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파괴신이 굴러들어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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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왔다.
드라이기, 어메이징 브라운 1호부터 아마도 붕붕이 3호나 식당의 냉장고까지.
또, 윤슬이 키가 30cm 커버린 것도 마치 없던 일처럼 내 옆에서 잠들어있는 5세는 여전히 자그마하다.
부우웅-
내가 잠에서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단 듯이 스마트폰이 진동한다.
[오누이 타이쿤!]
[달님: 서프라이즈~!]
확실히, 서프라이즈이긴 했다.
도중까지는 내가 꿈을 꾸고 있단 것조차 알아낼 수 없었으니 말이다.
[나: 진짜 뭔 일인가 싶었다, 냉장고 반쪼가리날 때만해도 정신이 아찔했는데.]
오누이 식당 홀에 있는 것은 내가 구매한 것이 아니라, 대여한 것이다.
그래서 반으로 잘려버리면 물어내야 한다.
폐기물 처리 비용까지 들어 지갑 사정에 꽤나 타격을 줄 것이다.
[달님: 그래도 재미는 있었죠? 윤슬이랑 같이 별 것 다 해보시던데.]
[나: 그래, 재미는 있더라. 재미는.]
우리가 꿈의 세계에서 윤슬이의 반갈죽 능력을 토대로 벌인 일은 돌이켜보면 꽤 엽기적이다.
죄 없는 돌맹이나 가로등을 부시거나.
정육점에 가서 시덥잖은 장난을 치곤 했으니.
아마 꿈 속 세계인 탓에 도덕성과 판단력이 많이 흐려졌던 듯하다.
그저 파괴 본능에 휩쓸려 반으로 가르면 재밌을 것 같은 것들만 주구장창 찾아다녔다.
허나 원래 놀이란 본능에 충실할수록 그 재미가 더해지는 법이다.
[달님: 근데 도중부터는 꿈인 줄 눈치 채신 모양이던데, 그래서 꽤 놀랐어요. 어떻게 아신 거예요? 일부러 놀래키려구 비밀로 하고 있었는데.]
[햇님: 아, 그건 저도 좀 궁금하네요.]
[나: 운이 좋았어. 붕붕이 3호 때문이야.]
[달님: 그거 반으로 갈라져서 윤슬이가 오열했잖아요.]
[나: 맞아, 그래서 알았어.]
윤슬이 생일 선물로 사주었던 유아용 전동차, 일명 붕붕이 3호에는 특이한 기능이 설계되어있다.
안전을 위하여 차체가 지면에서 높이 떠오르거나 일정 수준 이상으로 손상되면 그 전동차와 연동된 핸드폰으로 문자가 가게끔 되어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가지고 놀다가 일이 터지면 부모들이 곧장 알 수 있게 하는 장치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윤슬이가 그 물건을 직접 손으로 들어올렸을 때, 붕붕이 3호가 반으로 갈려버렸음에도 아무런 문자가 스마트폰으로 전송되지 않았다.
그 지점에서 꿈이 아닐까 싶던 것이다.
[오누이 타이쿤!] 어플이 사라졌던 것도 이상했다.
내가 이 어플이 처음 깔렸을 때, 삭제하려고 했더니 달님이는 전력으로 막으려고 했었다.
그런데도 단순히 장난을 위해 어플을 없애버린 게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오누이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만큼 눈에 띠는 상황은 되도록 만들지 않는 주의다.
일전에 석촌호수에서도 벚꽃을 주워먹는 시민들을 보며 다소 당황한 듯 했었고.
염라니 뭐니 하는 존재가 있어, 괜한 일을 벌였다가는 엉덩이를 맞는다고 했던 것도 같다.
[나: 이런 저런 이유로, 현실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지.]
[달님: (따봉) 역시 주현이 형. 은근 지능캐.]
[나: 은근 지능캐고 뭐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달님: 응? 그럼 뭐가 중요하죠? 제가 아끼는 장난감까지 선물로 드렸잖아요! 그것보다 중요한 사실이 어디 있어요.]
[나: 말 돌리지마. 너가 제대로 설명도 안 해주는 바람에 우리 남매가 얼마나 놀랬는 줄 알어?]
[햇님: 주현 오라버니, 그 점은 우선 묻어두시죠.]
햇님이가 웬일로 자기 오빠 편을 들어주는 것 같다.
평소 같았으면 내 쪽에 붙어 열심히 채팅으로 달님이를 패야 보통인데.
[햇님: 제가 나중에 참교육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아니었다.
오히려 본인이 직접 처리해줄 계획인가보다.
[나: 맡길게, 고맙다.]
[달님: ??? 법적 소송을 걸겠어.]
[햇님: 이건 염라도 인정하는 처벌일 듯하네요.]
[달님: ?! 그런 게 어디 있어!!]
풍문으로 들었는데, 햇님이가 달님이보다 근력이 좋다고 한다.
저쪽 남매, 오누이는 곧 레슬링을 시작할 듯하다.
“움... 우무무무무...”
그때였다.
5세는 이제야 깨었는지 팔다리를 수직으로 곧게 뻗어 기지개를 켠다.
뒤이어 벌떡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양팔을 넓게 벌린다.
“윤스리 등쟝!”
“윤슬이 등장이야?”
“웅. 등쟝이다.”
5세는 자다가 일어나면 애교쟁이가 된다.
일어났다고 하면 되지 “등쟝!”이라고 하다니.
너무 귀엽다!
자다가 깬 윤슬이의 눈꼽을 떼어주며 어젯밤 꾸었던 꿈에 대해 묻는다.
“윤스리 다 기억하구 이써.”
공중으로 손을 휙- 휙- 휘두른다.
꿈에서 반갈죽 스킬을 시전할 때도 대략 저런 자세였던 것 같다.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디게 재미 이써따!”
“되게 재미 있었어?”
“웅! 윤스리가 막... 이케! 이케! 다 뿌셔버려써.”
정확히 말하자면 부서지진 않고, 깔끔하게 양분되었다.
하지만 5세는 그것만으로도 대만족한 듯했다.
보스를 꿈꾸고 있는 윤슬이로서는 만족하지 않을 수 없는, 달달한 시츄에이션일 테니 말이다.
본인 손으로 이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니.
윤슬이가 이렇게 만족한 모습을 보니 달님이한테 조금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망의 똑딱이]
달님이가 직접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 똑딱이 상부에 볼록 튀어나온 빨간 버튼을 누르면 꿈의 세계로 돌입한다.
그때부터 꿈 속 세계에서는 본인이 욕망하는 바가 이능력으로써 실현되는데.
윤슬이의 경우 그게 ‘반갈죽’ 능력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똑딱이를 택배로 받기 전, 식당에서 일하던 시간에 치호씨를 만난 게 화근이 된 듯하다.
그때 황치호씨가 장난 삼아 윤슬이한테 반갈죽이라는 단어를 가르쳤고.
보스를 꿈꾸는 윤슬이의 욕망 사이로 그 개념이 스며들게 된 것이다.
만약 치호씨가 어제 우리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전혀 다른 상황이 발생했을 수도 있겠다.
꿈에서 깨기 전에 우리가 치호씨를 만나게 된 것도(결국 윤슬이에게 반갈죽 당했지만.)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옵바, 윤스리 다시 짝아져써.”
“그렇네. 다시 쪼끄매졌네?”
“움... 그래두 갠짜나.”
윤슬이는 침대 이부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한 바퀴 뱅글 돌며, 자신의 짧은 신장을 자랑한다.
“그래야 옵바가 짜근 윤스리두 오래 기억할 쑤 있짜나.”
“맞아, 윤슬이는 오빠를 위해서 조금 천천히 커주기로 했지?”
“그렇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친한 친구인 시후와 유민이에 비해 작은 것을 신경쓰는 듯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점점 윤슬이의 마음도 성장해가는 것 같아서 기쁘다.
[욕망의 똑딱이]
지금도 내 반바지 주머니에 들어있는 이 물건이 꿈 속에서 이뤄준 두 번째 욕망은 나의 것이었다.
윤슬이를 순탄하게 기르고 싶단 마음이 그대로 투영되어 갑자기 30cm나 훌쩍 커버렸던 것이다.
그 정도 신장이면 거의 열 살쯤은 되었겠다.
미래의 모습을 미리 본 것 같아서, 뭔가 영화를 스포당한 것만 같은 기분도 들지만.
그럼에도 초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윤슬이는 지금과 또다른 매력이 있었기에 미래가 기대되기도 한다.
“윤슬아, 이거 볼래?”
“움?”
윤슬이 눈 앞에 욕망의 똑딱이를 비춰준다.
이 물건을 보자 갑자기 뜨끔했는지 어깨를 움찔거린다.
“윤스리가 안 눌러써.”
“윤슬이가 안 눌렀어?”
“웅, 안 그래써.”
“이상하네, 오빠는 아무 것도 안 물어봤는데. 갑자기 왜 안 눌렀다고 그럴까?”
“아, 아앗...!”
급격히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다. 그리고 고개를 도리도리 돌리며 점점 진득하게 들러붙는다.
내 승모 쪽에 두 팔까지 걸고 아예 몸을 늘어뜨린다.
“윤스리눈 암 것두 몰러.”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말이야?”
“웅...”
“그럼 오빠가 속아줘야지 돼?”
“웅... 속아주므는 좋케따.”
이미 속아달라고 말한 시점에서, 속는 게 아닌데 말이다.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속아주겠다는 제스쳐를 취하자 고개를 빼꼼 들고는 씨익-
웃는다.
“히힝... 사실 윤스리가 눌러버려써. 넘무 누르고 싶으게 생겨써서. 못 참아써.”
“그건 인정하긴 해.”
가장 처음 희생양이 된 드라이기가 반으로 갈려버린, 꿈의 시점에서 나는 이 똑딱이를 누르지 않았다.
내가 똑딱이를 누른 것은 꿈에서 깨기 위해서.
딱 그때 한 번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이 똑딱이를 멋대로 누른 범인은 한 명으로 좁혀진다.
아마도 샤워 후 먼저 몸을 닦아주고 방으로 내보냈을 때, 궁금했던 모양이다.
확실히 욕망의 똑딱이는 딱 봐도 정말 누르고 싶은 비주얼이긴 하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한가.
아무튼 우린 오늘도 출근을 해야하고.
욕망의 똑딱이는 재미 있는 장난감이다.
“다음 번에 재밌는 아이디어 생각나면 이걸로 오빠랑 또 놀면 되겠다, 그치?”
“움! 윤스리가 한 번 잘 생각해보께!”
우리는 가게로 출근하며 다음 번엔 어떤 꿈을 꾸는 게 좋을지 상의했다.
다양한 얘기를 나왔지만, 공통적으로 윤슬이는 꽤 터프한 능력들을 선호하는 것 같다.
“루이보다두 엄청엄청 큰 멍뭉이가 대구 시퍼!”
라던가.
“옵바보다두 키가 더 커져서. 옵바를 안꾸 다니구 시퍼!”
라던가...?
“하늘두 날아보구 시프다!”
등등.
5세의 창의력은 무궁무진했다.
“옵바눈?”
“응?”
“옵바눈 무슨 거가 하구 싶어?”
오빠는 뭐가 하구 싶어?
“글쎄, 오빠는 좀 오래 생각해봐야 될 것 같은데.”
“움... 윤스리눈 하구 시픈 거 디게 많은데.”
왜냐면 그냥 네가 올바르게 커주는 것만으로도, 당장 더 바랄 게 없어졌으니까. 실제로 욕망의 똑딱이가 하룻밤 사이지만, 이뤄준 것처럼.
진심이었음에도 그런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괜히 낯간지러우니까 말이다.
후일담.
결국 달님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햇님이한테 물어볼 기회가 있었다.
[햇님: 오라버니한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면, 그 잔혹함에 치를 떨게 될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나: 뭔데 그래.]
햇님이가 저렇게까지 과장스럽게 표현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래서 더욱 신경 쓰였는데.
[햇님: 무려 2주 동안이나 헬스장 출입을 금지시켰다고요!]
[나: 그거 잔혹한 거 맞아?]
[햇님: 그럼요! 상상만 해도 등에 식은 땀이 흐르는데요...?]
[나: 그래. 가치관은 각자 다른 거니까.]
왠지 욕망의 똑딱이가 왜 만들어졌는지 알 것만 같았다.
아마 저 오누이 녀석들은 똑딱이를 이용하여 더 높은 단계의 헬스 트레이닝을 수행하는 것이 아닌가.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실제로 물어봤더니.
[달님: 어떻게 알았지?! 주현이 형, 진짜루 지능캐?]
[나: 그건 딱히 지능캐가 아니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달님: 왜죠?]
진심으로 모르는 것 같아서, 그냥 냅두기로 했다.
일일이 답해주기도 슬슬 피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