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10월의 개미취(4)
“움? 그냥 시오니라구 알려주므는 대자나.”
“글쎄...”
이걸 5세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시후한테 알려주기까진 아직 시간이 필요해.”
“왜여? 지금 시후한테 못 가더라두, 윤스리네랑 쪼꿈만 지내다가 돌아간다구 하므는 대자나.”
죽었다 돌아온 시온이 부활했다고 말했다간 여러 모로 복잡해지니까. 인간 세계의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일이기 때문에 함부로 입을 열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만약 윤슬이가 다섯 살 정도만 더 많았더라면 그리 명료하게 설명했을 것이다.
허나 동생은 애초 시온이 죽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죽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지만 그 개념이 온전히 확립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윤슬이는 볼에 바람을 빵빵히 불어넣는다.
거센 불만이 있어보인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5세는 궁극적으로 시후와 시온이 재회하는 것을 바라고 있으니, 당연히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 내가 시후한테 돌아왔다는 게 알려지면 안 돼서 그래.
“움...? 왜 안대는데!”
- 난 아직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무지개 다리 너머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는 걸 허락받지 못했는데. 우연히 넘어오게 된 거야.
“잉...? 그러문 월래 여기 이쓰믄 안 대는 거야?”
- 그렇지. 그런데도 여기 있는 게 들켜버리면, 시후도 놀라겠지? 그리고 그렇게 됐다간 다시 시후가 있는 곳으로 영영 못 돌아오게 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되면 내가 직접 얘기할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시온은 자상하게 웃으며 윤슬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윤슬이는 고양이처럼 웅크린 시온의 손을 붙잡는다.
“힝... 시오니가 그러므는 어쩔 쑤가 업짜나.”
납득한 듯 보였다.
곧잘 설명하기 복잡한 부분이 있어, 곤란했었는데 시온이 직접 저렇게 말해주니 한시름 덜었다.
윤슬이는 어떻게든 설득했고, 남은 문제는 앞으로 시온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그 지점이었다.
덜커덕-
그때였다.
- 어이! 주현이...! 윤슬이!
“정육쩜 함모니랑 할부지?”
우리가 자주 들르는 시장의 정육점 사장님 부부가 가게로 들려주셨다.
아직 가게가 오픈할 시간은 되지 않았다.
손님으로서 오신 게 아니었다.
“아차, 오늘 일찍 들리겠다고 하신 걸 잊고 있었네요.”
- 뭐, 꼭 기억해야 될 필요가 있는가? 여기 이짝이나 한 번 봐보라구.
할아버님의 손에는 두 종류의 고기가 봉투에 담긴 채로 들려있었다.
적당한 테이블 위에 펼쳐두신다.
- 주현이가 일루 와봐봐.
“윤스리두 갈 껀뎅...”
쫄래쫄래...
5세는 본인만 불리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약간 심통이 나서 다시 한 번 볼을 부풀린다.
나는 그 양쪽 볼따구를 콕- 콕- 찔러 풍선을 터뜨렸다.
“뿌후-!”
바람빠지는 소리가 방귀처럼 들려서 5세는 볼을 붉힌다.
그리곤 내 허벅지에 살포시 얼굴을 묻는다.
아침부터 여러 모로 리액션이 풍부한 동생이다.
“자... 이게 두 돼지고기가 다른 데서 갖고 오신 모양이네요?”
- 그제, 요거는 영서 쪽에서. 그리고 요쪽은 강원 영동 쪽에서.
시장의 정육점 부부는 본래 강원 영동 쪽의 돼지 농가에서 고기를 들여오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기회가 되어 다른 쪽 농가의 돼지 고기를 받게 되었는데.
양 쪽 고기 모두 질적으로 우수하기에 고민이 된다고 하셨다.
“둘 다... 꽤 느낌이 괜찮네요. 빛깔도 곱고, 선도도 좋고. 육질도 .... 살아있네.”
- 그니까는 우리가 고민인 거지. 본래 쓰던 데서 쓰는 것두 좋지만. 한 번 고객 입장도 들어봐야 되지 않겠어?
두 분이 우리 가게까지 고기를 이렇게 들고 오신 이유가 그거다. 두분께서 결정하실 수도 있는 문제지만.
단골 가게인 우리 식당에 한 번 들러 내 의견을 들어보시겠다고 하셨다.
솔직히 원래 발주를 맡기던 영동 쪽의 농가와 계약을 이어가는 게 정석이긴 하다.
괜히 업체를 바꾸었다가 그간 없던 문제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니 말이다.
물량 부족이나 품질 문제 등.
농가가 바뀌게 되면 부차적인 것들이 자연스레 걱정되게 된다. 그동안 협업했던 농가에 비해 정보가 부족하니 말이다.
그런 부분은 어차피 정육점 부부가 결정하실 문제이니 간단하게 내 의견만 말씀드리기로 했다.
우선 고기의 육질 자체는 새롭게 들여온 영서 쪽의 돼지 농가가 더 나은 편이었다.
특히 가져온 부위가 목살인 것을 고려하면 그것은 명백한 이점이었다.
“.... 일단 제 생각은 그래요.”
- 그치? 봐봐라! 내 어뜨케 말했나? 새로 들인 쪽도 나쁘지 않다니까는. 주현이가 역시 고기 보는 눈이 예사롭지가 않아!
할아버지 쪽은 내 의견이 마음에 드시는지 만면에 미소를 지으신다. 반면 할머님은 궁시렁대셨다.
- 칫, 내가 그거를 몰른다구 그러나? 원체 같이 하던 쪽이랑 우리가 몇 년을 같이 했는데! 그거를 바꾸기가 쉬운가...
할머님과 할아버님은 몇 마디를 나누시며 티격태격대신다. 여전히 사이가 좋은 듯하여 절로 미소 지어진다.
그러다가 우리 옆에 멀뚱히 서있는 시온이 신경쓰였는지 할머님이 헛기침을 몇 번 뱉고는 물어보신다.
- 근디, 그짝 아가씨는 누구지? 혹씨나 주현이 애인 생긴 거?!
“아뇨, 저희 새로운 직원입니다.”
- 장사 잘 된 다드만 직원 하나 새로 들이왔는가보네.
시온은 눈치를 보다가 가볍게 목례한다.
인간이 된지는 그리 오래지 않은 주제에 이런 격식은 꽤 잘 지키는 편이다.
서울에서 오래 돌아다닌 만큼 인간들의 예습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 아가씨는 이름이 어뜨케 되시는가? 이짝 식당 직원이믄 우리 가게로 고기 가질러 올 때도 있겄네.
할아버님이 살갑게 여쭤보시는 가운데, 시온은 당황한 듯 동공이 가늘어진다.
여기서 정시온입니다.
라고 답하기는 다소 애매했다.
그걸 보고는 윤슬이가 재밌다는 듯이 쿡쿡 웃으며 작게 읊조린다.
“고영인뎅... 쿡쿡.”
- 으응? 뭐라구?
다행히도 두 분 모두 나이가 있으신 탓에 귀가 잘 들리지 않으셨고. 윤슬이의 돌발 발언은 잘 듣지 못하신 모양인데.
하필이면 내가 그때 그 돌발 발언을 무마하기 위해 입을 놀려버렸지 뭔가.
“고영희요, 고영희. 영희씨... 에요.”
- 아하...! 고영희씨?
그 순간.
그리도 허무하게 시온의 새로운 이름이 확정된 순간.
나를 쏘아보던 날카로운 눈매를 아직도 기억한다.
- 왠지...! 귀가 벌써 먹었나. 나는 윤슬이가 고양이라구 하는 줄 알었어.
- 귀가 먹긴 먹은 모양이구먼, 쯧.
- 뭐요?!
두 분은 금슬이 참 좋으시다.
정육점 할머님과 할아버님이 다시 시장으로 돌아가신 이후 시온은
- 아무리 그래도 고영희는 너무한 거 아니냐고.
라며 따져왔지만.
더 나은 이름을 떠올리진 못했다.
나와 동생이 머리를 싸매어 새로이 제시한 개명 후보로는.
정윤슬(윤슬이가 낸 아이디어인데 동생과 겹치니까 탈락됐음).
조삽삽(임팩트 있는 이름이 좋을 것 같아서 제안해보았는데 시온이 발톱을 세우며 나를 노려봄).
고냥이(윤슬이가 낸 아이디어 2번, 고냥이로 할 바에야 고영희가 차라리 낫다며 기각당함).
유산균(내가 낸 아이디어. 솔직히 이때부턴 거의 장난이었음, 단 조삽삽은 진심이었음).
등등.
결국 고영희보다 더 좋은 이름을 떠올리지 못한 채.
그렇게 시온은 고영희씨로서 우리 가게에서 일하게 되었다.
**
“옵바, 윤스리 다녀와써.”
뒤늦게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는 윤슬이.
입고 있던 레이싱 자켓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내게 자랑한다.
“이고 바바, 여누 아저씨가 이거 조써. 초코.”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흔한 초콜렛이었다.
시온과 방금 자전거로 배달 다녀온, 연우씨와 혜원씨네 공방에서 받아온 모양이다.
“윤슬이가 이거 받을라구 영희씨 따라서 다녀왔구나?”
“그렇타. 이거시 다 작쩐! 대성공이지롱.”
망설이며 부정하는 티라도 낼 줄 알았더니 오히려 당당하다.
윤슬이는 좀처럼 가게를 비우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시온을 따라서 공방에 다녀왔다.
5세 말에 따르면 초코를 받아먹기 위한 작전이었다고 한다.
“움...?”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이익! 이거 모야. 다 녹아써...”
“손에 소중하게 꼭 쥐고 왔나보네.”
이제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도 윤슬이 주머니 속에 보관되어 있던 초콜렛이 포장지 안에서 흐물하게 녹아있었다.
그걸 보고는 동생은 반쯤 울상이 되었다.
초콜렛을 받아먹으러 굳이 그쪽 공방에 배달까지 나갔다 왔는데, 정작 그 보상이 녹아있으니 크게 유감인 것이다.
“어쩔 쑤가 업찌. 핥... 핥...”
필살, 포장지 핥기!
를 시전하는 5세였다.
“이래두 맛이 좋구먼.”
녹아있어도 초콜렛은 초콜렛.
여전히 달고, 부드럽다.
윤슬이는 대만족한 듯하다.
볼따구에 초코를 덕지덕지 묻혀가며 먹고 있다.
“으이그...”
나는 그 모습을 보곤 물티슈로 닦아주려고 손에 쥐었다.
내가 닦아주려고 다가가던 와중 윤슬이가 고개를 번쩍 든다.
무언가 깨달았는지, 눈을 반짝인다.
그리고 도도도도-
유민이와 영희씨 쪽으로 다가간다.
“윤스리만 먹으므는 안 대눈데. 이거 유미니랑 영히씨두 머글래?”
- 으응.... 괜차나.
- 나도 괜찮은데. 저기 너희 오빠 줘.
두 사람이 손사레를 치는 이유는 명백했다.
방금까지 저 녹아버린 초콜렛 위쪽을 5세의 혓바닥이 사정없이 휘감았기 때문이다.
윤슬이 볼따구에 묻은, 녹은 초코만큼이나. 저 남은 초콜렛 부분엔 윤슬이의 침이 묻어있다!
“움... 그게 좋케써. 혼자만 먹으므는 안 대자나.”
젠장.
고영희가 내 쪽으로 주의를 돌려버렸다.
“옵바눈 머글 꺼지? 윤스리가 주는 거야.”
“크, 크읏...!”
눈망울을 반짝이며 내게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네어주는 윤슬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침이 많이 묻어있.
“냠냠... 맛있네...!”
냉큼 먹어버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동생이 이렇게 애처롭게 쳐다보면서 자기가 주는 초콜렛 안 먹을 거냐는 듯이!
이쁘게 쳐다보는데!
어떻게 안 먹어!
“움? 진쨔루 먹넹? 그거 윤스리가 침 낼름낼룸 다 묻힌 건뎅. 키키킥.”
“...?!”
소, 속았다.
이럴 순 없어.
뒤돌아보니 고영희와 유민이, 그리고 미정 선생님은 나를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다.
멘탈, 게슈탈트 붕괴, 와르르.
입 안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초코의 단 맛과 윤슬이의 침 맛을 천천히 느껴본다.
침에서 이상한 맛과 향이 안 나는 것을 보니 아직 충치는 없는 모양이다.
내가 양치를 잘 시키고 있는 덕이다.
그것만을 위안 삼으며 어떻게든 멘탈을 잡아본다.
“옵바.”
윤슬이는 장난친 게 미안했는지 내 안색을 살피려 슬쩍 다가오더니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윤스리가 장난 한 번 쳐바써... 기부니 안 나빴찌?”
“그럼, 우리 윤슬이 침인데 뭐가 더러워. 완전 깨끗하지.”
“히힝... 그러문 윤스리두 옵바 침 머글게.”
“아니, 그러진 않아도 괜찮아.”
“움?”
가끔 동생은 기상천외한 장난을 칠 때가 있다.
유전일까, 싶어 내 평소 행실을 되돌아본다.
어찌 생각해보면 시온의 이름을 고영희로 지은 업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되돌아온 걸지도 모른다.