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오른팔과 요리교실(1)
숨이 막혀온다.
눈에 익은 두 남자.
내 앞을 가로막는, 그 두 남자의 걸음이 평소보다 족히 다섯 배는 무겁게 느껴진다.
살이 쪘거나, 아니면 근육을 키워 무게가 늘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거리가 좁아진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익숙한 공간인 오누이 식당 내 주방 안이 꽉 막힌 골목처럼 느껴질 정도로.
기세.
오직 기세 탓이다.
네 개의 서슬퍼런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 알려주세여.
- 아니, 저한테 가르쳐주라구여. 주혀니 형아.
"난 아는 게 없어."
그러나 뜻을 굽힐 수는 없었다.
이래 봬도 대한건아다.
학력 문제로 군대를 안 가긴 하지만.
그럼에도 의지의 한국인이란 말이다.
이런 데서 무너질 수는 없다.
반드시 지켜야할 것이 있기에.
- 발뺌해두 소용 업써여.
- 이미 다 알구 있거든여!
나한테 굳이 왜 이러는 것일까.
그런 의문에 관하여 짐작 가는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다면 나는 더욱이 강경하게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우리 동생은 고작 다섯 살밖에 안 되는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런 동생을 위하여.
나는 함구하고, 함구하리.
"너희에게 알려줄 건 없다! 썩 돌아가!"
- 그럴 쑤는 없써여!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가게 끝자락의 테이블에서 동생은 맛짱짱 우유 바나나맛을 호록- 호록- 빨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움... 바부들?"
세 남자의 차디찬 항쟁을 '바보들', 그 하찮은 세 글자로 줄여버리는 5세였다.
우리 가게에 자주 들르는, 꼬마 남자아이들.
그 둘이 내 앞에서 이토록 저돌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 데에는 일련의 과정이 있다.
이윽고 싹터버린 사랑이란 감정 앞에 서게 된,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다.
**
"옵바... 오때...? 우읏!"
"잠깐만 기다려봐."
"빠, 빨리 해이지대... 윤스리 힘두러."
"...."
"움? 왜 그러케 바."
"너 까치발 들고 있지?"
"잉...? 들켰따."
윤슬이가 혀를 배쭉 내밀며 머쓱하게 웃는다.
"그럴 줄 알았다. 어떻게 갑자기 5cm나 커지나 했어."
"히힝- 빨리 크구 시퍼서 발 들어버려써."
티비나 벽장 등으로 가려지지 않은, 맨 벽 부분에 윤슬이가 차렷 자세로 딱 붙어있다.
신장을 재기 위해서다.
정확한 치수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아니고.
단지 무럭무럭 클 시기이니 한 달마다 벽에다 대고 선을 그어보고 있다.
물론 우리 집이 아니라, 전셋집이라서 벽 위에다가 B4 용지를 붙여두긴 했다.
집주인이 따로 있으니, 소중하게 다루는 게 매너인 것쯤은 알고 있다.
달마다 키를 재는 건 월말에 진행한다.
주로 아침에.
왜냐면 인간의 신장은 아침보다 밤에 더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런 것에도 민감한 우리의 5세를 위해 최대한 배려를 하여 출근 준비 시간까지 할애해 신장 측정을 하고 있는 것인데.
오늘따라 갑자기 대중 잡아 5cm 커버린 것이다.
지난 달 기록에 비해서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기에 '까치발'이란 치트키를 썼다는 것은 꽤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나에게 치트키 사용이 적발된 5세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제대로 된 자세를 잡는다.
정수리에 팬을 붙여 선을 긋는다.
스윽-
"옵바, 옵바. 어때? 빨리, 빨리 바바!"
"잠시만요."
눈매를 좁히며 선과 선 사이의 간격을 유심히 살핀다.
확인 결과는 명백했다.
"컸네!"
"얼마나 커써?"
"글쎄. 이 정도면 1cm 안팍 아닐까?"
"움...? 그게 얼마나인지눈 몰루는데."
"윤슬이 새끼 손가락 있지?"
"이써. 없쓰며는 그거는 넘무 아프지."
윤슬이는 자랑스럽게 자기 손등을 보여주며 새끼손가락만 하나 펴보인다.
초등학생 때 썼던 몽당연필만하다.
요즘 애들은 연필을 쓰기나 할는지 모르겠다.
"그 새끼 손가락에 끝에 하얀 부분 있지?"
"움. 이써."
"그거만큼 컸어."
"이익...!"
5세.
소노(小怒)!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오른다.
허공을 향하여 콩알 펀치 5회 시전.
효과는 미비했다.
"왜 화가 났어."
"윤스리는 빨리 크구 싶으다구. 근데 이거밖에 안 크므는 언제 옵바보다두 더 커져?!!"
"그래도 달마다 이만큼 크는 게 어디야."
"그걸루는 모잘러!"
분이 좀처럼 풀리지 않는 모양.
그러나 키가 안 크는 것만큼은 어떻게 해줄 도리가 없다.
또, 윤슬이는 굳이 따지자면 또래보다 아주 조금이지만 큰 편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종종 자녀를 키우는 손님들께선 윤슬이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곤 한다.
- 어머! 윤슬이 저번보다 더 키 큰 모양이다. 우리 애랑 동갑인데, 조금 더 큰 것 같은데?
혹은.
- 윤슬이 글씨도 쓸 줄 알어? 꽤 빠르네? 우리 애는 다섯살 때 이만큼까진 글을 못 떼었던 것 같은데.
등등.
윤슬이의 성장 속도가 느린 편인 것 같진 않았다.
지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그럼에도 5세가 이리도 분노한 이유에 대해서 짐작 가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요근래 윤슬이의 베스트 프렌드 자리를 차지한 세 존재가 있다.
세 명이 아니라 세 존재라고 굳이 표현하는 것은 루이가 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남는 두 사람은 누구냐.
미정 선생님의 아들인 차유민군, 6세.
그리고 위대한 모험가 고양이의 절친 정시후군 7세.
두 사람이다.
성인, 아니 고등학생쯤만 되어도 한두살 차이가 그리 크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때쯤이면 성장도 거의 멈출 때이고, 어느 정도 사회성도 갖출 때이니 말이다.
반면 유년기 아이들의 경우 1년 차이에 따라 언어부터 신장까지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 음, 윤슬이.
'움?'
어제 있던 일이다.
시후가 오랜만에 가게로 놀러왔다.
시후네 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러온 것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윤슬이 앞에 바짝 다가가더니 자기 정수리로부터 윤슬이 머리 위까지 손을 오고 가며 신장을 대중 잡았다.
그게 윤슬이 입장에서는 조금 분하게 느껴진 것이다.
'이익! 시후 모하는 거야!!'
- 아, 아니. 그... 윤슬이가 얼마나 큰지 궁금해서 그래써.
"윤스리 안 짝거둔!!"
- 알어... 근데 그냥 궁금해서.
5세는 크게 삐졌다.
안 그래도 시후한테는 열등감 아닌 열등감을 미미하게 안고 있던 상태였다.
왜냐면 일곱 살인 시후는 윤슬이보다 힘도 좋고, 신장도 약간 더 크다. 그 덕에 얼마 전, 우리 가게를 도와줄 때 눈부신 활약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런 시후가 신장을 서로 비교하는 행동을 한 게, 윤슬이 입장에서는 약간 무시당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5세치곤 꽤나 섬세하다고 볼 수 있겠다.
- 어후... 미안해요, 주현씨. 시후가 내년에 학교 가다보니까. 자기 키를 신경 쓰더라고요. 그래서 저런 것 같은데.
'아아... 그랬군요.'
그러니까 시후도 악의가 있던 것은 아니다.
끽 해야 시후도 일곱 살인데 악한 의도가 있었겠는가.
그때 그 사태는 내가 시후에게 묘수를 알려주는 것으로 어떻게든 무마시켰다.
윤슬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 중 하나인, 금박지에 둘러쌓인 초콜렛을 공양하는 것.
시후가 얼마 없는 자기 용돈을 털어서 윤슬이에게 그걸 선물했던 것을 보면(심지어 시후 어머니가 대신 사주겠다는 것을 우기고 우기며 본인이 샀다.).
시후도 아마 윤슬이를 여간 아끼는 게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오랜만에 화가 날 뻔했다.
강릉에서 함께 놀았던 유민이의 얼굴이 어른거리면서, 형용할 수 없는 화가 치밀어올랐달까.
내 동생은 내가 지킨다.
좌우지간 오늘 아침 신장을 구태여 확인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다. 어차피 9월의 말이기도 하고, 시기 상으로도 한 번 확인할 때였으니 말이다.
신장이 얼마 자라지 않았다는 사실에 소노(小怒)한 윤슬이를 달래기 위해 입에 초콜렛을 물려주고.
오늘도 역시 오누이 식당으로 출근했다.
"움... 쪼코."
어느새 기분이 풀린 5세.
먹을 것은 위대하고.
윤슬이 한정 초코는 가장 값비싼 약재에 견줄 수 있다고 단언한다.
"옵바! 근데 이따가 유미니 오지?"
"응, 미정 선생님이랑 같이 온다고 하더라."
"알게쏘."
오늘은 주말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미정 선생님과 유민이가 들리겠다고 연락이 왔다.
9월이 되자 미정 선생님이 바쁘신 모양이었다.
학교에서 체육 교과뿐만 아니라 담임도 맡고 계시니 사정에 따라 업무가 많은 시기도 있을 것이다.
특히 지아나 수영이, 미정 선생님 반 아이들이 일러준 바에 따르면 요근래 특히 다크서클이 심해졌다고 했던 것 같다.
그 덕에 체육 교과 시간에 대충 공을 던져주며 자유 시간을 주는 것 같아서, 오히려 좋다고 했던 것 같다.
이따가 유민이와 함께 들르시면 간식도 서비스로 드리고, 잘해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앞선다.
윤슬이도 오랜만에 유민이랑 보는 게 신이 나는지.
아니면 신경 쓰이는 부분이라도 있는 건지.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윤슬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움... 아무 것두 아니야. 갠짜나."
심각한 표정은 아니었기에 굳이 깊게 파고들지 않고, 장사 준비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몇 테이블이 오고 가고.
장사가 지속될 때쯤.
반가운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미니! 그리구 선샌님!"
- 어이구, 윤슬이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 윤슬이...!
유민이가 선생님 손을 꼬옥 잡은 채로 볼을 밝힌다.
시선은 45도.
윤슬이 눈을 제대로 못 마주친다.
그런 수줍은 남자, 6세 차유민군에게 윤슬이가 다가간다.
악수를 청한다.
한 손에는 미정 쌤 손.
반대쪽에는 윤슬이 손.
그런데 어째서인지.
윤슬이 손을 잡으니까 볼이 더욱 발그레 달아오르는 것만 같다.
아아, 이제껏 이토록 격렬한 분노를 느낀 적은 없었다.
- 야아- 주현아. 선생님 배고프다. 아침도 안 먹고 왔다.
"유민이도 안 먹었어요?"
- 유민이는 김밥 멕였어.
"어휴, 제대로 된 것 좀 먹이시지."
- 천국김밥이 마침 우리집 가까이에 있지, 뭐니. 내 의지는 가스레인지에 가깝지 않아. 너와는 다르다고.
여느 때와 같이 후줄근한 추리닝을 입은 미정 쌤.
다크서클이 약간 내려온 듯 보이기도 하지만, 주말이라 그런지 그나마 컨디션은 나쁘지 않아보인다.
이어서 시선이 5세와 6세의 회담 쪽으로 쏠린다.
마침 윤슬이가 입을 연다.
"움. 유미니, 한 번 등 보여조."
- 응...? 등?
유민이는 5세의 말에 순순히 따라준다.
똑바로 선 채로 등을 보인다.
그리고 윤슬이는 곧바로 자신도 뒤를 돌아 유민이와 등을 맞댄다.
그러자 다시 한 번 유민이의 볼이 달아오른다.
"크윽..."
분노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