 작가 황치호: 식당 만족도가 8% 상승했습니다!]
[종합 만족도: 47%]
웬일로 별 말 없이 묵묵히 드시기만하는데도 만족도가 훌쩍 올라간다.
어지간히 만족하신 것 같다.
"고구마 아저씨가 무슨 일루 저러케 조용히 머그지?"
윤슬이도 호기심이 생기는지 저 멀리에서 목을 빼놓곤 지켜본다.
입에 한 가득 담은 음식을 힘겹게 삼키고서야 말을 뱉는다.
- 경건하게 즐기고 싶다, 이 맛을.
그렇다고 한다.
갑자기 신발을 벗어제끼더니 공손히 의자 위에서 무릎을 꿇고 다시 식사를 재개한다.
진짜 황치호씨 캐릭터 특이하다.
그 모습이 여간 이상해 보이는 게 아닌지.
윤슬이의 눈매가 극도로 좁아진다.
시간이 조금 흘러, 그 그릇을 비울 때쯤.
신발을 다시 신으시며 황치호씨가 그제서야 보충 설명하신다.
- 아아, 오늘 아침부터 아무 것도 안 먹었거든요. 그래서 더 맛있어져셔 그만. 이런 기행을 벌여벌였지 뭡니까.
"그러셨군요. 이해합니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안 드셨다면야.
저 정도 과장섞인 행동쯤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해드리자...!
- 근데 토마토 소스 베이스인데 양배추 같은 것도 채썰려서 들어있더라고요. 그런 건 같이 넣는 이유가 있는 거예요? 맛의 밸런스가 잡힌다던가.
"맛... 밸런스라기보단 건강 친화적인 재료 선택이죠. 토마토 소스에 산미가 강하다보니까. 왕창 먹으면 위장 안에 산도가 높아져서 속쓰리거든요. 그걸 중화시켜주는 역할이에요. 그리고 양배추 자체가 맛이 미미해서 그다지 전체적인 밸런스를 해치지도 않구요."
- 그렇군. 그런 깊은 뜻이. 메모... 메모...
황치호씨는 소설에 또 써먹으려는지 스마트폰을 꺼내어 다시금 메모를 시작하는데.
이걸 기회로 삼아볼까.
"잠시만요. 제가 말씀드리는 거 그렇게 하나하나 다 메모하시면 곤란한데."
"곤란하거둔여!"
치호씨에게 한 소리 할려는 줄 착각했는지.
윤슬이는 잽싸게 내 허벅지 뒤로 달려와 슬쩍 숨더니 말을 거든다.
- 아, 그렇죠. 미안합니다. 이게 버릇이 돼버려서.
사과하며 뒤통수를 머쓱하게 긁적이는데.
메모를 지울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딱히 지워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이 정도 지식은 인터넷에 잠깐 검색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수준이니까.
그럼에도 방금 그 행동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황치호씨가 자신의 메모를 꽤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보통 메모에 대한 불평을 상대방이 말해오면 지우는 게 매너인데 그걸 지우지 않고 몰래 묻어가려고 하는 행동에서 그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치호씨 지금 요리 관련 소설 쓰고 있다고 했죠?"
- 네, 맞아요. 사실 그래서 이렇게 여쭤보기도 하고. 사진도 찍어가는 거죠. 이게 은근히 도움 되거든요. 묘사할 때나. 아니면 작품 전개할 때에도.
"음... 그래서 그렇게 저한테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러시는구나."
- 주현씨가 은근 프로잖아요.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어느 정도 정보는 나오는데. 뭔가 주현씨가 말하면, 요리가 본업인 입장인 만큼 리얼한 얘기가 나온다고 해야 하나?
"옵바눈 프로거둔. 옵바 요리가 맛짱짱이보다두 더 마시써."
황치호씨는 우리 가게에 처음 들린 날부터 매일 같이 오늘의 메뉴를 시키며, 이것저것 물어보곤 하신다.
답해드리기 어려운 일도 아니고, 요리 레시피에는 저작권도 없으니 시간이 허락하는 이상 대략적으로라도 알려드리곤 하는데.
"그럼 치호씨는 은근슬쩍 저한테 빚 지고 있던 셈이네요."
- 음, 그렇긴 하죠.
"자주 들러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저희 가게는 요리 교실이 아니고 식당이니까요."
- 맞아요. 되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긴 한데. 어찌 말씀하시는 게...
치호씨도 뭔가를 눈치챈 듯 말꼬리를 흐린다.
"오는 게 있으면. 또 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 설마 돈?
"아뇨. 어떻게 이런 걸로 돈을 받아요."
"윤스리는 6억 주므는 대!"
- 그 정도 돈은 내고 싶어도 없단다.
"피이..."
입술을 비죽대는 윤슬이 머리를 꾸깃꾸깃 쓰다듬으며 말을 잇는다.
"저희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앞으로도 요리 레시피나 잡지식 같은 거 열심히 알려드릴게요."
- 오! 진짜요? 그러면 합법적으로 메모하고, 사진찍고, 질문해도 되는 거?
"되는 거."
- 무조건 도와드릴게.
어지간히 내가 들려드리는 요리 지식이 마음에 드셨는지 눈빛이 진지해지는 치호씨였다.
반면 윤슬이는 무슨 얘긴 줄 아직 모르는 것 같다.
고개를 갸웃거린다.
"옵바눈 모든지 다 할 쑤 있눈데. 고구마 아저씨한테 모 부탁해?"
불만이 있는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윤슬이를 치호씨 눈높이까지 들어올린다.
"우리 윤슬이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세요."
"움?! 이미 윤스리눈 주인공인뎅. 보쓰자나."
- 그럼. 누구든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니까.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요."
나는 다시 주방으로 가서 맛짱짱 우유를 갖고 온다.
그곳에 쓰인 공모전에 대한, 깨알 글씨로 쓰인, 요강을 읽게 한다.
- 아아... 그런 거구나.
그제서야 내 말의 의도를 이해한 치호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 윤슬이를 주인공으로 해서 동영상 찍고 싶단 얘기인 거잖아요.
"네, 맞아요. 동영상을 찍는 거야. 그냥 제가 촬영하면 되니까 별 문제 없는데. 시나리오는 아무래도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베스트지 싶어서."
- 그럼요. 상업 작가를 믿으세요. 그렇게까지 유명하진 않지만 밥벌이는 하고 있고. 나름 대중의 니즈는 파악하고 있으니까. 이런 데서는 일반인들보다야 강점이 있죠.
치호씨는 자신만만한 듯하다.
우리의 대화를 묵묵히 바라보던 윤슬이가 내 바지춤을 쿡쿡 잡아당기며 관심을 요구한다.
"옵바..."
"응?"
"그러믄 고구마 아저씨가 윤스리 도와주는 거야?"
"그렇지. 윤슬이랑 오빠 도와주시는 거지. 맛짱짱 우유 대회에 나가서 좋은 성적 거둘 수 있게끔."
"이익...!"
윤슬이는 치호씨한테 도움을 받는 게 그닥 내키지 않은지 고개를 휭휭 젓는다.
그러다가도 고개는 내 쪽을 본 채로 자그마한 손만 치호씨에게 내민다.
입술은 여전히 배쭉 튀어나와 있다.
- 응? 뭐야.
"악쑤."
- 악수?
"웅, 악쑤. 빨리. 윤스리 손 뚝 떨어져여."
치호씨는 윤슬이 손을 잡고 위아래로 두어번 흔든다.
악수가 끝나자 곧바로 손을 빼고는 팔짱을 낀다.
그리고 말을 잇는다.
"윤스리랑 옵바 도와주니까는. 화해하는 거야."
- 화해하는 거야?
"웅... 저번에 고굼마 막 입에 너은 것두. 잘 생각해보니까는. 윤스리가 심해써. 미아냉."
- 크흡...
5세의 귀여움에 푹 빠졌는지.
치호씨는 잠시 입을 틀어막다가.
다시 스마트폰을 꺼내어.
- 메모... 메모...
저 메모병은 도저히 고쳐지진 않는 것 같다.
**
- 뭐야, 그래서 황치호한테 공모전 시나리오 맡겼다고요?
"네, 그렇게 됐어요. 어쩌다보니."
- 뭐... 치호가 나름 괜찮은 작가긴 하지. 작품 성적도 꽤 괜찮게 나와요. 가끔 뇌절을 해서 별점 테러를 당하는 게 흠이지만.
"내절? 이니 언니야. 내저리가 모야?"
- 응... 아무도 원치 않는 행동을 해서 미움 받는다는 뜻?
"이잉... 그건 쪼끔 슬푸다. 고구마 아저씨 불쌍해."
며칠이 지났다.
황치호씨는 그렇게 우리의 공모전 동영상의 시나리오를 맡아주기로 하시고는 며칠 동안 가게에 들르지 않았다.
다만 나와 연락을 주고 받고는 있으니, 약속은 지킬 생각인 것 같다.
윤슬이도 어느샌가 치호씨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는지.
백수인씨가 말하는 황치호라는 작가의 인식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있다.
"그나저나 저번에 그건 어떻게 됐어요?"
- 저번에...? 아, 그 병원 거?
"네, 병원에서 윤슬이 봐주는 대신에 소설 전개로 쓰겠다고 막 좋아했잖아요."
얼마 전.
나는 가게를 하루 쉬고 건강검진을 다녀왔다.
강씨 아저씨가 책방을 여전히 운영하는 중이셨다면 그쪽에 맡겼겠지만.
현재 아내분의 사정으로 바쁘시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를 대신하여 부른 것이, 최근에 나름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 중인.
우리 가게 대표 대식가 손님이자 유명 상업 작가 백수인씨인데. 또, 윤슬이와 사이가 좋다.
그래서 윤슬이를, 내가 검진을 받을 동안만 돌봐줄 수 없냐고 부탁했더니.
소설 전개로 그 내용을 써도 된다면 얼마든지 해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렇게 거래가 성사되었고, 건강검진이 무사히 끝날 무렵 백수인씨는 극도로 흥분해있었다.
- 검사, 다 끝난 거죠? 몸은 괜찮은 거죠? 저 이제 가봐도 되는 거죠?
말이 다급해지는 게 평소 같지 않았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는지 물어보기도 전에 병원에서 떠나버렸다.
그래서 윤슬이한테 물어보게 되었는데.
'움... 몬가 조은 생각이 났대. 그래서 빨리 써야지 대겠다구 막 그래써.'
황치호씨도 그렇고.
백수인씨도 그렇고.
상업 작가들이란 전개와 아이디어에 목숨을 거는 듯하다.
그리고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서.
백수인씨에게 그날 써내리고자 했던 글을 잘 마무리되었는지 물은 셈인데.
대답 대신 스마트폰을 보여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