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파괴신이 굴러들어옴(2)
그밖에 더 잘 표현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심지어 생김새가 매우 수상하다.
검은색 플라스틱으로 길게 빼인 몸체에 빨간색 버튼이 위에 볼록 튀어나온 형태다.
마치 이걸 누르면 미사일이라도 발사가 될 것만 같다.
"옵바, 그게 모야?"
".... 오빠도 모르겠다."
심상치 않은 물건이란 것만큼은 확실했다.
오누이가 무슨 용도로 쓰는 물건인지 알려주지도 않았고. 달랑 똑딱이 하나만 보내줬다는 건 십중팔구 어떤 사건이 발생하게끔 만드는 리모컨 같은 존재인 듯한데.
"괜히 눌렀다간 좋은 꼴 못 볼 것 같은데."
"움..."
그럼에도 똑딱이는 미묘한 오오라를 내뿜고 있다.
그 빨간색 버튼이 계속 손가락을 끌어들인달까.
누르고 싶어진다.
예를 들자면 문득 거울을 보았을 때, 볼에 잘 익은 여드름이 있다면 짜고 싶어지지 않는가.
또, 횡단보도를 건너다보면 흰색만 밟으면서 건너고 싶어지지 않는가.
보도 블록이 지그재그로 놓인 보도에서 같은 색의 블록만을 밟고 싶지 않은가.
그런 무의미한 강박과 매우 비슷한 느낌을 준다.
아무튼 누르고 싶다.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크, 크윽..."
하지만 누르지 않는다.
오누이가 이에 대해 먼저 언급하기 전에는 섣부르게 행동해선 안 된다.
햇님이보단 달님이 쪽이 걱정이라서 그렇다.
우리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는 녀석이지만 가끔 이상한 짓거리를 한 번씩 하는 게 달님이다.
조심스러워서 나쁠 건 없다.
"우선 씻을까?"
"그게 좋케써."
윤슬이와 나는, 오누이에게서 온 선물을 우선 방치하고 샤워하기로 했다.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씻는다. 그게 우리 남매의 약속된 루틴이다.
쓱싹쓱싹-
어푸어푸-
같이 샤워하는 게 익숙해진 우리 남매는, 씻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윤슬이 몸과 머리카락에 있는 물기를 먼저 닦아주고는 내 몸을 닦기 시작한다.
내가 몸을 닦고 있을 동안 윤슬이는 드라이기를 준비하여 침대에 가만히 앉아있는다.
내가 말려주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서 물 한 잔을 마시듯, 이 역시도 약속된 루틴이다.
그런데.
통-!
뭔가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뭉툭한 게 무너지거나 부서지는 듯한 소리.
"움...?"
"뭐야."
"움...?!"
"왜 그래, 윤슬아."
털털털털털-
아직 머리를 털고 있는 도중이었다.
어떤 플라스틱이 몸체를 튕구는 듯한, 익숙지 않은 소리가 침대 쪽으로부터 들려온다.
머리의 물기를 수건으로 터는 것을 멈추고.
"움...!!!!!"
화장실에서 한 발자국 발을 빼어 고개만 밖으로 빼꼼 내밀었는데.
아아.
"크, 큰 일 나쪄!!"
"이게 뭔 일이야."
윤슬이 손엔 드라이기가 들려있다.
콘센트를 꽂으려고 마침 손에 들었던 모양인데.
"윤스리가 드라이기 반갈죽 해버려쪄!!!!"
".... 그걸 어떻게 했니."
드라이기가 반으로 갈려있다.
말 그대로 한 가운데로부터 반으로 쪼개져있는데.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윤슬이 손에서 받아들고 우선 다쳤는지부터 확인한다.
주변에 떨어진 파편도 없고.
윤슬이 몸에 생채기가 난 것 같지도 않다.
"다친 데는?"
"웁써. 으응... 아니당, 이써."
"다쳤다고? 어디?"
"드라이기가 다쳐써."
".... 이건 다쳤다기보다는."
거의 죽었다고 보는 게 맞지.
전선이나 배터리 같은 것들이 알 수 없는 규칙 아래 배열되어 있다.
드라이기의 내부가 이렇게 생겼구나, 좋은 경험했다.
하지만 그런 감상은 차치하고.
어째서 드라이기가 반갈죽 당했는가.
그게 문제다.
윤슬이가 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절단면이 비정상적으로 깔끔하다.
장인이 만든 웬만한 다마스커스, 명도로 자른다고 해도 이렇게 될까, 싶다.
정밀 세공을 위해 만든 전자 공구가 있다면야 어떻게든 이런 절단면을 만들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 정도로 깔끔하게 잘려있다는 지점에서 이미 말도 안 되는 인과가 개입했단 뜻이다.
그렇다는 것은 십중팔구.
"저 똑딱이가 문제라는 얘기인데."
나는 누르지도 않았다.
아까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기 전에 식탁에 고이 놓아두었으니, 아마 윤슬이도 누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버튼을 누르지 않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얘기일까?
".... 달님이."
아무래도 드라이기값을 청구해야겠다.
덜 말린 머리를 수건으로 마저 털며 스마트폰을 쥐고는 바탕화면으로 들어간다.
스윽-
스윽-
"응...?"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어플이 사라져있다.
원래 같았으면 바탕화면의 한 켠에
[오누이 타이쿤!]
이라고 쓰인 어플리케이션이 보여야 하는데.
없다.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실제로 방금 샤워를 했으니 내 눈엔 촉촉이 보습이 된 상태이다.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정말로 사라져있다.
"이게 뭔 일이야."
머리가 복잡해진다.
"우웅... 미아내, 옵바. 윤스리가 드라이기 반갈죽해버려써... 일부러 안 그래써."
"윤슬이 탓 아니니까 괜찮아. 고개 들어."
"움?"
윤슬이는 의아하단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반응을 보아하니 스스로가 드라이기를 잡았을 때 마침 두동강이 나버려, 본인 탓이라고 착각을 하는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해도 동생 탓은 아니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알려주지도 않고, 서프라이즈라며 그 기능을 숨겨버린 달님이 잘못이 크다.
아니, 전적으로 그 녀석 잘못이다.
"윤스리 머리눈 어뜨케 말리지. 축축허당."
"오빠가 다시 한 번 털어줄게."
"알게쏘."
윤슬이는 다시 한 번 침대에 축 늘어지듯이 앉아서 자리를 잡는다.
머리 터는 지정석, 침대에 걸터앉아있다.
나는 우선 반갈죽 당해버린 드라이기를 분리수거 통에 버리며 합장한다.
"그동안 고마웠다. 너와 함께한 나날들을 잊지 않을게. 어메이징 브라운 1호."
물건에 쓸데없이 이름 붙이는 건 집안 내력인 듯하다(붕붕이 3호).
다시 윤슬이에게로 돌아가 머리를 꼼꼼하게 털어서 말려준다.
자연으로 건조하는 것은 되도록 지양해야 한다.
그랬다간 비듬이 생기거나, 심한 경우 두피에 곰팡이균이 눌러앉을 수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동생 머릿결은 어릴 때부터 잘 챙겨줘야지.
탈탈탈탈탈-
"움..."
윤슬이는 얌전히 앉아서 낮게 신음한다.
드라이기, 어메이징 브라운 1호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이미 우릴 떠나간 친구니까.
새친구를 맞이하는 수밖에.
"내일은 퇴근하면서 같이 새로운 드라이기 찾으러 갈까? 더 좋은 거로."
"그게 좋케써."
윤슬이는 머리를 말리는 내 손놀림을 의식하여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린다.
최근에는 수입적으로도 안정감이 생겼으니, 드라이기에 조금 투자하여 좋은 녀석을 구매해야 되겠다.
다짐하며 윤슬이 머릿결에 붙은 물기를 확인한다.
100% 깔끔하게 말랐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이 정도면 적어도 비듬이 생기거나 하진 않을 것 같다.
아직, 귀찮아서 집어넣지 않은 선풍기를 바깥으로 꺼내어 윤슬이를 그 앞에 앉혀놓는다.
"옵바, 이거 내가 갖다 노으께!"
그러나 윤슬이는 자신이 드라이기를 부숴먹은 것에 대해 속죄라도 하듯이 수건을 내 손에서 빼앗아 빨래통으로 가져간다.
도도도도-
어지간히도 신경쓰인 모양이다.
그런 모양인데...
지이이익-!
무언가가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
"움...?"
"뭐야, 이번에는 또."
"움...?!"
"불길하다."
"옵바!!! 이번에눈 수거니가 반갈죽 돼버려쪄!!!"
"아아아...."
이제야 사태가 파악된다.
그 똑딱이 탓에 드라이기가 부서진 게 아니다.
윤슬이에게 무슨 임의적인 능력이 부여된 것 같다.
그것도 되게 특이하게도, 본인이 잡은 물건을 반으로 깔끔하게 갈라버리는 능력을 부여한 것 같다.
"골 아프네."
연속적으로 물건을 반갈죽내버린 윤슬이는 극도로 침울한 상태에 빠져버렸다.
그런 윤슬이를 달래며 밤 시간을 보내었고.
마음이 진정된 동생은 곧장 곯아떨어져버렸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는데, 여전히 스마트폰의 바탕화면에 [오누이 타이쿤!]이 표시되는 일은 없었다.
스마트폰 오픈 소스가 업데이트된 탓일까?
아니면 괴상한 선물을 보낸 다음에 핀잔을 듣는 것이 두려워서 잠시간 어플을 삭제해버린 것일까.
후자라면 더더욱 악질이긴 한데.
좌우지간 달님이를 이후에 추궁해야 하는 것은 변함없다.
"에휴."
작게 한숨을 쉬며 눈을 붙인다.
이때까지만 해도 오늘은 내일의 전초전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관성적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출근하는 길.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는데도, 하복부를 비롯하여 종아리 등에 굉장히 이질적인 감각이 든다.
"히힝-! 히히힝!"
매우 신난 듯한 동생.
어젯밤과는 기분이 제법 달라진 것 같다.
그 이유를 모르는 것도 아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지난달에 비해 기대했던 것보다 키가 자라지 않아 서러웠던 윤슬이니까 말이다.
가게에 도착하자 씩씩하게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윤슬이.
그런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5세는 결코 가게 문 손잡이에 손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간 열려 있는 문을 밀어서 들어가거나 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문을 열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게 일반적인데.
하룻밤 사이에 키가 30cm 정도 자라났으니, 그러한 행동들도 바뀌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렇다.
5세는 커버렸다
훌쩍 커버렸다.
눈깜짝할 사이에 커버렸다.
원래의 신장에서 30cm 자를 얹은 정도로 커버렸다.
자고 일어났더니 벌어져있던 일이다.
어떤 소설에서는 자고 일어났더니 바퀴벌레가 되어있었다고 하니, 그것에 비하면야 훨씬 나은 일이지만.
그럼에도 당황을 금할 수 없다.
"옵바! 윤스리 이제 다 커써! 바바!"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홀에 있는 냉장고 앞에서 본인의 힘을 과시하는 5세.
냉장고 문을 이젠 자유롭게 열었다 닫았다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원래는 꽤나 고전하는 데 말이다.
키가 컸으니, 그만큼 근력이 붙은 모양인데.
다만 인격은 그대로다.
몸만 컸지, 아직 정신 상태나 감정 등은 5세인 그대로다.
다행이라면 다행이고.
아니라면 아닌 지점인데.
"왜 이렇게까지 돼버린 것인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사태를 파악하기까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눈을 떴는데, 5세가 아니라 10세쯤 되어보이는 아이가 옆에서 자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럼에도 얼굴형이나 복장 등에서 별반 차이가 없었으므로 누구인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비일상에 너무도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동생이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나 훌쩍 자라버렸는데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원인을 대략적으로 예상 가능한 것도, 내 평정심에 한 몫했다.
내 속주머니에 있는, 이 검은 똑딱이가 원흉일 것이다.
마음만 같아서는 부숴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원 상태로 영영 못 돌아갈 수도 있으니."
참아야한다.
....
그런데.
쿠궁-!
다시 한 번 온건치 못한 소리가 가게 내부를 메운다.
"움...?"
"하아."
윤슬이가 손에 쥔 냉장고 손잡이가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덜거덕거리더니.
그 거대한 문짝이 반으로 쪼개져버렸다.
"옵바!!! 이번에눈 냉장고가 반갈죽 돼버려쪄!!!"
윤슬이 손에 닿았을 때 부숴지는 물건과 아닌 것도 일정 기준에 따라 나뉜 것 같긴 한데.
그 기준을 알 수 없으니 갈수록 태산이다.
이쯤 되면 내 인생은 어떤 장르로 규정해야 하는가, 심히 고민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