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레전드 오브 맛짱짱(3)
소설의 댓글창은 호평으로 가득했다.
대공이 자기 딸을 얼마나 아끼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던가.
"소설 내용이 어땠길래 그래요?"
- 전개되는 내용이 어떻냐면. 대공이 큰 부상을 입고 정신을 잃었는데도. 계속 딸의 이름, 리시아를 작게 되뇌이는 부분이거든요.
"절절한 에피소드네요. 근데 그 내용 전개가 어떻게 제 건강검진이랑 이어지는 거예요?"
- 수면 마취 때 윤슬이 이름만 계속 부르시던데.
"제가요?"
건강 검진 때 한 번 수면 마취를 했다.
내시경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수면 내시경을 하지 않았더라면 굳이 다른 사람을 부를 것도 없었을 텐데.
아무래도 국내 암 발병률도 높고 하니, 내시경을 한 번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옆에 앉아있던 윤슬이가 끼어든다.
"움! 옵바가 막 자구 있눈데. 꿈틀거리믄서 윤스리 이름 막 불러써."
"그랬단 말야?"
- 심지어 잠꼬대 하는 내용도 되게 재밌던데.
"...?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윤슬이가 옆에서 손을 번쩍 든다.
그리곤 테이블에 꿈지럭거리면서 눕더니 냅다 자는 척을 한다.
"우움... 윤스리... 다섯 끄릇... 여섯 끄릇... 우아! 디게 마니 머그네? 역씨 내 동생."
"내가 그랬다고?"
- 네, 윤슬이가 되게 잘 따라하네요. 거의 저런 느낌이었어요.
괜스레 쑥쓰러워진다.
원래 수면마취를 하고, 일어나기 전즈음에 잠꼬대를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듣기는 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직접 윤슬이와 백수인씨는 목격한 모양이다.
"그럼 대공이 기절해서 자기 딸 이름 부르는 씬을..."
- 맞아요. 주현씨가 중얼거리는 장면 보고 영감 받아서 쓴 거죠.
그런 비하인드가 있을 줄이야.
왜 그런 에피소드가 소설에 전개되었는지, 당사자가 되어 알고 나니 부끄러워지긴 하지만.
윤슬이를 잘 돌봐주셨기 때문에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 근데 무슨 꿈을 꿨길래 그런 말을 했대요? 다섯 그릇... 여섯 그릇...?
"윤스리두 궁금허다!"
여전히 테이블 위에 퍼질러 누워있는 채로 윤슬이도 나를 응시한다.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해요. 제가 그런 말을 직접 했는지도 기억 못하는데. 애초에 수면 마취 중이었잖아요."
- 그렇긴 한데. 그냥 물어보는 거죠. 혹시나 해서.
"혹씨나 해성~."
콧소리 섞어가며 백수인씨의 말을 따라하는 윤슬이.
말랑한 볼을 손으로 쓰다듬는다.
무슨 꿈인지 당연히 기억은 안 난다.
그래서 기억하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그럼에도 짐작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종종 그런 꿈을 꾼다.
우리 가게, 오누이 식당에 윤슬이랑 단 둘이 있는 꿈.
그런데 문제는 출입문이 사라지는 것이다.
완전히 갇혀버린다.
그렇게 되면 별 수 있겠는가.
굶어죽지 않도록 밥이나 튼실히 먹이는 수밖에.
"옵바 윤스리 한 그릇 더 쥬!"
"오냐."
우걱우걱-!
....
"한 그릇 더!"
"그려."
우걱우걱-!
....
이런 패턴이 몇 번 반복되다보면 어느새 윤슬이가 앉은 테이블에만 그릇이 매우 많이 쌓여있게 된다.
그릇이 쌓인 높이만 윤슬이 키보다 더 크니 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꿈을 꾸고 잠에서 깨면 기분이 좋다. 꿈은 무의식의 세계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손님들이 내 요리를 드시는 걸 보는 게 좋다.
그중에서도 누구에게 음식을 먹이고 싶냐고 묻는다면 단연 내 동생이다.
먹는 모습이 하도 복스러우니 말이다.
그런 나의 마음이 기묘한 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후루루룰룩-!"
옆에서 열심히 맛짱짱 우유를 빨아먹고 있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오빠가 간식 하나 만들어줄까요?"
"쪼록... 아니, 갠짜나."
"왜? 지금은 별루 먹고 싶지가 않아?"
"아니. 옵바눈 일을 넘무 마니 해. 그니깐 쪼끔 쉬어야대."
"그래서 윤슬이가 배려를 해주는 거야?"
"쫄록- 쪼록... 움... 당연해."
그렇게 맛짱짱 우유를 다 빨아먹고.
백수인씨도 식사를 마쳤을 무렵.
가게 문이 덜컥 열리며, 황치호씨가 들어온다.
- 고구마 아저씨 등장~!
"고구마 아저씨 왔따...!"
윤슬이가 쫄래쫄래 달려나가 반긴다.
원래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이지만.
일전에 치호씨가 우리 공모전 시나리오를 써주기로 하면서, 두 사람은 극적으로 화해를 했다.
치호씨는 자연스레 바 테이블 쪽에 자리를 잡아 앉는다.
그리고는 팔에 걸쳐들고 있던 에코백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낸다.
나와 윤슬이는 자연스레 그 옆에 앉았다.
- 짜잔-! 여기 완성본.
"이게 촬영 시나리오 완성본이에요?"
- 넵. 한 번 확인해보세요.
자신만만한 표정의 치호씨.
투명 파일에 담긴 종이 더미의 두께가 예상보다는 꽤 두껍다?
"옵바! 읽어주세여."
"읽어드려야죠."
윤슬이를 무릎에 앉힌 채로 소리를 내어 읽기 시작한다.
"레전드 오브 맛짱짱(가제)"
"움? 레전드가 모야?"
"되게 좋은 거."
"아항. 그러믄 옵바는 레전드네."
"보통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아. 사람 말고 물건한테만 사용해."
"그러믄 옵바 요리는 레전드네. 맛짱짱이두 레전드구."
"옳지. 그래서 치호 아저씨가 써온 시나리오 이름도 레전드 오브 맛짱짱이잖아."
"아항! 이해됐슴미다!"
약간 러프한 설명이었지만 다섯 살 눈높이에 맞추지 않았나 싶다.
우선 시나리오 개괄을 읽어본다.
[맛짱짱 우유, 그것은 전설의 영약 엘릭서에 견줄만한 신성한 포션이다. 용사 장윤슬은 맛짱짱 우유를 마시는 것을 통해 마왕을 무찌르고 세계의 평화를 지키게 된다.]
"움? 윤스리가 용사?!"
"그렇네. 치호 아저씨가 윤슬이를 용사로 정하고, 스토리를 쓰셨나봐. 주인공 됐네?"
"히힝! 주인공!"
윤슬이는 주인공이 됐다는 사실이 기쁜지 자기 볼을 움켜쥐고는 손을 꿈지럭거린다.
[그러나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일은 녹록지 않다. 마왕 황치호의 대대적인 압제 아래 세상은 혼돈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용사 장윤슬은 마왕에 맞설 만한 힘을 길러낼 필요가 있다.]
"힘을 길러야 대?"
"그렇다고 하는데?"
윤슬이는 폴짝 뛰어내리더니.
결심을 굳히듯 주먹을 불끈 쥐고는 가게 바닥에 엎드린다.
그리고 여태껏 여러 번 실패했던 팔굽혀펴기를 시도한다!
"끼이이잉-!!"
"윤슬이 그러다가 또 방귀를 뀌겠는데?"
"앗...!"
조금 이전의 이야기다.
윤슬이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자, 우리 가게 단골 지아 앞에서 팔굽혀펴기를 선보였다.
그러나 힘을 너무 과하게 준 나머지 궁뎅이에서 가스가 새어나왔지 뭔가.
그런 사태가 재발하는 것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다시 일어나서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린다.
다시 안아들어서 무릎에 앉힌다.
그런데 내게 약간 불만이 있는 것 같다.
"치잉, 고구마 아저찌 앞에서 방기 얘기눈 꺼내므는 윤스리가 부끄럽지."
"그렇단 말야? 오빠가 실수를 했네. 미안해요."
"따악 한 번만 용서해줄 꺼야."
"감사합니다."
치호씨는 웬일로 센스를 발휘하여 방귀 얘기는 못 들은 척해주신다.
딴청을 피우며 스마트폰을 보는 중이다.
[용사, 장윤슬이 힘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마왕이 세상을 완전히 집어삼키기까진 머지 않았으니. 일반적인 수련 방법으로는 도저히 제 시간에 그를 쓰러뜨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익! 마왕. 윤스리가 한 주먹으루다가 얍!"
윤슬이는 회심의 정권지르기를 선보인다.
저 콩알펀치는, 내가 몇 대 맞아봐서 아는 데 오히려 힐링이 된다.
[그리하여 용사의 수련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바로 맛짱짱 우유! 보통 맛 우유부터 초코, 딸기, 바나나까지. 각 우유를 한 번씩 마실 때마다 마왕에게 맞설 힘이 생긴다. 과연 용사 장윤슬은 4가지 맛 우유를 모두 마심으로써 마왕을 쓰러뜨리고 세상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오오...! 그러믄 윤스리가 맛짱짱이를 마시믄 쌔지는 거야?"
- 그런 거지.
"맛짱짱이두 마시구. 음청 쌔지구. 옵바두 지키구. 오오...! 이거 대다내! 마니 조은 이야기야. 저번에 그 앤디랑 애니 얘기랑은 아예 달러!"
윤슬이 취향을 저격한 것 같다.
잘 된 일이다.
이번 공모전 동영상 촬영의 목적은, 물론 수상도 있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윤슬이가 만족하는 일이다.
동생이 만족할 만한 이야기와 영상이 나온다면야 그깟 등수가 중요하겠는가.
라고 마음 먹고.
마지막 부분까지 천천히 정독했는데.
웬 반전이 이렇게 빡세단 말인가.
"그럼 시나리오 개괄은 이런 느낌인 거고. 마왕 역할은... 치호씨가 하는 거라고요?"
- 네, 저가 하려고요. 저 은근 이런 거 욕심 있음.
"그럼 부탁 좀 할게요."
오히려 좋다.
치호씨가 안 하면 내가 마왕을 할 뻔했다.
그랬다면 윤슬이는 틀림없이 망설였을 것이다.
'움?! 옵바가 마왕이므는 윤스리가 공격을 못해.'
라면서.
진짜로 그랬을지 물어볼까.
"윤슬아."
"왜여?"
"만약 오빠가 마왕이었으면 윤슬이는 맛짱짱 우유를 먹고 공격을 해요? 아니면 봐줘요?"
"공격을 해여."
한 치의 망설임 없는 즉답.
유감.
"오빠인데도 공격을 한다는 말이야?"
"웅! 대신 옵바는 윤스리가 꼬옥 안아주므는 대. 그러믄 마왕 그만할 거자나."
"앗, 그런 깊은 뜻이. 그럼 치호 아저씨가 마왕이면?"
"그러믄 안 바주지."
윤슬이는 무서운 기세로 공중에 콩알펀치를 휘갈긴다.
힘을 과시하려는 5세.
귀엽다.
- 어차피 출연은 저랑 윤슬이 정도로 끝내면 될 테고. 각본은 정해졌으니까. 이제 촬영만 하면 되는데요.
"어차피 공모전 응모 기간은 널널하니까요. 치호씨 오시는 날만 몇 번 시간 내어서, 브레이크 타임에 찍으면 될 것 같네요."
- 네, 뭐 찍는 거야. 식당 자주 오니까 언제든지 괜찮긴 한데. 다른 문제가 있긴 해요.
"문제요? 촬영은 어차피 제가 갖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할 생각인데요."
딱히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요즘엔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찍어 상영하는 영화제 같은 것도 열릴 정도이니 말이다.
이래 봬도 지금 사용 중인 기종은 촬영 기능이 준수하다고 유명한 녀석이다.
- 아, 촬영 문제가 아니라요. 다른 쪽이 살짝 걸려서요. 시나리오 개괄 아래 쪽에 대사나 묘사 지문 보면 이해하실 것 같은데.
그 밑에는 촬영 소품 같은 것들이 적혀있는데.
우선 맛짱짱 우유가 맛 별로 각 하나씩 필요하고 또...
"아, 이거 때문에."
자세히 읽어보니,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이 동영상의 전개 자체가 판타지스럽게 흘러간다는 점이다.
촬영은 우선 근처에서 어떻게든 해낸다고 쳐도.
결국 스토리의 흐름 상 윤슬이가 치호씨를 물리쳐야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특수 효과 같은 게, 잡스러운 수준이더라도, 들어가지 않게 된다면.
영상이 판타지로서의 느낌을 온전히 잃게 된다.
되려 볼품없어질 것이다.
- 주현씨 혹시 영상에 특수 효과 같은 거 넣을 줄 알아요? 그런 거 공부하셨나?
"아뇨, 아무래도 그런 쪽은 젬병이죠."
- 아아... 거기까진 제가 미처 생각을 못했네. 이거 누가 효과를 입혀줘야 되는데.
"믿는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긴 한데."
- 그래요? 누구 지인 중에 영상 편집하는 분이라도 있나요?
"그게 본업인 친구는 아닌데. 꽤 하는 것 같더라고요, 아마도."
- 요즘엔 너튜브가 활발하다보니까 그쪽에 취미 가진 분도 많죠. 저도 한 번 배워보려고 했는데 꽤 어렵던데. 혹시 그분은 본업이 어떻게 된대요? 시간 내서 그런 취미 내기가 여간 쉬운 게 아니다보니 궁금하네.
"본업... 이 뭔지는 모르겠고. 일단 헬스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 정도만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