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레전드 오브 맛짱짱(4)
- 취미가 많으시네.
확실히.
취미가 많은 녀석인 것 같다.
만화책을 본다고 들었던 적도 있으니.
- 그럼 소품 같은 것만 대략적으로 준비해서 내일모레쯤부터 촬영하는 걸로 할까요?
"움! 윤스리는 언제든 갠짜나."
동생은 양팔을 번쩍 위로 들며 의지를 표명한다.
그렇게 우리 세 사람의 영상 촬영은 시작되었다.
**
스산한 바람이 분다.
오롯이 적막한 바람 소리만이 사위를 감싼다.
해는 잔악하게 대지를 지지고.
생명의 자취가 드물다.
그런 황량한 벌판.
고고한 전사가 우뚝 서있다.
신장 무려 105cm.
몸무게 미상(본인의 강력한 요청으로 비공개).
휘황찬란한 갑주(라고 가정한 자켓)를 두른 전설의 용사.
장윤슬이다.
"우우... 마지막 맛짱짱이를 찾지 못해써."
용사의 미간이 좁아진다.
근심이 가득하다.
네 가지 맛짱짱 우유를 모두 마셔야만이 마왕을 타도할 수 있음에도.
아직 딸기, 초코, 바나나맛 우유밖에는 마시지 못했다.
이대로는 힘이 모자라다.
마왕을 타도할 만큼의, 강력한 힘이 용사 장윤슬에게는 필요했다.
"마왕... 쓰러뜨려야 해!"
그녀는 마왕을 쓰러뜨릴 용사로 지목된 인재이니.
이제껏 3가지 맛의 맛짱짱 우유를 얻는 과정도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초코 우유를 얻기 위해서 떠났던 여정은 고난이었다.
용사 장윤슬의 맹우.
맹견 루이가 마왕에게 세뇌당하여 지옥의 파수꾼 루이베로스로 변해버린 것.
기존에 있던 한 갈래 목 옆으로 두 개의 목이 더 생겨 끔찍한 외형(이라는 설정이지만 실제로 그렇다면 오히려 3배로 귀여워질 것이라는 게 용사의 견해다.).
루이베로스를 무찔러야만 초코 우유를 얻을 수 있었기에 장윤슬은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며 그를 해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 윤스리가 히미 부족해서... 지켜줄 쑤가 업써!!"
뭉...
먹어들어가는 루이베로스의 목소리(영상에서는 구슬픈 울음을 뱉는 것처럼 연출되지만 실제로는 이상한 분장을 한 채로 촬영을 돕게 되어서 곤란해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는 최후의 순간 세뇌가 풀려 제정신을 차리게 된다.
그리고 젖먹던 힘까지 다해 용사에게 맛짱짱의 가호를 내리며 최후를 맞이한다.
이윽고 지금에 이른다.
- 크큭... 용사, 이를 어쩌나? 아직 네 가지 맛의 맛짱짱 우유를 모두 모으지 못한 모양이군?
"우우... 어뜨케 아랐지."
- 어떻게 알았냐고?!! 그거 좋은 질문이야!
마왕 황치호는 찢어지는 듯 높은 톤의 목소리로 폭소하며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아니! 그거눈!"
- 그래! 맛짱짱 우유 보통 맛이다. 네가 당연히 얻지를 못했겠지. 왜냐면 내가 계속 갖고 있었으니까!!
"치사하당! 마왕이 그러는 게 어디 이써...!"
- 어디 있긴, 여기 있지. 요즘 빌런 세계에선 두뇌파가 인기몰이한다는 것도 모르나?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마왕이 서서히 용사의 숨통을 조여온다.
거리는 좁아지고.
호흡은 가빠온다.
- 어떤가? 용사. 이제 슬슬 항복할 생각이 드나?
"우우... 그럴 쑤는 업써."
- 네가 항복하겠다고 한다면 나의 근위대장 자리를 넘겨주도록 하지. 어때?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제안 아닌가?
"움? 그래...?"
- 응. 줄게. 근위대장.
"그러믄 용사 그만할게. 그거 조은 거지?"
- 당연하지! 네가 내 옆에서 보초를 서는 것만으로 3대는 먹고 살만한 돈과 땅이 주어진다고. 그리고 명예는 덤이지.
"오오...! 그러믄 용사보다두 훨씬 좋자나? 용사 때려치울게."
화기애애한 표정으로, 마왕과 용사는 악수를 나눈다.
그렇게 서로 손을 잡고, 뉘역뉘역 지는 석양 너머로 서서히 걸어간다...
세계는 온전히 마왕의 손에 넘어가고.
그렇게 10년이 지난다.
마왕의 근위대장이 되어버린 용사.
그녀는 용사일 때보다도 훨씬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푹신하고 포근한 침대.
따끈하고 비싼 식재료로 제공되는 식사.
값비싼 장신구로 치장하는 생활까지.
최고의 대우를, 마왕성에서 받게 된 것!
- 어떤가, 용사. 아니, 근위대장. 마왕성에서는 조금 살만한가?
"움! 아주 살만함미다. 마왕님."
그 10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질병을 앓던 용사의 친오빠는 마왕의 힘을 통해 영생의 몸을 얻게 되었고.
맹견 루이는 루이베로스로서 부활하여 새 삶을 살게 된다.
용사일 때보다 오히려 좋아...!
그리고 마왕의 생일이 되었다.
마왕 황치호는 세상을 점령한 만큼 용의주도한 성격으로, 특별한 날에는 오직 자신들의 최측근만을 불러들여 파티를 벌인다.
그 자리에는 전직 용사, 현직 근위대장 장윤슬이 끼게 되는데.
정적.
정적.
정적.
사그라드는 호흡.
그리고 길게 늘어지는 비명.
피로 물든 파티장.
그곳의 중앙, 마왕의 옥좌에서 그의 가슴에 근위대장의 칼이 꽂혀들어간 것!
- 아, 아니... 이럴 수가.
"크크큭... 계획대로닷! 마왕!"
- 용사, 아니 근위대장... 난 그대를 믿었는데. 어째서?
"이유? 간딴하지. 마왕을 쓰러뜨리면 이제 세상이 윤스리 꺼라구!"
- 크, 크학...!
마왕은 그대로 숨을 거두고.
세상은 용사의 손아귀에 넘아가게 된다.
그렇게 전직 용사는 2대 마왕이 되었다.
새로운 마왕의 옥좌에 앉은 용사, 장윤슬.
그녀는 선대 마왕 황치호가 남기고 간 맛짱짱 우유로 한 모금 축인다.
"움... 이 마시야. 군자의 복쑤는 10년이 걸려두 안 늦거둔."
(본인이 말해놓고도 무슨 뜻인지 모름.)
그렇게 새로이 마왕이 된 용사는 친오빠, 루이베로스와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레전드 오브 맛짱짱 End]
**
- 제가 말씀드린 대로 CG 되게 잘 들어갔네요?
"아, 이거 해주기로 한 친구가 의외로 유능하더라고요."
- 잔인한 장면엔 모자이크 처리까지 돼있으니, 딱히 문제될 것도 없고. 이 정도면 수상은 따놓은 당상입니다.
"움... 진짜루?"
윤슬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치호씨를 노려본다.
사실 의심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저도 윤슬이 말에 조금 동의하는 게... 이런 시나리오가 진짜 뽑힐까요?"
- 그럼요. 저만 믿으세요.
"윤스리가 마싯는 것두 먹구. 루이두 살아나구. 옵바두 안 아프구. 다 조아. 하지만 용사가 마왕이 대자나! 이게 모야?"
바로 그 지점이다.
이런 정도에서 벗어난 스토리가 잘 먹힐지 솔직히 의심이 되긴 한다.
- 원래 대중들은 개연성보다 재미를 중시하거든요. 저만 믿으라니까요!
확실히 재미는 있다.
중간까지 보면 누가 이런 결말로 끝날지 예상이나 하겠는가.
개인적으로 네 가지 맛 우유를 먹어야 한다는 설정, 그리고 루이베로스가 목숨을 잃을 때 용사에게 가호를 내렸다는 설정 탓에 그 가호 덕으로 어떻게든 마왕에게서 네번째 맛짱짱 우유를 빼앗는 스토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웬 걸?
그딴 거 없고 그냥 마왕이랑 한 편이 되어버린다.
즉, 전부 맥거핀이었던 것.
시나리오의 전체적인 통일성이 엉망이긴 하다.
그럼에도 이 영상을 처음 접하면서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촬영도 무사히 진행되었고.
영상 편집을 도와준 친구의 어마무시한 활약 덕분에 꽤 그럴싸해보인다.
웬만한 대형 너튜브 채널의 영상 컨텐츠에 견줄 정도는 된다.
"그럼 일단 이대로 공모전에 투고해보죠. 어차피 완성된 마당에. 치호씨 시나리오 써주시느라 수고하셨어요. 재미있었거든요."
"움... 윤스리두 재미 있어써."
- 하하하! 그럼 됐죠.
명료하다. 그리고 치호씨의 말이 맞다.
이게 설령 수상작이 되지 않더라도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일이다.
윤슬이랑 재미있게 영상 촬영을 마쳤으니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놀랍게도 우리가 공모전에 투고한 영상은 수상 목록에 들게 되었다.
[인기상: 레전드 오브 맛짱짱]
"오! 옵바, 윤스리랑 옵바랑 상 받아써."
".... 진짜네."
그러나 1등과 2등격이라고 할 수 있는, 대상과 최우수상은 놓쳐버렸다.
해당 영상들은 아이들의 시선에 맞춘, 온건하고 심플한 영상이었다. 이후 맛짱짱 우유의 텔레비전 광고에 쓰일 계획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확실히 우리가 찍은 영상은 그런 느낌으로 쓰이긴 어렵다.
다만 우리가 3등격에 해당하는 인기상을 받을 수 있던 이유는 황치호씨의 스토리와 그걸 열심히 연기한 윤슬이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막장 스토리로 용사와 마왕의 대립 클리셰를 180도 뒤엎은 우리의 동영상은 맛짱짱 우유 공모전의 시청자 투표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 아니, 전개 실화임? 용사 인성이 사탄도 한 수 접고 들어가겠네.
- 마왕 개억까 당함 ㅋㅋㅋ 이쯤 되면 차라리 마왕이 불쌍하다. 용사한테 해줄 건 다해줬는데 배신당했네.
- 근데 저 용사 역할 맡은 애기, 저번에 어디 영상에서 본 것 같은데?
등등.
오히려 최우수상이나 대상보다도 더 많은 댓글과 좋아요를 받으며 SNS 등지에서는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우리가 촬영한 영상은 텔레비전 광고 대신, 맛짱짱 우유의 인터넷 홍보 홈페이지에 게시되었고.
가끔 심심할 때마다 윤슬이한테 틀어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인기상을 수상한 덕에 우린 몇 가지 상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는데.
홍보 홈페이지에 동영상을 게시하는 값으로 300만원 상당의 상금을 받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
맛짱짱 우유를 반 년 동안 무료로 배달받는 서비스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매일 다른 맛으로 자동 배달해준다고 하시니.
"후후... 열씨미 영상을 찌근 보람이 이써."
5세는 대만족이다.
나도 간식값이 굳은 데다가 상금을 받은 터라, 더할 나위 없는 결과라고 생각한다.
[달님: 제가 영상 편집해드렸는데, 저는 뭐 없나요?]
그렇다.
레전드 오브 맛짱짱이 수상한 데에는 숨은 공신이 있었으니, 그것은 달님이다.
일전에 윤슬이 생일날 달님이가 우리가 놀던 장면을 영상으로 찍어 너튜브에 업로드한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혹시 그런 쪽이 취미인가 싶어 부탁해봤는데.
[달님: 연습 삼아 나쁘지 않겠네요. 까짓 거 해드리죠, 뭐.]
의외로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은근히 한가한 듯했다.
그렇게 달님이가 직접 편집하여 만들어준 영상은 예상 외로 고퀄리티였다.
시나리오에서 인기몰이를 했다면, 영상에 첨가된 CG는 그걸 보완하는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영상 제작에 도움을 준 치호씨에겐 사장 권한으로 일주일 간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기로 했다.
또, 달님이에겐 원하는 프로틴을 하나 구매할 수 있게끔 기프티콘을 보내주었다.
[햇님: ㅋㅋ 남의 프로틴 뺐어먹는 게 꿀맛.]
저쪽 남매도 여전히 사이가 좋은 것 같아 흐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