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10월의 개미취(3)
꽤나 여유로운 느낌으로 시간이 흐르는 평일의 오후.
손님들 중에서 직장에 다니시는 분들이 재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시면 한결 여유로워진다.
마침 발코니 쪽에서 마지막으로 주문하신 손님들의 요리를 내어드린 참이다.
여유가 생겨 손을 닦고는 스마트폰을 켜본다.
“윤슬이가 없으니까 조용하네.”
지나칠 정도로 차분해진달까.
아니면 무료해진달까.
평소에는 늘 윤슬이와 함께 있다보니 별 일 없더라도 신경을 쓰게 된다.
붕붕이 3호에 앉아 꾸벅꾸벅 졸 때도, 혹시나 앞으로 굴러 넘어지진 않을까.
루이와 나란히 가게 바닥에 누워있을 때도 혹시나 어디 의자 모서리에 받히지 않을까.
그런 걱정을 무심코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윤슬이가 없어지면 조용해진다는 말은 단순히 가게 내부의 소음이 줄어든다기보다는, 내 마음의 한켠이 고요해진다는 것이겠지.
“음... 여기 있네.”
아무래도 배달에 나간 윤슬이가 신경이 쓰이게 되었다. 그래서 함께 나간 그 녀석도 덩달아 마음이 쓰여 손가락이 멋대로 움직인다.
[개미취]
지난 번에 통합검색으로 알아보니, 시온이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개미취라는 꽃을 뜻한다고 한다.
지금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된, 시온을 떠올리며 개미취라는 꽃을 한 번 검색해보았다.
“개화 시기가... 9월 말에서 10월 중순? 그리고 개체와 지역에 따라서 11월까지도 개화한다, 라고 하네.”
절기로 나누어보면 딱 지금즈음이었다.
상황이 절묘해서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한 번 졌던 꽃이, 10월에 다시 피어나서는 우리 가게 배달원이 된 건가.”
낮간지럽고, 낭만적인 말이다.
입으로 읊었다가 괜히 팔뚝에 닭살이 오돌토돌하게 돋아났다. 손으로 부비고 문질러 잠재운다.
- 혼자서 뭘 보다가 그렇게 중얼거리나. 윤슬이 없으니까 너가 우리 상대 좀 해줘.
“저도 자유 시간이 필요한데요.”
- 고객이 심심하다잖아. 대화로 즐겁게 해주는 것도 식당 주인장 역할인 거 아냐?
“네, 아니죠. 저는 값을 지불 받은만큼 음식만 내어드리면 되는데요.”
- 그건 그래. 괜히 방해해서 미안하다.
빠른 수긍.
“별 말씀을.”
미정 쌤이다.
그 옆엔 유민이도 데리고 왔다.
엄마가 평소처럼 장난끼 다분하면서도 자기 주장이 강한 것에 비해 유민이는 다소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엉덩이를 의자에서 반쯤 빼어앉은 꼴이, 꼭 뭔가가 쫓아오는 양 불안해보인다.
- 아들, 윤슬이 없는 게 그렇게 불만이야? 엄마만으로는 모잘라구나?
- 응. .... 아, 아니. 안 모잘라. 엄마가 조아.
- 흐흐흐, 그래.
아들을 놀려먹는 게 재밌었는지, 미정 선생님은 짖궂게 웃는다.
유민이는 앞접시에 놓인 제육볶음을 얌전히 꾸역꾸역 먹으면서도, 가게의 투명문 바깥을 꿈뻑이며 바라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고.
그 대상은 명백히 우리 집 5세였다.
찌리리리르르르륵....
자전거의 체인이 맞물리는 듯한 소리가 점차 강하게 들리더니 가게 앞에서 딱 멈추었다.
아주 작고 낮은 소리였지만 그나마 가게 실내가 조용하여 들을 수 있었다.
“유민아, 기다리던 사람 왔다.”
- 응...? 주혀니 형아, 진짜여?
“봐봐.”
덜컥-!
“유미니! 언제 와써! 왜 연락뚜 안 하구 와써!”
- 유, 윤스리...! .... 헤헤헤.
5세와 6세는 서로 만나자마자 손을 부여잡으며 재회를 기뻐한다.
누가 보면 아주 오랫동안 못 만난 줄 알겠다.
오빠보다 먼저 유민이한테 가버렸단 점이 약간 질투가 날 것만 같지만.
내 주의를 미정 선생님이 훔쳐가버린다.
- 아아... 그럼 여기 계신 분이, 가게에 새로 채용한 직원분?
“네, 맞아요.”
- 뭐라고 불러야 하려나... 나름 가게 단골이라서 자주 뵙게 될 것 같은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미정 선생님은 나한테 대하는 것보다 정중하게 이름을 묻지만, 신입 직원은 볼을 고양이처럼 긁적이며 시선을 피한다.
- 글쎄요, 저기 저 양반한테 물어보세요.
라며 나를 삿대질한다.
자신의 새로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미정 선생님은 약간 당황하여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시선을 내 쪽으로 돌린다.
“원래 제 친구여서요. 가끔 저래요. 수줍다고 해야 되나. 약간 까칠하다고 해야 되나.”
- 아아... 원래 친구였구나.
고양이 시절부터 친구이긴 했으니까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다. 불과 서로 알게 된 지는 2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름은....”
- 성함은?
내가 머뭇거리자 재촉하듯 말꼬리를 무는 미정 쌤.
“고영희.”
- 응?
“고, 영, 희에요. 고영희.”
내가 그녀의 이름 3글자를 입에 담자 미정 선생님은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배달원의 외모를 0.8초 정도 스캔한다.
노란빛이 띠는 갈색 머릿결, 그리고 옆으로 길게 늘어진 눈매와 연분홍색 입술.
말랑하고, 앙증맞은 콧볼까지.
매우 고양이상이었다.
그리고 이름이 고영희였다.
미정 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가히 불가항력이었고.
오누이 식당 신입 직원, 고영희(시온)씨는 나를 원망스런 눈초리로 노려본다.
나는 가볍게 시선을 회피하며 딴청을 부린다.
“휘유... 휘유...”
빌어먹을.
휘파람을 불려다가 완벽히 실패해버렸다.
자전거 바퀴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날 뿐이다.
여러 차례 되뇌이는 사실이지만.
난 진심으로 네이밍 센스가 최악이다.
**
오누이를 설득할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난 떠오른 것들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것을 채택하여 그들에게 제시했다.
[나: 시온을 우리 식당에 고용해버리면 어때?]
[햇님: .... 고용이요?]
[달님: 더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나: 너희도 시온이랑 우리가 나눴던 얘기를 들었겠지만, 저 친구는 아주 오랫동안 길바닥에서 지냈던 고양이야. 그래서 이 주변 동네 지리쯤은 훤히 꿰고 있어.]
[햇님: 그건 알겠어요. 그런데 그게 고용이랑 어떻게 연결되나요? 현재 오누이 식당에서 더 일손이 필요하진 않아보이던데요. 물론 주현 오라버니가 워낙 일머리가 좋으신 덕이지만요.]
[나: 홀만 운영하면 직원이 더 필요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최근에 배달 사업은 진행하지 않냐고 몇몇 단골들이 제안해주셔서 말이야.]
대표적으로 신혜원씨네 부부가 그랬다.
작업이 바쁜 경우 배달을 시켜먹는 편이 더 효율적이란 것은 현대인들에게 당연하다.
[나: 요즘엔 어플이 발달해서 그쪽이랑 연계하는 게 정석이긴 하지만, 그쪽으로 배달업을 돌려버리면 홀에서 작업이 꼬여버려. 홀 접시에 음식을 담아서 손님들에게 직접 내어드리는 거랑 배달 분량의 음식을 용기에 담고, 젓가락이랑 부가적인 것들을 포장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거든.]
손이 두 배로 든다는 얘기다.
즉, 어플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배달기사만을 따로 불러서 진행할 경우 괜히 더 피곤해질 가능성이 높다.
[나: 그래서 아예 우리 가게 전용 배달직원을 뽑아서 내가 요리를 만들면 그걸 포장해서 배달을 가는 방식으로 고용해볼까 생각했던 거야.]
[햇님: 확실히, 그런 방식은 효율이 좋아보이긴 하네요.]
[나: 가게 능률도 좋아지지만. 배달 사업을 시작하면 평소 우리 가게 손님이 아니던 분들까지 고객으로 잡아둘 수 있다는 장점이 생기지. 배달 음식만 따로 시켜먹는 분들이 요즘은 많이 계시거든.]
그만큼 요즘에 와서 배달을 하지 않는 것은 손해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 가게의 경우 아직 창업한 지 반 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슬슬 사업을 확장할 때가 됐다고 볼 수도 있다.
[나: 시온을 고용해서 유능한 배달 기사로 두면, 가게 지명도도 자연스레 더 많이 올라가겠지. 아까도 말했지만 시온은 주변 지리에 빠삭해서 유능한 인재야.]
어차피 네비게이션이 있어서 길찾기 자체는 누구에게 맡겨도 문제 없겠지만, 애석하게도 이 주변은 주택가다.
주택가의 골목골목, 그 최단 루트까지 계산할 수 있는 네비게이션은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시온의 장점은 충분히 발휘될 여지가 있다. 굳이 따지자면 사소한 부분이지만 말이다.
[달님: 흠.... 지금 미리 직원을 채용해두면, 나중에 가게 규모를 추가로 확장할 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네요. 특히 시온씨라면 중간에 퇴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수준이니까. 장기적으로 봤을 때도 이득이군요.]
달님이가 웬일로 내 편을 들어준다.
지금은 내가 오누이를 설득하는 입장이었는데 말이다.
아마도 지난 번에 헬스장 금지를 취소해달라고 달님이에게 말해둔 것에 대해 일말의 고마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햇님: .... 오라버니까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반대할 이유는 없죠.]
[나: 그래, 고맙다. 그럼 그렇게 된 걸로 할게.]
그렇게 오누이를 설득하고는.
“시온.”
- 엉?
“넌 이제부터 오누이 식당 직원이다.”
- 엉??!
시온에게는 채용을 통보했다.
“움? 지건?”
“우리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을 말하는 거야.”
“오오!! 시오니가 우리 가게에서 일핸다구? 그러문 옵바처럼 요리두 하는 거야?”
윤슬이는 내가 하는 웍질을 그대로 따라하기 위해 작은 메뉴판을 손에 쥐고는 휙- 휙-
흔들다가 툭-
바닥에 떨어뜨려버렸다.
“잉?! 실쑤해따. 이러믄 안 대눈뎅... 불 나눈뎅.”
긁- 긁- 긁적...
무안해진 5세였다.
- 야, 주현아. 고양이가 일하는 거 봤냐?
“너 지금 고양이 아니잖아.”
- 크, 크윽... 칫.
시온은 고양이보다 훨씬 길다란 자신의 팔다리를 훑고는 혀를 찬다.
“너도 알겠지만 인간들 사이에선 그런 속담이 돌기도 하거든.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 그건 나도 들은 적이 있어. 참 잔혹하지? 일 안해도 놀고 먹고 싶은데 말야.
“움? 그래서 윤스리두 일하자너. 싸이다두 꺼내주고 어서오라구, 또 오라구. 손님들 인사두 해준다구. 일 안 하므는 초코랑 맛짱짱이를 먹지룰 몬해.”
5세도 이렇게 말하니, 시온도 더 반박할 길이 없었다.
낮게 한숨을 내리깔더니.
-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을 하면 되는데?
“배달일, 그리고 포장.”
- 알려주기나 해봐.
깔끔하게 무직 생활을 포기한 시온은 정식으로 우리 가게 멤버가 되었다.
키가 160cm에 못 미치는 시온을 위해 나는 내가 쓰는 앞치마를 물려줄 수 없었다. 새로운 앞치마나 머리끈 같은 것들을 사와야만 했고.
고양이 손인 주제에 일을 습득하는 속도가 꽤 빠른 시온이었다.
물론 되살아난 김에 시온이 시후네 집에서 다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며.
이곳에서 일하다보면 분명 시후를 마주칠 일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몇 번 만날 수 있다면.
적어도 영영 만나지 못하는 것보다야 훨씬 좋은 일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 때쯤.
내 전두엽을 한 가지 의문문이 스쳐 지났다.
“시온이 누군지 시후한테 어떻게 설명하면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